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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오리 공룡발자국 앞에서 바라본 금성산 능선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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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군을 지역별로 답사해보려는 여행자는 군의 행정 중심지인 의성읍보다도 금성면을 먼저 찾아야 한다. 금성면은 의성 일대의 빙하기시대, 구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삼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답사지를 모두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전남 강진을 두고 '남도 답사 1번지'라 했다. 그의 수사법으로 말한다면 금성은 '의성 답사 1번지'이다. 금성은 일개 '면'에 지나지 않지만 웬만한 '군'이나 '시'보다도 더 풍부한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발걸음을 해보면 '과연 금성!'이라는 찬탄은 저절로 터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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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운마을에서 가음면으로 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금성산과 비봉산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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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을 오른다. 의성군이 <의성 관광> 홍보책자를 통해 다인면 비봉산과 더불어 의성의 2대 '명산'으로 추천한 바로 그 산이다. 높이는 531m.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산(死火山)이라는 의미도 지녔고, 조문국이 신라에 맞서 처절하게 싸운 금성산성(金城山城)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금성산을 오르는 것은 그 때문만이 아니다. 숲을 보고 나서 나무를 보는 것이 대상을 인식하는 올바른 순서인 까닭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의 한 가지를 보고 그의 전체를 판단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된다.
금성산 정상에서 조문국 고분군, 중요민속자료가 있는 산운마을, 국보인 탑리5층석탑, 제오리 공룡발자국, 그리고 산을 에워싸고 있는 크고 작은 연못들, 집들, 길들…. 이 모든 것들이 서로를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고 있는지 두루 살펴본 후, 하산하여 하나하나 '인사'를 다니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등산로는 주차장 왼쪽에서 시작된다. 금성산을 오르면서 제일 먼저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은 중턱쯤에 잠깐 쉬면서 '노적봉 전설'을 되새겨보는 일이다. 노적봉(露積峯)은 금성산 정상과 해발 671m의 비봉산 중간에 있는 봉우리로, 군량미를 적들의 눈에 잘 드러나도록[露] 봉(峯)우리 위에 쌓아놓는[積] 기만 작전을 썼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목포의 노적봉에서 똑같은 방법을 활용하여 왜군을 물리친 일을 생각하면, 그보다 1400여 년 이전에 우리나라 최초로 '노적봉 전술'을 쓴 조문국의 지혜는 의성사람의 현명함을 역사적으로 증언하는 대목일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노적봉'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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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바라본 노적봉 쪽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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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년, 신라 벌휴왕이 조문국에 사신 두 사람을 보내 항복을 요구한다. 조문국왕은 그들을 죽인다. 2000명의 신라 군사들이 조문국을 공격한다(인구수를 감안할 때, 당시의 2000명은 지금의 3만 명에 해당되는 대군이다. 2011년 현재 의성군 전체의 인구가 약 6만 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애당초 조문국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조문국왕은 금성산에 석성(石城)을 쌓고 신라군에 대항한다. 신라군은 숫자로는 상대도 되지 않는 조문국 군대를 격파하지 못한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산성 안의 식량이 떨어져 간다. 아무리 용맹한 군사들이라 하더라도 오랫동안 굶고는 제대로 싸울 수 없다.
조문국왕은 이때 기가 막히는 꾀를 생각해 낸다. 금성산과 비봉산 중간의 볼록한 봉우리를 짚으로 덮어 군량미(軍糧米)가 충분한 것처럼 신라군을 속이자는 것이었다. 또, 흰 빛깔이 나는 흙을 계곡 물에 풀어 쌀뜨물처럼 보이도록 하는 방법도 사용하였다.
과연 적은 멈칫하였다. 신라군들은 빠른 기간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들이 물러났다면 조문국의 노적봉 설화는 후대에 더욱 빛이 났을 것이다. 목포 유달산 노적봉에 쌓인 군량미를 본 왜적들은 싸울 마음이 약해지면서 결국 이순신 장군에게 밀려났지만, 아득하게 먼 바다를 건너야 하는 왜군들에 비하면 경주는 금성산성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신라군들은 돌아갈 결정까지는 하지 않았다.
결국 싸움이 다시 벌어졌다. 군사의 수도 상대가 되지 않는데다 줄곧 굶주렸으니 싸움은 자꾸만 조문국에 불리해졌다. 마침내 왕이 칼을 뽑아들고 신라군의 대장과 결투를 하는 지경까지 되었다. 하지만 싸우던 중 왕은 말에서 떨어져 진흙탕에 빠지고 말았다. 신라 장군은 긴 칼을 휘둘러 조문국 왕의 머리를 베었다.
노적봉을 바라보며 슬프게 죽은 조문국왕을 생각해본다. 그러나 신라도 결국은 없어졌다. 세계 역사에 1000년이나 망하지 않고 이어온 나라는 신라밖에 없다지만, 죽는 순간 조문국왕이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상이 물려준 나라를 신라에 빼앗기는 순간이었으니 그는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졌을까.
