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보령문학 제20호 시5편-[하얀 벽, 하얀 섬],[고양이의 보은],[소나무 생채기],[아버지와 대천 바다],[꿈에, 산속에서]
꿈에, 산속에서
김윤자
만나지길 간절히 바라고, 바라면
꿈에라도 오실까
보내드리고도, 보내지 않으면
가던 길 되돌아 오실까
가시지 말라고 통곡하면
눈물 밟고 오실까
구슬피 우는 산새를 만나면
그 울음 따라 오시려나, 안부를 묻고
실바람 한점 옷깃을 스치면
그 바람결에 실려 오시려나, 기다리고
하루, 하루 그리 살아가고 있는데
산녘 비탈진 언덕을 내려오신 아버지
삽을 던져 주시며 감자를 심자고
땅을 파고 감자를 심는데
작아진 몸으로 산비탈을 달려오신 어머니
나를 향해 두 손 벌리고 오시길래
품에 안기려 삽자루 던지고 뛰어가는데
살아진 목숨이라고 떠진 눈
비록 안겨보진 못했어도
선산에서 곱게 살아가시는 모습
눈앞에 뚜렷이 새겨 놓으신
꿈에, 산속에서 그려진 간절한 소망의 명화
이제는 그 명화 지워지지 않기를
가슴벽에 대못으로 걸어놓으면
아버지, 어머니 꼬옥 붙들고 살아질까
꿈에, 산속에서-보령문학 2022년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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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대천 바다
김윤자
아버지 일생의 전부는 자식이었다.
아버지 여행의 전부는 대천 바다였다.
마을 사람들 좋다는 곳 마다하고
점심밥 준비한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 앞세우고
대천 바다로 가는 그것이
아버지의 가장 행복한 나들이였다.
허름한 우산 펼쳐 들고
대천해수욕장 모래밭에 앉아서
바닷물 속에서 첨벙대는 철부지 자식들
아차, 잘못 될까
큰 눈 뜨고 지키셨다.
어찌 이 바다에서만일까
그렇게 밤낮없이
가슴으로, 온몸으로 오남매를 지키셨다.
대천 바다는 바다가 아니고
자식들이 마음껏 뒹굴며
구김 없이 성장하는 보드라운 융단이었다
아니 세상으로 나아갈 때
두려움 없이 비상할 수 있는
넓은 가슴을 달아주는 큰 새의 날개였다.
아버지의 대천 바다 여행은
그렇게 거룩했고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여정이었다.
아버지와 대천 바다-보령문협 2022년 해변시인학교 시화,보령문학 2022년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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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생채기
-안면도 자연휴양림
김윤자
얼마나 아팠냐고 물으시면
그날, 옆구리 살점쯤 베어나간 건
아팠지만 참을 수 있었다고
그럼 어디가 더 아팠냐고, 또 물으시면
가슴, 가슴 찢는 조국의 아픔이었다고
그 서러운 삼십육 년
바다 건너온 몹쓸 도둑 바람이
나의 진액 송진을 빼내어 가겠다고
옆구리 생살 찢던 그날
이건 나를 향한 칼질이 아니라
내 조국을 향한 칼질이라고
하늘 닿을 듯 영혼으로 피를 토하며
아픈 생채기 두고두고 보존했다가
후세에 고하리라 맹세하고, 또 맹세하고
그 아린 세월 버텨온
칼날에 패인 육신, 흉터만 보지 마시고
짓밟혔던 조국의 가슴팍 흉터도 담아가셔요
그리고 새살 돋아 우뚝 선 날 보셔요
잘 키워온 우리 조국의 높은 위상입니다.
소나무 생채기-보령문학 2022년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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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보은
김윤자
어디서, 어떻게 찾았냐고
여기까지 어찌 데리고 왔냐고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으셔도 돼요
주인님이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저 까투리 한 마리만 할까요
새끼 다섯 마리 낳고 기운 없어
거리에서 비틀거릴 때
오갈 데 없는 우리 여섯 목숨 거두어다가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살려주셨는걸요
보금자리 틀어주시고
산모라고 보신용 먹이 사다 주시고
날로 자라는 새끼들 보듬어 안으며
은혜 잊지 말자고 다짐했지요
주인님 출근하고 나면
철길 너머 산자락 헤적이며
주인님께 드릴 근사한 선물을 찾았지요
어느 날, 그 남자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니
현관문 앞에 놓인 까투리 한 마리
기르던 고양이는 간 곳이 없고
그날 이후로 다시 오지도 않고
그랬구나, 자식이 장성하면 집을 떠나듯
너희들도 이제 다 컸다고 집을 나갔구나
그냥 가도 될 것을
이리 큰 선물을 주고 떠났구나
그 남자, 그 고양이를 가슴속에 품고 산다.
고양이의 보은-보령문학 2022년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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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벽, 하얀 섬
김윤자
아침에 일어나니
안개가 온 창문에 하얗게 벽을 쳤다.
하얀 벽에, 하얀 섬에 갇혀 있다.
어느 창문을 열어도 세상은 없다.
하얀 벽이 세상을 옥죄고
하얀 섬 안에 가둬 모두를 단절시켰다.
곧 열리겠지, 하는 희망이 없다면
모두 죽은 목숨이다.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거실로 와서, 핸드폰을 열어 날씨를 보니
시간마다 둥근 해가 웃는다.
하얀 장막 뒤에서 밝은 햇살이 뚫고 나오려
발돋움하는 것이다.
그럼, 그렇지
어디 세상이 그리 무섭고 잔인할까
서서히 하얀 벽이 갈라진다.
하얀 섬들이 날개를 달고 일어선다.
높고 낮은 아파트 층층마다 희망이 서린다.
결코 하얀 벽, 하얀 섬은
두려운 존재가 아님이 증명되는 대목이다.
하얀 벽, 하얀 섬-보령문학 2022년 제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