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훈의 스토리뉴스]
 
전두환의 장탄식
'어쩌다 내가 이 지경까지'...말년운이 중요한 이유
 
전두환을 보라, 소년등과일불행(少年登科一不幸) 교훈 /
5·16 지지이후 27년 잘 나갔지만 이후 지금까지 31년은 쫓기는 신세 /
대통령 권세 누렸지만 전직원수 최초 사형수가 돼, 단죄 또 단죄 뿐 /
젊어선 호탕, 지금은 전 재산 29만원· 부인 집에 얹혀 살고· 치매 읍소 /
허울뿐인 경찰 경호...국민 대부분 '누구신지' 외면, 혹시 해코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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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로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11일 재판을 받기 위해 광주로 간다. 전 전 대통령을 볼 때면 초년, 중년, 말년 운 중 말년 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예전에 아무리 잘 나가봤자 말년이 초라하거나 비참하면 다 소용없기 때문이다. 1100여년 전 중국 송나라 학자 정이천(1033년 ~ 1107)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다. 그는 사람에 있어 3가지 불행이 있다며 첫째는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소년등과일불행· 少年登科一不幸), 둘째는 부모 권세에 힘입어 좋은 자리에 앉는 것(석부형지세위미관· 席父兄之勢爲美官), 셋째는 재능이 뛰어나고 글솜씨가 좋은 것(유고제능문장· 有高才能文章)이라고 했다. 잘난 척 하지 말고 부모에 기대지 말고 스스로 일어서라는 뜻과 함께 젊은 시절 출세는 마냥 좋은 것만이 아니니 훗날을 위해 덕을 쌓고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는 충고다. 전두환(1931년생) 전 대통령의 88년 인생이 우리에게 준 교훈 중 하나는 일찍 권력의 맛을 알아 권력속으로 들어가 승승장구한 것을 훗날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된다, 즉 '소년등과가 가장 큰 불행이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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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년만에 다시 법정에 서는 88살 전두환, 경찰경호· 통역(?)은 부인 이순자씨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사자 명예훼손'혐의로 11일 오후 2시30분 광주지법 201호 법정에 선다. 1996년 12월 16일 쿠데타 혐의로 친구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항소심 법정(당시 무기징역)에 선 지 23년만에 피의자 신분으로 다시 법정에 서게 됐다. 전 전 대통령은 11일 오전 8시 30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출발, 광주로 간다. 전 전 대통령의 광주행에는 경호담당 경찰 5명과 함께 불상사를 막기 위해 서대문경찰서 형사팀 2개조 10여명이 동행한다. 부인 이순자씨는 재판정에 나란히 앉을 예정이다. 전 전 대통령이 치매를 앓고 있어 자신이 아니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고 호소, 남편옆에 앉게 됐다. 경찰 경호, 부인과 동석 등 얼핏 거물에 걸맞는 대접을 받는 듯같지만 이는 허울뿐이다. 인파정리를 위한 경호가 아니라 혹시나 욕설 등과 함께 돌아올지 모를 격렬한 항의와 떼어놓기 위한 차원의 경호다. 또 이순자씨 말이 맞다면 그는 해석이 필요할 만큼 인지기능을 거의 상실한 불쌍한 신세(?)로 전락했다.
1967년 8월, 청와대 경비를 맡는 수경사 30대대장 이취임식 뒤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전두환 중령(왼쪽)과 전임 손영길 중령. |
◆ 30살 전두환, 권력행 급행열차에 오르다...딱 한번 위기 육사 11기 전두환은 정규육사(4년제) 1기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소년등과한 것과 같다는 것도 모르고. 육사 졸업후 미국 유학(특전교육)까지 다녀온 전두환은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난 이틀 뒤인 5월18일 육사생도들을 이끌고 쿠데타 지지 행진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박정희의 눈에 들어 1988년 2월 대통령에서 물러날 때까지 27년여 승승장구했다. 1969년 동기 중 선두로 대령, 1973년 1월1일 1공수 여단장을 맡는 등 거침없이 질주했다. 그 와중에서 1973년 윤필용 사건(박정희 차기는 수경사령관 윤필용 소장이다는 말이 나돈 뒤 모반으로 재판에 넘겨짐)이 터져 모반세력으로 몰려 군복을 벗을 위기에 처했다. 윤필용 장군이 육사 졸업생 사조직인 '하나회' 뒤를 봐줬다는 말에 따라 하나회 핵심에 대해 대대적인 단속이 있었고 전두환에게도 화가 미치려 했다. 이 때 전두환은 당대 실력자 박종규 경호실장의 도움으로 윤필용 사건에서 빠져 나와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까지 되는 등 권력 중심부로 더 다가섰다.
