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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82
2월29일[사순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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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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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3evJ9z-RQtY
[서울대교구 김광두 고스마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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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잘 잡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에 있는 고대 유적지에 가면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부조 조각화 한 점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기괴하고 우스꽝스럽습니다. 그 모습이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한 애매모호한 작품입니다.
그냥 지나치는 관광객들에겐 아무런 의미 없는 작품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큰 감명과 깨달음을 주곤 한답니다.
주인공의 형상은 대충 이렇습니다. 앞머리는 숱이 무성하지만, 뒷머리는 완전 대머리입니다. 발뒤꿈치에는 조그마한 날개가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나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함이요, 길게 늘어뜨린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발견했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나를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요, 내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 나의 이름은 바로 ‘기회’이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외적으로는 행복한 것처럼 비치지만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불행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모를 잘 만났든지, 아니면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났던지,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몇 평생을 쓰고도 남을 재산을 축적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무슨 말이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선을 베풀 좋은 기회를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것입니다. 관대한 나눔을 통해 어려운 이웃도 돕고 또 자신을 위해서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실을 보십시오. 라자로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거지가 자신의 식탁 바로 아래 기어 다니고 있었음에도 그를 외면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소중한 기회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우리 역시 잘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기회는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다시금 새출발 할 기회, 사랑을 실천할 기회, 하느님께서 내뻗으시는 손을 잡을 기회, 구원받을 기회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기회가 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기회는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지나가는 것입니다.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잘 준비한 사람만이 잡을 수 있습니다.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 열정과 지혜를 가진 사람, 사랑과 자비를 지닌 사람만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잘 잡아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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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yx4-IlBL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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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과학적 이유>
부자가 되면 행복할까요? 그렇다면 돈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자살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1조 원 가진 부자가 자살한 예도 있었습니다. 15조 원 가졌다가 미국 리먼 브러더스 사건 때 14조 원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지옥 갔고 라자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부자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았고 거지는 나쁜 것을 받아서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자는 이 세상에서 행복했고, 거지는 불행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지상에서 천국에 갈 것처럼 잘살다가 한순간에 지옥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예는 없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들은 이 지상에서부터 점점 더 행복해졌던 사람이고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조금씩 더 불행해졌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부자가 행복할 것이란 착각 때문에 이 지상에서는 고통받으며 살아야 한다고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가장 행복하셨던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왜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는지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엽총으로 자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부족한 게 없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탄 소설가였고 그 덕분으로 부와 명예,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는 왜 자신이 끊어진 필라멘트와 같다고 말했을까요? 그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마지막으로 쓴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노인이 아주 커다란 물고기를 잡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의 사투 끝에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배에 실을 수 없어서 옆에 밧줄로 매어 자랑스럽게 항구 마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상어 떼가 나타나 그 물고기를 물어뜯습니다. 노인이 노를 가지고 쫓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어 항구로 돌아왔을 때는 생선 머리만 남아있었습니다. 노인은 침대에 푹 쓰러져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헤밍웨이는 엄청난 명예를 얻었지만, 말년에 이전과 같은 작품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얻은 기쁨보다 지금 가진 것을 잃을 고통 때문에 더 큰 무언가를 잡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던 것입니다.
학자들은 얻는 것, 가진 것보다 잃는 것, 그리고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의 고통이 두 배 정도 더 크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도박에 빠지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20달러씩 주고 50% 확률 게임에서 이기면 50달러를 더 딸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도박하지 않습니다. 굳이 공짜로 얻은 20달러를 잃을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50달러를 주었다가 미안하다며 30달러를 빼앗고 배팅을 하려면 하라고 하면 대부분이 다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돈이 50달러였는데 20달러 공짜로 가지게 된 것보다 30달러 잃은 고통이 더 커서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만회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20달러를 공짜로 받고도 자기 것을 조금이라도 잃었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참아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왜 돈을 빌린 사람보다 꾸어준 사람이 더 고통을 당하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왜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거부들은 자기들 재산을 자녀에게 주지 않고 다 기부하겠다고 말할까요? 만약 자녀에게 물려주면 그 돈이 어쨌거나 자기 돈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잃을 두려움에 행복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모든 것에 십일조를 내면 됩니다. 돈과 시간과 재능의 십일조를 내면 어차피 그것이 내 것이 아니므로 잃는 고통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들로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내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하며 산 사람이 거지 라자로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거지였지만, 잃는 두려움 없이 가진 것을 나누며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부자는 자기가 무엇을 가졌다고 여기니 이 세상에서부터 고통의 굴레에 묶여 살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 마음속에 천국과 지옥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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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어원은 이렇습니다. “1347년, 프랑스 칼레시는 영국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만, 더는 원병을 기대할 수 없어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후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는 칼레시의 항복 사절단이 파견됩니다. 그러나 점령자는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그동안의 반항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라며 ‘이 도시의 대표 6명이 교수형을 받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칼레시민들은 혼란에 처했고 누가 처형을 당해야 하는지를 논의했습니다. 