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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가로 변신한.,허영호(1954. 4. 16 生) 산악인.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무엇을 할까?’
그런 생각이 있어야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시간은 소중합니다. 도전할 기회를 주니까요.
도전이라는 것은 새로운 세계,
미지의 세계와 함께하는 겁니다.
새로운 가치가 있어야만 하겠지요?
인간 한계에 도전한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도전은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다치게도 하죠.
하지만, 정상을 향한 도전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탐험은 몹시 춥지만
도전은 열정이니까요.” - 허영호 -.
탐험가는 도전에 성공하면, 명성을 얻지만
도전에 실패할 경우에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
그래서, 열정이 없다면, 계속 할 수 없는.,탐험.
탐험가가 탐험을 멈추면 그것으로
탐험가로서의 수명은., 끝나고 만다.
그래서, 탐험을 멈출 수 없는.,탐험가.
영하 40~50도 극지에서의 탐험은
목숨을 건 '극한 여정'이라 춥기 마련.
단한번으로 끝나지 않을 기나긴 인생 여정.
인류 최초로 지구 3극과 세계 7대륙을 완전 정복해
1997년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세계적인 산악인 허영호.
그후, 해마다 해외원정 와중에도 경비행기에 폭 빠졌다.
허영호의 도전은 산에 그치지 않았다.
비행기 조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1998년 초경량 항공기 조종 면허증을 획득.
2008년 4월 초경량 비행기 '스트릭 새도'를 타고
경기 여주에서부터 제주도를 거쳐 다시 돌아오는
국토종단 왕복비행, 또한 9월에 독도 비행에도 성공.
체육훈장 기린장·거상장·맹호장·청룡장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걸어서 땅끝까지.
"실패는 있었지만 포기는 없다"
"어디든 태극기는 꼭 챙겨간다"
"일년에 반은 집을 떠나 지낸다."
그가 가장 힘들었던 원정은 1995년 북극점 횡단 때였다.
러시아 최북단섬~북극점~캐나다로 넘어올때 영하 50℃
북극에서의 극한여정은 가장 혹독한 시간이기도 했단다.
영하 50도가 넘는 혹한에 원정장비는 무려 200kg 무게,
그걸 짊어지거나 보트에 매어 끌고 하루 12시간씩 걷는다.
북극해 얼음 대륙은 하룻밤 사이에 십수 킬로를 떠밀려 이동.
때론 그 때문에 전날 지나간 지점에도
못 미치는 곳에서 아침에 눈뜨기도 한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북극점도 일정하지 않아 애를 먹고,
예상못한 자연의 횡포로 생사의 문턱을 오가기도 여러차례.
바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곳 사람들이 가끔 물어요.
"용변은 어떻게 해결하느냐?"
"소변볼때 고드름이 달리지 않냐?"
라고 묻는데, 그렇진 않아요(웃음).
"신속하게 보는게 중요하죠.”
그는 등반하다가 동료를 잃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동상에 걸린 동료도 없어 자칭 “엄청난 행운아”라지만,
그가 잔소리를 많이 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12시간씩 북극 탐험을 하고 숙소에 들어오면 꼼짝하기 싫죠.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도 발은 꼭 씻고 자라고 잔소리 합니다.
발에는 노폐물도 많고 잘못 방치하면, 혈액 순환도 안 되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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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확인해야 합니다.
언제 어떤 일이 어느 순간에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탐험때 에피소드를 제대로 다 이야기하려면,
며칠 밤을 꼬박 새워도 부족하다고 말하는 그.
5일에 한번씩 하는 양치질부터 몰래 먹는 술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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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있는 그는 술마실줄 모르는 산악인.
1994년 남극탐험을 떠나기 직전에 처음 만났다.
그를 마지막 만난 시기는 1997년 남극탐험 직후.
햇수로 4년 동안에 6~7번은 만난 것 같다.
그런데 한번도 술한잔 같이 한 기억이 없다.
사우나에 몇번 같이 갔고, 밥을 몇번 먹은 정도.
그무렵 그는 내가 나이로 4년쯤 선배라
예의 상, 내 앞에서는 술을 절제한듯 하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단정한 정장 옷차림.
머리도 직업군인처럼.,갓 이발한듯 단정.
다른 산꾼들과는 다르게 늘 단정한 몸가짐.
1994년에는 그와 함께 사우나에 가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고
그에게 사인을 요구하는 팬들이 드물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하다며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
1995.12.12 남극대륙 최고봉 등정 후
김영삼 대통령 때 청와대에 초청 받고
그가 유명산악인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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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무렵에는 그와 사우나를 하고 나오면
남자사우나 앞에 여성 팬들까지 길게 줄설 정도였다.
그가 사우나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싸인을 요청하는 팬들.
그당시 그는 국가브랜드로 급부상.
나는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 호텔 사우나에서도
처음 발생하는 소동이라서
직원들이 몹시 당혹해 하는 상황.
그 호텔의 남자사우나 문앞에
남녀가 뒤섞여 길게 줄서 있으니까
손님들도 남탕인지 여탕인지 몰라 당혹.
그가 사우나에 들어갔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순식간에 남자 사우나 문앞에 팬들이 몰려든 것.
그래서, 여성 팬들까지 남자사우나 앞에 줄을 선 것.
전혀 예상못한 여성팬들의 환호성에 놀라
그는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손으로
황급히 앞을 가리며 당혹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 말고 밖으로 나가서 하면 안될까요?"
나중에 알고보니 그 남자사우나 문앞의 소동은
그가 그곳 입장 전에 사인요청을 하는 여성 팬과
마주치며 말 한마디 실수하는 바람에 일어난 사건.
"목욕 후에 싸인하면 안될까요?"
"그럼, 그때 싸인회를 여실래요?"
"네."
"...."
그래서 그 여성팬이 혼자 남탕 앞에서
기다리기가 쑥스러워.,'허영호 팬 싸인회'
소문을 내며 남자사우나 앞에서 기다린 것.