1977년 나란히 자리한 청와대 경호실 핵심. 왼쪽부터 노태우 행정차장보, 전두환 작전차장보, 차지철 경호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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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12·12, 1980년 5·18을 이용해 대통령까지 전두환은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 1사단장을 거쳐 1979년 보안사령관에 올라 군부 실력자 중 실력자가 됐다. 10·26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군정보수사망을 장악한 전두환은 1979년 12·12쿠데타로 군을 완전장악했다. 이듬해 5·18민주화 운동을 핑계삼아 쿠데타 집행기구인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 3권을 손에 넣은 뒤 1980년 9월 11대 대통령자리까지 꿰찼다. 1981년 간선제 형식의 대통령 선거를 실시, 12대 대통령에 올라 5공화국 문을 열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약속한 이후 전두환은 몰락의 길에 들어서 1988년 2월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상상조차 못했던 말년을 맞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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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담사 유배, 단종이후 531년만의 사형선고, 사면, 재산몰수 등 험한 말년 역대 대통령 중 쓴맛을 가장 많이 본 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유배, 사형선고, 무일푼, 치매 등 등 사람이라면 피하고 싶은 모든 일을 경험했거나 하고 있다. 1988년 11월 23일 쫓기든 강원도 백담사로 유배를 간 뒤 1990년 12월 30일에야 연회동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뒤를 봐 줄 것으로 기대했던 노태우 후임 대통령은 '시대'를 이유로 외면했고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 일부 측근만 그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1995년 12월 12· 12 군사반란과 5· 18 광주민주화운동 학살 혐의 피의자로 전락한 전두환은 12월 2일 연희동 집 앞에서 '골목성명'을 내고 자신의 처벌하려는 김영삼 정권에 저항했지만 다음날 합천에서 안양교도소로 압송, 구속수감됐다. 1996년 8월26일 1심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져 1455년 단종이래 531년만에 처음 사형선고를 받은 전직 국가원수가 됐다. 그해 12월 16일 2심이 무기징역(추징금 2205억원)으로 감형한 것을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이 받아들여 전두환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다. 1997년 12월22일엔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사면돼 석방됐다.
◆ 전 재산 29만원, 부인 집에 얹혀, 치매...소년등과의 쓴 맛을 맛보며 사면 뒤 전 전 대통령은 "내 재산은 29만원 뿐"이라며 추징금을 납부하고 싶어도 납부할 돈이 없다고 해 국민적 분노를 자아냈다. 전두환이 '돈이 없다'며 버티기에 들어가자 2013년 6월 국회는 추징 환수시효(2013년 10월)을 앞두고 시효를 2020년까지 연장하는 '전두환 추징법'을 통과시켰다. 관계당국이 총력전을 펼쳐 전두환 일가 재산 추징에 나섰으나 지금까지 1155억만 걷어 미납 추징금이 1050억원(47.6%)이나 된다. 추징금 환수시효(2020년 10월)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당국은 최근 연희동 저택 등을 공매(감정가 102억3286만원)에 내 놓았지만 유찰됐다. 이에 맞서 전 전 대통령측은 '공매 물건이 이순자씨와 며느리 이모씨, 전 비서관 이모씨 등의 이름으로 된 점· 자택 외 머물 곳 없는 전 씨 부부가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며 공매 집행정지 취소소송을 냈다. 한편 전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사자명예훼손 재판 출석을 명 받았으나 '치매로 출석이 불가능하다'며 거부했다. 이러한 일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가진 재산이라고는 5만원짜리 몇장, 부인집에 얹혀 살며 치매로 사리분별을 못하는 비참한 신세다. 확실히 소년등과보다는 소소하지만 평화로운 말년이 몇 백배 더 행복하고 중요한 일임을 그를 통해 읽을 수 있다.
박태훈 기자, ⓒ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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