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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왔나? 싶습니다. 어제 낮 최고기온이 마치 봄 날씨 같았습니다. 이것도 기후변화 탓인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정상은 아닙니다. 포근해서 좋아만 할 일이 아니지요. 우리는 좋은 것을 따르기보다는 옳은 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모두 자기 좋은 것만 따라가다가는 혼란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좋아하다 망하는 길로 가게 되겠지요. 소위 말하는 근시안적 삶을 만들면 희망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누구 말대로 내일 세상이 끝난다 해도 오늘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세상이 좀 시끄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질문하면 뭐라고 대답을 할까? ‘요즘 무슨 재미로 사세요?’ ㅋㅋ <어찌 보면 재미로 사나? 그냥 사는 거지. 그냥 살아남아야겠다, 하는 생각뿐이다> 뭐 그렇게 생각도 듭니다. 사실 주변에는 살아남기도 힘든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생각도 합니다. 오늘은 뭘 먹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행복한 사람이겠지요. 하기야 먹을 것 걱정 없이 산다고 꼭 행복한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조건마저 채워지지 않는다면 다른 행복의 조건이 머릿속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입을 쩍 벌리고 다닙니다. 작년하고도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발달(?)할 수가 있을까? 싶은 거죠. ㅋㅋ
겨울은 왔는데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아직 출발선에서 멀지 않으니 곧 정상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합니다. 성탄절도 가까워지고 연말도 다가옵니다. 건강해서 희망을 가지고 맞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건강이 희망입니다. 일단 살아남아야 희망을 실현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건강하세요. ^)^
2023년 12월 09일 김종우 목사 드림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잠언 22 : 26 - 27)
<사채소년>
세상은 누가 지배합니까? 아니면 무엇이 지배하고 있습니까? 사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윤리도덕을 배우고 공동체 질서를 지키려고 노력도 합니다. 그래도 실제로 힘과 권력을 행사하는 실권자가 있습니다. 생명체도 없지만 생명체를 좌지우지 합니다. 더구나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사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교과서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현실 속에 처해 있고 그 현실을 헤쳐 나가야만 합니다. 설령 불법이 아니라 하더라도 부도덕하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강제로 잡아 가둘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당한 사람만 아픔을 감내해야 합니다.
생각해봅니다. 과연 사채업자 ‘랑’을 불법자로 체포 구금할 수는 없을까요? 어떤 법률 조항을 대들어서 체포할 수 있지요? 그가 직접 나서서 학생들에게 이자를 뜯은 것은 아닙니다. 이용당한 학생도 스스로 약점을 지니고 있으니 나서서 고소고발하기도 어렵습니다. 사채업자는 바로 그 점을 이용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법의 현실적 요소를 찾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악의를 가진 어른들이 어떻게 미성년자를 이용하여 사익을 취할 수 있는지도 엿볼 수 있습니다. 당하는 자가 아플 뿐입니다. 소위 악덕(?) 사채업자에게 어떻게 되갚아줄 방법이 없다는 것에 속으로 분만 삭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지요. 과연 방법이 없을까요?
우리네 이야기 속에 많은 부분 돈이나 재물이 껴있습니다. 결국 돈이지요. 돈이 권력입니다. 돈을 쥐고 있는 자가 힘을 사용합니다. 어쩌면 돈으로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돈에 혈안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세상 어디를 가도 돈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남녀노소 돈을 마다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돈 자체를 모르는 젖먹이가 아닌 이상 돈은 그 누구라도 웃음 짓게 만듭니다. 기분 좋게 만들어주지요. 성직자라고 예외입니까? 미안하지만 그런 수도사는 이제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대단한 종교단체일수록 사실 돈은 더 많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남을 도와주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돈의 위력이 학교 안에까지 침투해 들어옵니다. 학생들을 휘어잡고 나아가 교사까지 끌어들입니다. 대단한 영향력입니다. ‘강진’이도 ‘다영’이도 모두 부모의 빚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운명처럼 주어졌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집에서의 굴레가 학교 안으로까지 들어옵니다. 돈이 없기에 약자입니다. 아주 영리한(?) 사채업자 ‘랑’이 기회를 포착하여 강진이를 끌어들입니다. 학교 안으로 침투할 수 있었던 길이 됩니다. 강진이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역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따라왔으니 구태여 피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강진이를 못살게 굴던 ‘남영’이 강진이 가지고 있던 사채업자의 돈을 몰래 빼앗습니다. 괴롭히려고 가로챈 것인데 그만 그물에 걸린 꼴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반대로 강진이에게 매여 힘든 상황으로 바뀝니다. 왜냐하면 강진이 뒤에 사채업주가 힘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강진이는 노예 신세에서 왕처럼 바뀝니다. 그리고 교내 학생들에게 사채놀이를 하게 됩니다. 아직 미성년자이니 사채업자가 그냥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 부모의 인적사항을 불게 하여 담보로 붙잡습니다. 돈이란 것이 받는 것은 쉬워도 갚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채업주는 바로 그 점을 노려서 그 부모들을 닦달하여 원금에 높은 이자까지 뜯어내는 것입니다.