그러자, 남녀 가릴 것 없이
열렬 팬들이 몰려들었던 것.
.
그후에도 나는
그를 만날때마다
해외원정 직전과 직후에
그의 몸에 변화를 보고 싶어
사우나에 동행한 적이 여러 차례.
산악인으로서의 탁월한 심폐기능은
그의 남달리 두터운 가슴에서 나오는듯.
경주마처럼 가는 종아리 위에 두터운 허벅지.
그런데, 남극원정 직전에는 '비계덩어리' 뱃살이
남극원정을 다녀와서는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았다.
얼마나 고된 여정이었는지 그 뱃가죽만 봐도 짐작갈 정도.
극지로 떠나기 전에는 체지방을 한껏 늘리지만
극지를 다녀오면, 체지방이 모두 다 빠져 버린단다.
체지방은 극지원정 중 위기극복 때마다 에너지 공급원.
체지방은 극지에서 몸에 저장한.,최후의 비상식량.
영하 50도 혹한과 모진 바람에 버티는 원동력이란다.
그는 극지원정에서도 최적인 몸을 늘 유지하는 산악인.
당시 40세인 그의 몸은 한마리 야생마를 보는듯.
남극에서 굶주린 백곰을 만나 잡아먹힐뻔 했단다.
바로 코앞에서 총을 쏴서 겨우 위기를 모면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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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엔 '허영호 후원회
100인과 함께.,숨은벽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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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12명 꿈나무 클라이머들을 안내요원으로.,투입.
그외에도 안내요원으로 12선녀 산악회 후배들도 투입.
베이스캠프 중심으로 원점회귀 산행(워킹 & 클라이밍)
일사분란하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안내요원들의 맹활약으로 산행을 마감.
나는 허영호 산악인과 숨은벽 등반을 동행.
'허영호 후원회 100인' 산행은 성황리에 마감되었다.
그는 그때 도와준 보답으로.,내게 선물을 갖고 왔었다.
그가 남극 탐험 때에도 썼다던.,500cc 티타늄 보온병 2개.
그당시 티타늄 보온병은
국내에 없을 만큼 귀한 것.
그래서, 그 선물을 받고 싶었지만
전문산악인에게는 손때 묻은 장비가
위기에서 생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 다시 돌려주었고 그후 몇번 더 만났다.
'허영호 후원회' 총무를 맡은.,김광호.
그와 나는가까운 사이라 함께 만난 것.
목숨을 건 해외원정을 떠나기 직전이나
해외원정을 무사히 다녀온 직후에 만났다.
탐험가에게 목숨 건 도전은 숙명인지 모른다.
스폰서(광고주)들이 점점 더 강렬한 모험에
무리한 도전까지 바란다며.,숨은 속내도 토로.
도전적인 원정일수록, 위험율이 높아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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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생 그는 당시 늘 새로운 도전에 몰두해 있었다.
'산악 그랜드 슬램' 7대륙 정상 등정과 3극점 도보 탐험.
1997년 그의 목표가 끝나자 새로운 목표가 필요했던 그.
그당시 그가 갖고있던 개인장비는
40피터 콘테이너로 2~3개 정도였다.
대형 아파트 3채에 채워넣을 정도 물량.
그가 해외원정대 팀을 꾸려 나갈 때에는
꼭 필요한 장비지만, 평상시에는 짐이었다.
그래도, 그것들이 그에게 전재산 일 만큼 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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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무렵, Dream & Adventure(꿈과 모험) 회사 설립.
그는 어릴적 꿈이었던 비행기 조종으로 눈을 돌렸다.
2007년에는 초경량 비행기로 제주도 왕복 비행을 시도.
2008년 9월에는 독도 선회 비행.
'독도의 하늘은 대한민국의 하늘.'
2011년 4월 3일 600kg 초경량 비행기를 타고
독도와 마라도 등 우리나라 영공의 동,서,남쪽
끝자락을 도는 단독 비행에 성공하기도 했었다.
앞으로는 초경량비행기와 자동차로 세계일주가 꿈,
우리나라 산은 남북한을 포함해 모두 다 가보고싶다.
유일하게 갈 수 없어 못가본 북한에 가보는 것도 소망.
'도전과 탐험정신이 사라진 요즘 한국의 젊음이.'
'꿈과 목표가 없으면 인생을 무슨 의미로 사는가?'
“외국 사람들은 모험을 좋아합니다. 영국이나 노르웨이 같은 나라는
역사 자체가 모험의 역사이기도 하구요. 우리나라는 아무래도 정적인
역사를 지녔기 때문인지 젊은이들이 모험을 즐기는 것 같지 않아요.
사람은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탐험은 경험의 가장 좋은 이름이죠. 호연지기는 컴이 아닌 대자연.
대자연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사람의 사고가 넓어집니다.”
탐험과 여행의 차이가 뭐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사실 탐험가들 사이에서는 '원정'이라는 의미가 강한
탐험(expedition)보다 여정(journey)이라는 말을 많이 써요.
탐험은 여행에 비해 험난해, 장비도 많이 필요한 차이가 있지만,
탐험이든 여행이든 여정이죠.즉, 오디세우스가 겪었던 탐험도 여정
어떤 경우건 극(極)에 도달한 체험자는 범인을 초월한 경지.
그들에게는 보다 명철한 정신과 도전정신이 몸에 배여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철학이 되고, 신앙이 된다.
그는 7대륙 최고봉과 3극점을 발로 디딘 ‘최초의 인간’이다.
이 세계의 끝을 이루는 남극점과 북극점, 에베레스트 꼭대기.
그외에도 인간으로서는 차마 갈 수 없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고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곳들만 골라서 찾아다녔던.,허영호.
지구상의 모든 극점을 다녀온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북극에서의 ‘시간’입니다. 남극은 대륙이라 언 땅이지만
북극은 바다. 바다가 ‘언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비했어요.
두달 동안 걸었는데, 자연의 무수한 변화를 눈으로 보았죠.
