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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長白山)의 만년설(萬年雪), 그리고 사막지대(沙漠地帶) [제2편]
장백산(長白山)과 백두산(白頭山), 두 봉(峰)이 있다.
2023년 03월 02일
○ [제1편] 에서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계속(繼續) 연결(連結)되는 내용(內容)이다.
※ 벨루하산[4506m, 4440m의 두 봉(峰)이 있다.] [사진 출처 : 위키백과]
※ 벨루하산 [사진 출처 : 위키백과]
※ 백두산[2,770m]과 천지(天池) [出處 : 위키백과]
(17) 농암집(農巖集)【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2권 시(詩) : 김 종성(金鐘城) 수오(粹五) 에 대한 만사 [34세 때인 1684년(숙종10)에 종성 부사(鐘城府使) 재임 중에 죽은 김수오(金粹五)를 애도하여 지은 시(詩)로, 김수오(金粹五)는 자는 자순(子純),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김현(金琄)의 아들이며 작자보다 32년 연상이다. 출처: 고전번역원DB 解題]
《愁州北望大荒隈, 長白山高雪不開 : 수주(愁州)에서 북(北)쪽으로 대황(大荒)을 바라보면, 아스라이 장백산(長白山) 만년설(萬年雪)이 덮인 곳, 聖主恩分竹符去, 邊民哭送柳車迴 : 우리 임금 대 부절 갈라주어 보냈더니, 변방 백성 통곡하며 상여를 보내왔네.》하였다.
또한 〈시(詩) 경성(鏡城)〉 : 《障塞迢迢地一隅, 磧沙西北是長楡 : 머나먼 땅 변방의 험한 요새 한 구석[경성]이여, 적사(磧沙: 沙漠) 서북(西北)쪽엔 느릅나무 성한데 白山古雪兼冬夏, 靑海愁雲接曉晡 : 백산(白山 : 長白山)의 만년설(萬年雪)은 동하(冬夏)에도 변함없고, 청해(靑海)의 짙은 구름 조석(朝夕)으로 이어지네》하였다.
또 말하기를 : 〈시(詩) 종성(鐘城)의 객사에서〉 : 《愁州城外野茫茫, 磧草連天落日黃 : 수주성(愁州城) 밖 아스라이 들판이 펼쳐진 곳, 하늘 닿은 사막(沙漠) 초원(草原) 석양 아래 누렇구나. 客路已臨胡地盡, 鄕心直共暮雲長 : 나그네 길 어느덧 오랑캐 땅(胡地) 닿고 보니, 이내 향수 어느새 구름 따라 깊어지네》하였다.
➊ ‘수주(愁州)’는 ‘종성(鍾城)’의 옛 이름이다. ‘만년설(萬年雪)’은 곧 ‘빙하(氷河)다.’ “높은 산(山)에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눈이 엉키어 얼어붙어 큰 덩어리가 된 것이 그 위에 쌓이는 눈의 누르는 힘이 더해짐에 따라 큰 얼음덩이로 변(變)하여 낮은 곳을 향(向)하여 흘러내리는 현상(現象)”을 일컫는 말이다.
➋ 한반도(韓半島)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 정상(頂上)에는 빙하(氷河)가 없고, 또한 있을 수 없다. 더불어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의 요새(要塞)의 땅을 이야기하면서 존재(存在)하지도 않는 ‘적사지대(磧沙地帶)=사막지대(沙漠地帶)의 서북방(西北方)’ 이야기가 필요(必要)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존재(存在)하지도 않는 만년설(萬年雪)을 강조(强調)할 하등(何等)의 이유(理由)도 없다.
특히 《‘적사(磧沙) 서북(西北)’쪽에는 느릅나무 성한데(磧沙西北是長楡)》라는 곳은 어디를 지칭(指稱)하는 말일까?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고비사막[Gobi 沙漠] 서북(西北)’쪽은, 곧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최(最) 북단(北端) 〈금산(金山)=알타이산(Altay,山)=아이태산(阿爾泰山)=별노합산(別盧哈山)=벨루하산(Belukha,Mt)〉이 있는 곳으로 “만년설의 빙하(氷河)가 억겁(億劫)으로 쌓여 있는 곳이다.”
(18) 東史綱目 附錄 상(上) / 하 [잡설(雜說)] 조선(朝鮮) 명호(名號) : 《“동방(東方)은 곧 백두산(白頭山)의 기슭이고 백두산(白頭山)은, 선비산(鮮卑山)으로부터 뻗어내렸으니 그 근본(根本)은 곤륜(崑崙)의 별지(別支)이다.》라고 하였는데,
➊ “백두산(白頭山)의 기슭이 곧 동방(東方)”이라고 하였다. 이런 대목을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로 비정(批正)한다면 : “동방(東方)”의 땅은, “동해(東海)와 열도(列島)와 태평양(太平洋) 바다를 말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해설(解說)은 정말 ‘머저리 중의 머저리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이 된다.’
