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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환의 「택리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란 첫째로 지리를 꼽고, 둘째로 생리(生利)를, 세 째로 인심을, 네 번째로 산수를 꼽았다. 그 첫 번째로 꼽은 지리란 다분히 풍수학적인 견해겠지만 수구(水口)를 보고, 들의 형세를 보고, 다음으로 산의 모양과 흙의 빛깔과 물이 흐르는 방향을 본다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백리 되는 들이 없고, 천리되는 물길이 없다. 그러므로 서융, 북적, 동호(東胡), 여진은 중국에 들어가서 황제노릇을 하지 못한 종족이 없는데 유독 우리 민족만이 그런 일이 없다.’고 개탄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풍수학적이라 하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닌 것을 말이다. 그러나 고령과 합천은 물길이 바다까지 닿아있고, 넓은 들이 있으며, 흙 또한 우리의 토기문화를 꽃피울 만큼 질 좋기로 유명한 고령토가 있으니 좁은 땅덩어리 한반도에 몇 되지 않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은 분명하다. 물론 안타까운 역사도 함께 있다. 그것은 임진년 난을 도자기 전쟁, 즉 막사발 전쟁이라 불렸으니 이곳 고령사람들이 일본 땅으로 붙잡혀가 일본 도공의 원조가 되는 비운도 있으니 마냥 행복해 할 수 많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내용도 있다. ‘신석산 남쪽은 성주와 고령이다. 고령군은 옛 가야국 지역이며 또 남쪽은 합천인데 세 고을 논이 가장 기름져서 적은 종자만으로 많이 수확한다. 까닭에 고향에 뿌리박은 자는 모두 넉넉하며 고려 때부터 이름난 사람과 높은 선비가 많았다. 한강 정구가 이곳 사람이며 남명 조식의 고향도 이곳이다.’ 그만큼 풍요로운 고장이며 기개 높은 고장이란 뜻도 될 것이다.
지리적 요건을 차지하고 고령과 합천은 대가야의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며, 수많은 불교 문화재와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가 있으며,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월광의 한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월광사가 삼층석탑 두 기와 함께 처연하게 놓여있다. 뿐인가, 가야인의 시조격인 청동기 시대 살았던 사람들이 바위에 그려놓은 암각화가 17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또한 대가야의 화려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고분군이 늘려있고, 석등이 아름다운 청량사, 백암사터, 그리고 폐사지 답사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영암사터가 또 여기에 있다. 청량사 고복형 석등과 백암사터에 신라 전형적 석등, 그리고 영암사터에 이형석등인 쌍사자 석등을 모두 합치면 석등의 진면모를 모두 비교 감상하는 맛 또한 일품이다. 그러니 답사의 동선을 그리는데 상당히 즐거운 고민이 따르기도 한다.
이곳에는 몇몇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 가야산의 산신(地母神)과 하늘신이 감응해 두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이 가야산 줄기를 타고 하천으로 흘러내렸다. 하나는 회천에서 껍질을 벗고 나와 대가야의 1대 이진아시왕이 되었고, 또 하나는 회천을 지나 김해까지 흘러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다고 한다.(대가야/ 매일신문 발행/ 도서출판 창해) 이것이 가야국의 초대설화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도 이와 비슷한 가야의 건국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금관가야와 형제로 설정해 묘사한 것은 3세기 중반까지 주도권을 김해의 금관가야가 가지고 있던 것을 고령의 대가야가 계승했다는 자부심을 표방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다.
가야는 철기문화가 일찍 발달하였다.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 3대 철의 생산지였다. 지금도 가야면과 야로면 등의 지명이 불러지고 있다. 야로란 달군 철을 불리는 그릇을 그렇게 부른다. 그 외 또 다른 붉은 물의 적화현, 불묏골 등이 있어 그때를 뒷받침 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륵의 가야금과 화려한 금관에서 보았듯이 가야는 삼국과 달리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다만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술적 외교를 펼쳤으나 결국 단합되지 못하고 고대국가의 목전에서 사라지고 만 비운의 나라였다.
알터, 암각화 바위그림
천 칠백년 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청동기 시대 대가야의 선조들은 어떤 의미로 이렇게 그려 놓았을까?
농경사회가 정착되던 그 당시의 풍요를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었을 것이라 생각 된다.