당장 돈이 필요한 교사까지 껴듭니다. 가까이 있으니 편하고 그래도 잘 아는 사람(학생)이니 믿음직하겠지요. 사실 말려야 할 입장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돈의 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습니다. 쉽게 걸려들고 빠져나가기는 매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걸려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공기관을 통하여 돈을 빌리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고 돈이 급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채업자라는 것이 바로 그런 상황을 이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져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일단 빠져나가야 할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어디에서도 도움을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짐을 아이들이 짊어져야 하는 상황이라면 구제책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이의 삶을 망가뜨리고 공부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앞을 가리게 됩니다. 당시의 학창생활뿐만 아니라 장래까지 어둡게 만듭니다. 장래에 대한 희망까지도 빼앗을 수 있습니다. 막아주어야 합니다. 교내 생활지도 담임이 그것까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학생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는지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불법의 현장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그에 상응하는 벌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묘한 세상이지요. 어디서 들은 말이 떠오릅니다. 세상 참 살기 더럽네. 영화 ‘사채소년’을 보았습니다.
예수 믿는 당신이 거듭나야 합니다
나름대로 성실하게 교회를 잘 다니던 때 뜻하지 않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누가 그러는 겁니다. ‘거듭나셨습니까?’ 참으로 당황하게 만들었던 질문이었습니다. 그야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으니 당연히 거듭났지요. 그랬더니 다시 질문합니다. ‘언제 거듭났습니까?’ 햐, 이거 정말 웃기는 일이네. 우리 육신의 생일은 잘 기억하고 있는데 우리 영혼의 생일을 기억하고 사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정말 당황했습니다. 질문한 사람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몇 년 몇 월 며칠이라고. 그러면서 당신은 거듭나지 않았다고 단언하는 겁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나던지요. 아니 그 당시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하나님 사랑에 얼마나 빠져 있었는데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속에서 불이 치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맘 같아서는 줘패고 싶지요. 아무튼 그 후 곰곰 생각해보았습니다. 나 자신의 신앙행적을 역추적해 본 것이지요. 교회는 언제 나가기 시작했고, 언제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언제 세례를 받았고, 언제 은혜를 받았고 등등 말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느 시점이 거듭난 순간이란 말인가, 알 수 있나요?
한 동안 ‘구원파’라는 이단 성도들이 기존의 기독교 신자들을 겁주고 다녔습니다. 교회마다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려고 이렇게 저렇게 교육시키느라 바빴지요. 구원의 확신이 없으니 그런 질문을 받으면 금방 넘어집니다. 도대체 자기 생일도 모르는 사람이 있느냐? 그걸 모르는 걸 보니까 분명 거듭난 것이 아니다. 천국이 아니라 지옥행이다. 그러니 다시 배워야 한다. 그래서 끌고 가서 자기네 교리로 세뇌시켜주는 겁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 질문 받을 때 굉장히 화가 났지요. 문제는 그에 상응하는 대답을 할 수 없어서 더 화가 났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생일은 다 알고 계시지요? 그런데 그 생일을 자기가 결정하였습니까? 우리가 태어날 때 스스로 태어났다는 것을 압니까? 야, 내가 드디어 세상에 태어났다, 이 보세요,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입니까? 물어보셨습니까? 그런 사람은 세상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생일은 누가 가르쳐주지요? 예, 부모가 가르쳐줘서 아는 겁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생일은 누가 가르쳐주어야 합니까? 바로 영의 아버지이신 우리 하나님이 가르쳐주셔야 합니다. 구원파 그 사람들 아버지 하나님께로 들어나 봤는지 모르겠습니다. 다 자기 생각일 뿐이지요.