해가 뜨고, 기울고, 저무는 움직임에 따라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북극의 풍광이 시시각각
변하는데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 허영호.
북극에서의 시간은 한편으론 가장 혹독한 시간이기도 했단다.
영하 50도가 넘는 날씨에 장비는 무려 200kg, 그걸 짊어지거나
짐 보트에 매어 끌고 하루 12시간씩 걷는다. 그러나 알려진 대로
얼음 대륙은 해수 이동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도 십수 킬로를 이동.
때론, 자고나면 전날 걸어온 거리에도
못 미치는 지점에서 눈뜨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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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침반이 가리키는 북극점의 위치도 일정하지 않아 애를 먹고,
예기치 않은 자연의 횡포로 죽음의 문턱을 오가기도 수차례였다.
그는 이처럼 험난했던 북극탐험 경험을 ‘도전’이란 말로 축약한다.
“챌린지(challenge), 도전이란 새로운 가치를 찾는 것.
새로운 가치는 도전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는것 같아요.
저는 탐험을 통해서 도전하고, 새로운 가치를 찾습니다.
탐험은 저의 ‘진리’입니다.
사람마다 진리의 내용과 진리에 이르는 방법이 다르죠.
학자가 학문을 통해, 성직자가 종교를 통해서라면
저는 탐험을 통해 진리를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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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험한 산에 매력을 느끼는 건 맞지만,
그건 험한 산일수록 자연에 순응하는 법,
자연의 섭리를 더 잘 알려주기 때문이지
정복하는 쾌감 때문이 아니에요.
어떤 산이건 산은 제게 즐거움을 주지요.
한국의 산도 좋아하고 많이 다녀요.
설악산은 심산유곡의 묘미가 있고
남한산성은 가족들과 크게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어서 자주 갑니다.”
그는 또 요즘처럼 어려운 때 산행만큼 건강에 좋고,
비용도 안 들고 무엇보다 정해진 형식이 없어 배우느라
골치 아플 일 없는 스포츠가 또 어디 있겠느냐며.,‘등산예찬’
그는 국내에 산행하는 사람들은 점점 느는데 반헤
산을 지키려는 노력은 부족한 세태에 섭섭해 한다.
“킬리만자로에 갔을 때 뼈저리게 느꼈죠.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있는 그곳은 우리보다
더 낙후되고, 사람들의 교육 정도도 낮은데도
쓰레기 한 점, 담배꽁초 하나 찾아 볼 수 없지요.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몸에 밴 까닭이죠.
당연한 거지만 아름다운 곳일수록
보존하려는 노력이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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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를 등정한.,101명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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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6월 2일 오후 6시, 서울 힐튼 호텔에서는
네팔 사가르마타 데이(Sagarmatha Day)를 맞아
'사가르마타 데이 한국에베레스트 등정자모임' 행사.
에베레스트를 등정한.,101 韓國人
사가르마타 데이(Sagarmatha Day)는
1953년 5월 29일 에드몬드 힐러리 경이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등정한 날을 기념.
네팔정부에서 2008년부터 제정한 날이다.
네팔에서는 에베레스트를 '사가르마타'라 부른다.
'Sagar'는 '지구'를 의미, 'matha'는 '머리'란 뜻.
에베레스트는 '지구의 머리'란 뜻을 가지고 있다.
'Sagarmatha Day Korean Everest Summiteer's Meet'
주한 네팔대사관과 한국네팔친선협회 주최로 열린 이날 모임에는
허영호, 김창선, 엄홍길, 박영석, 오은선 등 101 에베레스트 등정자와
원로 산악인 김영도, 이인정 한국네팔친선협회 회장 등 산악인들이 참석.
이날 기념식은 네팔 전통의식인 촛불 점등을 한후에
에베레스트 등정 중 순직한 산악인 추모묵념으로 시작.
주한 네팔대사는 101 등정자들에게 일일이 기념패를 증정.
이날 기념패를 받는 산악인 중에는 한국인으로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한 고 고상돈 씨를 대신하여
부인 이희수씨 등을포함하여 유가족 상당수 참석했다.
한국은 110회 에베레스트 등정에 도전하여.,총 101명이 성공했다.
허영호, 엄홍길, 박영석(3회), 이 인, 박무택, 김재수(2회) 등 중복 등정
여성등정자로는 1993년 5월 10일, 고 지현옥, 김순주, 최오순 씨가
국내 최초(세계 3번째) 등정후, 오은선(2004.5.20), 곽정혜(2006.5.18),
고미영(2007.5.16, 고인), 송귀화(2007.5.17), 김영미(2008.5.22) 등 8명.
한편 최연소 등정자는 김순주(22세, 여), 박정현(23세, 남)
최고령등정자는 김성봉(66세, 남), 송귀화(59세, 여) 씨이다.
이날 축사는 원로 산악인 김영도(84세)씨,
이날 축배는 오은선 대장과 '나마스테'와
'히말라야로 가는 길' 등 네팔과 히말라야를
소재로 소설을 쓴 작가 박범신씨 제의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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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6. 2. 오후 6시, 서울 힐튼 호텔에서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던 국내 산악인들과
그 유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행사는 처음.
만약, 이러한 행사가 1990년대에 열렸다면
이 행사의 주인공은 허영호산악인이있을듯.
그는 1990년대 산악인으로서는 독보적인 존재.
그러나, 2000년대 들어온 이후
그는 유명산악인으로서의 명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는듯.
그러나,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나이에 맞게 도전 중.
허영호 산악인은 1987년 동계 에베레스트를 등정
1993년 티베트에서 네팔 쪽으로 무산소 횡단 등정.
2007년 홀로 팀을 꾸려 단독등정 모두 국내 최초 기록.
허영호 산악인은 2010년 6월 2일 이 행사 이후에도
2차례 더 에베레스트를 올라.,총 5회로 국내 최다 등정.
2016년 5월 19일 아리랑 원정대와 함께 63세 나이로 등정.
