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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쉬 마을을 다녀와서
김희 상
미국에는 세계 거의 모든 종교들이 들어와 활동하고 있고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번 호부터 본지에서는 「아미쉬」. 「퀘이커」 그리고 하와이 원주민들의 종교를 기회가 있는대로 소개할 예정이다.----「편집자 주」
필라델피아에서 약 1시간 20분 가량 서쪽으로 달리다보면 어느 틈에 확 펼쳐진 들판속에 안겨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온 사방에서는 무척 진한 거름냄새가 달려 들어오고, 신호등조차 없는 좁은 길 양 옆으로 한가로이 줄지어 서 있는 전봇대들은 마치도 오래 전에 떠난 고향땅 한 복판에 서있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들판 여기저기에 듬성듬성 서 있는 환 페인트칠의 커다란 농가들이, 여기가 고향이 아니었구나하고 새삼스레 머릴 설레설레 젓게한다
이곳이 바로 '시대착오적' 이며 '문명을 거부하는' 곳, 랭커스터 카운티다. 여러 해 전에 나온 영화 "Witness』를 통해 어쩌면 아주 신비스럽고 애처롭게까지 여겨질만큼, 뭔가 20세기를 사는 우리들과는 동떨어진 별종들로 생각되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동네를 한바퀴 돌다 보니 바깥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분명 사진 한 장쯤 박고 싶을 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사진촬영금지라는 표말이 커다랗게 붙어 있었고, 도무지 그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근엄한 얼굴들이 간혹 마차에서 내려 자기들 전용 가게에 들고 나면서도 곁에는 통 눈길을 주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가 하면 들판을 가로질러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듯한 어린아이들의 행렬은 이 동네를 들어설 때 맡았던 뒤엄냄새만큼이나 정겹기만 했다. 아이들까지도 어른들과 꼭같이 무거워만 보이는 옷차림이었지만, 바깥세상을 별로 만나보지 못한 아이들 특유의 수줍고 정겨운 웃음을 비껴 남기며 도망치듯 길을 재촉하는 모습들은 오히려 다가서서 말을 붙이는 것이 그 애들에게 때라도 태우는 듯 하여 절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게 했다.
아미쉬에 대하여는 무슨 사이비종교로 이단시하는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대체 어떤 종자들이길래 대서양을 건너온지 3세기가 되도록 옷차림 하나 변함없이, 전화도 안 쓰고, 전기불도 안 쓰고, 자동차라면 교회에서 쫓아내기까지 하면서, 뭐가 그리 대단해서 그 숨막히는 '전체주의적인' 틀을 고집하느냐고 웃음거리삼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그러나 이들이 살아 온 발자취를 빙산의 한 귀퉁이나마 따라가다 보니, 현대사회에서 갈갈이 찢겨나가는 정신문화의 시체들을 끌어안고 애통해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갈망해오던 그런 세상의 모습이 그들 공동체에서는 나름대로 보존되어 온 것이나 아닐까 하여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져볼 여유 한 번 갖지 못했던 안타까움을 한 번 풀어보자는 심정으로 아미쉬들 가까이로 한 발 다가가 보기로 했다.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
아미쉬는 그리스도교의 한 종파이다.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 낯익은 이름들로 대표되는 종교개혁기에, 이 쟁쟁한 종교개혁가들 눈에조차 너무도 과격하여 교회를 분열시키는 집단으로 여겨졌던, 그래서 수 없이 잡혀 고문당하고 자기 땅에서 쫓겨나고 또 죽음까지 맞아야 했던 "재세례파"(Anabaptists)의 한 분파이다. 특히 아미쉬의 원조가 된 스위스 쮜리히의 한 모임에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지 무비판적으로 교회의 예식을 따르고 복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기 시작했다. 세례는 죄씻음 받고 거듭나는 의식인데 선악의 구분조차 할 능력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유아세례를 주는 것은 비정서적이라고 하여 거부하고, 탄압을 피해 몰래 모여 성경 공부를 해 나가면서 모인 사람들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거듭남의 표적으로 세례를 주고 또 서로를 복음전파를 위한 전도자로 임명하여 활동하였다. 헌신적으로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키워가던 이들 재세례파 가운데 어떤 이는 재세례를 주장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물에 빠뜨려 죽임당하고, 어떤 이는 귀향갔던 곳에서 역병에 시달려 죽기도 했으며 또는 이단이라고 불태워 죽임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들에 대한 탄압은 적어도 두 세기를 넘도록 계속되었다.
