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그 어려운 삶 어찌 사셨습니까?
어머니, 어머니 그 어려운 삶 어찌 사셨습니까? 겨우 이 말씀 하나 여쭙는데 이 불효자 눈물이 앞서네요.
어머니 살아 생전 눈, 귀, 입, 다 가지시고도, 눈은 감고 귀도 막고 입도 다문 채 사셨네요. 왜 그러셨습니까?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있고, This too shall pass away 라는 말도 있지요. 모든 것 참고 살면 다 지나 가리라
믿었기에 그러셨나요? 요새 이 불효자 어머님이 그처럼 그립고 그토록 보고 싶어 뒤척이다 눈을 뜹니다.
뜬 눈으로 어둠 속에서 어머님 삶을 찾아가 보다 기적 같은 사실을 찾았습니다.
1911년 태어나 94 세였던 2004년에 어머님 하늘 나라에 가신 그 사이, 어머님께 이루어진 삶에 이런 기적의
인연도 있을까 했습니다. 아버지 7년 치매 끝에 마지막 2년은 식물인간으로 사시다가 하늘의 부름을 받고 가
셨는데, 그날 1월 28 일은 어머님 생신 다음 날이었습니다. 어머님이 아버님께 열녀란 말씀 들으시도록 헌신
하신 보답이셨나 싶습니다.
또한 어머니도 역시 7년 치매로 고생하시다가 94세 때 2004년 12월 6일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님 곁으로 가셨
는데, 그날은 어머님 하나 밖에 없는 손주가 결혼을 하고 직장 관계로 제가 혼인 신고를 대신 했던 날이었지요.
마치고 어쩐지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집에 도착하여 어머님께 “어머님, 지금 호진 이 혼인 신고 하고 왔어요.”
하자, 눈을 뜨시고 이 불효자 한 번 올려다 보시더니 사르르 눈을 감으셨으니, 이젠 내 할 일 다 하셨다 싶으셨
나요? 세상에 아침에 식사도 함께 하고 치매로 아무 생각도 못하셨던 어머님이 이 불효자 임종이라도 하게 하
셨으니 기적도 이런 기적이 있을까요?
어머님은 모두 닫고 사셨으면서도 어머님 가슴속에서는 정해 두신 마지막이 있었나 싶으니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더구나 어머님이 치매로 고생 하던 중 어쩌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어머님 왜 그러셨어요?” 하고
여쭈면 “네 4 형제자매 먼저 보낼 때 내 정신 다가서 그런다.” 하시던 어머님. 그날이 어머님 막내 아들 경영
이가 네 번째로 떠난 날이었으니 어머님이 막내를 얼마나 못 잊어 하셨으면 이런 기적이 있을 수 있을까요?
어머님. 사랑하는 어머님! 어머님 결혼 이야기는 벌써 가슴을 멍하게 하네요.
그런 결혼을 어떻게 받아드렸습니까? “결혼은 그 사람의 일생의 행과 불행을 가름 하는 인륜지 대사”인데
어머님이 어떻게 그 결혼을 받아드렸는지 이 불효자 마음이 아픕니다. 어머님은 겨우 17세인 1928년 4월
20일 일찍 결혼도 하셨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결혼도 있나 싶었습니다. 어머님은 앞을 바라보면 멀리
까지 확 트인 들판이 보이는 곳에서 태어나셨는데, 시집 오셔 살아야 하는 곳은 3면이 산으로 가로 막혀 앞
이 300 미터 정도밖에 보이지 않고 꼭 막힌 깊은 산골이었습니다. 또한 어머님 결혼을 두 할아버지가 술 몇
잔을 나누시고 유일하게 내세운 말씀이, 시집을 가지 않으면 위안부로 갈지 모른다는 거였다니,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기 외동딸을 그 험준한 산골로, 더구나 삶이 비교도 안 되는 부잣집 막내 딸을 보낼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정혼 후 가마를 타고 그 산골을 향해 오실 때 가도 가도 점점 깊은 산 중으로 들어가실 때, 얼마나 무
섭고 가슴이 아팠습니까? 몇 시간을 걸려 그 산 중 마을에 도착했을 때 어머님이 얼마나 절망하셨을까 생각
하니 이 불효자 가슴이 메어집니다. 심지어 전기도 없는 깊은 산 중,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산중, 친정 하고는
삶이 비교도 되지 않는 가난, 그래서 어린 몸에 아주 작으신 몸으로. 친정에서는 막내딸이었기에 일도 하시
지 안 했을 어머님이 매일 일에 묻혀 사셔야 했으니, 그 삶 얼마나 고되었나요. 또한 할머님이 얼마나 무서우
셨던 시 어머님이셨습니까? 그 할머니 뜻 다 받아주시며 사시느라 겪으셨을 고생 생각하면 어머님이 어떻게
참고 사셨나 싶습니다.
