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바스
작업대 위 조각난 운동화*를 올려놓고 복원사는 시간을 소환한다
물성의 고요와 세포들의 떨림 안과 밖의 격랑을 더듬는다
머리에 탄이 날아와 박힐 때 벗겨진 신발 밑창이 크레바스처럼 갈라져 있다
이른 계절의 실족이 앙다물듯 크레바스를 견디고 있다
시간을 영원으로 복원하는 일 이것은 재현인가 기록인가
운동화엔 가능한 그날의 흔적을 기워줘야 한다
조각조각 떨어져 나간 기억을 맞추고 얼룩을 되살린다
일그러진 거죽에 조금씩 빛이 돈다
귀틀에 안창을 박고 본체를 붙이자 기우뚱 배 한 척이 세워진다
낙타는 걷는 자세로 모래사막에 누워 있다 웅크린 뼈와 형상이 곧 지도인
신발을 유리관에 앉히고 스위치를 켜자 길 하나가 걸어 나온다
* 이한열의 운동화
웹진『시인광장』2024년 3월호
트렁크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 아래층엔
레스토랑이 있다
오후 다섯 시 전에 레스토랑에 가면
싼값에 늦은 점심을 먹을 수 있다
밀쳐 놓은 서류를 떠올리며 나는
주문한 메뉴를 기다리고
휴대폰을 검색하다 창가에 앉은 손님들과
눈을 마주치기도 한다
나는 손님들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일이 끝나면 편의점에 들러
베리향이 나는 와인을 한병 사야지 생각한다
야근이 끝나갈 무렵
레스토랑 셔터 내리는 소리가 차르륵 울린다
레스토랑에서 본 이들은
커플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신비로운 웃음과 조용한 말투가
자꾸만 떠오르고
늦게 도착한 버스엔 앉을자리가 없다
흔들리는 차창 밖에서 한 여자가 계속해서
손을 흔들고 있다
손이 향하는 방향에 내가 서 있었다
시야에서 여자가 사라질 때까지
손잡이는 엉거주춤 나를 흔들고
어떤 저녁은 몸도 마음도
닳은 비누처럼 딱딱해서
찬물로는 잘 씻겨지지 않는다
나는 웅크린 몸을 욕조에 풀어놓고
오늘은 와인을 한잔 해야지
되뇐다
한데 오프너 없이 어떻게 마개를 따지
하필 이럴 때
화장지 없는 사람의 기분이 된다
지퍼를 드르륵 열고 들어가 나는
트렁크에 나를 집어 넣는다
월간 <모던포엠> 2024년 4월호
이사과_2024년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