모두가 머뭇거리는 상황에서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처형을 자청하였고 이어서 시장, 상인, 법률가 등의 귀족들도 처형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음날 처형을 받기 위해 교수대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임신한 왕비의 간청을 들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죽음을 자초했던 시민 여섯 명의 희생정신에 감복하여 살려주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역사가에 의해 기록되고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노예와 다른 점은 단순히 신분이 다르다는 게 아니라,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습을 종종 보곤 합니다. 본당에 교무금 제도도 없고, 헌금도 그리 많이 내지 않지만, 본당을 위해서 후원하는 부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 그 자녀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후원하는 부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지 제도가 마련되어 있어서 가난 때문에 의료혜택을 못 받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정부에서 의식주에 대해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듣곤 합니다. “미국에서 살려면 아주 잘 살거나, 아주 많이 못살아야 한다.” 중산층은 세금에 대한 의무는 많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혜택은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도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4달 동안 급여를 받지 않고 일하였습니다. 직원들도 몇 년 동안 임금 인상 없이 근무해 주었습니다. 신문사를 떠나면서 후원금을 내고 왔습니다. 제가 5년 동안 뉴욕에서 잘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자리를 마련해 준 신문사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후임 신부님이 신문사를 운영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시니,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에서 벗어난 부유한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곤 합니다.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믿고 종업원들에게 막말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민의 의무인 입대를 피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부당하고 부정한 청탁을 받는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그런 부당하고 부정한 청탁의 결과로 우리 사회에 부정과 부패가 독버섯처럼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수사권과 공소권을 남용해서 이득을 챙기려는 일부 검사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사회적인 약자와 억울한 피해자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는 권력과 정치인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았다면 살아서도 행복했고, 죽어서도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재물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부유할지라도, 가난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은행이라는 곳간에 재물을 쌓듯이, 천국이라는 곳간에도 재물을 쌓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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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6,19-31: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자주색 옷을 입은 부자의 잘못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로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지만 가엾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자기 재산을 모두 버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식상에서 내버리는 빵부스러기라도 그 거지에게 주었어야 했다. 아무 동정도 받지 못한 라자로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으려 했다. 게다가 불치의 병이 그를 괴롭혔다. 개들조차 그의 종기를 핥으며, 그를 해치지 않고 돌보고 있다. 그런데 부자는 개들보다 잔인했다. 라자로를 가엾이 여겨주지도 않았고 무자비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에서의 삶과 영원한 형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선택한 삶에 관한 결과이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25-26절)라고 하신다. 이 구렁은 서로 반대되는 삶을 선택한 데 대한 심판이다.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선택하면 깊고 가늠할 수 없는 구렁을 파고 만다. 주님께서 고통을 겪고 있는 부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 것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자는 살아 있을 때 라자로와 그 같은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그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 두었어야 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고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부자는 고통을 겪으며 마지막으로 라자로를 자기 집으로 보내어 다섯 형제가 또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한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29절) 했을 때, 죽었던 사람이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하자,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요한 5,46) 모세와 예언자들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예언하였다. 아브라함의 말뜻은 바로 이것이다. 부자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보고도 외면한 데 있었다면 오늘의 나 자신은 어떤지 반성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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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불의를 저지르거나,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착취하여 부정한 재물을 축적하거나, 하느님의 가르침에 거스르는 길을 걸었다거나 하는 표현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라는 묘사로 재물을 남용하며 살았을 수 있겠다는 느낌을 줍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돈을 쓰는 것이 흠이 아니라, 오히려 미덕이 될 수 있는 지금의 관점에서는 그의 삶이 저승에서 고통을 받을 만큼 그릇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저지른 큰 잘못이 있습니다. 바로 ‘무관심’입니다. 문을 여는 작은 수고만 하여도, 불쌍한 라자로의 처지를 볼 수 있었을 터인데, 그리고 그 현실을 보면 그의 마음이 움직였을 터인데, 그는 자신의 관심을 자신과 자신의 즐거움에만 돌렸습니다. 사실 부자는 자신의 집 앞에 라자로가 있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자로를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 차가운 무관심이 부자가 저지른 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현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이 무관심의 문화가 하느님 사랑의 반대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무관심을 극복하고자 교회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의 현실에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교회 안에 머물면서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과 안락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랑을 전하러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길에 나가 상처를 입고 더럽혀지는 그때에, 우리는 성령의 활동을 체험합니다. 문 앞에 라자로가 있었던 것처럼, 교회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우리는 이 시대의 라자로를 만날 것이고, 그들의 현실은 우리 마음에 이르게 될 것이며, 그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우리를 사랑의 실천으로 이끌 것입니다. 교회 문을 여는 작은 첫 시도에서 위대한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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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루카 16,19-22)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비유에 나오는 부자처럼 살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고 가르치셨을 때(루카 16,13),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루카 16,14) 그들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그런 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신 ‘경고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루카복음 12장에 있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와 거의 같습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6-21)
여기서 ‘오늘 밤에’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에게 회개할 수 있는 ‘몇 시간’을 주셨음을 나타냅니다. 그 시간은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는 ‘시간’으로 그 기회가 주어졌지만,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는 ‘라자로’라는 상황으로 그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라자로에게(또는 라자로 같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 부자가 자기의 잘못된 삶을 바로잡는 방법이고, 비유 속에서는 마지막 기회인 것으로 보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문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현세의 삶을 즐기기만 한다는 것인데, 라자로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나타냅니다. 비유에서 “그의 집 대문 앞”이라는 말은, “그의 집의 밖”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의 시선 앞”이라는 뜻입니다.