세계최초 3극(極)점 & 7대륙 최고봉 등정.
'1990년대 허영호 산악인'이 이룩했던.,쾌거.
'아문젠, 피어리, 힐러리' 못지 않은.,탐험 업적.
남극점을 최초로 밟은.,로널드 아문젠.
북극점을 최초로 밟은.,로버트 피어리.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에드먼드 힐러리.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 들어오면서
그가 이룬 업적은 과소 평가되어 안타깝다.
2007년 6월 2일.,조선일보 이명원 기자 인터뷰.
........2007.6.2. 허영호 산악인 인터뷰........
“내가 산악계 외톨이라고요? 뭐, 그럴 수 있죠.
산악계 쪽에는 관여를 안 하니까. 행사도 안 나가고
산악인도 잘 안 만나죠. 등반을 가서도 마찬가지죠.
등반이란 본인이 하는 거니까.
그들의 등반은 그들의 등반이고,
내 등반은 내가 하는 등반이지요.”
에베레스트 등정 후, 2007.6.1 귀국 다음날 인터뷰.
햇볕과 눈(雪)에 그을린 흔적으로 어느 탄광 막장에서
막 나온 얼굴에, 짧게 이발한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새.
이번 에베레스트 등반은 혼자였다.
네팔 셰르파 2인 만 데려갔을 뿐이다.
그의 등정은 단신(短信)으로 처리되었다.
“혼자서 하는 원정은 외롭지 않았나요?”
“당연히 외롭고 힘들죠.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혼자서 해왔어요.”
“큰 원정대를 꾸려가면 마찰이 많아요.
대원들이 말을 안 듣기도 하고 대들기도 하고.,
무엇보다 약속을 안 지키는 친구들이 태반이에요.”
"무슨 약속을?"
“돈 문제로 마찰을 몇 번 겪고는 손을 들었어요.
원정 비용을 분담하겠다고 약속했으면 지켜야지요.
산악인들이 그런 약속을 안지켜요. 서약서 쓰면 뭐해요?
꽝인데. 그런 산악인들은 거의 무위도식.
등반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열심히 벌어서
원정을 갈 생각을 잘 안 한다고요. 그러니
나 혼자 가면, 빨리 결정하고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 편하죠. 그리고 속이 안 썩죠.”
그는 한국 탐험사에서 늘 신기록을 남겨왔다.
그전까지 한국 산악인 16명을 앗아갔던 ‘악마의 이빨’
마나슬루봉(8163m) 정상을 그는 무산소로 처음으로 밟았고,
1995년에는 7대륙 최고봉과 남·북극점 도달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는 세상의 영웅이 되었지만,
산악계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그를 둘러싼 나쁜 소문이 퍼져나갔다.
산악계에서 그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 고립과 단절의 세월이 무려 8년이 지났다.
물론, 이러한 내막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돈 문제 때문에
동료나 선후배들과는
함께 하기 싫다는 뜻인가?
“그런 이유가 많죠. 원정 경비를 분담한다는
약속을 해놓고 안 지키니까 "싫다." 이거지요.
이미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잖아요.”
-산악인들은
돈 이야기를
잘 안하는데.,?
“산악인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돈은 중요하죠.
그것을 등한시 하면 나이가 들어 도태될 뿐이죠.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해요.
손가락· 발가락을 잘린
산악인들이 솔직히 뭐 영웅?
먹고 사는 게 더 중요하잖아요.”
- 산악인들로서는
모독으로.,
느껴질 것 같은데요.
“등반에만 매달려 손가락 발가락 잘린 걸
훈장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일상 생활에서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렇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면 돈이 나와, 뭐가 나와요.
탐험도 그렇고 등반도 그렇고, 저는 항상 조용히 다녔어요.
과장되게 말 안하고 등산복에 태극기도 안 달지요.
산이 좋아서 가는 사람이 태극기를 달 이유가 없죠.
정상에 올라서면 태극기 들고 촬영하면 되는 일이지,
자기가 국가대표선수도 아닌데 왜 태극기를 달아요.
함께 다니는 대원들에게
‘제발 폼 잡지 말라’는
말을 많이 했지요.
그리고 등산이 끝나면 ‘깨끗하게 다녀라.
바로 면도하고 머리도 깎아라’라고 말해요.
산은 산이니까 그렇다 치고, 왜 여기 와서
표시를 내느냐는 겁니다. 저는 다른 산악인들처럼
여럿이 어울리는 술자리에는 오래 있지 못해요. 그게
한국적 사회생활에서는 문제가 됐는지 모르죠.”
―등반으로 인해
가족 부양이 어렵다면
등반을 안 했을 건가요?
“안 하죠. 가족이 제일 중요하죠.
가족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하면서
등반을 계속 해서 뭐해요. 그런 친구들이
사회에서 성공하나요? 성공 못하지. 저는
등산보다는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등산이 더 좋다면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사는 길밖에 없죠.”
― 산악계에서는 당신이 순수한 등반 행위를
비즈니스로 훼손시켰다는 비판을 하더군요.
“아니, 저는 등반하면서 비즈니스를 한 게 없는데
무엇을 훼손했다는 것이죠? 이윤이 남아야지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원정대를 꾸리면 기업체로부터 후원을 받죠?
“스폰서를 받죠. 하지만 거의 남는 게 없어요.
제 기준으로 봤을 때는 그래요. 원정비용보다
모자라거나 다 쓰지. 내가 등반과 탐험을 하면서
집에서 가져다 쓴 돈이 1억 원이 넘을 거예요.”
―그렇다면 왜 먹고 사는 행위로 등반을 택했지요?
“등반을 통해서 나오는 소산물들이 있으니까.
그걸로 기업체 등에 초청강연을 다니는 거죠.
한 달에 한 15번 내지 20번쯤 되지요. 그 강연료
수입으로 먹고 살고 사무실을 운영하고 세금을 내죠.”
―후배 산악인들은 그런 것을 잘 못하죠?
