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나는 하루하루가 달라졌다.
늘 힘들고 지치기만한 내 삶의 한 귀퉁이에 '그녀' 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녀를 만나는 시간은 늘 행복했다.
그 행복은 내가 세상을 살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즐거움이었다.
거지 부랑자같던 나에게 관심을 가져준건 그녀가 처음이었다.
동정이라도 좋았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준것...말을 걸어줬다는것....손을 내밀어 줬다는것.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힘든 훈련후 늦은 밤엔 우린 항상 공원에 갔다.
그곳은 너무나 조용하고 이세상 어떤 슬픔,미움, 증오도 없는 우리만의 순수한 세계였다.
아무도 우리의 행복을 깨트릴수는 없었다.
우리의 행복은 영원할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운명은 우리의 행복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의 집은 무척 가난했다.그녀는 간호사였다.
처음 만났을때 내 상처를 그렇게 능숙하게 치료한것도 그녀가 간호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밑으로는 어린 동생들이 딸려 있었다.게다가 어머니는 몇년동안 자리에 누워 집을 돌볼 사람은 그녀밖엔 없었다.
그녀의 빠듯한 월급만을 바라보고 있는 집인데도 그녀는 가족을 사랑했다.
그러나 힘들어도 힘들다는 내색한번 하지 않았다.
나를 만나면서도 그녀에게선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도 그녀의 집안 사정을 알고 있었으나..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녀를 위해 내가 할수있는일이 아무것도 없다는것이 너무 비참했다.
그래도 그녀는 항상 웃기만 했다.
그녀가 웃을때면 난 항상 눈을 찡그리곤 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너무나도 눈이 부셨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웃음은 이세상의 것이 아닌듯 했다.
그것은 하늘의 것이었다.
그녀의 큰 눈망울이 나를 보고 있을때면 마치 그속으로 빨려 들어거는것 같았다.
크고 둥그런.......까만 눈동자....
ㅡ그 눈동자가....나를 빨아드리던 그 눈동자가 어느날인가부터 내 앞에서 사라진것은.....
그것은 사고라고 했다.
그녀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버렸다.
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전복되는 바람에 절벽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분개했다. 아니....정신을 잃었던것 같다.
난 믿을수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날 그녀가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남동생이 사고를 쳐서 보상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걱정이라고 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눈물을 그때 처음 보았다.
나는 가슴이 찢어질것 같았다.
그러나...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그녀의 눈물앞에서 나는 그 어떤것도 할수 없었다.
그녀는 나몰래 사채를 쓴것이다.
돈이 없으면 사랑하는 동생을 빼내올수 없었기에 그녀는 그런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사채빚은 곧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만큼 되었다.
그러자 사채업자들이 그녀를 협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깡패놈들에게 시달릴 때도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그정도로 그녀는 내가 걱정하지 않게하기위해 아무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놈들은 그녀를 죽였다. 그녀의 가족들도 죽였다.
그녀의 죽음앞에서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죽은날 수련원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관장이 애지중지하던 십이지신술 비급을 훔쳐 내왔다.
그날 이후 나는그것을 혼자 수련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 하나
'복수하기 위해서' 였다.
십이지신술을 능숙하게 익혔을때쯤 나는 드디어 그녀의 복수를 했다.
그놈들을 다 갈가리 찢어 죽여 버렸다.
복수가 끝나자 나는 허탈했다.
내가 살아야할 이유가 없어진것이다.
그녀가 살아있었을땐 그녀를 위해서 나는 살고 싶었다.
그녀가 내 곁을 떠났을땐 그녀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그런데...복수가 끝났다.
그럼...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지?
죽어야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늘은 나의 죽음을 원치 않는듯....
나는 죽을 수 없었다.
하늘에게 복수해야한다. 내가 내손으로 내 목숨을 끊으면 그것은 하늘에게 지는 것이다.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를 가져간 하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살아야 했다.
그럼....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지?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그래....
'돈'이다.
그녀를 죽게만든 '돈'
그 원수같은 놈의 돈을 벌자
그녀를 앗아간 돈. 저주스러운 돈.
그 후 나는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나의 힘을 이용해 해결사로 활동했다.
