타인의 창/김행숙
유리로 만든 것들은 우리를 속이기 쉽습니다. 저 창문은 액자 같고,
그곳에서 가장 먼 나뭇가지에라도
나는 걸려 있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신이 찾을 수 있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그곳입니다. 당신의 눈빛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곳에,
내 슬픔의 무게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구덩이를 팝니다. 많은 것들이 꺼질 듯 매몰되었습니다. 아아, 나는 멸망인 척해도 멸망이 아닙니다. 나는 그림인 척해도 그림이 아닙니다.
창밖이 진짜 어떤 세상인지 압니까?
구덩이에 빠져서 낮과 밤과 다음 날 아침이 비슷하면 어떤 기분인줄 아세요? 기분이 구덩이 같고 흘러내리는 흙 같아요.
모든 옆집의 창문 같은 그곳,
유리의 주인인 당신의 눈빛을 상상하면 나는 그림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삶의 카펫에 누군가 주체를 정하고 문양을 찍는 것 같습니다. 카펫은 밟으라고 있는 겁니다.
이런 내 마음의 소리가 당신에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내 절망이 당신에게 스러질 듯이 원경으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찌푸린 눈빛처럼 내가 나를 보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눈빛에 항상 걸려 있는 나의 살가죽을 쓰고 다니면 세상의 모든 옆집들
창문이 빛을 반사하고, 창문이 눈물을 흘리고, 창문이 눈동자를 키우고, 창문이 문서를 작성하고, 창문이 강간을 증언하고, 창문이 창문의 창문을 낳고, 창문이 자꾸 질문을 만들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은 안 만들어줘요. 그곳에 당신이 있었다면
내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어느 이웃집 꼬마처럼 돌멩이를 손에 쥐면 그때 그곳이 생각납니다. 그곳에 돌멩이를 던진다면, 그것은
당신의 눈알을 당신의 얼굴에서 빼앗아 그 얼굴에 서 던져버리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눈알을 으깨는 기분으로 나는 돌멩이를 손에 꼭 쥐고 있습니다. 내가 보이는 그곳,
그곳에 당신이 있을까? 없을까?
박진
정념의 수동성과 타인의 '눈빛'
존재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동일자 안의 타자는 타인
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온다. 그리고 그 뒤흔듦에는 외상적인 폭력의 측면이 있다. 타인인 누군가는 "폭군처럼 솟아서 시간의 차원을 뒤엎고 한 자락 그림자도 없이침입하"(어딘가, 어딘가에는)며, 또 누군가는 “흉기가 되도록 뾰족해져서 "어둠 속으로 정확히 파고들어 시간을 끊으면서 "참으로 끈질긴 노크 소리” (「물방울 시계)를 낸다. 타인은 그리 달갑지 않은in-desirable 자이고, 그런 뜻에서 타인을 향한 쏠림은 바랄 만하지 않은 non-desirable 것에 대한 정념이다.
정념의 이 같은 수동성(passion'에는 "passif"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다)으로 인해 우리는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타인과 마주치고, 타인의 두드림에 타격을 입으면서 자기를 거슬러 영향을 받는다. 뜻하지 않게 때로는 내 "영혼의 옥타브가 바뀌기도 하고, “하나뿐인 세계가 무너지"(잃어버려지지 않는/찾아지지 않는」)기도 하는 것이다. 주체의 이런 수동성(능동성과 대비되는 수동성보다 더한 수동성)에는 존재론이 전혀 사유할 수 없는 윤리적 가능성의 지대가 있다. 『에코의 초상』에서 김행숙 시가 새로 마주한 '타인의 의미도 바로 그 속에 깃들어 있다.
유리로 된 "창문은 액자 같아서 바라보기 좋은 “그
림"인 양 “우리를 속이지만, 그 창문은 실은 “타인의
창"이고 바라보는 “눈빛”의 “주인”도 내가 아닌 "당신"이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나'는 그림으로, 바라봄의 대상으로 뒤바뀐다. 주격으로서의 특권을 박탈당하고 대격으로 전락한 '나'는 내 자리를 '당신'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내 삶의 카펫에 누군가 주제를 정하고 문양을 찍는”것처럼, '당신'의 시선에 따라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짜이고 형성된다. 그렇기에 "당신이 찾을 수 있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그곳"이다. "당신의 눈빛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곳에는 아마 '나'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타인의 창문에서 "가장 먼 나뭇가지에라도"
그림으로 "걸려 있기로 결정" 한 '나'는 "그림인 척해도 그림이 아니다. 자신이 걸려 있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구덩이를 파서 "많은 것들"을 "꺼질 듯 매몰"시키는 "내 슬픔의 무게" 때문이다. 이 무게는 자신의 고유한 코나투스에서 뿌리 뽑힌 물질의 무게 전체일 것이다.
하지만 그 뿌리 뽑힘과 이를 견뎌내는 수동적인 참을성에서 존재 너머의 또 다른 주체성이 발생하는 것이라면, 동시에 "나는 멸망인 척해도 멸망이 아니다. 자기 밖으로 추락하여 구덩이에 매몰된 채로 “아아, 나는 멸망인 척해도 멸망이 아닙니다./나는 그림인 척 해도 그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이 신음 같은 탄식에서는, 고통 속의 수동성이 지닌 어떤 윤리적인 것이 흘러나온다.
나아가 타인의 시선에 숨김없이 노출되는 일은 '나'에게 일종의 폭력으로 경험된다. "당신의 눈빛에 항상 걸려 있는 나의 살가죽"은 보호 없는 노출이자 벌거벗음그 자체이고, "당신의 찌푸린 눈빛' 앞에서 그 살가죽을 "쓰고 다니는 '나'는 자아 없이 헐벗은 자다. 더구나 그 시선은 "세상의 모든 옆집들"에서 전방위적으로 '나'를 에워싸고 압박한다. 그래도 '나'는 '당신'의 창문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지 못한 채 그 "돌멩이를 손에 꼭 쥐고" 간신히 서서 버티고 있다. 타인에 대한 정념passion의 수동성으로 '나'는 해를 입으면서 모든 수난 passion을 감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