“모르겠어요. 잘하는지 못하는지. 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제 등반·탐험 자료들을 모두 모았어요.
그건 한국등반사의 기록이지요. 내가 썼던 등반장비,
2만 컷에 이르는 슬라이드 사진을 다 가지고 있어요.
전문 탐험가나 산악인이라면
자신의 분야에 대해 공부를
엄청나게 해야 해요.
그런데 후배들은
공부를 안 해요.
내가 보면 답답해요.”
―통상 강연 요청이 오면
강연료를 미리 제시를 합니까?
“그 쪽에서 말해오면,
제가 조정하는 경우가 있어요.
액수는 자존심과도 관계된 문제이니까요.”
―강연에서 등반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합니까.
혹시 “등반은 무상(無償: 보상 없는) 행위”
라는 식으로 말합니까?
“등반은 무상의 행위라는 것이나,
탐험 등반했던 당시의 목표와
정신력에 관해 주로 이야기를 하죠.”
―실제 무상의 행위로 보는가요?
“젊은 대원들은 순수한 등반이 많고요.
원정대에 그냥 따라오니까. 그러나 원정대장은
스폰서를 구해서 전체적으로 운영해야 하니까 약간 틀리죠.
그럼에도 크게 보면 등반 자체는 무상 행위이죠.
고생하고 대가가 없잖아요. 밥벌이와는 전혀 상관 없어요.
손해를 보면 손해를 봤지,
등반에서 남는 돈은 하나도 없어요.
있다면 명성밖에 없어요.”
―등반에서 무엇을 추구합니까?
“명성이죠. 유명해지는 것이었죠.
물론 처음에는 명성보다는, 히말라야를 안 가봤으니까
높은 산을 올라가봐야겠다는 호기심으로 시작했지요.
다행히 내 체력과 맞아서 정상을 밟게 됐지요.
그래서 이름이 나니까, 또 다른 도전을 하고
더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이죠.
명성을 얻지 못하면 스폰서가 안 붙죠.”
―세상에서의 명성도 중요하지만
주변사람들의 인정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글쎄, 내 스스로는 그렇게 잘못한게 없다고 봐요.
누구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으니까. 후배들이 내게 대접을
소홀히 하고 인사를 안 한다고 크게 상처를 받을 게 없어요.
그냥 그렇게 받아들여요. 나는 상관 안 해요.”
그의 등반 인생에서 결정적 시점은
1999년 한국산악회 원정대장을 맡아
에베레스트의 북벽 루트로 갔을 때다.
그 원정대는 고난도 벽(壁)
앞에서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문제는 결산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가 원정비용의 일부를 빼돌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의 진상은 가려지지 않았지만, 분명했던 것은
이로 인해 산악계에서 그의 ‘자리’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전체 예산에서 지출경비가 4000만원쯤 오버.
모두 영수증이 있고 수 차례 점검을 했어요.
어쨌든 이것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어요.
산악회도 책임을 안 졌어요.
원정대원들이 등반 경비를 부담하기로
서약하고도 안 낸 것도 있었고.
그런데 내게 책임지라는 것이었죠.
나는 ‘한국산악회’ 이름으로
대장을 맡아서 갔을 뿐인데.
그런 시비가 2년을 끌었어요.
그러니 말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결국 내가 아파트 팔아서 다 갚아주고,
한국산악회에 나를 제명시켜 달라고 했어요.
산악회 회원, 이 따위는 싫다 이거예요.”
―그 뒤로 산악 행사나
모임에는 전혀 안 나타냈죠?
“사람들이 싫으니까 안 하죠.
산악계에 있어야 등산하는 것도 아니고.
그 뒤로 나는 나대로 산에 가고 탐험하고 했지요.
혼자 돼도 열심히 내가 스폰서 찾아서 등반하면 되니까.
난 남들에게 준 것도 없지만 피해준 것도 없어요.”
하지만 홀로된 그 심사가 늘 평정을 유지할 수는 없다.
이번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국내 지인에게 전화해
“한국 원정대가 4팀이나 와 있고, 박영석 원정대도 있지만
내게 얼굴 한번 안 비친다”고 쓸쓸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산악계 선배로서의 어떤 책무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선배로서 해줄게 없는데.
내가 능력이 안 되어서 해줄게
없는데 무슨 책임을 져요.
능력이 안 되는데 폼 잡으면 뭐해요.
사회에서 도태가 될 뿐이죠.”
―세상을 혼자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오. 혼자 안 살죠.
그러나 나는 산악계 말고도
또 다른 모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결혼할 때 처가에서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산 타는 것으로써 충분히
가족을 먹여 살릴
자신이 있었나요?
“그 때는 직장(시멘트 회사)을 갖고 있었어요.
먹고 사는 것은 보장을 해 놓고 산에 다녔던 것이죠.
대부분 젊은 산악인들은 거의 무위도식 하는데 그것과 틀려요.
세상에는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산을 탄답시고 무위도식한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안타까워요.”
―죽을 고비를 많이 맛봤죠?
“1982년 마칼루봉 원정 때는
정상에서 추락해서 죽을 뻔했고,
83년 마나슬루봉 가을 등반에서는
눈사태에 묻혀 셰르파들 구조로 살아났고,
87년 에베레스트 원정 때는 내려오면서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진 틈)에 빠진 적도 있었지요.
거기서 죽을 수도 있었지요. 그런 사고를 겪으면
이제 그만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죠.
그런데 그게, 세상으로 돌아오면
또 산에 가고 싶어지니까.”
―올 초에는 초경량 항공기로 국토 1100km를
종단하겠다고 나서, 완도 앞바다에서 떨어졌지요?
“예. 빠졌죠. 한 1억 원짜리 비행기를 날렸지요.
바다에 빠져도 사나흘 생존할 준비를 다 했어요.
세상 사람들이 봤을 때는 ‘바다에서 어떻게 살까’
그랬지만, 저는 사고 대비 준비를 다 해갔던 셈이지요.
모험이란 늘 준비된 모험이지요.
