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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겨울의 기상예보에는 늘 삼한사온이 등장했다. 기상학적으로 큰 근거는 없지만, 우리나라에 겨울철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이 강해졌다 약해지는 주기를 일컫는 말로 사용됐다. 그러나 작금의 겨울들은 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양상을 보인다. 혹한이 이어지다 폭우가 이어진다. 폭설이 내렸다가 다시 혹한으로 돌아간다. 삼한사미(三寒四微), 삼청사미(三淸四微)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봄마다 기승을 부리던 황사 대신 계절을 가리지 않는 미세먼지가 더해진 찬바람이 변덕스럽게 오염 물질을 유입시키고 정체시킨다. 좀처럼 예측하기 힘든 변화들로 인해 사람들은 고통받으며, 생물들은 이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생태·환경 문제는 우리 사회의 주요 논의에 속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기후 위기, 지구온난화, 쓰레기 문제, 삼림 파괴와 멸종 같은 문제는 정치와 윤리 그리고 사회 전반에서 주요 쟁점이 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를 포함한 전 인류에게 닥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생태·환경 문제라 하겠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생태·환경 문제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가? 아니, 이러한 질문에 앞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전제가 있다. 과연 성경은 생태·환경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생태·환경 문제에 대한 교회의 시각혹자는 성경은 환경 문제와 전혀 무관하며, 오히려 기독교인이 환경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복음과 선교의 본질을 흐리는 행위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생태·환경, 창조 세계, 자연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칫 하나님이 아닌 자연을 신으로 숭배하는 정령 신앙 등으로 변색될 위험이 존재하기에 생태·환경 문제는 교회에서 논의할 주제가 아니며 교회는 개인 구원과 선교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들은 재난적 상황의 증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로서 종말의 때가 가까웠음을 알리는 징표로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환경 문제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반하는 행위로 여겨질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필수 불가결한 변화를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들은 환경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성향이 보수적인 자신과는 많이 달라 함께하기 힘들다고 여긴다. 이러한 이해들과는 달리 교회가 환경 문제에 앞장서고 사회의 짐을 나누어 져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교회에서 생태·환경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러한 여러 가지 입장이 교회에 혼재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상명령(창 1:28)1967년, 미국의 UCLA대학에서 중세 역사를 가르쳤던 린 화이트는 사이언스지에 “우리의 생태·위기에 대한 역사적 근원”(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이라는 소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생태·환경 문제의 원인이 서구 기독교의 인간중심주의, 특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라(창 1:26-28)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에서 비롯됐다고 비판했다. 비록 화이트의 비판이 기독교 창조신학에 대한 바른 해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은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환경적 위기의 사상적 근원을 기독교의 인간중심주의에서 찾고 있다.
사실, 창세기 1:26-28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창조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명령은 창조 세계를 인간의 필요를 위한 자원이나 착취의 수단으로 삼으라는 것이 아니다. 몇몇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창세기 1:28의 히브리어 단어 ‘카바쉬’는 ‘정복하다’로 해석될 수 있으며 폭력적인 지배를 암시하고 있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상황에서도 자주 등장한다(민 32:22, 29; 수 18:1; 대상 22:18 참조). 그러나 여기서 ‘정복과 다스림’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인류가 이 땅 가운데 살아가기 위해서는 땅을 정복해야 하는 것과 같이 많은 노력이 수반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더글러스 무와 조너선 무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다.
“이 세상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적어도 세상이 그분의 형상을 지닌 자들의 합당한 다스림 아래 놓이게끔 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함축하게 된다. 다만 이때 이 활동 안에 적대적인 세력들에 맞선 싸움까지 포함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목적들이 성취되는 질서 있고 선한 세계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그 본문은 그런 세력들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1
창세기 1:26-28의 ‘정복과 다스림’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위해서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왕권 사상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의 통치는 지배나 착취가 아니라 “이상적”인 대리적 통치를 의미했다. 신명기 17:18-20에 기술된 것처럼 이스라엘의 왕은 형제인 이스라엘 백성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율법책)을 등사하여 읽고 묵상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묘사된다. 또한 이스라엘 왕의 통치는 무엇보다 자신이 돌보는 백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신 17:18-20).
왕에 대한 이러한 성경적 이해를 감안하면, 창세기 1:28의 ‘정복과 다스림’은 하나님을 대신해 왕적인 지위를 가진 인간의 창조 세계의 안녕을 위한 책임성을 강조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창조 기사가 다시 기록돼 있는 창세기 2:15에서도 입증된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최초 명령을 ‘정복과 다스림’이 아닌 에덴동산을 ‘보호하고 돌보는 것’(경작하며 지키는 것, 개역개정)으로 묘사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아바드’) 지키게(‘샤마르’) 하시고”(15절).