세 개의 둥근 원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계절의 순환과
태양을 상징하며 하늘에 모든 것을 의지한체 순한 삶을 엮어 갔을 것이다.
삶과 죽음, 영원으로의 회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기울어지는 한 없이 작은 심성.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며 현재의 삶에 용기를 불어넣지 않았을까.
아래쪽으로 기울어진 네모와 그 속에 알 수 없는 형상들
주위로 수염이 난 가면 같은 모습에 이설이 많으나
제단에 바쳐진 소의 형상이라, 과연 소가 우리의 농경사회에
언제부터 이바지 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나의 고집대로라면
전지전능한, 때로는 무서운 하늘의 신, 또는 가면을 쓴 제사장을 연상한다.
다분히 내 식으로 풀어보자면 제사를 한 번 지낼 때 마다 하나씩 새겨 넣었을 것이다.
사방으로 향한 줄기는 제사장에게 향하는 우상이나
후광, 또는 비를 연상하지 않았는지
무엇이 되었든 청동기 시대의 성지가 바로 여기이다.
이 또한 알 수는 없으나 오랜 세월을 거슬러 타임머신을 타고
상상하는 맛 또한 당시의 내가 되어 영상이 잡히는 것은
너무 심한 병적 집착이라 두려우나
나름대로 분석하고 결론지어가는 것도 재미를 잊을 수 없다.
이토록 자유로운 상상이 나는 늘 즐겁게 한다.
지산동 가야고분군
잊혀진 왕국 가야,
비주체적 고대국가 고령의 대가야는
1대 이진아시왕에서부터 16대 도설지왕까지 520년간 내려온 나라이다.
토기와 금관 세공양식과 무덤양식이 삼국과 다르니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산동 가야 고분군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토록 많은 도굴꾼과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일본인들의 악착같은
집착 속에서 근근이 견뎌온 것이 지금의 가야고분군이다.
44호 고분, 지금 현재의 시각으로 보자면
여전히 가슴 아픈 껴묻이, 즉 순장(殉葬)풍습에 할 말을 잊게 한다.
작게는 36명 많게는 40명 이상,
그들은 과연 주공을 위한 사명감에 의연하게 죽어 갔을까?
정말로 이승과 저승, 영혼불멸의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당당하게 이겨 낼 수 있었을까?
주공을 따라 저승에서도 굳건히 모시리라는 사명감에 죽음을 받아들인다.
극약이 가득 든 사발을 입으로 가져가는 손이 떨렸을 것이다.
또 어떤 곳에서는 자신의 배를 가르고 무사가 뒤에서 목을 내려친다.
일본의 그 짓(?)과 닮아있다.
두개골에 구멍이 난 어린아이의 유골까지 있다.
어린 아이는 무서움에 울음을 터트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음을 피한 목숨을 건 탈출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간의 소설의 소재로도 충분 할 것이지만
더 많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상상만이 가능하리라 보며
더이상의 욕심은 접는다.
약간의 이별에도 가슴 저리는 것이 순하디 순한 우리의 민족의 심성인 것을.
우리는 생과 사, 이승과 저승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영혼불멸은
우리들의 상상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한편으론 지배자의 힘과 권력이 만들어 낸 풍습이며
죽어서도 현재의 권력을 이어가고자 욕심이 부른 재난이었을 뿐이다.
풍습이란 당시에나 조선시대에나 현재에나
가진 자와 아닌 자들은 서로 다른 것을.
자연사에 대한 아픔을 서로 그렇게 위로하며 이겨 냈을 뿐인데
그것을 빌미로 엄청난 일을 벌이는 왕권의 위력을 실감한다.
자꾸만 영문도 모르게 죽어간 여덟 살 배기의 초롱한 눈망울이 잡힌다.
이렇게 아픈 흔적이 있는 무덤군을 우리는 한가로이 산책을 한다.
그들의 아픈 이야기를 밟고, 처절한 죽음을 미화한 곳을.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감상에 빠지는 것도
답사의 묘미이니 망설이지 말자.
청량사
청량사,
말만 들어도 청량한 기운이 감돈다.
말 그대로 그랬다.