항상(恒常) 언급(言及)하는 것이지만 : “동방(東方)이 있으면 서방(西方)이 존재(存在)하고, 북방(北方)이 있으면 남방(南方) 또한 존재(存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世上)의 이치(理致)다.”
그렇다면 “동방과 서방(西方)은 어디를 기준(基準)하여 말하는 것일까?”
➀ 아세아(亞細亞)와 구라파(歐羅巴)를 나누는 경계(境界)는 우랄산맥[Ural, 山脈)이다.
➁ “총령(葱嶺)=곤륜(崑崙)=천주(天柱)”라는 곳이 중심(中心)이며, 그 가운데 땅을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라고 부르며, 그 서(西)쪽 땅을 서방(西方), 그 동(東)쪽 땅을 동방(東方)이라고 불렀다.
이곳【총령(葱嶺) = 곤륜(崑崙)과 또는 우랄산맥[Ural, 山脈】을 기준(基準)으로 삼아 : 즉(卽) ➀ 또는 ➁를 기준(基準)한다는 것은 역사상식(歷史常識)이요, 지리상식(地理常識)이요, 일반상식(一般常識)에 속하는 문제(問題)다.
물론(勿論), 이러한 상식(常識)이 통하지 않는 집단(集團)이 있긴 있다. 바로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이다. 한반도(韓半島)가 “동방(東方)”이라면 그 서(西)쪽의 중국(中國) 땅은 서방(西方)으로 “서융(西戎), 서이(西夷)”의 되놈(胡)들이 사는 곳이다. 무슨 얼어 죽을 중국(中國)이요, 화하(華夏)요, 한족(漢族)일까?
➋ “백두산(白頭山)은 선비산(鮮卑山)으로부터 뻗어내렸다.”고 하였다. 도대체 선비산(鮮卑山)은 어디에 있는 어떤 산(山)을 지칭(指稱)하고 있는 건가? 누구도 이런 질문(質問)에 답할 능력(能力)이 없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비산(鮮卑山)”이란 흉노(匈奴)의 공격(攻擊)으로 흥성(興盛)하던 한 종족(種族)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져 분산(分散)되었는데, 그중의 한 부족(部族)들이 선비산(鮮卑山)으로 들어가 보존(保存)하여, 그 종족(種族)의 이름도 “선비(鮮卑)”가 된 것이다. 어떤 산(山)인가?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이게 밝혀지면 조선사(朝鮮史)를 다시 찾을 수 있을 정도(程度)로 중대(重大)한 산명(山名)이었기 때문에 모조리 지워버린 것이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徹底)하게 없애버렸다.
‘선비산(鮮卑山)’을 혹시(或是)나 하고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에서 검색(檢索)을 해보니…“大鮮卑山,傳說中的鮮卑起源地,其地點不詳”…이라고 하였지만, 그 산(山)을 찾을 수 있는 단서(端緖)는 있다.
➌ 즉 “선비리아(鮮卑利亞)”인데, 이곳은 “서백리아(西伯利亞)”로 오늘날의 “서시베리아(西 Siberia)”를 말하는 것인데, 이곳의 별명(別名: 작호(綽號))이 ‘선비리아(鮮卑利亞)’라고 하였다. 【西伯利亞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綽號:鮮卑利亞. 西伯利亞(俄語:Сибирь,羅馬化:Sibir),又稱鮮卑利亞,是烏拉山脈以東廣大地區之總稱.】
“선비(鮮卑)”라는 이름이 왜 그곳 땅에 기록(記錄)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당연(當然)한 것이다. 이곳은 “우랄산맥[Ural 山脈)=오랍산맥(烏拉山脈)”의 ‘동(東)쪽 저지대(低地帶)’를 말하는 것으로, “선비산(鮮卑山)은, 우랄산(Ural Mt)=오랍산(烏拉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➍ “오랍산(烏拉山)”은, 우랄산맥(Ural, 山脈 : 길이 2,000km)의 최고봉(最高峰)은 “나로드나야산(納羅達峰: 1,894m)=오랍산(烏拉山)”을 말하는 것이며,
우랄산맥【Ural,山脈: 길이 남북(南北) 2,000km】은 “서양(西洋)=서방(西方)”과 “동양(東洋)=동방(東方)”을 가르는 기준(基準)이 된다. ‘중국위키백과’ 역시(亦是) 똑같은 내용(內容)으로 되어있다. 속일 수 없다는 뜻이다.【烏拉山脈和烏拉河是亞洲和歐洲的分界線】
➎ “백두산(白頭山) 기슭 동방(東方)”이라는 말은, 곧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을 분계(分界) 하는 주변(周邊)에 백두산(白頭山)이 있어야 “백두산(白頭山) 기슭 동방(東方)”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19) 星湖僿說 2권 / 天地門 五國城 : 《然則冷山亦指白山而云者欤 : 그러면 냉산(冷山)도 백두산을 가리킨 것일지도 모른다. : 불함산(不咸山) : 백두산(白頭山)을 말한다. 성호사설(星湖僿說) 천지문(天地門) 오국성(五國城)〉에 “옛적에 불함산(不咸山)을 백두산(白頭山), 장백산(長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일 년 내내 춥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런 즉 냉산(冷山)도 백두산(白頭山)을 가리킨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하였다.》하였는데,
〈별노합산(別盧哈山)=벨루하산(Belukha,Mt)〉은, 두 개(個)의 봉(峰)을 말하는 것인데, 그 하나는 별노합산【別盧哈山 : 동벨루하봉 : 4,506m】이요, 또 하나의 봉(峰)은 우의봉【友誼峰 : 輝騰山 : 冷山 : 서벨루하봉 : 4,374m】을 말하는 것이다. 그 외(外)에도 규둔봉【奎屯峰 4,082m】등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인 우의봉【友誼峰 : 輝騰山 : 冷山 : 서벨루하봉 : 4,374(4,440)m】을 “냉산(冷山)”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는데 ‘냉산(冷山)이란 이 산(山)의 본디의 뜻이라고 하였다.’
