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화엄사를 뒤로 하고 선암사로 향한다.
조계산을 넘어 선암사, 송광사를 일주하려고 하였는데 다리 수술한 사
람도 있고 상경할 때 교통 체증이 두려워 산행은 생략하기로 하였다.
언제 100대 산에 들어가는 조계산을 산행할 기회가 있을 지 모르겠다.
처음 가보는 선암사.
순천 승주읍에 있는 조계산(曺溪山) 선암사(仙巖寺)
신라 도선(道詵)이 창건하였고 고려 13대 선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중
창하였다.
선암사는 태고종 본산으로 대처승들이 있는 곳이다.
태고종 총본산은 서울 서대문에 있는 봉원사이다.
선암사는 입구에서 자갈로 잘 다져진 비포장도로를 1KM 이상, 15분 이
상 걸어야 한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보면 부도밭이 나온다.
그 부도밭에 오래된 2개의 석종형 부도가 눈에 들어 오는데 그에 대한
설명이 없다.
석 종 형 부 도
또한 부도비 하나가 바르게 서있지않고 비딱하게 방향을 틀고 있는데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설명이 없다.
비딱하게 방향을 잡은 부조비
계속 오르니 보물 400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 유명한 승선교(昇仙橋).
자연 암반에 돌을 다듬어 쌓은 무지개 모양의 홍교를 만들었고 다리
아래족에서 위를 쳐다보면 한 복판에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
죽 나와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
고 전해 온단다.
다리 중간 천장에 만들어놓은 용머리
정호승의 선암사를 한 번 읊고 다시 설명을 하면 어떨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근심 걱정이 많은 우리들의 생활에 한 순간이라도 위안을 주기위해 이
시를 읊지 않았나 생각된다.
녹음이 우거진 호젓한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절 못미쳐 삼인당(三印塘)
을 만난다.삼인은 무아의 지경에 이르면 열반에 들어간다는 불교사상을
나타낸다.
중간에 대각암 가는 길이 있었다.
그곳에는 보물인 대각암 부도가 있는데 가지 않았다.
또한 그 위쪽으로 보물인 북부도, 동부도가 있다는데 본사를 관찰할 요
량으로 그 곳까지 갈 성의가 없었다.
조계산 선암사 일주문은 수리를 하는 바람에 옆으로 돌아 들어간다.
대웅전이 중심에 있고 삼층석탑이 양쪽에 서있다.
대웅전, 삼층석탑, 삼층석탑 유물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나 초파일 행
사로 삼층석탑 이미지를 제대로 담을 수가 없었다.
대 웅 전
삼 층 석 탑
종루에 걸려있는 명동종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보물을 아끼기 위해
서인지 지금은 그 종을 사용하지 않는단다.
괘불 및 부속유물도 보물로...
도선국사 진영이나 대각국사 진영이 보물인데 성보박물관 문을 열지않
아 볼 수가 없었다.
석가탄신일이니 더 문을 열어야 하지 않는지?
배가 아파 그 유명한 뒷간으로 갔다.
훤히 뚤린 해우소의 깊이가 정말 깊다. 1개 층 정도는 될 듯하다.
볼 일 보려고 아랫도리 내리고 올릴 때 호주머니에서 물건 떨어질까 걱
정스럽다.
선 암 사 뒷 간 입 구
선암사에는 국보는 없고 보물만 14점 있다고 한다.
대강 선암사를 관찰하고 걸어 내려가려는데 다행히 셔틀버스가 있어 그
버스 신세를 지고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3. 이제 마지막 행선지 송광사로...
선암사에서 산으로 넘어가는 길로 가다보면 유명한 보리밥집이 있다고
하여 자동차로 갈 수 있는 줄 알고 길을 물으니 짚차나 갈 수 있단다.
아래로 돌아 주암까지 가서 송광사 경내로 들어간다.
여러 절을 다녔지만 예불시간이 닥아와서인지 이제는 정말 막힌다.
초파일이고 10시가 넘으니 안막히면 이상한 것이지.주차장이 막혀 길을
따라 오를 수가 없다.
그것도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인 송광사인데 안막히면 말이되나.
불보사찰 통도사, 법보사찰 해인사, 승보사찰 송광사이다.
그리고 16국사를 배출시킨 절이니 얼마나 유명한가?
신라말 혜린선사가 창건하고 송광산 길상사라 하였단다.
