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사 (호세아 9장 1절 – 17절) 9:1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음행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 2 타작 마당이나 술틀이 그들을 기르지 못할 것이며 새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 3 그들은 여호와의 땅에 거주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은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5 너희는 명절 날과 여호와의 절기의 날에 무엇을 하겠느냐 6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7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온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8 에브라임은 나의 하나님과 함께 한 파수꾼이며 선지자는 모든 길에 친 새 잡는 자의 그물과 같고 그의 하나님의 전에는 원한이 있도다 9 그들은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부패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11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 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4 여호와여 그들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15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에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 그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 반역한 자니라 16 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17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개역개정) 종교 정치 지도자들의 타락은, 그 민족의 정신과 삶을 황폐화시켜 버립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구약 시대부터 시작해서 신약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탄식이 있습니다. 이 죄악의 물결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반복하여 흘러내려오고 있고, 깨어있는 신앙인들로 탄식하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종교 정치 지도자들이, 세상적인 가치관을 마치 하나님의 뜻이나 되는 것처럼 왜곡시켜 백성들을 미혹하는 거짓된 죄악을 일삼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경계하시기를 첫 산상 설교의 마지막 결론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17:15-16)고 하시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돌이키는 이들이 복됩니다. 한국 교회가 천마산기도원 이천석 목사가 강단에서 함부로 막말을 내뱉기 시작한 이래로, 그것이 마치 권위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인지 강단에서 남용되더니, 최근에는 전광훈 목사가 그리고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정치가들의 입에서 안 믿는 사람들도 자제하는 험악한 말을 내뱉는 일상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이제 일반적이 되다보니, 이 문제를 조금이나마 극복해보겠다고 새로운 번역본인 ‘새 한글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아예 존댓말 표현으로 바꿨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것인지가 마음 아픕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서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말미암아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7:16)며,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과 세상의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도 웃음거리가 될 것을 경고합니다. 1. 축제를 왜곡한 심판이 어떻게 선언됩니까? 오늘의 성경 본문은, 호세아 선지자의 아홉 편의 설교(4:1-14:9) 중에 다섯 번째 설교(9:1-17)입니다. 그 내용은, 추수의 기쁨을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게 돌린 북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처럼 백성들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부패하게 만든 종교 정치 지도자들의 타락과, 잘못된 지도자들에게 맹종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첫 사랑을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으로, 이러한 저들을 향해 저주 밖에 간구할 것이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추수의 기쁨을 표현하는 초막절 축제를,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의식이 아닌 우상인 바알 신을 숭배하는 성대한 광란의 축제가 되게 한 것에 대한 호세아 선지자의 책망으로 오늘 성경 본문은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9: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시간이 지체되자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출32:1)고 아론을 위협합니다. 이에 아론은 저들의 위협을 잠재우기 위해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는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32:4)라는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백성들은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출32:6)고 하는 광란의 축제를 벌입니다. 얼마나 요란했는지 산 위에까지 그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출32:17-19).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지만, 모세의 간곡한 중보로 일부만을 처벌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북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입맛을 맞추고 자신들의 뜻대로 저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거짓된 우상숭배를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생활에 접목하여 미혹하는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우상숭배자들의 예배를 통해 자신들의 기쁨을 극대화하는 광란의 축제를 벌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네가 음행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9:1)고 호세아 선지자는 책망합니다.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예배를 가리켜서, 주님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신30:16)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주실 축복을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30:16)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우상 숭배 문화를 받아들여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기쁨과 만족을 위한 광란의 축제를 벌이는 종교 예식들로 변질시키는 것을,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신30:17-18)고 경고하셨습니다. 