조문국 아녀자들, 치마로 돌 날라 신라와 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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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산성 흔적지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주차장(수정사 입구) 쪽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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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적봉을 바라보며 등산로 중간쯤에서 잠깐 쉰다. 조문국 사람들이 쌓은 금성산성 터에서 쉬는 것이다. 의성군 홈페이지 등에는 금성산성을 두고 길이 2730m, 높이 4m, 너비 2∼4m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축성(築城) 당시 또는 673년(문무왕 13)에 성을 고쳤을 때의 모습을 말한 듯하다.
지금은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탓인지 웅장한 맛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돌더미들은 나무 사이 사이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길게 이어져 있어 지난날의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이 성을 쌓느라 조문국 군사와 백성들은 얼마나 애를 썼을 것이며, 신라군 앞에 엎드렸을 때 또한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했을 것인가.
산성 흔적을 따라 조금 더 오르니 '관망대(觀望臺)'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작은 이정표가 서 있다. 관망대라면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관망대에서는 바로 아래로 사운마을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탑리가 내려다보인다. 관망대에도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은 이곳 관망대가 조문국 지휘부의 초소로서 적의 침입을 살피던 곳이라 전한다. 안내판에 따르면, '조문국이 최후의 결전을 치를 때 심지어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官民)이 일치단결하여 싸웠는데, 이곳이 바로 부녀자들이 앞치마로 돌을 날라서 던지고, 구르며 끝까지 항전(抗戰)한 곳'이다. 물론 그것은 '구전(口傳)일 뿐 그 진위(眞僞)는 전해지지 않고 있는 역사만이 알 뿐'이다.
부녀자들의 슬픔을 뒤로 하고 정상을 향해 걷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산답게 눈에 보이는 돌들이 대부분 검정색 일색(一色)이다. 오석(烏石)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화산 폭발의 흔적인 흑요석(黑曜石)들이다. 산을 내려오는 이에게 꼭대기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리는가 물으니 '이제 반쯤 왔다. 등산로 입구에서 정상까지 빨리 걸으면 한 시간, 천천히 걸으면 두 시간도 걸린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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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산 정상. 정상석과 등산객들이 매단 리본이 보인다. 전망대는 이곳에서 왼쪽으로 10m 정도 내려가면 있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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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정상에 닿는다. 여러 곳에서 사진까지 찍으며 올랐으니 결코 빨리 걸은 것은 아닌데도 약 한 시간만에 정상석(頂上石) 앞에 섰다. 하산객이 허풍을 떨었나 싶다. 정상석에는 '金城山 530m'라 새겨져 있다. 정상석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으로 눈길을 돌려본다.
안내판의 요지는 산의 높이가 503.1m라는 것, 국내 최초의 사화산이라는 것, 영니산, 금학산, 천진산, 금성산 등 이름이 여럿 있다는 것, 산 전체가 흑요석으로 덮여 있다는 것, 이곳이 조문국 최후의 격전지라는 것, 맑은 날에는 금성면의 대부분은 물론이고 의성읍 시가지와 가음면 일부까지 보인다는 것 등이다. '사화산' 세 글자를 붉게 써서 특별히 강조한 것이 눈에 두드러진다.
금성산 꼭대기는 최고의 명당으로 유명
그리고 한 가지 더, 전설을 말해주고 있다. 이 전설은 의성군 홈페이지에도 '금성산의 암장(暗葬)'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안내판의 것보다 홈페이지의 것이 좀 더 자세하므로, 한자어를 우리말로 바꾸어가며 '금성산의 암장'을 읽어본다.
금성산은 멀리까지도 영산(靈山)이라고 알려졌다. 이 산에는 옛날부터 다음과 같은 진기한 전설이 있다. 산꼭대기에 무덤을 쓰면 석달 동안 이 산을 둘러싼 지역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이 들고, 묘를 쓴 사람은 갑자기 운수가 대통하여 큰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묘를 쓰는 사람이 간혹 있었고, 그러면 어김없이 날이 가물었다. 그래서 산 아래의 여러 마을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그 묘를 찾아내어서는 파낸 일이 종종 있었다. 언제부터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8.15해방 이후까지도 그 일은 되풀이 되어 왔다.
정상석에서 왼쪽으로 10m 내려가면 고분군까지 두루 보이는 전망대가 있다. 벼랑 끝에 툭 튀어나온 아찔한 바위 위가 전망대인데, 둘레로는 안전을 위해 철책(鐵柵)이 둘러져 있다. 올라서서 저 멀리 고분군의 조문국 경덕왕릉을 찾노라니 저절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온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그림은 이곳까지 올라온 보람을 가슴 가득 느끼게 해준다. 정상의 안내판이 '맑은 날이면 의성읍까지 보인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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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 바로 아래 전망대에서 바라본 금성고분군 방면의 풍경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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