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서원의 디테일
no방송과 노방송(路傍松)
또, 또, 또, 도동서원에 다녀오다. 도동서원으로 가는 날은 모처럼 여름비다운 비가 내린다.
다람재 고갯마루에 현판도 없는 정자에 오르면 꽉 차 흘러오는 낙동강,
오른쪽 산 아래로 안개에 묻힌 서원은 한 폭의 수묵화마냥 편안하다.
논 날 같이 비가 퍼붓는 데도 자전거를 타고 국토 순례를 나섰다는 부산 총각은
잠시 비를 피하더니 쏜살같이 도동으로 페달을 밟는다.
그를 보내고 시비로 앞으로 갔다.
시제는 노방송이라 흡사 근래 국영방송의 직원들이 작심하고 시답잖게 방송을 하던 짓거리들이
연상되었지만 김굉필선생의 漢詩, 노방송(路傍松)을 읊어보면 세상만사가
그때나 이제나 달라짐은 없었다.
路傍松
一老蒼髥任路塵(일로창염임노진) 잿빛 수염의 늙은이도 이 길에서 머물고
勞勞迎送往來賓(노노영송왕래빈) 힘들게 오가는 객들도 맞고 또 보낸다.
歲寒與汝同心事(세한여여동심사 이 모진 세한에 그대가 겪는 심사
經過人中見幾人(경과인중견기인) 지나는 이들 중에 몇이나 될꼬.
창염(蒼髥) 늙어서 잿빛이 된 수염
돌조각 디테일
뜻이 없으면 보이지 않고, 보아도 마음에 남지 않는다고 했다. 도동서원이 바로 그런 곳이다. 수월루로 들어서면 가파른 계단위로 좁고 낮은 사립문 같은 환주문이 찾아온 주인들을 맞는다. 지붕 위로 엎어놓은 떡시루 같은 절병통은 오늘 같은 장마에는 안성맞춤이다. 빗물이 기와로 스며듦은 아예 차단해 버린 착상이 절묘하다.
뿐인가 환주문의 현판 모서리에 새겨 놓은 새 그림은 닭인지 봉황인지 몰라도 닭은 계명의 상징이요 봉황은 급제의 징표가 아닌가. 환주문 지붕의 모서리마다 연꽃을 새겼다. 더러움에 물들지 말라는 뜻은 곧 이 서원의 모신 분의 모습이요 말씀이다.
환주문의 좌우로 쌓은 담장은 보물급 꽃담이다. 여기서 올려다보는 전각은 도동서원의 본채, 중정당이다. 여섯 기둥머리에 둘러놓은 흰 한지는 사당에 모신 분이 위대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상지’라 한다.
마당으로 들면 디딤돌 끝단에 옹골찬 거북이가 머리를 곧추세우고 강으로 내칠 태세다. 매서운 눈빛을 보고는 기가 눌러 자라도 아니고 거북이도 아니라고 하길 레. 요즘 등장한 슈퍼맨이라고 했더니 그럴싸하단다.
서원의 축대의 면석을 보자.
이 면석들은 전국의 유림들이 보내준 크고 작은 본래의 형태를 남겨 다듬어 모자이크처럼 잘도 구성했다. 어느 면석에는 모서리가 12개 굽이로 깎아 놓았다.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각각이다. 돌들의 멋은 은은하게 풍기는 색깔들이다.
축대 기단 아래로 네 마리 용두가 서원을 지킨다. 한 용두는 색깔이 희고 셋 용두는 색깔이 짙다. 바깥쪽의 두 용두는 여의주를 물었고, 안쪽의 두 용두는 물고기를 물고 있다.
축대의 좌우에 놓인 계단은 동쪽 것은 올라가는 계단이고 서쪽 것은 내려가는 계단이다. 계단 옆에 다람쥐와 꽃문양을 새겨 시각장애인들도 이 문양을 따르면 오르내림이 가능한 점자를 대신한 점화인가 보다
사당의 디테일
내삼문에 이르는 계단 들머리에 석수가 있었다는데 도난을 당해 흔적을 감췄고, 계단 입구 좌우에 태극문양과 만卍자 문양을 음각해 놓았다. 태극은 성리학을, 만자는 불교를 상징하는 것들을 이 엄숙한 경지의 이곳에다 말이다. 하기야 환주문의 연꽃이며 문지방의 연봉이며 여기서 만난 만자 문양도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문양들이 아닌가.
더구나 중간 계단에는 괴수 같은 두상(頭像)을 놓았다. 턱은 복스럽고 콧구멍은 벌름하다. 흡사 고사 상에 올린 돼지머리 같다. 계단 바닥에 네 잎 클로버 문양은 무엇을 상징하는지?
철 만난 숨은 그림들
빗줄기가 세차다. 세찬 비는 돌들을 씻어 조화로운 명암이 확연하다. 계단 돌들은 물기를 머금고는 청명한 날에는 볼 수 없는 진기한 암각화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우중이 아니라면 이런 형상들을 볼 수도 없을 텐데 말이다. 방사선 조명으로 보일 듯한 암각화들은 계단마다 이어지고 형태를 찾는 눈길은 바쁘고… 나는 연방 뜻이 없으면 보이지 않고, 보아도 마음에 남지 않는다는 말을 토해내면서 이 진귀한 암각화들을 오늘에서야 보는 행운에 만끽하다.
어느 계단 돌에는 바다의 게가 또렷하고 또 다른 면에는 잉어가 승천할 듯하고, 어느 돌엔 비천상도 그려 보았고 합장한 모습도 어른어른하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내 능력으로는 그 암각화를 다 살피기는 족탈불급이라, 다음을 기약하고 이쯤에서 물러났다 아쉬운 지고…
사당 안에는 설로장송(雪露長松)과 강심월일주, 두 점의 벽화가 있다는데 문을 걸어 놓아 갈 때마다 그림의 떡이다. 혹 그 설로장송이 다람재를 너머 오다 만난 선생님이 읊은 노방송의 화제의 벽화는 아닐까!
사당 안 벽화, 설로장송(雪露長松)
서원으로 한 줄기 비바람이 또 친다. 물빛에도 튀고 녹음에도 튄다. 서원 곳곳에 놓인 돌마다 담은 해학 같은 미학들, 우중에 만난 계단의 숨은 암각화들은 또 다른 도동서원의 한 꼭지로 다섯 차례 답사 끝에 서원이 나에게 안겨준 보물이요 진면목이었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건강하시죠 선배님!!!
담장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니 가서 보고 싶어짐니다.
한번 쯤은 서원보다 아기지기한 디테일에 관심이 가죠
가는 길이 있으면 안내해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