일도 시집살이도 어려웠지만 어머님의 혼을 다 앗아간 삶은 참으로 눈물 납니다.
어머님! 19살 때 결혼하시고 2년이 지난 1930년부터 딸, 딸 또 딸 그렇게 2년 터울로 낳으셨습니다. 그런데
셋째 딸 누나만 남고 두 누나는 먼저 어머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아들, 아들 또 아들 이렇게 셋을 또 낳
으셨어요. 그 중에서 둘째 아들인 저만 남고 두 형제마저 또 세상을 떠났으니 어머님이 겪으신 아픔 중에 이
보다 더 아픈 삶이 있을까요? 그 아픈 삶에 대해 하시고 싶은 이야기야 에베레스트 산보다 더 높고 태평양
바다 속보다 더 깊으셨을 어머님 마음을 어떻게 묻어 두시고 사셨나요? 네 형제 먼저 간 것도 어머님이 모든
아픔 다 참고 견디며 가슴에 묻어 둔 한을 형제자매가 먹고 그게 탈이 된 것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이 많으
면 젖에도 독이 쌓인다 했습니다..
그렇게 큰 댁에서 사신지 13년 동안 그렇게 모든 것 다 주시고 사셨던 어머니 아버지셨지만, 어머님 큰 댁을
나오실 때 무얼 가지고 나오셨나요? 아무리 장손 만 알아주던 시절이었지만 동네 빈집 하나 있어 그 집으로
나오셨지요. 제가 3살 때이었기에 깊이는 모르겠지만 그 집은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기에 문짝도 잘 잠기지
않는 집이었고, 심지어 방에 멍석이 깔려 있던 집이었습니다. 큰 댁에 머슴으로 살았어도 그렇게는 분가 하진
안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내 살림 시작이다 여기시고 아버님 어머님 모든 것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
로 사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사셨던 지 몇 년 만에 우리 집을 새로 지어 새집으로 이사하셨
을 때 어머님 마음은 이제 내 삶이다 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그 기쁨 오죽하셨겠습니까?
<어머님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내 아들 꼭 살려주세요.>
큰 댁에 사실 때야 어디 어머님 뜻대로 사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6 남매를 낳으시고 4 남매를 두 살도 넘게
키우시지도 못하고 보냈지만, 어머님은 가슴속으로만 피눈물 흘리셨고 어찌하지 못하신 어머님이셨습니다.
이제 어머님 머릿속에는 살아있는 두 남매는 살리시겠다는 마음 뿐이셨기에, 삼신 할머니에게 빌어 자식을
얻으셨지만 이제 살게 해 달라고 빌 수 있는 곳은 북두칠성 뿐이셨나 봅니다. 겨우 살아남은 이 불효자 부모
님을 얼마나 가슴 졸이게 했는지 모릅니다. 이미 3 녀 1 남을 낳고 그 중 셋째 누나 하나 살았을 때, 1938년
11월 3일. 새벽에 주무시다가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갔는데, 갑자기 무서움이 와서 마당 귀퉁이에 있는 두엄자
리에 앉아서 저를 낳았다면서요. 만약 화장실에서 일을 보셨다면 화장실에 빠질 뻔 했던 저였는데 천만다행
으로 살았고 그래서 어렸을 때 제 이름은 장영(場永)이 흔한 말로 마당쇠였지요. 이름이 험해야 오래 산다고
해서 제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그렇게 불렸습니다. 그렇게 귀하게 얻은 자식인데 자다가 갑자기 경기를
하다가 죽어지니. 얼마나 조마조마한 삶이었고 부모님은 어떻게 되는가 싶어 가슴을 조였겠습니까?