제게는 비행기가 한 대 더 있어요.
다음달 초 다시 도전 할거예요.”
―지금까지 가장 힘든 원정은 어떤 것이었지요?
“북극 원정이 제일 힘들었어요.
나는 그것을 1995년에 이미 했잖아요.
10년 전에 내가 한걸 그 다음에 박영석이가 했지요.
박영석이가 그걸로 매스컴에 크게 나는 걸 보면서,
‘나보다 더 큰 도전을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명성을 얻으려면 늘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지요?
“저는 늘 그렇게 해왔어요.
그래야 스폰서를 끌어 들일 수 있는 거죠.
위험 강도가 계속 높아져야죠. 하지만
자기가 죽으면 모험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수위를 자신의
나이 수준에 적절하게 맞춰야죠.”
―부인은
이런 남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안 좋게 생각하죠.
고산등반 같은 것은
이제 그만하라고 하죠.”
―그럴 때 뭐라고 답합니까?
“대답 안 하죠. 가만히 있죠.
저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닙니다.”
―말은 안하고 그냥 실행에 옮깁니까?
“그렇죠. 등반 준비는 사무실에서 하니까 아내는 모르죠.
나중에 출발할 때쯤 통보를 합니다. 고산등반들을 미리 상의하면
아내에게 무슨 도움이 돼요? 불안하게 만들뿐이죠.”
―등반이나 모험의 극한 상황에서
그만 포기하고 싶다는
유혹이 들지 않습니까?
“그 과정이 몹시 고통스럽고 지루하죠. 하지만
목표가 세워져 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는 않죠.
어떻게든지 버틸 때까지 버텨보는 것이지요.
현실적으로 원정은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원정을 실패하면 다시 기회를 잡기가 어렵죠.
더욱이 두 번 세 번 실패하고 나면
스폰서를 구하기가 힘들어지죠.
늘 스폰서에 대한 그런 강박관념이 있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까?
“아주 좋다고 생각해요. 정말 행운이죠.
이번 에베레스트에서도 올라가다가
눈사태가 나서 추락했거든요.
그 전날 발목이 빠질 정도로 눈이 왔어요.
경사가 있고 로프가 직선으로 걸렸어요.
고정로프니까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죠.
딱 잡고 올라가는데 눈이 확 쏠리면서
몸이 20m쯤 날라갔죠.”
―죽음이 앞으로도 이처럼
피해갈 것이라고 봅니까?
“모르죠. 늘 피해갈 지….
이번 등반을 하는 동안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박영석 원정대의 오희준·이현조를 멀리서 봤어요.
벽에 붙은걸 보고 600mm 줌 카메라로 사진찍어 놨어요.
그리고 나서 이틀 만에 이 친구들이 사고로 숨졌지요. 운명이지요.
나도 혹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이게 내 운명이구나 그래야 겠죠.”
―그런 치명적인 사고를 직접 겪게 되면
겁이 나 울음이 터지지 않습니까?
“울었죠. 엉엉 울었죠.
1987년 추락했을 때 엉엉 울었지요.
또 하늘을 쳐다보고 운 적 많아요.
몸이 말을 안 들어서 엉엉 운 적이 많아요.
등반을 할 때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잘 알아야 해요.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체력 손실이 많으니까,
자신이 판단을 잘 해야 살아서 돌아오죠.
그런 판단은 경험에서 나오죠.
모험이란 준비되고 계산된 것들이에요.
계산을 못하면 안 되죠.
올라가다가 체력이 안 되면 내려와야 해요.
그 욕심을 못 이기면 안 돼요.
자꾸 무리해서 가다가 탈진상태가 되면
결국 전체 원정대에 피해를 주게 되죠.”
―그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까?
“버릴 수 있죠.
그것을 못 버리면 안 되죠.
나도 몇 번씩 정상 바로 밑에서
그냥 돌아온 적이 많은데요.”
―그러면 후회가 안됩니까?
“베이스캠프 텐트로 돌아와서 엄청 후회하죠.
‘죽더라도 갔어야 했는데’ 하면서 땅을 칩니다.”
―그런 후회의 경험이 있으면
다시 그런 상황을 맞게 될 때,
‘내가 돌아가서 후회할 짓을 하지 말자’ 며
끝까지 올라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 미리 준비를 더 하는 거죠.
그런 상황이 발생해 돌아오지 않게끔 말이죠.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위험과 불확실성을
가능한 한 꼼꼼하게 계산하고 준비합니다.”
―본인이 살아온 삶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지금까지 세상을 많이
다닌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그게 내 재산이지요.
내일 죽어도 인생의 후회는 없어요.”
그러면서 “사실 아직도 몇 군데 더 가야
할 곳이 남아있기는 한데…”라고 덧붙였다.
그의 답변은 처음보다 훨씬 더 길어져 있었다.
나는 이 세속화된 듯한 산악인과 작별을 하면서,
내가 어울렸던 순정(純情)의 산악인들이 왜 그를
싫어할 수 밖에 없는지를 어렴푸이 알게 되었지만
그들이 그를 싫어함이 또한 얼마나 막연한 감정에
사로잡힌 것인지는 그를 통해 나는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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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21일 한국산악회에서 제명한.,허영호.
한국산악회 38명 이사 중 30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진
제4차 정기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그를 제명처분한 것.
1999년 8월 한국산악회 에베레스트 동벽 원정대 대장으로서
원정대 경비 정산, 공동장비 반납 등 사후 업무처리에 불성실.
1945년 한국산악회 창립 이래 56년 사상 제명 처분 사례는 3건.
그는 한국산악회 이사였고 유명 산악인이지만
그간 수차례 등반경비 문제로 구설수에 오른 것.
한국산악회에 따르면, 1999년 에베레스트 동벽 원정시
원정대(대원 16명)에게 총 2억4,500만 원의 경비를 마련.