1527년 재세례파의 비밀집회에서 일곱 가지 조항이 그들 공동체의 기본정신으로 선포되어 오늘까지 지켜오고 있는 내용들이기도 하다. 이 일곱가지 속에는 물론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원칙이 첫번째로 들어 있으며 그 밖에도 공동체의 영적인 하나됨을 위해 죄지은 자는 두번 경고를 준 뒤에 축출하는 조항, 일단 공동체에서 쫓겨난 사람들과는 결코 함께 하지 않는다는 조항, 이러한 조치는 죄지은 자를 훈계하여 다시 공동체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의 육체를 벌하거나 죽이거나 할 수 없다는 조항, 악한 세상과 철저히 스스로를 분리하며 악한 세상의 폭력적인 무기는 절대 들지 않는다는 조항, 하늘과 땅에 대하여 결코 맹세하지 않는다는 조항들이 들어 있다. (아미쉬 공동체에서 추방당할 만한 죄를 짓고 죄 속에서 살고 있을 때,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했을 때, 그리고 거짓된 교리를 가르칠 때이다.)
재세례파의 여러 지도자들 가운데 오늘날 아미쉬의 기원을 만든 것은 네덜란드의 메노 시몬스라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뒤를 따라 이루어진 분파는 오늘날 우리가 메노나이트(Mennointes)라고 부르는, 아미쉬와 가장 가까운 종파이다. 메노 시모스는 그리스도가 믿는 사람의 공동체 속에 임재하는 것이지 교회의 예식 속에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속에서 정치와 야합하고 있는 당시의 천주교와 개혁교회 모두를 비성서적이라고 비판하였다. (메노 시몬스보다 한결 급진적이었던 재세례파의 한 집단에서는 1525년 농민전쟁에 적극 참가하였고 당시의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세력이라고 지목되어 역시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메노나이트라는 종파에서 또 다시 오늘날의 아미쉬가 갈라져 나온 것은 스위스 사람 야콥암만(Jacob Amman)으로부터 였으며, 아미쉬라는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다. 다른 메노나이트 집단과 아미쉬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것은 배교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 암만은 일단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축출당한 이들과는 교회 밖에서도 화합을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오늘날도 전통적인 아미쉬 공동체에 속한 집안에서는 축출당한 자식이 집에 돌아오면 다른 식구들과 한 상에서 음식을 나눌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대신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어린 동생들과 함께 다른 상에서 음식을 먹게 한다. 세례를 받지 않은 어린이들은 정식으로 아미쉬 공동체에 속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암만이 강조한 것은 공동체에속한 사람들이 섬기는 뜻으로 서로 발을 씻기는 예식이었는데, 이것 역시 오늘까지도 아미쉬 예배에서 반드시 지켜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종교적인 분파가 기존 교단에서 갈라져 나올 때 흔히 그렇듯이, 아미쉬 역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암만의 지도 아래 자기들의 집단과 세상을 철저하게 분리시키면서 단지 종교적인 뜻에서만이 아니라 옷이며 머리 모양에 이르는 생활의 구석구석에 자기들의 신념을 담아 지켜왔다.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변해 온 세계의 움직임 속에서, 그것도 전통사회에 가까운 유럽에서는 여기저기 흩어져 다른 교단들 안에 흡수되고 말았는데 거꾸로 문명의 최첨단을 걷는 이곳 미국으로 흘러온 아미쉬들이 몇 세기 전과 거의 변함없는 신앙과 문화의 통일된 공동체를 이루어 온 것은 바로 그러한 종파운동 특유의 성질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오늘날 아미쉬들이 유일하게 "이방인" (아미쉬들은 바깥 사람들은 통털어 Englisher라고 부른다)의 부류에서 제외하여 자신들과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인정하고 있는 메노나이트들도 일반적인 사회의 기준으로 보자면 무척 전통적인 면모를 고수하고 있지만 아미쉬들에 비하면 훨씬 산업문명에 대해 열려있고, 변화에 대해 열려 있으며, 고등교육을 거부하는 아미쉬들과 달리 이미 19세기부터 자체의 고등교육기관까지 설립하여 운영해오고 있다.