오늘은 거듭남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예를 든 구원파든 양파든 쪽파든 상관할 것 없이 기독교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거듭남’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태 우리 신자들이 배우고 알고 믿고 있는 ‘거듭남’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봅니다.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만 살아있던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예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지요. 요 1 :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말씀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태 하나님과 상관없던 이방인이었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육신만 살아있던 사람이었다가 영혼이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거듭난 것으로 배웠고 그렇게 알았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구원파 성도가 질문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 영혼이 살아난 그 날이 언제냐?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가리켜 당신이 거듭난 때가 언제냐? 하고 물은 것입니다.
일단 ‘거듭남’이란 용어부터 바르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일단 한 번 태어난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하는 말이지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면 이 말을 사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번 태어나서 존재해야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전에 먼저 태어나는 일이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전에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는 우리 영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육신만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다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끼리는 사람이라고 칭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짐승이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잠 32 : 2 - 3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거룩하신 자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그 사람은 짐승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그 영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백성 가운데 들어왔습니다. 한 번 태어난 것이지요. 이것은 거듭난 것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그 영이 태어난 것입니다.
어느 날 니고데모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짜고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상황을 잘 보아야 합니다. 우선 니고데모란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요 3 : 1 - 2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첫째 바리새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이라 하면 신앙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철저히 율법대로 즉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발버둥 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도 역시 바리새인이었지요. 그의 고백을 잠시 들어봅니다. 빌 3 :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보십시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그렇게 율법에 철저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오로지 ‘성경대로,’ 그런 뜻이지요.
그리고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관원이라면 백성의 지도자라는 뜻입니다. 학자들의 이야기를 빌린다면 산헤드린공회 의원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국회의원 격이지요. 그러니 신앙적으로나 사회적 명망으로나 대단한 사람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당시 30대 초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이가 많았을까요, 니고데모가 나이가 많았을까요? 당연히 니고데모가 훨씬 연장자였을 것입니다. 좀 과장하면 아들 뻘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노인네가 젊고 허름한 예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왜요? 당시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니고데모의 고백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 3 :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우선 예수님을 무엇이라 호칭합니까? ‘랍비’라고 부릅니다. 선생이란 뜻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느 쪽이 선생으로 생각됩니까? 당연히 니고데모가 선생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이것부터 대단한 일이지요.