그곳에 올라서면 뒤로는 매화산의 바위산 기운을 받고
앞으로는 탁 트인 넓은 공간을 두고
저 멀리 녹색의 파도가 치는 산등성이를 바라보노라면
맑은 기운이 내 가슴에 가득 찬다.
이곳에 서면 서러움도, 미움도 깨끗하게 정화되는 청량한 맛이 있다.
하여 돌아서 오면 늘 그곳을 그리워 하는 목이 긴 사슴이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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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사 석가여래좌상
새 단장 된 금당 안으로 들어가면 그 옛날 고운이 합장하며 기도하던
석가여래불이 있다.
석가여래불, 석가모니가 보리수 나무아래서 깨달음을 얻는
찰나의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당당한 어깨, 법의는 오른쪽 가슴을 드러낸 우견편단.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 부처와 닮아있다.
머리는 꼽슬한 나발이며
수인은 손가락 하나로 마귀를 굴복시킨다는 항마촉지인이다.
종교가 무엇이든 그것을 떠나 경건한 마음으로
선인들이 행복을 기원하며 다듬었던 예술 작품을 본다.
아마도 섬세한 조각에 저절로 고개 숙일 것이다.
당당한 어깨선 뒤로 화려한 광배가 머리 위 화불을 중심으로
둘러싸여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으로 마음을 달랬을 것이며
또한 마음을 정화시켜 갔을까.
전쟁과 역병, 권력에 기생하는 천한 이들로부터
영원한 일탈을 꿈꾸며 마음을 다스렸을 것인가.
석불의 표정은 변함이 없는데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달리 보여주는 신기가 오래 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욕심과 다르지 않으니 합장하며 고개 숙인다.
옹다문 입술로 보아 내게는 쉬이 열어주지 않을 것 같다.
*
청량사 삼층석탑과 고복형 석등
사진은 오래 전 겨울에...
신라 정형의 석탑과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는 참 이쁜 석등하나.
둘 만의 대화에 불쑥 끼어드는 이방인을 반긴다.
지붕돌은 반전이 심해 날려 보이는 삼층석탑과 함께
매화산 경관과 어울려 앞으로 넓은 공간으로 날아갈듯
준비하는 모습이라면 억척인가.
굽어보는 석등과 화음을 이루는 이중주를 감상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더도 덜도 말고 군더덕 없는 석탑에 비해
잘록한 허리, 멀리서 보면 단아한 여성이요,
가까이서 보면 디테일 한 맛을 완벽하게 지니고 있는 석등이다.
고복, 즉 장구를 세워놓은 모습의 고복(鼓腹)형 석등,
팔각의 정형화 된 석등, 이형의 쌍사자 석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화려하게 승화된 세 종류의 석등 중 하나가 바로 고복형이다.
볼륨감 심한 복련석과 앙련석,
복련은 이승에의 인연과 깨달음 이야기 한다면
앙련은 윤회를 이야기 한다.
윤회, 늘 느끼는 것이지만 윤회라 한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며, 알지 못하는 과거 이승의 인연이 과연 내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내가 천국에 간들 이승의 기억이 일천하다면 과연 그곳이 내게 천국일까.
이승의 아픔을 잊고, 이승의 미련에 연을 끊고 과연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나와 나의 경계가 불분명 한 것을, 내가 너이고 네가 바로 나인 것인가.
맞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것인지도 모른 일이다.
탑을 세우고, 불을 밝히며, 향을 사르는 이 행위는
비단 나 자신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딱딱한 돌에 혼을 심고, 마음을 담아 불심의 세상에서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땀방울을 닦았을 것이다.
고통은 나의 대에서 그저 끝이 나 주길 간절히 원했을 지도 모를 일이며,
무한한 동경에서 희망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들이 바라보았던 눈길이 이곳에 모여 있다.
과거를 모두 아우르는 시선들이 모아져 교훈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열린 가슴에만 보이며 들린다.
우리는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도 나에게는 관대한 습성이 있다.
나에게 냉철한 시각을 요구하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체 눈을 감는 습성이 있다.
눈을 감으며 모른 체 가슴을 닫아 버린다.
이것은 잘못 된 길의 첫발을 내 딛는 것이다.
나중에 저지른 잘못은 과거보다 아무리 작다 할지라도
더 지탄받기 마련이며,
역사, 즉 과거가 던지는 교훈을 알면서도 잘못을 행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을 남에게 들켰을 경우 극단적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악의적 심성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마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고 한다.