라자로는 항상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부자가 오가며 빵 부스러기 같은 것을 던져 주었음을 뜻합니다. 그 부자는 라자로를 모르지 않았고, 완전히 외면한 것도 아니고, 빵 부스러기 같은 것을 던져 주면서, 자기는 할 만큼 했다고, 사랑 실천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사랑 없음을 나타내는 태도일 뿐입니다. 사랑 실천은 ‘나’를 기준으로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상대방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랑을 실천할 때에는 이만큼 했으면 충분히 했다는 말은 내 쪽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라는 말은, 부자가 던져 주는 빵 부스러기는 아주 적은 것, 라자로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이었음을 나타냅니다. “개들까지 와서”라는 말은, 부자가 라자로에게 빵 부스러기를 던져 줄 때 마치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처럼 던져 주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큰 죄입니다. <이 말은, 라자로를 개들이 있는 곳에 방치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매일미사 책 ‘오늘의 묵상’ 글을 보면, 교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라자로를 만나야 한다고 썼는데, 글을 쓴 이가 속해 있는 교회는 라자로 같은 이가 하나도 없는 교회인가? 부자들만 있는 교회인가? 그리고 그 교회는 항상 문을 닫아 놓고 있는가? 라자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곁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고, 우리 가운데에도 있고, 어디에나 있습니다. 바로 곁에 있는 라자로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멀리 떨어져 있는 라자로는 더욱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온 세상으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사실, 안이냐, 밖이냐, 곁에 있느냐, 멀리 있느냐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입니다. 사랑 실천은, 모든 곳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문을 닫아 놓은 곳이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향해, 또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항상 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될 수 있습니다.(마르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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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불신과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 말씀으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었다.”(루카 16,20)
부자는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고,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고 인색했습니다. 곧 자기 자신에 빠져 타인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코로나19'로 많은 어려움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음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아마도 마음 한쪽 편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타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보다 자신에 대한 보호와 안전에 관한 관심이 더 커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참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당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코로나19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있는 문제들, 예를 들면 한 해에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이들이 2천 명이 넘고, 교통사고로 죽은 이들은 3천 명이 넘고, 독감으로 죽는 이들이 약 5천 명이 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1만 3천 명이 넘어도 타인의 고통에 무디어져 있으면서도 코로나가 자신의 안전에 문제가 되기 때문에 더 관심이 큰 것은 아닐는지요,
물론 코로나19의 문제가 중하지 않다거나 약화시킬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만, 이러한 우리의 속내가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입니다. 사실, 진정 무서운 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타인에 대한 사랑의 부재라는 점일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이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부유함(부자)=멸망, 가난함(빈자)=구원이라는 등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어 부자가 되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 곧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자가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본 것은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부자는 이승에 사는 자기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서 라자로를 보내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승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덧붙여 말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사실, 기적이 사람들을 회개시키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믿지 못함은 기적을 보지 못해서 혹은 듣지 못해서나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 보고 체험하고도 받아들이지를 않는 완고함 때문일 것입니다. 곧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루카 11,28)
한편,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라자로가 구원을 입은 것이 그가 남에게 특별한 선을 베풀었거나 해를 입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혹은 그의 가난하고 고통 받은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입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을 입고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 줍니다.