星湖僿說(성호사설)의 저자(著者)가 맥(脈)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 아닐까!
(20)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9권 / 함경도(咸鏡道)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 [山川)] : 安得與君駕尻輪而馳神馬,絶大漠而凌蒼霞,陟白山之絶頂兮?望尹碣以摩挲,臨瀚海而酌蒼波;洗胸中之嵯峨,奏《徵招》而歸來,以獻夫胡越一家之歌。: “어찌하면 그대와 더불어 꽁무니를 수레로 삼아 신마(神馬)를 몰아서 큰 사막을 넘고, 푸른 연하(煙霞)를 헤치며 백두산(白頭山)의 정상에 올라 윤관(尹瓘)의 공적비(功績碑)를 어루만지고, 바다에 임하여 푸른 물결을 잔질하여 가슴 가운데에 불평을 씻고 군신(君臣)이 같이 즐기는 징초(徵招)의 악장(樂章)을 연주하며 돌아와 호월일가(胡越一家)의 가사(歌詞)를 임에게 바쳐볼까.” 하였다.
➤ 〈絶大漠而凌蒼霞,陟白山之絶頂兮?望尹碣以摩挲 : 큰 사막을 넘고, 푸른 연하(煙霞)를 헤치며 백두산(白頭山)의 정상에 올라 윤관(尹瓘)의 공적비(功績碑)를 어루만지고〉하는 구절(句節)을 생각해 보자.
“대막(大漠) 즉(卽) 큰 사막(沙漠)을 건너야 백두산(白頭山)에 오를 수 있다는 뜻이다.” 한반도(韓半島) 또는 그 북방지대(北方地帶) 어느 곳에서든 불가능한 지세(地勢)를 말하고 있다.
즉 한반도(韓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 어디에서든 백두산(白頭山)을 오르기에 아무 문제(問題)가 없다는 뜻이고, 큰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없으니 사막(沙漠)을 건널 수고가 없다는 뜻이다.
즉(卽) 『윤관(尹瓘)의 공적비(功績碑)가 세워져 있는 백두산(白頭山)은, 한반도(韓半島)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이 아니다』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린 의무교육(義務敎育)이라는 빛 좋은 ‘개살구’에 목줄이 매어, 세뇌(洗腦)당하고 사고(思考)할 수 없는 뇌(腦) 세포(細胞)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이다.
(21) 약천연보(藥泉年譜)【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제2권 [연보(年譜)] : 《삼수는 갑산에 비하여 지형이 다소 낮으므로 사람들이 갑산에 들어가서 함께 화피를 채취하는바, 지금 새로 낸 길 북쪽의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 등 여러 산 사이에 있습니다.》하였으니,
➤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의 두 봉우리가 있다”라는 뜻이다.
