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
용담댐의 물이 가득 차면 용이 승천한다 ○ 공통점
위에서 대략 우리나라의 특이한 예언지명들을 봤는데 이러한 예언지명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1) 실현시기;
거의 전부가 20세기 또는 그 이후에 실현될 일들을 예언했다. 2) 대규모 시회간접자본; 하나같이 모두 대형 사회간접자본이라는 특징이 있고 그 규모가 세계적일수록 예언이 선명하다는 것이다. 인천, 기흥의 경우가 그렇다. 기업의 제조공장도 사회간접자본으로 볼 수 있다.
3) 표현방식; 눈으로 본 듯이 생생하게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4) 예언이 동태적; 더욱더 절묘한 것이 몇 개의 지명에서 확인된다. 이 예언들이 신기하게도 실현시기와 맞물려 동태적으로 예언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인천, 기흥의 경우를 들 수 있는데 다시 보면
인천
인천은 옛날 지명이 인주(仁州)였다. 그런데 실현될 시기에 가까워지자 주(州)가 천(川)으로 변한 것이다. 인천공항은 몇 개의 섬을 밀어서 만든 것이다. 즉 주(州) 자 가운데 점들은 섬으로 상형된 것이다. 그 섬을 밀어서 공항을 만들 시기가 다가오니 천(川)으로 변했다는 말이다. 거대공항이 들어설 것을 실현시기상 동태적으로 예언했다. '州'자의 점들이 바로 영종도와 용유도였던 것이다. * 인천은 역사적인 지명이 아니고 예언지명이다. 백제건국세력이 상륙한 곳은 아산의 인주면이다
기흥
기흥도 마찬가지다. 원래 기(器) 자가 들어간 지명과 흥(興) 자가 들어간 지명이 있었는데 행정구역이 합쳐지면서 합성지명이 된 것이 오늘날의 기흥이다. 실현될 시기가 가까워지면서 지명이 합성될 것까지도 다 내다보고 세계 제일의 반도체공장이 들어설 땅이라는 것을 예언해 놓고 있는 것이다.
통천
통천의 경우도 비슷하다. 고구려지명이 수입(水入)이고 통일신라때 이름이 통구(通溝)인데 아직도 통천(通川)으로 변치 않고 있다. 水入>通溝>通川으로 이름이 바뀌어도 뜻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도랑, 개천을 뜻하는 구(溝)는 천(川)과 같다. 거대한 댐이 들어서고 발전소가 건립되면서 도수(導水)터널이 뚫리는 것을 예언한 것이다.
여천
여천도 비슷한 경우다. 여수(麗水)와 순천(順川)의 합성지명인데 절묘하게 석유화학공단을 상형한 지명으로 변했다.
※ 위의 상형으로 푼 예언지명은 각각의 사진이나 그림을 놓고 그 위에 바로 한자를 쓴다거나 각각의 특징적인 부위를 한자의 부수와 대조해가며 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 예언지명의 가능성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우연은 아닐까? 우연은 아닌 것 같다. 하나 둘이면 우연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례가 발견되면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연적인 예언의 결과로 본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눈으로 본 듯이 선명하게 예언을 할 수 있을까?
여러 모로 생각을 해본 결과 이런 결론이 나왔다. 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 도(道)를 득하면 육신통(六神通)을 얻는다고 한다. 육신통이란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신족통(神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누진통(漏盡通) 등이 있는데 이중에서 천안통(天眼通/天眼智)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중생의 모습을 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불교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신선도에서도 나타나고 서양종교에서도 나타나는 사례가 있다. 예를 들면 성 프란체스코의 경우 새들이나 동물들과도 대화를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것은 위의 육신통 중에서 천이통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늘귀가 열렸다」라는 뜻이다. 그러면 뭇 동물들과의 대화도 가능하다고 한다. 고도한 영적 수련 끝에 얻어지는 특수한 능력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예언지명들은 이와 같이 불교 도승(道僧)들이나 신선도로 도를 득한 진인(眞人)들의 천안통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현상은 지명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옛날부터 동양에서는 세상에 큰 변혁이 있을 때는 대체로 변화가 있기 전에 세상에 널리 유포되는 예언동요(豫言童謠)나 경구(警句)라는 것이 있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 해방을 전후해서 널리 퍼진 경구(警句)가 있다.