그렇습니다. 라자로가 은총을 입은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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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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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루카 복음 16장에서는 재물에 관한 여러 말씀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재물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는 비유는 바리사이들을 향한 논쟁(16,15.16-17.18 참조)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16,14)을 반박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비유에서는 세 명의 인물, 곧 부자와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 그리고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루카 복음 16장 19-31절은 루카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등장인물의 이름이 언급되는 비유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의 현세적 모습은 대조적입니다.(16,19-21 참조)
그러나 이들은 죽고 나서 ‘종말론적 역전’을 경험합니다.(16,22-24 참조) 부자는 현세에서 안락하고 풍요롭게 살았지만, 그 가까이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부자는 죽은 뒤에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라자로는 비록 현세에서는 배고프고 비참하게 살았지만, 죽은 뒤에는 아브라함 곁에서 영광과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이의 이름 ‘라자로’는 ‘하느님께서 도우셨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엘라자르’가 그리스어로 축약된 표현입니다.
이 이름에 따라 라자로는 현세에서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지만, 죽음 뒤에 하느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오늘의 비유는 재물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면 타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한 강한 애착은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특히 마지막 말씀은 우리에게 예언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도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사도 5,1-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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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16,19-21)
부유한 이들 중에는 이 이야기를 불편하게 듣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있는 재산으로 즐겁게 호의호식하며 사는 게 무슨 죄냐고, 라자로에게 딱히 잘 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쫓아버리거나 못되게 군 것도 아닌데 왜 죽어서 고생을 해야 하냐고 억울해합니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으니 이제 여기서 고초를 겪는 것'(루카 16,25 참조)이라는 인과관계도 영 맘에 들지 않습니다. '가진 게 죄인가? 열심히 노력해 부자로 사는 게 죄인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느님께도 항변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16,21) 그런데 실상 진정으로 "간절히 바란" 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저 간절히 바랐다고 하는 주체는 바로 라자로 안에서 굶주리고 계셨던 하느님이셨습니다. 라자로도 허기졌지만 하느님도 허기지셨습니다. 라자로도 아팠지만 하느님도 아프셨습니다.
"간절히 바랐다."(루카 16,21) 이 말씀 안에 깊이 머무르니 하느님의 굶주림, 허기, 소외감, 서러움, 슬픔... 모든 고통이 밀려옵니다. 라자로와 함께, 하느님과 함께 어느 누구도 관심 기울여 주지 않았던, 채워주지 않았던 가난에 잠깁니다
그렇지만 부자는 아직 자기 처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의 고통을 해소해 달라면서 아무 거리낌없이 라자로를 심부름꾼으로 지목합니다. 여전히 부자에게 라자로는 함부로 부려도 되는 가난한 이에 불과합니다. 그러고 보니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 가난한 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네요. 그의 존재를 몰라서 못 도와주었다는 변명은 꺼낼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루카 16,30) 자기 가족을 위해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할 때 부자는 결정적으로 "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알고 보니 그는 무엇이 잘못인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것 가지고 내가 즐기는 게 무슨 잘못인가?"라는 당당함 뒤에는 양심의 불편함이 없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양심을 통해서도 말씀을 하시기에 외면할 수는 있어도 몰랐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내 것이라 생각해서 나와 내 식구만 즐기고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 이웃 당사자는 물론 하느님을 얼마나 굶주리게 했는지 모르지 않은 부자는 결국 제 입으로 "회개"라는 말을 올립니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예레 17,10) 하느님께서 스스로 속을 떠보신다는 표현을 하시는 게 좀 불편합니다만, 하느님께서 부자에게 재산 축복과 더불어 함께 사는 행복까지도 누리게 해 주시려고 라자로를 통해 그에게 계속 사인을 보내신 것이라 받아들이면 한결 받아들이기 쉬울 겁니다. 그 기회를 줄곧 외면한 부자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묵상이 부자를 단죄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흐른다면 그건 이 비유를 들려 주신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구원은 당장 눈앞에 기적이 펼쳐지길 바라는 것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믿고 따르는 데서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예수님의 말씀을 뒤집어 보니,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잘 듣고 본질을 깨달은 이라면, 예수님의 복음 역시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거란 의미로 들립니다.
세상에 살 때 "좋은 것들"을 받았건 "나쁜 것들"을 받았건, 부자였건 가난했건, 배웠건 못 배웠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기에, 그동안 충실히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따르던 이들이 새로운 계약을 받아들이고 죽은 이들 가운데 살아나신 분을 믿는다면 구원은 당연히 가능합니다.
당시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이 오해했을 뿐,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과 예언서의 가르침을 뒤집어 엎어 버리는 전복이 아니라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에게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 벗님에게 10억을 주시는데 지금 당장 일시불로 줄 수도 있고, 10년 후에 복리이자 붙여서 줄 수도 있고, 죽고 나서 100배를 줄 수도 있다면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세요? 저는 참 슬프게 들었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회개하려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아브라함도 힘을 써 줄 수 없는 그 큰 구렁이 어떻게 생긴 걸까요? 그건 부자가 생전에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거나 무시하거나 돕지 않은 횟수만큼 골이 하나둘씩 늘어나서 생긴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깝고 두려웠습니다.