또 쓸데없는 말이 길어진다. 각설하고,
답사는 제일 먼저, 아름답게 보는 미적시각이다.
그 두 번째가 역사적 시각이며,
다음이 교훈과 반성, 그리하면 자연히 미래를 엮어가는 지혜가 생겨남이다.
역시 역사는 미래일 수밖에 없다.
무생명의 돌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도
내가하는 답사의 맛이다.
돌을 바라보고 돌과 대화를 하다 보면
돌이 나를 바라본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부족한 내가 부끄러워지고
그러다 돌을 경배하는 것이 답사의 이치이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함을 느낀다.
나는 언제쯤이면 그렇게 바라보는 시각이 생겨날까?
아마도 영원한 미제로 남을지도 모른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하루 온 종일 함께 놀아도
지겹지 않을 돌 조각이 여기 청량사에 있다.
다음에 찾아오는 발길에는 어둠에 묻어 와야겠다.
저녁노을을 이들과 함께 바라 보고 싶다.
월광사터
대가야는 친 백제 정책에서 친 신라로 옮겨간 때가 이뇌왕 때었으니
신라 법흥왕과 혼인동맹을 맺게 된다.
이뇌왕이 신라의 이찬 비루의 여동생과 혼인을 하여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월광을 생산한다. 신라, 즉 외가에서 생활하던 월광태자는 자신의 나라 대가야가
백제와 다시 손을 잡고 신라와 전쟁을 벌였으니 아마 가시방석이었을 것이다.
신라는 이사부를 대장군으로 삼고, 화랑출신 사다암을 부장으로 삼아 대가야를 공격하였다.
이때 대가야의 고령군은 서쪽의 높은 산과 동쪽의 낙동강으로 보호되기 때문에
외적이 침입하기 어렵고, 한편으로 낙동강의 뱃길을 이용해 밖으로 쉽게 교통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렇듯 천연적 요새인 가야산을 뒤로하고 앞의 진출로만 방어하였으나
사다암은 5천의 군사로 천연의 요새라 굳게 믿고 있던 가야산을 넘어
대가야를 정복하고 말았다.
월광사
월광사터, 이곳이 바로 대가야의 마지막 격전지였다.
하여 후세 사람들이 비운의 월광태자를 기리며
이곳에 월광사를 세웠다고는 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는
가야국의 태자 월광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대가야의 마지막 도설지왕이 바로 월광태자라는 설도 있다.
대가야 정복에 성공한 신라는 명망 있는 신라계(?) 월광태자를 왕으로 내세워
민심을 수습하였다.
후에 민심이 안정되자 늘 그래왔듯 도설지왕, 즉 월광태자는 권좌에서 쫓겨나고
이곳에 월광사를 짓고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이렇듯 무엇이 진실이든 이곳 월광사터는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월광의 한이 묻어있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자취는 간 곳 없고, 삼층석탑 두 기만 처연히 서 있다.
가야산 해인사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와 월광천이 합쳐지는 곳에 월광사가 있다.
그 앞으로 지금은 쓰임새를 다한 공장과 굴뚝이 을씨년스럽게 흉물로
앞을 가리고 있어 안타깝지만 옛날 그 시절의 월광사는
앞과 옆으로 흐르는 물과 어울려 심층석탑이 자태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통일신라 정형의 삼층 석탑 두 개,
비슷하게 생겼으나 조금씩 다른 석탑.
월광태자의 흔적이 숨쉬는 이곳에 서 있는 석탑.
맞다! 역사는 승자의 몫이다.
고대국가로 승화하지 못한 잘못도
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서로 질시하며 분열된 모습을
작금의 세태에서도 느낀다.
외세의 힘을 빌어서 이어가고자 했던 당시 나약한 나라의 백성들은
혼란 속에서 서로 분열되었을 것이다.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힘까지 빌어서 가야국 끼리 전투를 벌였으니
망국이야 뻔 한 결과일 수 있다.
내부의 화합만이 살길이며,
진정한 평등이 완성되었을 때 자유를 이룰 수 있는 힘이 된다.
자유란 만용과 무질서가 아니다.