당시 1인당 천만원이면 거봉 원정이 가능하므로 자금이 넉넉.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비가 모자라다며
국내 장비업체들로부터 3천만원 가량 장비를
한국산악회에 통보도 하지않고 가져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장비업체들이 한국산악회에 미지불금을 청구.
한편 등반 도중 일어난 조난사고 구조에 대해 중국등산협회가
35,000달러 구조비를 요청하자 한국산악회는 그에게 소명을 요구.
한국산악회 관계자 측의 주장은 “그가 몇 차례에 걸친
소명 요구를 번번히 거절, 혹은 회피해 결국 제명이란
극한처분까지 받게 된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던 것.
그래서, 한국산악회 원로이사들이 특히 격노한 것.
그의 제명안은 이미 지난 4월26일 상정, 심의된 것.
그러나 일부 이사들이 소명 기회를 주자고 제안하여,
5월15일 회원관리위원회에 출석하란 통고서를 보냈으나
그는 해외등반을 이유로 한 달 연기해달라고 회신했던 것.
그러나, 5월15일에 그는 해외등반을 나가지도 않았고,
6월15일 회원관리위원회에도 참석 않고 위임장도 없이
후배에게 해명자료를 들려보내 이사들을 격분케 했단다.
한국산악회는 그에 대해 제명처분으로 그치지 않고,
허위보고, 업무상 배임 등 법적조치까지도 취할 예정.
“아직 구체적 방안은 잡히지 않았으며, 부인키 어려운
여러 물적 증거들을 갖고 있다.” - 한국산악회 관계자 -.
한편, 허영호씨는 장비업체들이
공동으로 미지불금에 대한 청구소송
그래서, 상당 부분 갚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산악회와 결별.
1999년 함께 원정을 떠났던 후배들과도 불화.
국내 산악인들로부터 소외되는., 계기가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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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생애 첫원정에 나섰던 스물아홉살 청년.,허영호.
히말라야 마카루봉..‘살아있다는게 이토록 황홀한 거구나.’
1987년 세계 등반사상 세번째로 겨울철에 에베레스트 등정.
또한 ‘악마의 정상’ 마나슬루를 무산소로 등정.
1987년 - "대체 이러한 등산을
해 내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능력이란 무한해요.
하지만 정신력과 체력 중에 하나만
무너져도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지요.
등반과 탐험은 정신력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체력이라고 봅니다.” - 허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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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산악인., 허영호(許永浩, 1954. 4. 16 충북 제천시 ~)
1973년 제천고등학교, 1989년 청주대학교 체육학과를 거쳐
1994년 고려대학교 자연자원대학원을 졸업한 탐험가이다.
1982년 5월 히말라야 마카루 등정을 시작으로
북극점, 남극점,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등정 등
2007년 히말라야 동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
세계 7대륙 최고봉 완등과 남북극점 정복,
북극횡단, 에베레스트 등정은 5회를 기록.
1977년 고상돈이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후,
1987년 허영호가 대한민국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드림앤어드벤처를 설립하고
초경량 비행기 조종에 관심을 갖고
세계일주 도전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2007년 1월 1일 경기도 여주에서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까지
왕복 1100km 단독비행에 나섰으나 전남 청산도 해상에서 추락.
2008. 4. 18에 같은 코스로 재도전하여 1년 4개월 만에 성공한 것.
2008.4.23
1982년 - 히말라야 마카루
1983년 - 히말라야 마나슬루
1987년 -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대한민국 산악인 최초 겨울철 등반 성공)
1989년 - 히말라야 로체
1989년, 1990년과 1991년 연속 북극자점 도전.
1991년 그의 탐험대는 북극점 도보 탐험에 성공.
그는 북극점을 지척에서 화상을 입어 북극점 실패.
1994년 남극점과 1995년 북극대륙 도보횡단 성공.
1991년 - 북극점 원정
1992년 - 안데스 아콩카구아 - 남아메리카
1992년 - 맥킨리 - 북아메리카
1992년 - 킬리만자로 - 아프리카
1993년 - 초모랑마 - 중국
1993년 - 남극점 원정
1994년 - 칼스텐즈
1995년 - 북극해 횡단 (북극점 경유)
1995년 - 코카서스 엘브르즈 - 러시아
1995년 - 빈슨 매시프 - 남극대륙
1995년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 정상(5,140m) 등정.
3극점과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른 인류 최초의 탐험가.
1995.12.12 남극대륙 최고봉 등정후 청와대에 초청받았다.
아래는 그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허영호 산악인을 격려하는 사진.
1996년 - 맥킨리
1996년 - 남극점 원정
1997년 - 초오유 - 티베트
1998년 - 킬리만자로, 케냐산
1998년 - 코카서스 엘브르즈
1999년 - 침보라조, 코토팍시 - 에콰도르
2000년 - 코지우스코
2001년 - 클류체프스키야 - 러시아 캄차카반도
2002년 - 에베레스트 뷰포인트 트래킹
2003년 - 몽블랑
2005년 - 킬리만자로
2007년 -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
......수상.......
1996년 청룡장.
1991년 맹호장
1998년 거상장
1982년 체육훈련 기린장.
.................................
우리나라 탐험가로는 .,허영호(63)와
한국인 최초로 북극점 정복과 세계 최초
사하라사막 도보횡단에 성공한 최종렬(59).
"탐험가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실패를 두려워 않는 용기가 필요." -허영호 -
1954년 충북제천에서 태어나
고려대 자연자원대학원을 졸업.
1982년 6월 히말라야 마칼루 등반을 시작으로
1983년 히말라야 마나슬루 단독등반에 성공한다.
1987년 12월 22일에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정.
1992년 남미 아콩카과, 북미 매킨리,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1994년 오세아니아 칼스텐즈. 1995년 유럽 엘브루즈 등정.
1994년 남극점, 1995년 북극점 도보탐험에도 성공을 한다.
7대륙 최고봉과 남북극점 도보탐험에 성공하며
어드벤처 그랜드슬램 달성한 인류 최초의 탐험가.
산을 무서워하던 소년이 에베레스트만 5차례 등정.