(22) 학봉일고(鶴峯逸稿)【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제3권 / 북정일록(北征日錄) ○ 기묘년(1579, 선조 12) 10월 20일(임진) :
《맑음. 아침에 남문을 나서서 장령(長嶺)에 올랐다. 고개가 하늘에 닿을 만큼 높았는데, 서쪽으로의 높이는 20여 리이고, 동쪽으로의 높이는 20 리였다. 길은 고개 등성이에 나 있고, 고개 꼭대기에는 원(院)이 있었다. 서쪽으로는 여연(閭延)과 무창(茂昌), 북쪽으로는 백두산(白頭山), 동쪽으로는 장백산(長白山)의 여러 봉우리가 둘러 있어서 모두 시야에 들어왔다. 백두산 남쪽에는 오랑캐 땅의 산이 꾸불꾸불 이어져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면서 천 리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평야로 되어 있어서 바라보아도 산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중략(中略).》
※ 학봉일고(鶴峯逸稿) 3 / 북정일록(北征日錄)[이미지 출처 : 고전번역원db]
➤ 『북(北)쪽에는 백두산(白頭山), 동(東)쪽으로는 장백산(長白山)과 여러 봉우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곧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의 두 봉우리가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백두산(白頭山)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당시(當時) 저자(著者)가 있는 곳에서, 『서(西)쪽으로는 여연(閭延), 무창(茂昌)이고, 북(北)쪽으로는 백두산(白頭山), 동(東)쪽으로는 장백산(長白山)의 여러 봉우리가 모두 시야(視野)에 들어왔다』고 하였으니,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이 별도(別途) 봉우리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저자(著者)가 직접(直接) 본 것을 기록(記錄)으로 남겨 놓은 것인데, “그날이 바로 기묘년(己卯年 : 1579, 선조 12) 10월 20일(임진:壬辰)이다.”
(23) 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 제13권 / 지리고(地理考) 13 산수(山水) 1 경내(境內)의 산(山)과 도서(島嶼) : 백두산(白頭山) : ➊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북쪽 달단(韃靼)의 남쪽 경계에는 큰 산(山)이 있는데, 이름이 백두산(白頭山)이다. ➋ 고려사(高麗史)에는 “광종(光宗) 10년(959)에 압록강 바깥쪽의 여진(女眞)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 살게 하였다.” 하였는데, 백두산이라는 칭호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➌ 소백산(小白山) : 바로 백두산(白頭山)의 남(南)쪽 봉우리로 압록강(鴨綠江)이 발원하는 곳이다
➊ 『조선(朝鮮)의 북(北)쪽 달단(韃靼)의 남(南)쪽 경계(境界)에 있는 대산(大山)이 백두산(白頭山)이다』라는 말은, 한반도(韓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서북방(西北方)의 〈별노합산(別盧哈山)=벨루하산(Belukha,Mt)〉을 말하는 것이다. “이곳의 북(北)쪽 땅이 달단(韃靼)의 영역(領域)이었기 때문이다.”
즉(卽) “선비리아(鮮卑利亞)”를 찾아보면 : 〈‘서백리아(西伯利亞)’라는 이 이름의 명칭은 서백리아(西伯利亞)는 달단어(韃靼語)에서 온 가능성(可能性)인데, 그 의미는 “침수(沉睡 : 잠자는 낮은)의 땅”이다. 서백리아(西伯利亞)는 달단인(韃靼人)들이 이곳에 서백리아(西伯利亞)한국(汗國)을 건립(建立)하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西伯利亞此名稱可能來自西伯利亞韃靼語,意思就是‘沉睡之地’(SibIr)。西伯利亞韃靼人以此為國家名稱建立西伯利亞汗國[出處: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라고 했기 때문이다.
➋ 《고려사(高麗史)에는 “광종(光宗) 10년(959)에 압록강 바깥쪽의 여진(女眞)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 살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게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 이야기로는 웃기는 이야기다.
즉(卽) 압록강(鴨綠江)은, 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한다고 하니, 압록강(鴨綠江) 하면 백두산(白頭山)이다. 헌데, 『압록강(鴨綠江) 바깥(外)쪽의 여진족(女眞族)들을 백두산(白頭山) 밖(外)으로 몰아내었다』는 말은, 『압록강(鴨綠江)은, 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發源)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백두산(白頭山)은, 압록강(鴨綠江) 바깥(外)에 있었다.』는 뜻이다.
➌ 《소백산(小白山) : 바로 백두산(白頭山)의 남(南)쪽 봉우리로 압록강(鴨綠江)이 발원하는 곳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게 맞는 말이다. 즉(卽) 『압록강(鴨綠江)은 백두산(白頭山) 남(南)쪽 또는 동(東)쪽에 있는 장백산(長白山)에서 발원(發源)한다.』는 것이고, 이는 위의 글 ‘➋’의 내용(內容)을 가능(可能)케 해주는 근거(根據)가 된다.
즉(卽), 위의 많은 자료(資料)에서 설명(說明)한 바와 같이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은 두 개(個)의 봉우리였다는 것이다” 곧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의 두 봉(峰)이 있었다는 것이다.