더욱이 이 골은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자신만이 나눔과 베품을 통해서만 징검다리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한 더 나누고 베풀어야 겠다고 되새겨 봅니다.
오늘 저와 함께 징검다리 하나 놓지 않으실래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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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16,31)
오늘 복음의 부자는 죄인이 아니지만 예레미야와 시편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사람의 속을 떠 보는 하느님께서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예17,10) 는 말씀의 본보기이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거지 라자로와 달리 이름조차 없는 점에서도 드러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재산이 자신의 힘만으로 이룬 것이라 자랑하고 살았으며, 그런 연유에서 풍요의 감옥에 갇혀 이웃의 어려움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하였으며, 이웃에게 나누지 못하고 베풀지 못한 삶을 살았죠. 그는 한마디로 주님에게서 마음이 이미 떠나 있었으며 그러기에 그의 미래는 마치 “광야의 메마른 곳과 같은, 인적 없는 소금땅과 같은 곳”(예17,6)인 저승의 고초를 겪게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복음의 부자에게서만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와 친지들을 통해 후회하지 않는 참된 삶과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부자와 같은 의식과 행동이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고 신뢰를 하느님께 두고 사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시1,3), 살아가면서 때론 어려움도 겪게 되겠지만 두려움 없이 잎이 푸르른 삶을 줄곧 삶의 풍성한 열매(예17,8)를 맺게 될 것입니다. 신뢰를 주님께 두는 사람은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리라.”(시1,3)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가 이 땅에서 살면서 드러난 삶의 극명한 대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내 저승 곧 죽음 이후의 삶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뒤바뀐 삶의 모습을 자세하게 보여 줍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어설픈 상선벌악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런 비유를 드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잘못 이해하면, 부자는 이 세상에서 호화롭게 살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통을 겪은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자였다는 그 사실만으로 자비로우신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죽을 죄는 아니잖아요. 부자라는 이유로 무조건적 지탄받고 비난받고 단죄받는다면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은 아니라고 봅니다. 참으로 세상을 떠난 다음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갔는지 그렇지 않은지 저의 관심사는 아니며 그것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겠지요. 다만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던 사람이 그렇게 된다면 그 까닭은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대로, “너희는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12,15)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기에”(루12,21) 그렇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더욱 마태오 복음의 최후심판에서도 이런 점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25,45) 곧 부자가 하느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고 돈에 지나치게 집착하였으며, 그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기에 하느님 없이 혼자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마치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것처럼 살았으며, 그런 사고 의식에서 자신이 가진 바를 세상의 이웃이며 형제인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고 베풀기보다 가진 것에 집착하고 탐욕을 부리며 형제의 고통을 외면하고 무관심하여 자신 안에 갇혀 살았기 때문이며 이것을 우리는 소위 세상의 죄라고 표현합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부자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해서 가난한 사람으로 살기보다 부자로 사시길 바랍니다. 다만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고 자신만의 쾌락과 안일을 위해서 간직하고 쓰는 것보다, 가진 재물을 이용해서 사람을 사랑하는 데 힘쓰십시오.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오히려 돈에서 해방되어 자신이 가진 재물을 이용해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생색내지 않으며 오히려 더 겸손하게 소박하게 마치 가지지 않은 사람처럼 단순하게 소박하게 살아가는 부자가 되십시오. 그 가난한 거지의 이름은 나오는데 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은 까닭을 한 번쯤 생각해 보십시오. 거지의 이름을 성서는 ‘라자로’라고 한 것은 그 사람의 실제 이름이 라자로 이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라자로의 의미가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는 뜻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주님께서는 늘 자상한 아버지로서 돌보시고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서는 그 부자의 이름은 어디에도 언급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며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런 부자를 돌보지 않으시고 호명할 수도 없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더욱 이름이 없는 부자는 단지 성서에 나오는 한 사람이 아닌 부자들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기에 이름을 부를 수가 없을지 모릅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그리고 라자로는 부자를 필요로 했고 서로 도울 수 있었는데, 관계가 단절되고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서는 결국 축복을 받을 기회를 부자는 잃어버렸고 천국으로 갈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사실을 우리 역시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면서 인생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만일 여러분은 부자의 풍요로운 삶과 라자로의 궁핍한 삶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어떤 존재로 살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행복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탈리아 협동조합연합회 회원 7,000여 명과 가진 미사에서 “돈을 숭배하면 돈이 사람의 선택을 결정하게 되고 결국은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돈은 악마의 배설물이라며 강한 어조로 돈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했다고 합니다. 교황님께서 성경보다 더 강경한 표현으로 돈을 비판한 것은 지나치게 돈을 우선시하는 세상적인 사고와 의식의 행태를 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품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사실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은 물론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부 아시아 교회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 위험 수위가 도달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살았던 베트남도 머지않아 굳건한 신앙을 잃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단지 당신 시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겪는 문제임을 꿰뚫어 보시고,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라고 하신 말씀임을 더 뼈저리게 동의하고 동감합니다.