대서양을 건너
아미쉬가 메노나이트에서 갈라져 나오기 꼭 10년 전인 1683년,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의 메노나이트들은 이미 펜실베니아로 이주하여 오늘날 필라델피아의 저먼타운(Germantown)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미쉬가 독자적인 집단으로 미국에 건너오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들어서였다. 극심한 탄압속에서 공식적인 기록을 남길 수 없었던 탓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아미쉬들은 대개 두 차례에 걸쳐 미국으로 건너온 것으로 보인다. 즉, 첫번 이주는 1727-1770년에, 두번째는 1815-186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이루어졌다고 보면 무리가 없다.
당시 유럽에는 재세례파들을 사냥하는 비밀경찰조직이 곳곳에 퍼져 있었다. 스위스 정부는 특별위원회까지 만들어 재세례파들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잡히는대로 이들을 인두로 지지고 감옥에 가두고 이탈리아에 노예로 팔아 넘기기도 했으며, 재세례파에 속한 부모에게서 낳은 아이들은 사생아로 규정하였고 그들에 대한 상속권도 거부하였다. 대신 빼앗은 재산으로 비밀경찰들에게 상을 내리고 필요한 경비를마련하였다. 가혹한 탄압상황을 맞은 재세례파 교인들은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했다. 스위스출신의 재세례파들은 대개 오늘날 프랑스의 알사스지방(당시는 스위스 땅)을 거쳐남부 독일, 프랑스, 펜실베니아 등으로 이주하였으며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네덜란드, 프러시아, 폴랜드 등으로 망명한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탄압에 더하여 계속되는 전쟁과 기근 때문에 18세기 초에는 많은 사람들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을 피난처로 택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당시 유럽상황은 종교적 박해를 받던 이들 뿐 아니라 천주교, 루터교, 개혁교, 모라비안교에 속한 이들까지도 살길을 찾기 위해 이민길에 나설 수 밖에 없게 만들고 있었다. 자기가 살던 조상의 땅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매우 불경스럽고 지탄받아 마땅한 일로 여기는 것이 전통사회인 당시 유럽의 눈이었다. 쫓겨나다시피 자기 땅을 떠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미국으로 건너온 아미쉬들 역시 유럽에 남은 이들보다는 한층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닌게 아니라 맨 처음 미국에 정착한 아미쉬들은 오늘날에 비해 훨씬 개인주의적이고 가족중심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첫 이민기로부터 약 한 세기동안의 혼란기를 거친 뒤에야 오늘날과 같은 아미쉬 공동체의 기초가 닦여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다음 세기에 이주하여 인디애나와 온타리오에 정착한 아미쉬들 가운데 많은 수는 미국 아미쉬가 유럽에 남은 이들보다 훨씬 고루하다고 여기고 주변의 메노나이트등 다른 종파에 흡수되기도 했다. 사실상, 미국 아미쉬들만큼 아미쉬 고유의 문화적 전통을 지켜온 사람들은 없다. 유럽에 남은 아미쉬들이 계속해서 겪어야 했던 박해로부터 일단 자유로울 수 있었고, 여기서는 커다란 공동체를 이루며 살 수 있는 넓은 땅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버린 땅을 옥토로
종교적으로는 당시 사회에서 용납받지 못하는 이단의 처지였으나 재세례파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농부들이었다. 이들이 가는 곳마다 폐허가 된 땅도 옥토로 일으켰으며, 종교적인 탄압을 피해 자기 땅을 떠났을 때 유럽 제국은 바로 그 밭가는 능력때문에 이들의 부재를 몹시 아쉬워했다고 한다. 