(24) 朝鮮王朝實錄 肅宗 5년 기미(1679) 12월 12일(계유) / 북병사 유비연이 청나라의 차사원이 물어온 지도에 대해 치계하다 : 癸酉/北兵使柳斐然初以淸差指問白頭、長白兩山時, 設地圖, 泛鐵事啓聞矣。 至是又馳啓曰: "所謂地圖, 更問于差使員, 富寧府使崔良弼則以爲, 중략(中略). : 북병사(北兵使) 유비연(柳斐然)이 처음에 청(淸)나라의 차사원(差使員)이 백두산(白頭山)ㆍ장백산(長白山) 두 산의 형세를 물어올 적에 지도(地圖)와 나침판을 내놓은 일을 계문(啓聞)하여 왔었는데, 이때에 와서 또 치계(馳啓)하기를, 중략(中略)》
➤ 역시(亦是) 위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여러 자료(資料)들과 같은 내용(內容)을 말해주고 있다. 즉(卽)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 두 산(山)의 형세(形勢)를 물었다”는 것이다.
(25) 목은시고(牧隱詩藁)【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제17권 / 시(詩) 느낌이 있어 짓다. : 《白頭朝列苦吟詩, 身世悠悠甚矣衰, 長白山前沙漠漠, 大明殿上草離離 : 백발로 조정 반열에서 애써 시를 읊노니, 유유한 이 신세가 심하도다 쇠함이여, 장백산 앞에는 사막이 아득하고요, 대명전(大明殿) 가에는 잡초가 무성하여라.》하였는데,
➤ “장백산(長白山) 전(前)”이라면 “장백산(長白山)의 앞”을 말하는 것으로, 바로 ‘조선(朝鮮) 땅’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러한 “조선(朝鮮) 땅에 사막(沙漠)이 아득하다(漠)”는 말은, 입에 담기조차 민망(憫惘)한 이야기다.
이런 기록(記錄)이 한반도(韓半島)의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한다면 : 함경도(咸境道) 땅과 그 북방지대(北方地帶)는 모두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는 것인 바, 지형지리(地形地理) 측면(側面)에서 봐도 “한반도(韓半島)와 백두산(白頭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초딩들도 알 수 있을 정도다.
(26) 북여요선(北輿要選) 상〈백두산도〉에 대한 고찰〔白頭圖本攷〕: 《望見白山, 西邊岡巒, 雪消露脊, 東邊巷谷, 斑雪頹落。 穿林攀崖, 登臨詳審, 則白頭亥壬爲坐, 巳丙爲前。 俯瞰大澤, 神龍屈伸, 碧浪空打。 甫多會、長白等山低小若一眉。 坎癸方彼地山、寅甲方六鎭山皆入眼中。 백산(白山)을 바라보니 서(西)쪽 산언덕에는 눈이 녹아 산등성이가 드러나 있고, 동(東)쪽의 골짜기는 얼룩덜룩하게 눈더미가 쌓여 있다. 숲을 뚫고 벼랑을 기어 올라가 산 정상에 다다라 자세히 바라보니 백두산(白頭山)은 해임(亥壬 북북서) 방향을 뒤로하고 사병(巳丙 남남동) 방향을 향하여 있다. 대택(大澤)을 굽어보니 신룡이 꿈틀거리는 듯 푸른 물결이 허공을 치고 있다. ‘보다회산(甫多會山), 장백산(長白山)’ 등은 나지막하고 작아 마치 한 조각 눈썹 같다.》고 하였다.
➤ 『백산(白山)인 백두산(白頭山), 장백산(長白山), 보다회산(甫多會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있는데,
〈가장 큰 봉우리는 백산(白山)인 백두산(白頭山)이요, 보다회산(甫多會山)과 장백산(長白山)은, 그보다 나지막하고 작게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27) 新增東國輿地勝覽 50권 /咸鏡道 鏡城都護府 : 《산천(山川) : 白山。在府西一百十里。山勢甚峻,至五月雪始消,七月復有雪,山頂樹木矮小。土人亦謂之長白。: 백산(白山) : 부(府)의 서쪽 1백 10리에 있다. 산세가 매우 험하여 5월이 되어야 눈이 녹으며, 7월이면 다시 눈이 쌓인다. 산꼭대기에는 나무의 키가 낮고 작다. 지방 사람들은 이 산(山)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부른다.》고 하였으니,
➤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 두 산(山)이 있으나 토인(土人)들은 이를 모두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불렀다”는 뜻이다.
(28) 우계집(牛溪集)【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제6권 / 잡저(雜著) 잡기(雜記) : 自註。南望三角山。長白山在旁。東北望白頭山。○ 甲午 : 자주(自註)에 “남쪽으로는 삼각산(三角山)이 바라보이고, 장백산(長白山)이 곁에 있으며, 동북쪽으로는 백두산(白頭山)이 바라보인다.” 하였다. ○ 갑오년(1594, 선조27)
➤ 역시(亦是) 똑같은 내용(內容)이다. 즉(卽)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 두 개(個)의 산(山)이 있다.”는 것이다.