남을 배려하는 질서 속에서 지켜가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종교든 정치적 색깔이든 상대를 인정하는 데서
진정으로 만끽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백암사터
여기가 절터였던가?
모르겠다. 백암사였던가, 대동사 였던가.
다만 단아한 신라 전형의 팔각석등이 잔재로 말을 해 주고
깨어지고 세파에 시달려 닳아진 석불상이 애처롭게 말은 건다.
어느 그 옛날 화려했던 절집의 중심에 있었으나
어느 날인가, 난리 통에 이리저리 휘둘리더니
양반이랍시고 들어와 그마져도 깨어졌다.
몸 따로 머리 따로 뒹굴던 돌조각을
어느 집 자손을 위해 코도 후벼가고,
어느 집 정원의 장석으로 쓰기위해 지대석도 가져가고,
어느 집 아무개 아들놈이 몇 푼의 돈을 위해 예쁘게 남아있던 등짝도 떼어갔다.
그래도 온전히 남아있는 석등에 희망이 있었고,
사람 여럿모여 이리저리 뒹굴던 조작들을 맞추어
좁은 터이나 온전하게 정리정돈 해 두었다.
그 사이 함께했던 늙어가는 회나무와 느티나무가
그의 동무가 되고 그늘이 되어 도란도란 정겹다.
석등의 화사석에 악귀를 밟고 있는 사천왕상의 힘이런가.
기다란 간주석이 균형과 조화를 맞추고
넓은 지붕돌이 힘을 받쳐주니 연잎 위에 꽃이 피어났다.
앙증맞은 꽃 수술이 함께 피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도 새 단장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겠다.
언제 또 다시 발길을 할 것인지 기약은 없다만
지나가는 길에 꼭 잊지 않고 찾아 반가운 모습 다시 보리라.
꽃을 꺾는 행동은 자기만이 소유하려는 이기적인 행위이다.
문화재 또한 같다.
누가 어떤 용도로 파갔던 그것은 다른 이에게 아픔을 주고
자기만이 행복해 지려는 종교의 편율된 인식을 심어주게 만들기도 한다.
종교는 죄가 없다.
다만 종교를 믿음으로 한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과 행동에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종교의 말씀이나 교리대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참 아름답게 변할 것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영암사터
합천에 영암사터가 없었다면 얼마나 허전할까?
합천길에 영암사터를 들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보고 느끼고 감상하며 배워도
모자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만 영암사.
그러나 이곳에 서면 사라진 것들과의 대화가 있고,
아름다운 수다가 빈 공간을 메우고 있다.
이것이 바로 답사의 참맛을 느끼게 하는 폐사지 답사의 매력이다.
비어있으므로 해서 가득 찬 느낌,
바람도 잠시 멈추는 곳,
공간에 흐르는 산새소리도 색깔을 간직하고 있는 이곳,
그래서 폐사지는 홀로 다니는 여행의 도착점이 되며,
심성을 곱게 다듬어 주기도 한다.
또한 상상만 하여도 가슴이 아련해 오는 곳이기도 하다.
이토록 극진한 찬사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영암사터이다.
석축과 아치형 계단
처음 이곳을 찾게 되면 뒤의 우뚝 솟은 바위산,
즉 황매산이 사람의 기를 움직이고 눈을 아래로 돌리면 단정한 석축이 눈에 들어온다.
긴 장대석으로 엇지게 쌓아올리고 가운데 중간 중간 쐐기돌을 박아놓았다.
경주 불국사의 석축과 비교 상상하면 이해가 빠르다.
석축을 돌아 최근에 이 마을 사람들이 관리하기 위해 지어놓은 낮은 집을 돌아서면
제밀 먼저 보이는 것에 감탄을 한다.
툭 튀어나온 석축위에 사자가 엉덩이를 발라당 들어 보이며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석등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일 뿐이고 석등과 함께 아치형 홍예계단,
그리고 석축이 하나의 조화를 이루며 반긴다.
성벽의 치(峙)처럼 도드라지게 하여 그 위에 석등을 세웠다.
석축 양 옆으로 홍예처럼 둥글게 다듬어 계단을 조심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다른 여러 개의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돌로 다듬어 계단을 오르게 되면
발을 옆으로 기울여 발가락에 한껏 힘을 주고 올라가게 만든다.