「미국사람 믿지마라, 소련(사람)한테 속지마라, 일본사람 일어난다, 조선사람 조심해라」
우리말을 잘 아는 일본사람이 열도로 건너가면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앞말과 뒷말의 우리말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한 절묘한 경구다. 결과적으로 보면 믿었던 미국의 애치슨라인선포에다 속아서는 안될 소련한테 북한이 속았고 그로 인해 북한의 남침으로 6.25가 일어나고 이때 미국의 병참, 병기기지 역할을 한 일본은 다시 일어섰다.
결국 경구 내용대로 우리는 조심을 안 해서 지금도 남북이 갈려있다. 물론 민주주의가 아닌 통일은 안 하는 것만도 못하다고 본다. 문제는 이것이 해방 훨씬 전부터 나왔다면 예언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조선사람 대신에 한국사람을 넣으면 뒷말이 어떤 말이 될까? 한국사람 한 번은 일어선다? 이 말은 너무 길어 운율이 안 맞다. 그러면 "한국사람 한심하다". 각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야할 문제 같다.
또 초등학교 때 여학생들이 놀이를 하면서 즐겨 부르던 동요가 하나 있다.
「빨간 동그라미 언니는 전차에 깔려서 납작꿍, 그의 어머니가 나와서 땅바닥을 두드리며 엉엉엉」
이 동요는 고도한 은유를 포함하고 있다. 풀어보면 빨간 동그라미 언니는 일장기에서 딴 것으로 일본제국주의를 지칭하고, 전차는 그 당시 최신무기로 무장한 막강한 미군을 상징했다. 그의 어머니란 일본왕실 및 제국주의 지도부를 은유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게 단순한 동요가 아닌 것이다. 미국에 의한 일본제국주의의 패전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서「땅바닥을 두드리며 엉엉엉」이라는 구절이 바로 '통석(通惜)의 염(念)'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다. 이 동요 역시 해방 전부터 불려졌다면 예언동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경구나 예언동요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은 아니고 동양권의 다른 나라에도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삼국지연의를 보면 동탁(董卓)이 몰락하기 직전에 천리초(千里草)를 주제로 한 동요가 유행하는 것이 나오는데 천리초란 동(董)을 파자(破字)하여 동탁을 지칭하는 것이다. 몰락 후에 결과를 놓고 지어 붙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같은 형식을 띠고 있다.
위의 두 가지 사례에서 보듯이 이러한 내용들이 해방 이전부터 있었다면 오늘날에도 예언이라는 것이 행해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말을 바꾸면 지금도 천안통(天眼通)을 지닌 도승(道僧)이나 진인(眞人)이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앞에서 얘기한 예언지명이란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 한민족은 보통민족이 아닌 것이다.
신선도는 우리민족의 고유한 영적수련법이었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으니까. 중국의 도교가신선도에서 갈라져 나갔다는 설도 있다. 나라를 처음으로 연 왕검 단군부터 신선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플라톤이 얘기한 철인(哲人)이 다스리는 이상국가였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가락국의 김수로왕도 만년에 신선이 됐다고 하는 기록도 있는데 그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 구주에 지금도 있다. <춤추는 신녀/이종기/동아일보사/1997년/250, 261p>에 나온다. 너무나도 완연한 한복차림의 신선상이다.
위의 예언지명들은 그냥 상식적으로 생활주변에서 들은 것이지만 좀더 정밀하게 조사하면 대형사회건접자본과 관련하여 더 있을 것으로 본다. 지금도 순 우리말로 된 지명으로 남아있을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면 물막이골 같은 경우라든지 차유령(車踰嶺) 같은 경우는 우리말로 하면 유(踰)가 넘을 유이므로 차너미고개라든가 거너미고개라든가 하는 형태가 될 것 같다. 서해대교 같은 큰 다리나 방조제 같은 경우도 있을 듯하다. 또 북한의 핵개발센터가 있다는 평북 영변 근방의 지명도 틀림없이 예언지명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정확한 지명을 모르겠다. 이 곳의 지형을 프랑스 위성이 찍은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데 풍수적으로 볼 때도 보기 드문 대명당으로 보였다. 청천강으로 보이는 강이 핵개발센타의 본부가 들어선 곳을 휘감아 흐르는 것이 마치 호리병 모양으로 보기에 대명당으로 판단된다.
위의 예언동요의 상징법을 볼 때 필자가 고대신화, 설화를 실사적으로 해석을 하면서 알게 된 고대인의 신화, 설화 구성기법과 흡사하다. 이런 것을 이해하는 것은 고대인의 의식과 사고 그리고 어떤 사물을 상징, 은유할 때의 발상에 바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