산악인으로 50여년의 세월을 살아온 허영호 대장.
중학생 때 산이 무서워 혼자 오를 수 없었다고 토로.
7대륙 최고봉과
남극점 북극점에 도달.
세계 최초의 인류로 기록
- 영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그가 20여 년 이상 정열을 바쳐 매진해온
탐험 역정의 결정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등반과 탐험을 위해 해외원정을 계속 나가야 했던 그는
가족의 원성에 자녀들과 동행하면서 세계 곳곳의 다녔다.
혹한과 역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50년 동안 쉬지 않고 도전.
허영호 대장의 또 다른 도전은 바로 경비행기 조종이다.
진도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영공 동·서·남쪽 끝을 10시간에 1800㎞ 단독 비행.
.
그리고 그가 다시 준비하는 새로운 도전은
경비행기로 63세 나이에 세계일주를 하는 것.
.........................
.........................
2007.1.1. 네. 여기는 서울 목동 스튜디오.
오늘(1일) 들어온 국내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국내 최초로 국토종단 비행에 나섰던 탐험가 허영호.
하마터면 큰 사고를 당할 뻔 했습니다.
타고 있던 초경량 항공기의 엔진이 꺼지면서
바다로 떨어졌는데 큰 부상없이 구조됐습니다.
광주방송, 천명범 기자가 보도합니다.
초경량 항공기를 몰고 국토종단 허영호 씨가
해경 경비정을 타고 전남 완도항으로 들어옵니다.
허 씨의 항공기는 오늘 낮 12시 10분쯤,
전남 완도군 청산도 부근 상공을 날던 중
엔진이 꺼지면서 해상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엔진의 동력 없이 비행하는
글라이딩 비행을 통해 바다에 미끄러지듯
내려 앉아 아무데도 다친 곳은 없었습니다.
해상에 불시착 직후 3천t급 가스운반선 구조.
"엔진에 이상이 생겨 기체가 흔들리기 시작해
방향이 잘 안잡혀서, 엔진에 이상이 있는줄 알고,
주변에 큰 배가 있어서 좌측에 내려 10분 만에 구조."
허씨의 항공기는 허 가 구조된 뒤 바다로 침몰.
1일 경기도 여주에서 초경량 항공기를 타고 이륙해
제주도까지 왕복 1천 1백km 단독비행 도전에는 실패.
허씨는 당시 도전에 실패
재도전의 의지를 밝혔었다.
.............................
.............................
2010 5월 17일 에베레스트 정상에 아들과 함께 올라
2010년 1월 5일에 숨진 부인을 추모한.,허영호 산악인.
2016.05.16 에베레스트 정상 .,허영호 산악인(63세)
산악인 허영호 대장(63)이 이끄는 아리랑원정대가
노스케이프가 지원한 의류를 입고 히말라야의 최고봉
에베레스트 최정상에 깃발을 꽂았다고 19일에 발표했다.
이로써 그는 에베레스트 5번째 등정.
국내 최다 에베레스트 등정기록 수립.
허영호 대장의 아리랑원정대는 노스케이프가 지원한
다운, 방수자켓, 플리스자켓, 바지, 티셔츠 등을 착용.
이번 노스케이프에서 지원한 장비와 의류는 악천후에서도
인간의 신체를 보호하고 활동성을 보장해주는 제품들로 구성.
특히 영하 40도에 이르는 극한 환경에서 기능성에 초점을 맞췄다.
지난달 4일 원정을 떠난지 43일 만인
16일 오전 6시(현지시간) 최정상에 도착.
그는 이번 등정 동안에 전과정을 직접 촬영했다.
가상현실(VR) 카메라로 등반 전과정 촬영에 성공.
이번 촬영을 통해 담은 영상을 통해
에베레스트에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도
직접 다녀온 것과 같은 간접 체험이 가능.
2016.5.19
영하 40도를 밑도는 날씨와 눈보라와 강풍
악천후에서 에베레스트 등반 전과정을 담았다.
1987년 동계 에베레스트를 등정
1993년 티베트에서 네팔 쪽으로
무산소 횡단 등정에 성공을 했다.
심지어 2007년에는 혼자서 정상에 섰으며,
2010년에는 아들 재석씨와 부자 동반 등정.
이 모두 국내 최초의 기록이며,
이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도전을
그동안 쉼 없이 해왔던 탐험가 허영호 대장.
"도전은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할 때 의미가 있는 것"
"국민들에게 도전정신의 중요성을 전달하고 싶었다".
.
"많은 사람이 에베레스트에 가보고 싶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실감 나는 VR 영상을 찍어와
그런 아쉬움을 달래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허영호.
에베레스트 등정후에도 360도 카메라를 놓지 않는 그.
지금껏 출시되지 않았던 삼성전자[005930] '기어 360'
2017년 9월 유럽 최고봉 알프스 등정 때도 가져갈 계획.
VR을 도전과 모험의 '동반자'로 받아들인.,그.
산에서 숱한 역사를 남긴 그의 마지막 목표는
경비행기를 직접 몰아 세계를 일주하는 것이다.
이미 서울-제주, 서울-독도 구간을 수차례 성공.
"청소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기 위해
경비행기로 북극점, 남극점에 착륙하고,
에베레스트 상공을 나는 세계 일주에 도전."
"360도 카메라로 세게일주
비행 여정을 전하려고 한다".
- 탐험가 허영호 -
첫댓글 일찌기 산악인 허용호에 대한 일화는 많이 알려져 잘 알고 있드라구요..
요즘은 국내산 팀방대장으로 TV에 자주 나오더군요...
그런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평은 그리 좋지않은듯한데..왜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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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잘나갈땐 그의 명성이 단점을 덮었죠.
2002년 한국산악회에서 간판스타 그를 제명처분.
2011년 실버원정대 김성봉 대장이 그때 총대 멘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등반' 중 지나칠때.,외면.
그때 국내 산악회 4팀이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함께 있어.,후배들 언론도 혹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