모든 시대가 경험해 왔듯이, 오늘 복음에서도 빈부격차와 그에 따른 부자와 빈자 사이의 관계 단절은 너무도 뚜렷하게 보입니다. 교황님께서는 당신의 사목 방침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미 오늘 복음의 핵심과도 동일한 논조에서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라고 언급하셨습니다.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란 곧 오늘 복음의 라자로처럼 사람을 죽일 뿐이다, 는 것입니다.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배척입니다. 한쪽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음식이 버려지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는 사회적 불평등입니다. 오늘날 모든 것이 경쟁의 논리와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 놓이게 되면서 힘없는 이는 힘센 자에게 먹히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배척되고 소외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일자리도, 희망도, 현실을 벗어날 방법도 없습니다.』(53항)
“주님, 당신은 저희 마음을 살피시고 속을 떠보시는 분이시며 저희 삶의 결과에 따라 갚아 주시는 분이심을 알기에 모든 이의 모든 것인 당신께 신뢰하며 당신께 온전히 의탁하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당신만을 믿고 따르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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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화가 앨리스 카하나는 15살에 독일군에 의해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이때 앨리스 카하나는 뼈아픈 기억을 하나 만들게 되었습니다.
수용소로 끌려갈 때, 앨리스 카하나는 여덟 살인 남동생과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신발 한 짝만 신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신발이 벗겨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주의한 동생이라는 생각에 “넌 왜 그렇게 바보 같니! 너 자신의 물건 하나도 제대로 못 챙기니?”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수용소로 끌려가며 닥친 혼란 속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동생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생은 다른 트럭으로 끌려갔고, 그 후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면 과연 미움과 저주의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끝에 서면 후회되는 것이 얼마나 많을까요? 나의 말과 행동으로 타인에게 주었던 아픔과 상처가 오히려 내게 되돌아와 나를 힘들게 합니다.
그런 후회를 더는 만들지 않기 위해 깨어 있는 삶이 필요합니다. 특히 사랑에 집중하면서 받는 사랑이 아닌 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후회를 줄여나갈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마지막 심판 때에는 우리가 얼마를 벌었는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라갔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사랑의 실천에 얼마나 온 힘을 기울였나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바로 그 시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라자로는 너무나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둘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 머물고,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 부자가 고통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즐겁고 호화롭게 살면서, 가난한 라자로를 보살피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개가 다가와 라자로의 종기를 핥을 정도로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그 무관심이 그를 저승의 고통으로 이끈 것입니다. 또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부자의 이름은 전혀 알 수 없고, 가난한 이인 라자로의 이름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기억하는 사람은 이 세상 안에서 풍요와 안정을 누린 사람이 아닌, 어렵고 힘든 삶을 산 사람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억하는 사람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사랑 실천이 중요합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을 더는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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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와 나>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너와 나>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19-20)
네가 늘
내 앞에 있거늘
나를 닫으면
너는 없고
너를 있게 하신
하느님마저
계실 수 없으니
나를 있게 하신
같은 하느님과
나조차
함께할 수 없지
네가 늘
내 앞에 있기에
나를 열면
네가 있고
너를 있게 하신
하느님께서
계실 수 있으니
나를 있게 하신
같은 하느님과
나 또한
함께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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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천국 본향에 대한 믿음>
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 본향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온갖 환난을 이겨내는 힘이며 능력입니다. 현세의 이익과 행복을 뛰어넘는 고달픔을 차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지만 결국은 관리를 하다가 하느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매 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뻐합니다. 천국 본향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느님께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마르 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 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의 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보다 세상을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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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젊은이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신부님을 찾아 상담하기로 작정하고 앵무새를 안고 사제관으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사제관에도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앵무새가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제관의 앵무새가 답례를 하였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고, 거꾸로 “다들힘내!”라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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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도 행복도 선택이다!”>
-회개의 일상화-
삶은 선택입니다. 의식적, 의지적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천국도 지옥도, 회개도 사랑도 선택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요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장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연옥이, 지옥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선택에 따라 전개되는 현실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천국을, 행복을 선택해 살아야 죽어서도 천국의 행복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타고난, 바꿀수 없는 부정적 요소도 많지만 날마다 새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합니다. 주님을, 희망을, 사랑을, 행복을, 감사를, 기쁨을, 평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주신 하루에 감사하며 주님을 삶의 중심으로 선택하여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다산의 어록중 다음 내용도 우리에게 선택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더 가고 싶을 때 절제하고, 두려울 때 한걸음 나아간다. 탁월함이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고요할 때 텅 비면 밝고, 밝으면 통한다. 움직일 때 곧으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넓다. 이러한 상태는 탁월함에 가깝다”
얼마전에는 군에서 전역후 귀농하여 새로운 삶을 선택해 힘차게, 희망차게, 의욕적으로 살아가는, 저를 삶의 멘토라 부르며 따르는 60대 중반의 ‘이용민 요아킴’형제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2005년 봄에 만났으니 무려 20년째 교류를 계속중인 분입니다. 이분이 선물한 “신중년의 비상(飛上)”이라는 책 제목도 멋졌고, 날마다 비상의 삶을 선택하여 사는 모습도, 또 서문의 감사로 끝나는 끝말도 아름다웠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응원해주고 지지해 준 아내 임영자 여사, 나의 인생 노트에 적어 놓은 글을 잘 정리해 준 아들 형록이와 딸 민지에게 감사하고 이 책을 바친다.”