그 후 보조국사 지눌의 정헤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 번창하기
시작하였단다.
송광사는 5대총림에도 들어가고 불교 삼대 사찰에도 들어가는 대찰이다.
선암사처럼 담이 쳐저있는 일주문을 지난다.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라는 현판과 "승보총찰 조계총림"이라는 현판
이 같이 걸려있다.
대찰답게 일주문 공포가 주심포(柱心包)로 몇 겹을 쌓아 놓았는지 모르
겠다.
바로 가다보면 능허교, 우화각 앞에 죽은 향나무가 아직 서 있다.
고향수(枯香樹)라고 하는데 800여 년전 지눌 스님이 심었는데 지눌스님
이 입적하자 같이 고사하였다고 한다.
고 향 수(枯 香 樹)
송광사는 일주문 지나 직선으로 오다가 왼쪽 계곡을 건너면서 직선으로
주불전으로 가게 되어있다.개천을 홍교(능허교라고 함)로 만들어 넘게
하고 홍교 위에 우화각(羽化閣)을 지어 그 안으로 통과하게 하였다.
우화란 깃털처럼 가벼워져 하늘나라로 떠올라 신선이 된다는 뜻을 내포
하고 있다.
우화각에 들어서면 송광사라는 멋진 현판이 있는데 해강선생이 썼다
한다.
그리고 계류에 발을 담그고 있는 임경당(臨鏡堂)이라는 요사체 건물이
있다. 임경당은 거울같은 곳에 임한다는 뜻이 아닐지?
거울에 비친 아름다운 건물이란 뜻일까?
이 임경당과 우화각, 능하교가 있는 한 폭의 그림은 정말 아름다운 그
림이다.
그러나 등들을 줄줄이 달아놓아 멋진 영상을 찍을 수가 없다.
우화각 지나 송광사 중심 영역으로 들어가니 우선 천왕문을 통과한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사천왕상이 또한 남다르다.
사천왕상은 흙으로 구워 만들거나(소조) 나무를 깎아 만드는데 이곳은
목조에 흙을 덧대어 만든 목조 토대의 소조 조형물이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소조사천왕상이 보물1467호로, 복장유물이 보물 14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고 종고루를 지나면 광장이 나온다.
송광사는 지눌의 정혜결사를 계승해 삼무(三無)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대운전 앞 탑이 없고 TV와 핸드폰이 없다.
강진 백련사 요세(了世)스님은 백련결사를 일으켰는데 당시 불교가
무척이나 타락하였었나 보다.
정면에 대웅보전이 있고 왼쪽에 승보전, 오른쪽에 지장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대웅전 뒤 오른쪽에 16국사 영전이 모셔진 국사전이 있다.
국사전은 국보 56호이다.
조사전 내부에 있는 16국사 진영
이국사전은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13호)과 비슷한 모형의 맞배지
붕을 한 조선 초기 건축양식이다.
지장전 옆 끝에 송광사에서 가장 작은 전각인 약사전이 있는데 보물
302호요, 옆에 보물 303호인 영산전이 있다.
그리고 목조삼존불감이라는것이 박물관 내에 있는데 국보 42호로 지정
된 조그만 나무조각품인데 보조국사 지눌이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모셔온 것이란다. 송광사 대표 유물로 석가탄실일에만 전시한단다.
우리는 운 좋게 이 국보를 관람할 수 있었다.
촬영금지로 광고용지의 그림을 다시 찍었다.
목 조 삼 존 불 감
16국사 진영도 과거에 13개나 도둑맞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목조삼
존불감은 평상시 관람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그 외 국보 43호 혜심고신제서라는 고려 고종 3년에 조계사 2대 진각
대사 혜심에게 대선사의 호를 하사한 제서이다.
그 외 보물은 나열하기조차 어려워 생락한다.
송광사에는 국보 4점, 보물 21점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천자암에는 쌍향수가 있는데 천연기념물 88호이다.
지눌과 중국 담당국사가 같이 꽂은 지팽이가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올라가지 못하고 다른 분의 작품을 대신 올린다.
쌍 향 수(雙 香 樹)
이상 지방문화제 탐방을 끝내고 상경하기로...
점심은 고속도로휴게소에서 해결하고 서울로 향하였는데 생각만큼 그
리 맥히지않아 해지기 전에 도착하였다.
(2914년 5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