(29) 학봉일고 제3권 / 북정일록(北征日錄) ○ 경진년(1580, 선조 13) 2월 12일(임오)
《그 형세를 살펴보니, 장백산(長白山)이 백두산(白頭山)에서 나와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세 고을에 가로로 뻗치다가 경성의 주을온보(朱乙溫堡) 뒤에 와서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한 줄기는 서북쪽으로 내려오다가 허수라동 입구에 와서 끝나고, 한 줄기는 동북쪽으로 내려오면서 보을하보의 운두성에 와서 끝났다. 차유령은 바로 동쪽 줄기의 중간이 끊어진 곳이었다.》하였으니,
➤ ‘백두산(白頭山)’은 북(北)쪽에 있는 큰 봉우리를 말하는 것이고, ‘장백산(長白山)’은 백두산(白頭山)에서 뻗어 내려온 작은 봉우리였다는 뜻이자, 두 개(個)의 봉우리가 있어,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뜻이다.
(30) 海東繹史 62권 / 本朝의 備禦考 2 : 왜적(倭賊)을 막은 데 대한 시말(始末) 2
《왕명학(王鳴鶴)의 ‘조선(朝鮮)의 형세(形勢)에 대해 논하여 삼공(三公)과 사마(司馬) 석성(石星)에게 보고한 글’을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 “제가 지난번에 조선(朝鮮)에 들어갔을 적에는 조선(朝鮮)의 산천(山川)과 형세(形勢)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함부로 진달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제 자신이 조선의 경내를 두루 둘러보고 겸하여 도첩(圖帖)을 상세히 고찰하고 역관(譯官)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조선(朝鮮)의 크기가 동서(東西)로는 2000 리이고, 남북(南北)으로는 4000 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개 조선(朝鮮) 땅은 정북(正北)쪽에는 장백산(長白山)에서부터 산맥이 내려오므로 북(北)쪽이 가장 깁니다. 부산진은 동남쪽 모퉁이에 치우쳐져 있으면서 대마도(對馬島)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으므로, 일본의 병마(兵馬)가 조선으로 쳐들어오기가 쉽습니다. 전라도(全羅道) 한 도의 경우는 정남(正南)쪽으로 곧장 향하면 중국의 소주(蘇州)ㆍ상주(常州)와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➊ 《조선(朝鮮)의 크기가 동서(東西)로는 2000 리이고, 남북(南北)으로는 4000 리》라고 하였는데, 이는 『명(明)나라 사신(使臣) 왕명학(王鳴鶴)이 직접(直接) 경내(境內)를 두루 살펴보고, 도첩(圖帖)을 상세하게 고찰(考察)하고, 역관(譯官)에게 일일이 자세(仔細)하게 물어보고 난 뒤에 “조선(朝鮮)의 강역(疆域)”에 대해 알 수 있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동서(東西) 2 천리(千里)는 800km, 남북(南北) 4 천리(千里)라면 1,600km 정도(程度)되는 땅』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정도(程度)라면 오늘날 한반도(韓半島) 크기의 약 5-6배(倍) 정도(程度)나 되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할 수 있는 땅이다. 【한반도(韓半島)는, 그 땅이 남북(南北) 약 1,000km, 동서(東西) 약 300km 정도, 면적(面積)은 약 22만㎢이다.】
결국(結局) “옛 조선(朝鮮)의 땅은 한반도(韓半島)가 아니었다.”는 것을 설명(說明)해주고 있는 기록(記錄)이다. 누가 이를 “아니다”라고 부정(否定)할 수 있겠나!
➋ 《전라도(全羅道) 한 도(道)의 경우는 정남(正南) 쪽으로 곧장 향하면 중국의 소주(蘇州)ㆍ상주(常州)와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하였는데,
전라도(全羅道) 땅에서 정남(正南) 쪽은 대해(大海)이며, 곧장 정남(正南) 쪽으로 내려가면 : 타이완(臺灣)과 오키나와(沖繩) 한가운데 대해(大海)에 다다르기 때문에, “중국(中國)의 소주(蘇州)나 상주(常州)와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한반도(韓半島)의 전라도(全羅道)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땅이다.