신앙의 삶을 사는 것보다 종교 행위가 쉽습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첫째로 “타작마당이나 술틀이 그들을 기르지 못할 것이며, 새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9:2)라며, 그들이 먹고 마시던 양식을 더 이상 공급하지 않고 끊겠다고 선언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여호와의 땅에 거주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은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9:2-3)며, 약속의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에서 추방하여 다시금 이방의 노예가 되게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셋째로, 이방의 포로가 된 저들이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하던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포도주를 부어 드리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의 제물은 애곡하는 자의 떡과 같아서…먹는 자는 더러워지나니,…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님이니라.”(9:4). 부정한 자들이 드리는 부정한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고 가증하게 여기겠다며, 따라서 주님을 향한 예배를 광란의 축제가 되게 한 저들이 더 이상 할 것이 없음을 “너희는 명절날과, 여호와의 절기의 날에 무엇을 하겠느냐?”(9:5)고 경고합니다. 2. 부패한 죄악의 심판이 어떻게 선언됩니까? 호세아 선지자뿐만 아니라 많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 앞에 “진실”과 “인애”를 회복한 백성들로 돌아오기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자기 탐욕의 성취와 자기 기쁨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우상 숭배적인 신앙인을 향해 호세아 선지자는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9:17)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주 일시적인 사건이 될 것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저들의 희망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철저하게 꺾어버립니까?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9:6).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전쟁이 일어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잠시 남쪽의 “애굽”과 그 수도인 “놉”으로 피해갔다고 오겠다며, “은”과 같은 “귀한 것”들을 땅에 묻고 떠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행해진 국가의 영원한 멸망으로 인해 피난간 곳에서 “장사하리니”, 재산을 묻은 땅에는 “찔레가 덮을 것이요”, 살던 “장막”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며, 돌아갈 조국이 없어져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죽다보니 황폐화될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따라서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온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9:7)고 선언합니다. “보응의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은만큼 당할 날이 다가왔다는 선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까지 치닫게 된 것은, 백성들을 죄악으로 미혹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맹종한 결과라고 깨우칩니다.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9:7).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보는데, 하나는 타락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는 표현으로, 또 하나는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이 거짓된 교훈으로 백성들을 미혹한 것과 거기에 맹종한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표현으로 봅니다. 이처럼 혹세무민(惑世誣民)하기에 바빴던 북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이 민족과 백성들에 대한 자기 책임과 사명을 팽개쳐버린 것을, “에브라임은 나의 하나님과 함께 한 파수꾼이며, 선지자는 모든 길에 친 새 잡는 자의 그물과 같고, 그의 하나님의 전에는 원한이 있도다”(9:8)고 밝힙니다.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창48:17-20)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함께 한 파수꾼” 역할을 했어야 했지만, 우상 숭배와 악독으로 가득한 곳이 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백성들을 자각과 각성으로 일깨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해야 했지만, 오히려 백성들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원한”을 품게 하는 등 거짓 교훈으로 미혹하여 “모든 길에 친 새 잡는 자의 그물”처럼 저들을 올무에 걸어 파멸에 빠트리기에 바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혼탁하고 부패한 죄악의 상황을 “그들은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부패한지라”(9:9)며, 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9:9)고 심판을 선언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매순간 참된 신앙의 소명을 지탱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힘의 근원을, ‘죄악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으로 일깨웁니다.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부패”했다는 것은, 사사기 19-21장에 나오는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은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삿19:1)라고 시작됩니다. 사사 시대 말기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된 레위 사람이 첩을 거느렸다고 하는 것부터가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그 첩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친정으로 가버리자, 가서 첩을 설득하여 데리고 돌아가던 중에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보니 당시 “예루살렘”으로 이방 민족이 사는 “여부스 사람의…성읍”(삿19:11)이었다는 점에서, 그 레위사람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삿19:12)고 하며 위선자가 경건한 신앙인 같은 모습을 표출합니다.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삿19:14)에서 머물던 그 밤에, 그 레위 사람의 첩이 “그 성읍의 불량배들”(19:22)에 의해 윤간을 당하여 죽게 됩니다. 레위 사람은 첩의 시신을 말에 싣고 에브라임 집에 돌아가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삿19:29), 이 일에 대한 징계를 12지파에 호소하며, 경건을 잃어버린 자기 죄악으로 벌어진 사건을 민족적인 엄청난 분규로 키워갑니다. 이 때문에 모인 11지파가 그 짓을 한 이들을 내어놓을 것을 베냐민 지파에게 요구하지만 거부합니다. 