아미쉬를 포함한 재세례파들이 밭가는 일에 뛰어났던 것은 물론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대신 인간을 오히려 자연의 한 부분으로 조화시키고자 하는 신앙의 바탕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여러 세대에 걸친 탄압속에서, 잘못된 종교제도를 개혁하겠다던 원래의 목표는 현실적으로 살아남을 길부터 우선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로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쫓기는 상황속에서 그들은 상조회를 발달시켰으며 집약적 농업방식을 개발하였고 근면하게 땀흨려 일하여 말 그대로 버린 땅도 옥토로 만드는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결국 유럽 여러 군주들은 종교적으로는 이단으로 몰면서도 값비싼 노동력으로 이들을 탐내곤 하였는데,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오늘까지 아미쉬들로 하여금 자신과 당장 관계있는 주변환경 바깥의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경향을 낳게 되어, 때로는 바깥 사람들에게서 크게 오해를 사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예 초기부터 철두철미 무기를 들 것을 거부하고 따라서 징집을 거부해 온 소위 "순수한 평화주의자'로서 아미쉬들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군대에 가기를 거부하고 감옥에 간다든가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다른 노역으로 이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반전운동이 한창이었던 60년대 반전 · 평화운동가들은 아미쉬들이 자신들처럼 체제저항적인 입장에서 반전운동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말았다.
알고 보니 아미쉬들은 무기를 들지 않는다는 것 뿐이지, 권력잡은 이들을 신이 정한 지배자로 받아들여 절대 복종해야한다고 믿는 점이라든가 압도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한다든가 하는 점에서 여타 보수적인 기독교의 교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더 나아가 "맹세하지 않는다"는 신조때문에 공적인 직책을 절대 맡지 않을 뿐더러,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결코 소송따위는 걸지 않는데 그 이유인 즉 차라리 당하는 것이 낫지 자기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송사하는 것은 교만한 표시이며 스스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므로 겸손을 미덕으로 하는 성서적 신앙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니 일반적인 인권운동적 측면에서 보아도 이들은 아주 실망스러운 사람들로 인식되고 말았다. 더구나, 정해진 세금을 내는 것은 국민된 의무로 알아 반드시 지키되 그 세금이 전쟁과 같이 그릇된 곳에 쓰이는 것에 대해서는 자기 책임 밖의 일이라고 (신의 뜻이라고) 포기해 버린다든가, 공동체안의 노인들은 철저히 공동체가 부양한다는 이유로 (다시 말하면 공동체정신을 손상시킬수 없다는 이유로) 정부의 사회복지 연금을 단호히 배격한 점들은 사회진보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실망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 밭가는 일이 거의 모든 아미쉬의 소명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상은 자연스럽게 고등교육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대체로는 후대들은 "세상에 오염시킬 수 없어서" 8학년 이상의 교육을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 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도 원래는 4학년 이상의 교육은 필요없다고 하던 것을 여러 해에 걸친 싸움에서 양보하여 8학년까지로 용납하게 된 것이다), 현실적인 이유는 일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남자아이들의 경우 3학년을 마칠 나이가 되면 농사 일에 큰 몫을 할 때인데 평생 해 나가야 할 농사 일과 거의 전혀 관계가 없는 학교교육은 지나친 낭비라는 생각이다. 아미쉬가정에서는 아주 어린 아이때부터 농사일을 거들기 시작하며, 한 가족 평균 7명씩 낳는 아이들은 그대로 엄청난 노동력으로 간주된다.