이 구절에 쓰인 첫 번째 동사 ‘아바드’는 ‘경작하다’, ‘일하다’, ‘섬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 단어가 성전과 같은 장소에서 사용될 때는 ‘섬기다’로 해석된다. 에덴동산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공간임을 고려한다면 여기서의 ‘아바드’는 ‘섬기다’로 해석된다. 두 번째 동사 ‘샤마르’는 일반적으로 ‘보호하다’, ‘지키다’, ‘감독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이 단어는 민수기의 제사장 축복문에서도 사용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샤마르’)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시 12:7 참조). 따라서 ‘창조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창 1:26-28)과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보호하라는 명령’(창 2:15)을 함께 연결해 해석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 창조 세계에 대한 무분별한 파괴나 착취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현대 이전의 시대에는 이 본문(창 1:26-28)을 인간의 목적을 위해 자연을 마음대로 지배하도록 허락하는 위임통치로 해석하는 데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오직 과학기술의 발달이 그러한 목적을 갖기 시작하면서 자연에 대한 인간지배를 부각시키는 특별한 관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현대 과학의 진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프랜시스 베이컨은 창세기 1:28에 입각해 과학 발전의 목표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권한을 확대하는 것”으로 인식했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자연을 도구화하는 것을 “역사적 사명”으로 이해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연에 대한 지배는 과학의 발전을 통해 가능하며 이로써 인간이 창조 세계에 대해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 감당하는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리처드 보쿰은 자연에 대한 무제한적 지배의 사상적 배경과 현재의 생태학적 위기를 초래한 태도의 근원을 16세기 르네상스 인본주의로 보았다.2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최초 명령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세계를 잘 돌보라는 인간을 향한 부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의 창조 세계의 돌봄은 진보와 보수 같은 성향의 문제도, 이념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부여하신 사명이다. 또한 이 세상을 돌보는 일은 그저 성경의 지엽적인 주제 중 하나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의 정체성과 직결돼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현재 우리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인 기후 위기와 생태·환경 문제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고민, 그리고 실천을 통해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생태 위기 상황에서의 케리그마에 대한 재고3케리그마는 생태·환경 문제의 상황 속에 있는 우리가 어떠한 방향성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케리그마의 뜻은 ‘선포, 공표, 설교’로 헬라 시대에는 선포의 행위와 내용 모두를 가리켰다. 특히 필로에게 있어서 이 단어는 종종 비유적으로 전쟁에서의 승리나 포상 등과 같은 것이 주어지는 것에 대한 선포를 의미했다. 신약성경에서는 두 가지 큰 범주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다.
첫째, 요나가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을 알린 것과 같은 매우 중요한 공적인 포고를 가리킬 때 사용됐다(예, 마 12:41; 눅 11:32). 둘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사도적 전언(傳言), 즉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병 고침, 기적,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과 재림 등을 나타낼 때 사용됐다(예, 롬 16:25; 고전 1:21; 2:4; 15:14; 딤후 4:17; 딛 1:3). 고린도전서 2:1-5에서는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성령의 능력을 통해 전한다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됐으며, 로마서 16:25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를 전파하는 것을 나타낼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케리그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구원 사역에 대한 선포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구원의 때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전하는 선교의 개념이 함께 포함된다.
케리그마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 특히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의 대상에 대해 우리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에 비추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신학적인 토대를 설립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15-20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타 판타’)을 화해시키시는 유일하신 그리스도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타 판타’)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타 판타’)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5-20).