이에 “사십만 명…전사”(삿20:17)가 베냐민 지파와 싸우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싸움에서 져 광야로 도망간 “육백 명”(삿20:47)의 베냐민 지파의 “용사”를 빼고는,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다 살육해버리면서 한 지파가 멸족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고 나서야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삿21:6)며 탄식합니다. 문제의 시작부터 쌍방의 대처까지가 모든 것이 하나님을 망각한 총체적인 죄악의 참담한 결과였습니다. 따라서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부패”한 호세아 시대 역시, 동일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북 이스라엘의 신앙 상태를 어떻게 일깨웁니까?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9:10).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4:1)라는 탄식 밖에 나오지 않는 신앙인들이 사는 이스라엘 땅의 파멸이 어떻게 선언됩니까?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9:11-12). 3. 타락한 민족의 저주를 어떻게 간구합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아홉 편의 설교를 시작하면서 전체적인 서론으로 말씀한 첫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4:1-3). 당시나 오늘날이나 믿는 사람들은 다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지만,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라는 의미라는 것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그 결과로 빚어지는 타락한 사회의 모습을 미처 생각하지 못합니다.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는 땅을, 하나님이 떠나신 땅으로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것을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9:12)라고 일깨웁니다. 사실 하나님이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축복과 은혜를 베푸시기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자기 기쁨과 만족을 위한 탐욕의 성취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이러한 동일한 죄악을 “내가 보건대, 에브라임은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으나,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9:12)고 선언합니다. 주님의 백성과 자녀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를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은 곳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그 축복과 은혜를 받은 이들은 이에 감사하고 자족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기보다, 놀랍게도 잘못된 신앙의 사람들의 미혹에 빠져 자기 야망 성취를 위한 우상 숭배에 집착합니다. 그럴 때 주님을 배신한 이에 대한 심판을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며, 그 자녀들로 남을 파멸케 하는 자들에게 넘겨주어 죽게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자기 탐욕의 저주에 빠진 이들을 위해서, 더 이상 어떤 중보기도조차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다는 호세아 선지자의 탄식이 어떤 기도로 표출됩니까? “여호와여, 그들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9:14).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의 죄악에 빠진 우상숭배자들에게는, 그 어떤 것을 주어도 감사와 기쁨과 자족이 없습니다. 따라서 놀랍게도 호세아 선지자의 기도는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9:14)라고 하는 저주의 간구였습니다. 더 이상의 출산을 통해 이런 죄악의 백성들이 태어나지 않게 하시고, 태어난다 할지라도 먹을 젖이 없게 하셔서 그 생명이 끊어지게 해 달라니, 섬뜩하지 않습니까? 이미 하나님은 저들의 탐욕의 죄악과 심판을 가리켜서,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4: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의 죄악을 가리켜서,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에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9:15)고 선언합니다. 거룩한 땅이었던 “길갈”을 우상을 숭배하는 탐욕의 처소가 되게 해버린 것(4:15)을 탄식합니다. 하나님이 당부하신 거룩한 삶에는 관심도 없고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에만 집착하기에 “그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4:15)며, 죄악의 행위를 뻔뻔스럽게 행하는 신앙인들의 추방과 그들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를 표출합니다. 이러한 행위 뒤에는 우매한 백성들을 미혹하는 신앙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의 죄악이 있었음을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 반역한 자니라”(9:15)고 일깨웁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의 저주의 간구(9:14)에 대한 응답의 심판을 어떻게 선언하십니까? “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9:16).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호세아 선지자가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9:17)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한국 교회가 모두 큰 교회로의 성장만을 지향하면서, 사회의 지탄과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전도는커녕 교회 안의 신자들이 계속 빠져나가고, 심지어 교회는 안 나가지만 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는 ‘가나안 신자’까지 생겼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 나가는 신자라는 뜻으로, ‘안나가’를 뒤집어 표현한 웃기면서 슬픈 단어입니다. 떠돌게 하는 자나 “떠도는 자” 모두가,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우리의 잘못된 신앙을 돌이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부 목사들은 동성애 문제만을 부각시키며, 이에 맹종하는 교인들로 교회 내부와 목사들의 죄악을 말도 보지도 못하게 합니다. 동성애가 성경적으로 분명한 죄악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서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나 사회에서 극히 일부적인 죄악입니다. 동성애 문제만을 부각시키며, 오히려 교회 안에 만연해 있는 죄악과 성경에서 더 크게 지적하고 있는 죄악에 대해서는 침묵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교인들의 윤리 수준이 땅에 떨어져가고 있고, 심지어 교회를 떠나고, 사회는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상황에도 저들이 침묵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1:28-32). 우리가 돌이켜야 할 신앙 자세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주님 앞에 새로운 마음과 자세로 나아가는 부활의 아침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