금당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다시금 다듬어 경건하게 하라는
이치로 해석 될 수 있으나 상상은 자유이다.
미적(美的)으로 본다면 석등과 둥근 돌계단
그리고 석축이 참으로 묘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발상에 눈을 때지 못하게 한다.
쌍사자 석등
도드라진 석축 위 사자 두 마리가 서로 껴안듯 마주보고 힘찬 뒷다리를 지탱하며
부처님께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받치고 있다.
이 석등 또한 팔각이라는 양식에 크게 어긋남이 없이
팔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을 올렸다.
여덟의 복련석 위 갈귀와 꼬리까지 표현 된 사자 두 마리가
힘을 받쳐 간주석을 대신하고 있고,
두 단의 굄석을 세워 상대석 앙련을 표현해 놓았다.
상당한 양감이 있으나 세월의 풍파에 닳아 아쉬움이 미련으로 남게 된다.
팔각의 화사석 네면에는 화창을 내고, 다른 네 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놓았으나
이 또한 마모가 심해 잘 분간이 어렵다.
팔각의 지붕돌 모서리에 귀꽃을 올려 상승감을 보여주고
풍탁을 단 흔적으로 보아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던 조성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 석등은 석축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맛이
옆에서 보는 맛보다 더 좋게 느껴진다.
그것은 뒤의 황매산의 바위들과 어우러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금당터
석등에서 눈길을 돌리면 금당터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 높지 않은 석축위에 사방으로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던
주초(柱礎)가 둘러쳐 있고 가운데 불상을 놓았을 수미단 공간이 있다.
아마 그리 크지도 않은 석불이 있지는 않았을까?
금당터의 크기와 석등과의 간격으로 보자면
3층의 목탑양식이 있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목탑? 우리나라에 흔치않은 목탑이 있었을까?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 지리산 화엄사의 각황전, 부여의 무량사 극락전,
청양의 마곡사 대웅보전이 이층 양식이나,
70년대에 불타버린 화순의 쌍봉사 대웅전이 목탑양식을 잘 갖추고 있고,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이 현재 남아있는 목탑의 대표 격이나
이곳 영암사에 목탑이 있었다?
그렇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곳 금당 사방 가운데에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또한 건물 안 남아있는 석재의 조각과 불상이 놓여있었을 위치가 뒤가 아닌
가운데 놓여있으니 충분히 그런 상상이 가능하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자면 얼마나 높았을까?
아래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뒤의 황매산을 거스러지는 않았을 터이고,
그리 넓지 않은 터에 단정하게 올려 진 삼층의 목탑이 있지 않았을까?
상륜부는 또 어떠하였을까? 이렇듯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만든다.
나의 무식이 상당히 즐겁다.
금당터 석축에 안상이 음각되고 그 속에 갖가지 자세로 터를 지키고 있는
사자상이 양각되어있다.
어떤 곳에선 머리만 무섭게 노려보고 있으며
어떤 곳에는 고개를 뒤로한 채 포효하는 모습도 있고,
또 어떤 곳에는 사자라 보기엔 민망스러운 개의 모습을 한 동물도 있다.
하나씩 감상하는 재미에 푹 빠져볼 즐거움도 있다.
소맷돌의 가릉빈가
하나씩 감상을 하며 돌다보면 객의 발길을 잡고
가슴을 저미게 하는 곳이 있다.
바로 양 옆에 계단의 소맷돌에 조각된 가릉빈가상이
처연한 자세로 춤을 추다 멈춘 것 같이 깨어져
보는 이의 마음을 아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릉빈가, 바로 불교경전에 나오는 상상의 새로서
사람의 머리를 하고 날개를 달고,
소리 또한 묘하여 미음조(美音鳥)라고도 한다.
극락정토에 깃들어 있어 극락조라고도 하는데
춤추고 노래하는 형상들이 많이 있다.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의 안상에 조각된 극락조를 상상해 보면
이곳 영암사지의 것과 대비도 되지만 사람의 상상력이 얼마 만큼인가 알 수도 있다.
소맷돌에 가릉빈가를 새겨놓을 기발한 생각이 참으로 자유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곳 소맷돌의 가릉빈가는 자세히 보면 한복을 입고 있는 듯 보인다.