신약학계에서는 “만물”이라는 표현이 창조 세계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는 것에 이견이 거의 없다. 즉, 골로새서 1:15-20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의 효력이 모든 피조물에게도 수여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모든 피조물을 향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 바로 그 순간이며 모든 창조물의 화해가 이뤄진 궁극적인 사건이다. 비록 골로새서 1:15-20에서 이 화해의 사건을 이미 완성된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지만(20절), 골로새서 3:1-3의 내용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화해의 완성은 미래적이며, 비밀 안에 감추어져 있다. 신약학자 제임스 던은 골로새서 1:15-20을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비전은 광대하다. 이 송가는 초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 주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문자 그대로 자연의 부조화와 인간의 비인간화를 해결할 열쇠라고 보았다. … 어떤 점에서 더 놀라운 것은 이 비전이 암시하는 교회는 이러한 우주적 화해를 위한 중심과 도구의 역할을 한다. 이미 화해가 이루어진(혹은 이루어지기 시작한) 가운데 그 공동체는 그들의 책임을 다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 이 비밀을 드러내어 선포한다.”4
바울 신학의 진수를 보여 주는 로마서에서도 오직 인간만의 구원이 아닌, 모든 창조물의 해방을 종말론적인 비전으로 제시한다. 특히 로마서 8:18-25에서는 인류와 모든 피조물이 운명 공동체임을 알릴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인의 나타남을 고대하고 있다고 선포한다. 특별히 모든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아들들’ 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아들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분명히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4에서 하나님의 영(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명시하고 있다. 로버트 제웨트는 로마서 주석에서 이 본문을 자연과 인간을 착취해 노예화하고 호화스러운 삶을 영위하는 로마제국의 번영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본문으로 이해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바울은 부와 명예를 자랑하는 로마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서가 아닌 탄식과 신음, 고통의 현실 속에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 모든 피조물의 온전한 해방이 이뤄지는 종말론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로마서 8:18-25의 중심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모든 피조물의 자유와 화해를 향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비전으로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창조 세계에 대한 보존과 회복의 책임이 있음을 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재고해야 할 것은 성육신 사건과 부활의 의미다. 성육신은 이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의 물질적인 요소를 취하셔서 창조 세계에 들어오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역사적인 사건을 뜻한다. 요한복음 1:14은 성육신 사건을 이렇게 고백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의 저자는 여기서 성경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곧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만물을 붙드시는 이 예수께서 육체를 취하셔서, 그분께 속한 창조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육신 사건은 이 창조 세계의 궁극적인 선함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신을 온 창조 세계에 굳건히 결속시키셨다면 이 세상이 아무리 인간의 죄와 부패로 위협받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이며 궁극적인 선함을 간직한 하나님의 창조 세계임이 분명하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진실로 새롭게 변화되신 분이셨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께서는 잠긴 방 안에 있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기도 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물질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분의 몸에는 십자가 고난의 흔적이 있었고 그분의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들은 그분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볼 수 있었다. 또한 부활한 예수는 해변에서 불을 피우고 물고기를 굽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물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의 선한 창조 세계를 포기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의 물질적인 요소들이 높이 고양되고 새롭게 변혁된다는 사실을 생생히 보여 주는 것이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곧 죄와 사망에 대한 그분의 승리는 온 창조 세계가 속량함을 입어 다시금 그분께 속하게 된 구속의 은혜를 보여 주는 하나의 표지라 할 수 있다.나가는 말신학은 신자들이 직면한 도전과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이처럼 신학을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 상황에 대한 반응이라는 차원으로 봤을 때, 현재의 신학은 생태·환경 문제를 신학적 해결 문제의 하나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 그리스도인은 창조 세계를 돌볼 특별한 책임을 부여받은 존재다. 창조 세계의 운명은 우리 인간의 운명과 서로 결부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세계는 인간이 누리는 복과 저주를 함께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 그 운명이 결정되는 모든 생물의 번성이라는 사명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별히 성도들의 삶과 밀접한 목회의 현장에서 창세기 1:26-28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명령, 즉 창조 세계를 지키며 보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 방안의 하나로 교회에서의 봉사, 친교, 교육, 선교, 그리고 말씀 선포를 ‘창조 세계 돌봄’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교회 교육에서의 케리그마의 변화가 절실하다. 성육신을 통해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세계와 굳건히 결속되어 계심을 나타내셨을 뿐 아니라 물질성을 부인하지 않는 예수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물의 구원과 화해, 회복을 위한 것임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이 구원의 드라마에서 단순한 엑스트라가 아닌 인간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된 이 구원의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공동 주연이다.
창조 세계의 회복과 화해에 대한 강조를 통해 지나치게 인류를 향해 기울었던 무게추를 옮겨, 이제는 우주적인 구원을 고려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창조 세계 돌봄’에 대한 반복적인 책임 강조는 그리스도인에게 창조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조그마한 불씨가 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여 교회의 미래를 잘 준비하기를 소망한다.
註
1) 더글러스 무, 조너선 무, 《창조 세계 돌봄》, 송동민 옮김(죠이북스, 2022), pp. 127-128.
2) Richard Bauckham, God and the Crisis of Freedom: Biblical and Contemporary Perspectives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pp. 159-177.
3) 신현태, “대전환기 시대의 케리그마(kerygma),” 〈교회교육〉 513, (2022): pp. 18-25의 내용을 수정보완해 작성.
4) James D. G. Dunn, The Epistles of the Colossians and to Philemon(Eerdmans Publishing Co, 1996), p. 104. 데이빗 G. 호렐, 《성서와 환경: 생태성서신학 입문》, 이영미 옮김(한신대학교출판부, 2004), p. 150에서 재인용.
첫댓글 그리스도인~창조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