얼핏 너무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 그들은 정직하게 자기 삶을 필요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미쉬 학교에서는 읽고 쓰고 셈하는 세 가지 능력을 주로 가르치며 농사를 짓는데는 그 이상의 교육이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자기 고유의 언어(Pennsylvania Dutch, 또는 Pennsylvania German이라 부르는데 독일어의 한 방언이다)를 모든 생활에서 보존하는 한편 바깥 세상과 교류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도록 모든 아이들이 완벽하게 영어를 쓰고 말하게끔 이중언어 능력을 키워주고 있는데 이것 역시 몹시 현실적인 셈에서 나온 교육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8학년을 마친 아이들에게 강압적으로 농사일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의 현실적인 요구가 어떠한가를 놓고 부모는 아이들을 설득하는 작업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기의 능력과 힘이 가족과 공동체에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는가를 가늠해 보고는 선선히 농사 일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닫힌 사회에 남기를 원하는 젊은이가 있을까 싶지만, 평균 7명 씩 되는 한 가정에는 아미쉬로 남기를 선택하는 아이들이 평균 4-5명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들이 겪어온 여러 과정들이 신앙적인 가르침과 맞물려, 농사일에 대한 아미쉬들의 헌신성은 이제 하나의 자부심으로 굳혀진 듯하다. 오늘날은 아미쉬 인구의 50%가량만이 직접 농사와 관계된 일 또는 농업공동체를 뒷받침하는 소규모의 수공업에 종사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산업사회속의 아미쉬 공동체
1890 년대부터의 기록만 보더라도 아미쉬 공동체는 매 10년마다 30-48%의 인구증가를 보여 왔다. (1979년까지의 통계를 보면 미국 전체에 살고 있는 아미쉬가 모든 85,783명으로 되어 있다.) 전체 인구의 75%가 오하이오, 펜실베니아, 인디애나주에 살고 있다.
아미쉬 공동체는 대가족제도 속에서 극히 낮은 유아사망율을 유지하고 있으며 평균수명을 높여가면서 낙태를 철저히 금지하고 있는데, 이같은 요인들이 합하여 아미쉬 공동체의 양적성장을 부추켜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성장에 못지 않게, 아무리 초보적인 문명의 이기라도 공동체정신을 위협 할 만한 것은 심각한 논의를 거쳐 철저히 차단해 온 이 공동체가 급진전하는 문명시대의 유혹속에서도 내적 동질성을 잃지 않으면서 살아 남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젊은 세대 가운데 75% 이상이 아미쉬로 남기를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다.
자녀들은 아미쉬로 남게 하는데는 부모의 경제적인 능력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성장하여 결혼한 자녀를 위해 농장을 사거나 자금을 대주는 일 등 자녀의 사회적인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아미쉬 부모들은 큰 책임을 느낀다. 부모가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경우에 자녀들도 아미쉬 공동체를 떠나는 경우가 많고, 부모가 신체적 불구가 되어 농사 일을 할 수 없어지는 경우에는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아미쉬 공동체를 떠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율을 차지하며, 개별 가정의 경우를 떠나서 아미쉬 공동체 전체를 볼 필요가 있다.