➌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땅”과 “동서(東西) 2 천리(千里), 남북(南北) 4 천리(千里)의 옛 조선(朝鮮)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것이다.” 이걸 자꾸 “한반도(韓半島)”라는 좁은 땅 안(內)에 모든 것들을 집어넣으려다 보니 뭐가 뭔지 분간(分揀)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지형지세(地形地勢) 또한 마찬가지다. 위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 즉(卽) 역사서(歷史書)에 말하는 백두산(白頭山), 장백산(長白山)과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백두산(白頭山)과는 관계(關係)가 없는 “산(山)의 이름만 같은 전혀 다른 산(山)이다”
(31) 朝鮮王朝實錄 肅宗 17년 신미(1691) 11월 16일(병인) :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여, 진주사의 선래 장계에 대해 논의하다
《丙寅/引見大臣備局諸宰, 出示陳奏使先來狀啓, 詢問彼人假道事許否便宜。 令諸臣各陳方策。 蓋彼人, 托以胡皇命移咨曰: "將遣五使, 自義州由我境行, 往見白頭山, 摸畫而來。 必使我國熟諳地方人, 導其路, 且要及正月前回咨, 或云將作《一統志》, 欲遍審山川形勢, 而其意未可測也。" 使臣亦具別單以聞曰: "在寧遠衛, 聽於道路, 有云內大臣一人, 刑部尙書一人, 翰苑官一人, 侍御史一人, 爲見長白山, 方往寧古塔, 及歸。 當轉向東國, 竝鴨綠江而行, 更審長白山。 胡人或稱白頭山以長白故也。 上意深以爲虞, 反覆諮諏。 而大臣無所建明, 只對以徐待赴燕大臣之歸, 當熟講而更奏云。" :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진주사(陳奏使)의 선래 장계(先來狀啓)를 내어 보이고 저들이 길을 빌겠다는 일에 대하여 허락할 지 그 여부(與否)의 편의(便宜)를 물어 신하들에게 각각 방책을 아뢰게 하였다. 대개 저들이 호황(胡皇)의 명이라 핑계하여 이자(移咨)하기를, ‘장차 다섯 사신(使臣)을 보내어 의주(義州)로부터 우리 지경을 거쳐 백두산(白頭山)에 가보고 그려올 것인데, 반드시 우리나라의 지방을 잘 아는 사람을 시켜 그 길을 인도하게 하여야 한다. 또 정월 이전까지 회자(回咨)하기 바란다.’ 하였기 때문인데, 혹 ‘장차 《일통지(一統志)》를 지을 것이므로 산천의 형세를 두루 살피려는 것’이라고도 하나,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다. 사신도 별단(別單)에 갖추어 적어서 아뢰기를. ‘영원위(寧遠衛)에 있으면서 길에서 들으니, 「내대신(內大臣) 한 사람과 형부 상서(刑部尙書) 한 사람과 한원관(翰苑官) 한 사람과 시어사(侍御史) 한 사람이 장백산(長白山)을 보기 위하여 바야흐로 영고탑(寧古塔)에 갔는데, 돌아올 때에는 동국(東國)으로 향하여 압록강(鴨綠江)을 따라 가서 장백산을 다시 살필 것이다.」 합니다.’ 하였는데, 호인(胡人)은 혹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하기 때문이다. 임금의 생각은 매우 염려스럽게 여겨 반복하여 물었으나, 대신은 건명(建明)하는 것이 없이 다만 대답하기를, ‘연경(燕京)에 간 대신이 돌아오거든 익히 강구하여 다시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한다.
➤ 《胡 人 或 稱 白 頭 山 以 長 白 故 也 : 호인(胡人)은 혹 백두산(白頭山)을 장백산(長白山)이라 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오랑캐(胡) 즉 되놈들은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이 서로 다른 산(山)임에도 혹 백두산(白頭山)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32) 耳溪外集卷十二 / 北塞記畧. 白頭山考 : 通志云。長白山。卽歌爾民商堅阿隣。/
盛京志云。:《長白山。卽歌爾民商堅阿鄰山。歌爾民。長也。商堅。白也。: 성경통지(盛京通志)에서 이르기를 : 장백산(長白山)은 곧 가이민상견아린산(歌爾民商堅阿鄰山)이다. 가이민(歌爾民)은, 길다(長)이고, 상견(商堅)은 희다(白)이다.》라고 하였다.
(33) 修山集卷之十四 / 東國輿地雜記 水經 : 《東方有八大水。一曰鴨綠。二曰遼水。三曰混同。四曰 豆滿。五曰大同。一名浿水。 六曰漢江。七曰白江。一名錦江。又曰白馬。八曰洛東。: 동국여지(東國輿地) 잡기(雜記) 수경(水經) : 동방(東方)에 8개의 큰 물이 있다. 하나는 압록(鴨綠)이요, 둘은 요수(遼水)요, 셋은 혼동(混同)이요, 넷은 두만(豆滿)이요, 다섯은 대동(大同)인데, 일명 패수(浿水)요, 여섯은 한강(漢江)이요, 일곱은 백강(白江)인데, 일명 금강(錦江)이며, 또 백마(白馬)라고 하며, 여덟은 낙동(洛東)이다.》라고 하였다.
(34) 硏經齋全集卷之四十六 / 北邊雜議 白頭山記 : 長白山與白頭並稱長白。中略. : 백두산기(白頭山記) : 장백산(長白山)과 백두산(白頭山)을 나란히 칭하여 장백(長白)이라고 한다.