순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심성에 딱 들어맞는 빈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 누구의 손에 무참하게 머리와 날개가 깨어진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춤추는 순간의 모습 그대로, 찰라의 순간을 기억하며
그렇게 기울어져 처연하게 놓여있다.
그것도 투명유리의 앞뒤처럼 양 면을 표현하여
언젠가 그 춤이 완성되기를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렇듯 슬픈 전설을 간직한 가릉빈가가 세상에 딱 여기밖에 없다.
그러하니 영암사터에는 못다 한 노래가 있고,
못다 한 춤이 있으며,
슬픔이 이곳에 깔려있다.
서금당터
금당터에서 서쪽으로 발길을 옮겨가면 너른 터에
서 금당터가 있고 비석의 받침인 귀부(龜趺)가 동서로 둘 놓여있다.
비석은 어디가고 비석위에 올려져 있던 이수도 없다.
다만 귀부의 비좌의 용머리 거북이 힘차게 트림하고 있어
당시 당당했던 모습을 상상하게 하여준다.
조금 같은 형태이나 조금씩 틀리다.
비좌 양 옆으로 물고기 문양이 서로 여의주를 다투며 노는 모습이 재미있다.
이곳은 과연 어떤 형태의 어떤 신앙의 대상을 모신 절간이었을까
상상하지만 남아있는 부재로는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대웅전 법당에서 서편 뒤쪽에 있으니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이나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이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보지만 알 수없는 노릇이다.
삼층석탑
다시 석축을 내려오면 금당터 보다 한단 낮은 곳에
석등과 일직선으로 나란히 한 삼층석탑이 하나 눈에 띈다.
바로 신라 후기의 석탑양식을 간직한 삼층석탑이다.
특이한 점은 지대석과 중대석 덮개돌이 하나로 되어 있으며
몸돌과 지붕돌 또한 하나로 되어있다. 모서리 기둥 우주의 직선이 눈에 잡히고
색상 또한 다른 석탑과 달리 붉은 기를 머금고 있어 보는 맛이 간간하다.
다만 다른 부재들에 가려 귀하게 대접받고 있지는 못하나
그리 무시할 정도의 석재품은 아니다.
이 석탑이 있음으로 해서 석등이 빛이 나고
금당터에 이야기 꺼리가 늘려있기 마련이다.
여기 영암사터는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복도의 성격을 지닌 회랑터가 있다.
그만큼 당시에 영암사의 격을 말해주기도 한다.
사찰의 회랑이란 불국사, 불타고 사라진 황룡사, 미륵사, 감은사 등이 있는데
이것은 왕실과 밀접한 절집이었음을 말해주며 당대의 화려했던 절집의 면모를
상상하게 한다.
답사의 마무리는 늘 아쉬움을 준다.
그러나 다음 답사의 기대로 마음을 다지며 돌아오는 길은
풍성함이 가슴속에 충만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으로 나는 차분한 가슴이 된다.
*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긴 글 죄송합니다^^*,.
(20090530)
첫댓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일수록 이런 글이 삶의 에센스로 지극히 필요합니다. 그저 초시 님께서 이런 영양가있고 사유가 깊은 글 자주, 자주 올려주시면야 가슴에 곰팡이 필 일 없이 담백하게 지내지요. 오늘 하루 몫의 지적 양식을 채워 주신 초시 님께 감사!
내말이~~~~~ㅎ
내말도~~~~~~~ㅎ(2)
뭔 말이여~~?^^*..
비움님글로 이하동문..... 저녁에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초시님
부산은 함 안오시는교?
물고문 할라꼬??
언제 들어도 순장의 역사앞에서 가슴이 벌렁거리는 그 답답함이여................. ............
그러니까....상경하기 바로 직전에 작은녀석이랑 박초시님 가신 그길 그대로 답사를 갔다 왔었는데..... ㅎ ㅎ ㅎ ㅎ 여전히 쓸쓸한 고요가......
오늘 하루 몫의 지적 양식을 채워 주신 초시 님께 감사(2) 드립니다. 지는 한달 양식도 더 될 것 같읍니다만 . . . 감동안고 가옵니다. 건강하세요. *^^*
저길 우리 녀석들 데리고 답사가야겠어요...프린트 해서리....양산은 언제오셔요..울 집이 양산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