작년 8월15일부터 시작한 선택-훈련-습관화의 도식에 따라 기상하자마자 시작한 만세육창 기도-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주님도 천국도 행복도 선택임을 확인하는 다음 제 ‘예닮기도’ 일부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희망,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의식적, 의지적, 의도적 선택이, 회개의 선택이, 회개의 일상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은총의 사순시기는 말그대로 깨어 회개하며 사는 시기입니다. 회개를 통해 가아(假我)가 아닌 진아(眞我)의 참나를 사는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뿐 아니라 매일미사중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거의 모두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도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 후반부 말씀 역시 우리를 뒤돌아 보게하는, 또 회개를 촉구하는 충격적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이 말씀을 보면 구제불능의 사람이요, 성선설보다는 성악설에 가깝습니다. 사실 오늘날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 현실을 보면 인간에게 ‘과연 희망이 있는가?’ ‘이렇게 인간이 사악하고 잔인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도 들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판불변의 법칙’이니 ‘사람은 고쳐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라는 말도 회자되나 봅니다. 이런 부정적 숙명론에 도저히 주저앉을 수는 없기에 이래서 회개의 선택이, 회개의 일상화가 참 절박합니다. 인간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창세기 노아 홍수 후에도 나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창세 8,21)
바로 이런 부정적 인간상의 전형이 오늘 복음의 이름없는 무명의 부자입니다. 이름이 없는 부자, 존재감 없는 아무것도 아닌 무와 같은 존재를 상징합니다. 오늘날도 복음의 부자처럼 부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고 무지의 헛된 유령같은 삶을 살다가 제대로 살아보지고 못하고 죽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복음 서두의 묘사가 참 충격적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는 오직 자기만 알고 라자로라는 존재는 관심도 없고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기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물건이나 짐승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라자로야 말로 부자에겐 구원의 문이요, 회개의 표지로 부자를 심판하지만 무지한 부자는 전혀 알길이 없습니다.
이름없는 무명의 존재감 없는 어떤 부자와는 달리 가난한 이는 이름이 있습니다. 진짜 하느님 앞에 살아 있는 존재임을 알리듯 라자로는 이름도 ‘하느님께서 도와 주신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흡사 제1독서의 예레미야서가 부자와 라자로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없는 소금땅에서 살리라.”
생각없이, 영혼없이 몸의 욕망따라 살아 온, 주님 탓이 아닌 스스로 자초한 업보의 화입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부자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동시에 우리의 회개와 더불어 “내 중심”인지 “주님 중심”인지 우리의 선택을 촉구합니다.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후자의 주님 중심의 모습은 그대로 라자로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여러분의 내면의 실상은 어느쪽입니까? 외관상 가난하고 초라해 보여도 이런 내면을 지닌자가, 하느님께 날로 깊은 믿음의 뿌리를 내려가는 자가 정말 그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부자요 행복한 사람이요 자유인입니다. 참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향기로운 사람입니다. 새삼 이 두 부류의 인간상, 우리의 회개를, 선택을 촉구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어떤 부자와 라자로는 사후 그 처지가 완전히 반전됩니다.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이가 가로놓여 있는 데, 이것은 살아 있을 때부터 형성되어 고정된 단절의 구렁이입니다. 내 중심의 삶들을 살기에 각자는 고립된 섬처럼 되고, 참으로 모두가 하느님 중심의 삶들을 살 때 하나로 연결됨으로 서로간 단절의 구렁도 사랑으로 메꿔질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래서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부단한 회개의 선택, 회개의 일상화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일상화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 찬미와 감사, 희망과 기쁨, 자유와 평화의 참행복한 하늘 나라 삶의 실현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지상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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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어떤 사람?>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그 잎이 푸르고 줄곧 열매를 맺는다.”