그렇게 시작해서 어머님은 저를 칠성 님께 맡기고 비시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추워도 목욕 재개하고 정화
수 떠서 받쳐 놓고 손이 닳고 무릎이 닳도록 엎드려 비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지성으로 비는지 저도 자주
보았습니다. 그 뿐입니까? 어머님은 저를 수양 어머니(점쟁이 어머니)와 인연을 맺게 하셔서 그 옛날 쌀 한
말이면 일 년을 보낸다는 그 시절에, 그 쌀을 머리에 이고 저를 앞세워 같이 가셔서 부처님께 그렇게 지성으
로 비셨습니다. 저에게도 부처님께 엎드려 빌게 하시고요. 우리 어렸을 때 얼마나 쌀이 귀한지 아십니까? 밥
을 할 때 보리에 쌀을 조금 섞어 먹던 그 시절에, 그 적은 쌀에서 얼마씩을 아껴서 모아 둔 쌀이었습니다. 그렇
게 소중한 쌀을 자식 살려 달라는 기도의 씨앗으로 사셨던 어머님이셨습니다. 그 뿐인가요? 제가 9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어머님 곁에서 멀어지면 큰 일이 나나 싶어 초등학교 넣는 것도 주저하시던 때,
겨우 허락을 받아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하시는 말씀이 “높은 나무에 오르지 마라.” “물가에 가지 마라.” 외에
는 하시는 말씀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여간 잠시도 눈에서 멀어지면 그렇게 가슴 졸이시던 부모님이셨습
니다. 그래서 제가 커서도 처음에 남의 집에 적응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어머님의 지극하신 기도가 저를 살려 놓으셨습니다. 결국 누나 한 분하고 저하고 남매만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이 사시면서 겪으신 어려움은 가난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어 초인이나 해내실 수 있는 삶이었
으니 어느 노래 말처럼 콩 밭 메는 어머님만이 아니셨습니다. 그 옛날 거의 모든 어머님들이 다 그러셨지만
손가락은 갈퀴가 되도록 일을 하셨고, 먹을 것이 부족하면 물 한 바가지로 배를 채우신 어머님이셨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어려움을 사셨던 어머님 이시지 만, 저는 어머님께서 불평 불만 원망을 하시는 것을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아버님 그렇게 남의 보증을 서셔 가끔 손해도 감수 하셨지만 아버님 탓하시는 말 씀 한 번 들은 적 없었고,
심지어 아버님 작은 어머니까지 두셨지만 그로 인해 아버님과 나쁘게 사신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친정이
그처럼 부자로 사셨지만 친정에 가서 무엇 하나 가지고 오시는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말씀 그대로 어머님
께 주어진 운명을 운명으로 다 감수하시면서 사신 어머님이십니다.
동네에서 잔치가 있으면 모든 것을 품앗이로 하던 때, 남의 부모님은 자식들 불러 국수라도 먹게 하셨지만
어머님은 저를 한 번도 불러 먹으라 하시지도 안 하셨고, 할머님이 떡 같은 것은 몇 개 가지고 오셔 먹이기도
했습니다. 어머님께서도 집에 있는 자식 생각에 무엇 하나 입에 넣지 않으시면서 그러셨습니다.
우리 어머니, 어머님은 입도 있으시고 귀도 있으시고 눈도 가지고 계셨지만 모든 것 다 가슴에 묻으시고
그렇게 어머니의 삶을 사시다가 가셨습니다.
영국 시인 랑구랄이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천칭의 한 쪽 편에 세계를 실어 놓고
다른 편에 나의 어머니를 실어 놓는다면
세계 편이 훨씬 가벼울 것이다.“ 라고.
그렇습니다. 어머님의 은혜야 말로 세상을 다 바친다 해도 그 은혜의 한 부분 밖에 갚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간절히 원합니다.
“어머님, 딱 한 번만 저에게 오세요.
어머님께서 살아 생전 아버지와 월명 산 벚꽃 구경 가신 것 한 번 뿐이시라 하셨지요.
어머님 모시고 여행 한 번 하고 싶습니다."
어머님, 딱 한 번만 저에게 오세요.
"용돈 드리시면 너희가 쓸 데 많지 나는 용돈 필요 없다 하셨지요.
그래도 꼬박꼬박 용돈 꼭 드리겠습니다.“
어머님, 딱 한 번만 저에게 오세요.
"어머님 움직이지 못하시면 휠체어에 앉게 하여 바깥 구경 시켜 드리겠습니다.“
어머니, 딱 한 번만 저에게 오세요.
"어머님께 세상 사는 이야기 말 동무 해 드리겠습니다."
아! 어머님 보고 싶습니다.
<다음에는 어머님 사신 모습 올려드리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