랭커스터 카운티 (펜실베니아주)의 아미쉬들은 중서부(오하이오, 인디애나) 아미쉬들과 기본 특징을 같이 하면서도 문화적으로 좀 다른 양상을 띤다. 즉, 가장 보수적인 공동체라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랭커스터의 아미쉬 공동체에서는 문명의 이기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고 농사 일과 낙농업에 필요한 기계들을 일부 받아들임으로써 젊은이들이 농장에 머무를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를 위해 성직자들은 매년 두 번씩 모여 공동체의 복지를 위한 회의를 갖는다. 다른 주의 아미쉬 공동체보다도 랭캐스터 카운티의 아미쉬가 경쟁적인 산업사회의 생리를 한층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중서부 아미쉬들은 농업의 기계화를 단호히 거부하는 대신 자전거를 타도록 허락한다든가 일반 상점에서 산 옷들도 입을 수 있게 한다든가 하여 젊은이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또한 이 지역 젊은이들은 농사 일을 포기하고 대신 목수가 된다든가 작은 공장 노동자로 취직한다든가 하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여자 아이들의 경우에는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할 수 있는 집안 청소부라든가 작은 가게의 종업원으로 취직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전통적 농업공동체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 사회경제적인 구조 자체가 크게 변화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미 1970년에 펜실베니아주 아미쉬 가운데 비농업 분야에서 외부 사람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가장의 비율은 5%가 채 안 되었던 반면, 인디애나주 아미쉬의 71%가 외부사람에게 고용되어 비농업분야의 일을 하고 있다.
전통적인 농업공동체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랭커스터 카운티의 경우에서도 비농업분야에 취업하는 사람들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1954년까지만 해도 공장에 취직하는 사람들은 파문을 당하는 정도였으나, 1960년 이후로는 이러한 농장 밖의 취업이 증가하였다. 일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리고 자급자족경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사방을 둘러싼 까닭이다. 요즘에는 농사를 짓고 싶은 아미쉬 청년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바로 돈 문제다. 이자율이 너무 높고 기계도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신앙공동체로서의 아미쉬
이렇게 나름대로의 지역적인 편차와 시대상황에 따른 변화는 있지만 아미쉬 공동체의 내적인 통일성만큼은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바깥 세상과 교류하고 접촉하는 가운데 아미쉬 공동체의 교세 또한 크게 확장되어 왔다. 1900년만 해도 아미쉬 교구는 6개에 불과했으나 1950년에는 25개로, 1979년에는 60개로 늘어났다.
신앙공동체로서의 아미쉬는 결코 특정 개인에게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며 공동체의 합의된 뜻을 가장 중요시 여기고 공동체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한다. 설교자를 선택할 때, 어떤 사람을 파문할 때, 그를 다시 받아들일 때, 그리고 곤궁에 처한 이들을 돕고자 할 때 그 결정은 공동체 전체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미쉬 교회에서 스스로 성직자가 되기 위해 별도의 과정을 밟는다든가 신학교를 간다든가 또는 소명을 받았다고 공포를 한다든가 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이러한 일은 모두 세상에 속한 일로 판단되어 파문거리가 될 뿐이며 자기를 높이는 일로 보아 단죄의 대상이 된다. 또한, 성직자로서의 직분수행에 대해 봉급을 받는다든가 또는 해당교구 밖의 사람을 초빙하여 교구의 성직을 맡게 한다든가 자기 공동체밖의 사람을 굳이 개종시키려 한다든가 하는 일도 찾아볼 수 없다.
공동체의 뜻에 따라 자기 교구의 사람들 가운데 뽑아 맡기는 세 가지 직분은 감독, 설교자, 집사들이다. 감독은 세례, 혼례, 설교자 임명, 파문, 또는 파문당한 자들의 재가입 등과 같은 교회 전반의 예식을 집행한다. 감독이 되려면 적어도 자녀 가운데 한 사람 이상이 아미쉬에 속해 있어야 하고 아직 아미쉬로 세례를 받지 않은 자녀들도 모범적인 평가를 받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아미쉬 공동체에서 젊은 감독이란 찾아볼 수 없다. 감독과 함께 각 교구에는 두 명씩의 설교자가 있는데 이들은 어떠한 보조자료 없이 청중앞에서 설교하고 훈례할 수 있도록 제비를 뽑아 선택된 이들이다.