(35) 硏經齋全集續集册十六 / 東國地理辨 太白山辨 : 《東國甞稱神人降于太白山檀木下。中略. 東國最多太白山之稱。北則白頭山及長白山也。南則順興之太白山也。中略. : 동국지리변(東國地理辨) 태백산변(太白山辨) : 동국(東國)에서 신인(神人)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대백산(大白山) 단목(檀木) 아래에 강림하였다. 중략(中略), 동국(東國)에서는 가장 많게 말하는 것이 태백산(太白山)을 지칭하는데, 북(北)측에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이다. 남(南)측에는 순흥(順興)의 태백산(太白山)이다.》라고 하였다.
○ 여러 옛 문헌(文獻)들을 참고(參考)로 하여 살펴보았지만, ‘한반도(韓半島) 백두산(白頭山)’은, 옛 고전(古典)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백두산(白頭山) 또는 장백산(長白山)”과는 『같은 산(山)일 수 없다는 결론(結論)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의 백두산(白頭山)을 우리들의 영산(靈山), 민족(民族)의 정기(精氣)가 서려 있는, 신령(神靈)스러운 산(山)으로 노래하며, 신성(神聖)시하였고, 그렇게 자리매김 되어 있다. 헌데 그것이 언제부턴가? 이건 근세(近世)에 해당(該當)되는 이야기다.
➨ 옛 기록(記錄)으로 보면 오늘날의 백두산(白頭山)을 민족(民族)의 영기(靈氣)가 서려 있는 산(山)으로 보지 않았으며, 신령(神靈)스러운 산(山)으로도 보지 않았다. 언급(言及)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근세(近世)에 조선왕조(朝鮮王朝)가 강제(强制)로, 어거지로 한반도(韓半島) 땅으로 이동(移動)될 때 함께 따라온 이름만 백두산(白頭山)인 한반도(韓半島)의 산(山)일 뿐이다』라는 것이 조선사(朝鮮史)를 연구(硏究)하는 필자(筆者)의 주장(主張)이다.
➨➨➨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에 대한 ‘결정적(決定的) 연구결과(硏究結果)’는, 현지(現地)를 직접(直接) 답사(踏査)하셨다고 고백(告白)하신, “고(故) 환국고려”님의 노고(勞苦)를 잊을 수 없습니다. 재야(在野)의 큰 손실(損失)이며,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1-2편 / 끝]
2023년 03월 02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다음 게재 예정 주제는 "만세(萬歲) 보령(保寧)"이란 무슨 뜻일까? 그 연유, 전고, 사유등을 살펴보기로 하며,
그 다음에는 "화성"에 있다는 만년제(萬年堤)에 대한 옛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특히 이 만년제에 대해서는 혹자는 만년제(滿年堤)라고도 한다고 주장하고,
혹자는 "방지원도"라고 한다며 엇갈리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참 알수 없는 '사학계'라고 보아집니다.
특히 '만년제'가 있는 화성의 안녕 주변은 우기가 되면 늘 홍수로 몸살을 겪던 곳으로 보아지는데, 이곳에는 당시에 습지가 많았던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화산(花山)은 뭐고, 화산(華山)은 무엇인지?
그 화산은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행태를 보여줍니다. 향토사학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백두산의 화산이 폭발한다면 어찌될까?
천지의 물이 넘처 대홍수가 발생할 것이고, 화산재는 백두산 주변은 당분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할 것이고,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휩쓸고 지나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옵니다. 물론 이것은 예상시나리오이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화산폭발과 한반도는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린 것이다'라는 것에는 모두 똑같이 예측합니다.
그러나 실제 화산폭발이 있을지, 없을지는 누구도 모르는 것이겠죠. 그저 그렇게 추측하고 있을 뿐입니다.
'악몽중의 악몽입니다.'
동서 2000리,
남북 4000리의 땅이라면 한반도의 5-6배 크기 정도가 되니, 인구 역시 3-4억 정도가 될 수 있다. 대국(大國)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됩니다. 대륙에 있었던, 한반도에 있었던 이 정도의 나라가 "조선"이었다면...생각하면 할수록 안타까움뿐입니다.
이 정도의 영토안에서라면 '수백리에 걸친 사막지대'와 '수백리에 걸쳐 있는 담수호도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아집니다.
'한반도 땅'은 바다에 막혀 확장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한정된 땅이다. 그 좁은 땅에서 일만년 가까운 세월을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고 하니, 지명이든 산의 이름이든, 강의 이름이든 "미상(未詳)"이란 말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기 알 수 없는 설명으로 채워져 있다면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다'라는 금세 파악할 수 있다.
'반도사관=식민사관!' 이 자들이 만들고, 편집하여 찍어낸 것들이다.
제 생각과 같은 내용을 인터넷을 따라 들어와 보니, 이미 많은 연구가 있었군요. 좋은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