그러면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는가 봅니다. 첫째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예수님이 누구에게서 왔다고요? 하나님에게서. 그 당시 예수님을 이렇게 알아본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요? 아직 열두 제자도 긴가민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감히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서 오신 선생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말이 그것을 설명해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직접 본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보았든 들었든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인가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원래 성경은 잘 알고 있었으니 분명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웬 낯선 청년이 나타나서 이런저런 일을 수행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알고 믿고 있는 성경 속의 메시야와 비교해보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과 그 메시야를 대조해보니 어떤 결론이 나온 것이지요. 이야말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메시야다, 하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렇게도 기다렸던 메시야가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우리라면 어떻게 할까요? 그런가보다 하고 그냥 하던 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니고데모는 너무나 기뻐서 직접 만나려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대뜸 고백하지요. 우리 다시 한 번 니고데모의 고백을 읽어봅니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2절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을 믿고 이제 예수님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며 하나님이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누구에게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그것도 아주 철저히 잘 믿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가 거듭나야 한다고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거듭나라는 말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한 번 태어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거듭나라고 하면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말이 안 됩니다. 아직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거듭나라는 말이 되겠습니까? 일단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다음에 거듭나라고 말해야 되지요. 그렇다면 여태 우리가 알고 있던 거듭남과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셨습니까? 우리는 불신자가 신자로 되는 것을 거듭나는 것으로 배우고 알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게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일단 신자가 되고 나서야 거듭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질문이 나옵니다. 이미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데 왜 또 거듭나야 한단 말인가? 예수 믿으면 구원과 영생, 천국에 갈 수 있지 않은가? 역시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알고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분명 예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잘 믿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뭐라고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단순히 하나님 믿는다고 하나님 나라 가는 것이 아니네요. 과연 하나님 나라 가는 것이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맞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7 : 13 -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이 쉽답니까, 어렵답니까? 찾는 사람이 많답니까, 적답니까? 아마도 어렵고 힘드니까 찾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럴수록 가야 되겠습니까, 말아야 하겠습니까? 세상에서 그깟 대학 가는데도 몇 년을 고생, 고생하는데 영원한 나라, 천국에 가는 것을 그렇게 만만하게 생각한다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알고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겨우 태어난 것뿐입니다. 태어났다고 인생 종치는 사람 있어요? 태어났으니까 살아야지요.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그 가는 길은 평탄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았습니다. 하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는 험난한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모르고 살다가 이제 하나님을 믿고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영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 나라로 가야 하지요. 그 길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래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나와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민 14 : 2 - 4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기 힘들다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렵니까? 그 사람들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따라 하렵니까?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까지 가는 길이 어렵고 힘들어도 소망이 있습니다.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까지 견디고 이겨내기를 축원합니다. 아무튼 질문에 답을 해야지요. 하나님을 믿는데 왜 거듭나야 하는가?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들어도 어떻게 듣습니까? 거듭나라고 하니까 니고데모가 반문하지요. 요 3 :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었다는 것이지요? 육으로 들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데? 영을 말씀하시는데 니고데모는 육으로 들은 것입니다. 우리가 여태 그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코드가 맞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육으로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고전 3 :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자 여기 ‘육신에 속한 자’가 나옵니다. 이 육신에 속한 자는 예수를 믿는 자다, 아니다? 바로 뒤에 설명이 나옵니다.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라고 나오지요. 간단히 말한다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기는 하는데 아직 어린아이요 육신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령한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신령한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 그 말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3 : 5 - 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하나님의 참뜻, 신령한 것을 깨닫기 위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도 똑같이 말합니다. 고전 2 :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요점은 이겁니다.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아직 육에 속하여 육으로 듣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나야 영으로 들을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거듭나서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 55 : 8 - 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여기 ‘너희’는 하나님 백성입니까, 이방인입니까?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생각과 하나님 생각이 천지차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거듭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거듭나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가 거듭나야 합니까? 하나님 백성이 거듭나야 합니다. 땅의 수준에서 하늘의 수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의 수준으로 바뀌는 일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십니다. 왜냐? 그래야 함께 아버지 집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같은 뜻을 사도 바울이 다르게 표현합니다. 골 3 : 1 - 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찾으라고 합니까? 위엣 것을 생각하고 찾으라는 당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육신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영을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육으로 생각하고 받으면 우리는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하나님 나라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아멘!
추가로 설명하겠습니다. 히 5 : 12 - 14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여기서도 하나님 백성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간단히 말하면 ‘젖을 먹는 자’와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입니다. 젖을 먹는 자는 어린아이고 ‘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니고데모가 거듭나라는 말씀을 육적으로 이해한 것과도 같습니다. 미안하지만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애굽에서 해방되었어도 힘든 광야생활을 지나 가나안 정복의 길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예수 천당’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숨 바쳐가며 신앙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다면 장성한 자로 자라가야 합니다. 당연히 언어부터 배워야 합니다. 육의 말이 아니라 하늘의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입으로는 주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말하면서 그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그냥 공허한 말이지요. 거듭나라 했더니 어떻게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냐고 뚱딴지같은 질문이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제 ‘예수 천당’ 수준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를 쓰며 배우도록 힘쓰기를 바랍니다. 영생 천국을 속된 말로 나이롱뽕 하듯 얻으려고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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