집사는 곤궁한 이들이나 과부들을 돕기 위해 기금을 모으고 예배나 의식에 필요한 일들을 준비하는 등 살림을 맡아 하는 사람인데, 이에 더하여 교구 내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하며 또한 파문이 결정되었을 때에도 파문당한 사람에게 그 사실을 통보해야 하는, 가장 어려운 일을 맡은 사람이기도 하다. 이 세가지 직분은 별다른 특이한 것은 이들이 임명되는 예식 도중에 청중들은 이들에게 얹혀잔 직분의 무게를 깊이 동정하면서 끊임없이 눈물 흘리고 애도한다는 것이다.
아미쉬 공동체는 다른 교회나 큰 집회에 대표를 보내는 일이 없다. 대신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구호재단에 기금을 모아 보낸다든가 소방서에 자원봉사자로 나간다든가 하는 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호사업에 참여한다고 해서 외부 사람들과 이런 문제를 함께 토론한다거나 활동방침을 의논한다거나 하는 일도 역시 없다.
아미쉬 공동체가 예배를 위하여 모이는 것은 2주에 한번, 일요일 아침이다. 세 시간이 넘는 긴 예배의식 가운데 특이한 것은 역시 서로의 발을 씻기는 예식과 16세기 그대로의 찬송이다. 때로 37절까지 이어지는 장중하고 비감한 성가들은 유럽에서 탄압받던 시절 순교자들의 고난을 담은 내용이 많으며, 다른 재세례파에서는 이미 잊은 지 오래 되는 가락들이건만 아미쉬 예식에서만큼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예배의식은 모든 중세 독일어로 진행되며, 아미쉬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은 아주 능숙하지는 않더라도 중세 독일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예배가 끝나고 오후에는 서로의 가정을 방문하는 일이 큰 일과가 된다. 이것은 예배가 없는 격주 일요일에도 역시 큰 일과로 치루어진다. 여름이 되면 인디애나와 아이오와 아미쉬 공동체들은 예배가 없는 격주 일요일마다 교회학교를 여는데, 교회학교의 가장 큰 목적은 성경공부를 통해 독일어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한다.
아미쉬 마을을 뒤로 하고 아미쉬 공동체의 엄청난 문화전통의 힘을 보면서 무엇보다도 이러한 공동체가 이렇게도 단단히 유지될 수 있었던 저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때는 앵글로 색슨 문화에 무조건 자기를 버리고 동화하라고 윽박지르다가 또 어떤 때는 여기는 다원주의 문화사회라고 자랑하면서 자기 고유의 문화전통을 챙길 여유란 것은 단 한번도 주어진 적 없었던 소수민족들을 어이없이 호통치기도 하는 미국 주류사회의 변덕스러운 소수민족 몰아치기 속에서, 공동체를 조금이라도 해치는 일은 아무리 편리하고 좋아도 단호히 거부하는 이 사람들은 도무지 한번도 그 공동체를 포기한 일 없이, 아니 포기하고 위협 한번 당한 적 없이 당당하게 살아온 사실만으로도 문화박물관 안의 진열품이라도 되는 양 신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고 그들이 앞으로는 어떤 식으로 자기를 지켜갈 것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어졌다.
그런가 하면 주변에 밟힐 정도록 깔린 비참한 현실들을 비웃듯 무슨 낙원처럼 다가드는 이미쉬 공동체의 도도한 풍요로움이 웬일인지 돌아서는 걸음을 무척도 무겁게 했다.
"내가 곤경에 처하면 내 형제들이 와서 도와줍니다."라는 자신만만한 아미쉬 농군의 말이 그저 부러워할 만한 공동체를 가진 자랑찬 말소리로만은 들리지 않는 것이 별스러웠다. 그에게는 축복인 "내형제"가 웬지 "아메리칸 드림"의 다른 한쪽을 들여다 보는 것만 같은 섬뜻한 생각을 일으켜, 돌아오는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
김희상:이화여대 영문과, 남감리교대학 신학석사.
현재 필라델피아 마당집에서 일하고 있음.
19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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