어려운 일을 처리해주고 나는 두둑한 돈을 챙겼다.
돈....
그놈의 두둑한 돈이 내 바지 주머니에 들어올때면 난 뭔지모를 증오심을 느끼며 한편으론 희열을 느꼈다.
그래 계속 들어와라
돈아
돈이 있으면 아무도 나를 업신여기고 깔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돈의 맛'이었다.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후엔 무조건 돈을 긁어 모았다.
남이 보면 드러운 놈이라고 할만큼 악착같이....
남들의 비난과 욕을 들어도 돈만 벌수 있다면 그 어떠한 짓도 서슴치 않았다.
나는 내 곁에 아무도 다가올수 없도록 철저히 차가워져 갔다.
그녀의 부제 후 나의 마음은 얼음장같이 딱딱 굳어져버렸다.
그렇게.......끝내는 내가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그 이유도 망각해버리고 말았다.
그런........어느날이었다.
나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까맣고 동그란 눈......
하얀피부.....
가녀린 몸.........
그녀였다.
그것은....
나는 믿기지 않았다.
그녀를 닮은........한 소년을 만났다.
꿈인가?
아니다...이건...꿈이 아니야...
그녀가 살아 돌아온 듯 했다.
반신반의 하며 소년과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그 소년을 만났다.
그녀가 내 안에 들어온 것처럼.......
그 소년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 소년은 내게 말을 걸어주었다.
관심을 가져 주었다.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 돈밖에 모르는 미친놈에게 그 작고 하얀.....따뜻한 손을............
나는
다시 살아야할 이유를 찾았다.
그녀를 닮은.....그 '소년'을 위해서.......
소년은 너무나 작고 갸날펐다.
그 어린몸으로 수많은 일을 겪은 그를 보면서 마치 어렸을때의 나를 보는것 같았다.
어린것이 너무나 안쓰럽다..
그것은 동정?
자신도 동정따윈 싫어하는 주제에 누굴 동정해?
하하..
아니...그것은 동정이 아니다.
그녀가 내게 해주었던 것도 동정이 아니었듯이.....
이제는....이 소년을 지키려 한다.
까만 눈망울....하얀피부....
나를 보는 그 빨려들어갈것같은 눈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닮은 그 눈망울을.....
"이놈들! 아무도 못간다! 여긴 아무도 못들어갓! "
동굴 앞에서 상준은 악을 쓰며 저항했다.
코쟁이 놈들....아무도 못간다, 가려면 날 죽이고 가라
놈들이 총을 쏴댔다.
상준은 십지지번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무차별적인 공격이 더해오자 이제 더이상 버틸수 없을것 같았다.
상처가 터져 이미 피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상준은 쓰러지지 않았다.
쓰러질수 없었다.
소년을 지키기 위해......
아니.....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눈앞이 흐려왔다.
'따따따따따.....'
기관총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순간 어깨와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왔다.
내려다보니 시뻘건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이놈들.......!"
상준은 온 힘을 다해 십이지번을 모두 쏘아냈다.
눈이 자꾸 감기려고 했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상준님이 그까짓 총알 한방에 나가떨어지다니......수치다.
눈이 가물가물했다.
순간...그녀가 보인듯했다.
아니.....그녀다.
'미안해......널 지켜주지 못해서....'
그녀는 웃고 있었다.
상준은 눈을 찡그렸다. 여전히 그녀는 너무 눈이 부셨다.
'준후야.....미안하다.....끝까지 지켰어야 하는데....
이놈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살아야 한다..... 만약 나 쫓아 오면...다시 떨어트려 버릴거야.....절대...나 따라오지마.......'
후회하진 않는다. 지금 죽더라도...나는 하늘에게 진 것이 아니야...하핫...하늘아 기다려라. 내가 곧 간다
상준은 웃음을 지었다.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이렇게 웃어본것이 얼마만이던가...
이제 그녀곁에 갈 수있게 됐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그 하얗고 따듯한 손을 내밀었다.
상준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조금만....조금만 더...
마침내 그녀의 손끝이 닿았다.
악을 쓰며 몸부림치던 상준의 몸이 털썩 바닥에 떨어졌다.
'기다려.....곧 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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