오늘 예레미야서를 바탕으로 의지와 신뢰의 차이를 묵상해봅니다. 누구에게 의지하는 것과 누구를 신뢰하는 것의 차이 말입니다.
의지의 문제점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대어 서기에 스스로 지탱하거나 설 수 없습니다.
지팡이에 의지하면 지팡이 없이는 서 있거나 걸을 수 없습니다. 술에 의지하면 술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술 중독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지하는 그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서지 못합니다.
의지하는 그 사람이 다행히 좋은 사람이면 다행이지만 좋은 사람인 줄 안 그가 그렇지 않으면 큰 문제겠지요.
그에 의한 행복이 그에 의한 불행으로 바뀔 것이고, 나의 인생과 나의 행불행이 그에 의해 좌우되고 그에게 매입니다.
그렇다면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자기를 믿고 자기 힘에 의지하는 사람 말입니다. 자기 인생과 자기 행복을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훌륭하고, 불교의 경우 이런 면에서 훌륭한 가르침을 주는 종교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오늘 예레미야서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라고 얘기하듯 자기를 과신하거나 아무도 믿지 않는 곧 과신과 불신의 자기 믿음이라면 다른 얘기일 것이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보다 더 문제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과신이 타인 불신으로 이어지고 타인 불신이 단절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과신은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문제이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문제이고 하느님과도 단절하게 하기에 더 큰 문제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물가의 나무처럼 싱싱하고 열매를 많이 맺지만 자기를 과신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단절되어 생명의 물과 단절된 사막의 나무와 같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으면 엽니다. 사람을 믿으면 사람에게 열고, 하느님을 믿으면 하느님께 엽니다.
그러니 믿는 것은 과신이나 불신보다 낫고 앞서 봤듯 의지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라자로 얘기를 볼 수 있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과 비교할 때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해 특별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라자로가 가난해서 천국에 갔다고 하는데 실은 돈만 없어서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의지할 돈도 의지할 사람도 없어서 천국에 간 것입니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하느님께만 믿음을 둔 것이고 하느님밖에 믿을 곳이 없어서 하느님이 계신 천국에 간 것입니다.
반면 부자는 라자로와 정반대 지점에 있고 그곳이 실은 지옥입니다. 지옥이란 돈도 있고 사람도 있는데 하느님이 없는 곳이 지옥이고 불타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영원히 단절된 곳이 지옥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부자입니까? 가난한 사람입니까? 의지하는 사람입니까? 신뢰하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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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루카16,25)
<인생역전의 삶!>
오늘 복음(루카16,19-31)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인생이 역전되는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어떤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처지가 저승에서 완전히 뒤바뀝니다.
어떤 부자가 이 세상에서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고 하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핧곤 하였습니다.
때가 되자 그 두 사람이 죽어 저 세상으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두 사람의 처지가 완전히 뒤바뀝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먼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는 말씀을 확인시켜줍니다. 그리고 '나눔이 없는 재물의 남용'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내 주위에 라자로와 같은 처지에 놓인 형제자매들은 없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오늘 독서(예레17,5-10)에서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17,5.7)
복된 사순시기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어떤 부자처럼 자기만을 위한 복으로만 여기지 말고, 주변에 있는 라자로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합시다! 그래서 모두가 함께 저 세상에서 영원한 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이점도 요셉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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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89rQ8lQ4W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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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2.29.목.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 25)
맑은 날도
흐린 날도
공평하게 주어진
우리의 시간입니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한
시간들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다시 시작되는
우리들 삶입니다.
삶의 고초도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나쁜 일도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배우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삶을 바르게
바라보면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우리모두의
공평한
죽음입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 소중한
것입니다.
맑은 삶이
맑은 죽음이며
하느님께
발길을 돌리는
맑은 만남이
됩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바라고
지극한 사랑을
바라는
우리들
인생입니다.
그래서 삶이란
그 어떤 것들을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자이신
하느님을 향해
우리의 생명이
앞으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십자가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모든 바탕이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하나의 위로가
다른 모든 위로를
대신합니다.
공평한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사순을
새롭게 살아가는
은총의 새로운
삶이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고초와
위로라는
실존적인
우리의 삶을
다시 껴안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 삶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는
십자가에서
우리는
가면을 벗고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을 통한
새로운 시작
영원한 생명이며
영원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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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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