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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가 진상용 원문보기 글쓴이: 국화
요즘 아침 출근 길 안개가 대단합니다.
겨우 내 땅 속 깊이 갇혀 있던 대지의 깊은 숨이 물렁해진 땅 사이로 뿜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일찍 봄을 기다리는 것 아닌가 싶지만 세상 돌아가는 모양이 봄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다시 아이들 모습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지난 이야기를 훑어 보았더니 짐 데일리, 존 브라운,
헬렌 알링햄, 윌리엄 부게로, 호아킨 바스티타, 소피 앤더슨과 찰스 바버까지 그 동안 아이들을 그린 화가들을
제법 많이 만났더군요. 아이들 모습을 보면 즐겁습니다. 제가 나이가 들었다는 뜻인가요?.
(저도 하나만 주세요 May I Have One Too / 1880)
그림의 내용은 한 눈에 알 수 있는데 등장 인물들의 관계를 설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여인의 옷 자락을
잡고 손을 내밀고 있는 아이와 여인은 무슨 사이일까요? 차림새가 비슷해서 모녀 같아 보이는데, 그렇게 보기엔
여인의 얼굴이 좀 굳어 있습니다. 물론 한 손은 바구니에 들어가있지만요. 여인과 양 손에 먹을 것을 쥔 아이의
관계도 모녀라고 보기에는 옷 차림에서 구별이 됩니다. 그나저나 한 발을 살짝 올려 놓은 여인의 고운 자태가
낯설지 않습니다. 어디서 봤을까 ----- 아, 맞다! 그리스 조각.
한 과일을 베어 문 아이가 빤히 저를 쳐다보다가 한 마디 합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그렇게 중요해요?’
‘녀석,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정의 되지 않고 비틀어지면 세상도 덩달아 비틀린다는 것을 네가 알기나 하니?
손에 든 것이나 얼른 먹어라’
에밀 뮤니에르 (Emile Munier / 1840~1895)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고블랭 가문에 의해
세워진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일을 했고 어머니는 캐시미어 천 공장에서 광택을 내는 일을 했습니다.
아이를 셋이나 둔 부모가 맞벌이를 한 것으로 봐서는 부유한 가정 사정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당시 파리
대부분의 사정이 그랬었지요.
(각별한 순간 A Special Moment / 1874)
‘음, 할 이야기가 있는데 ----‘ ‘ 무슨 이야기? 해 봐”
자기도 모르게 손을 여자 아이의 무릎에 올려 놓게 되었습니다. 사내 아이의 몸에는 긴장한 자세가 역력합니다.
여자 아이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지런히 모은 발과 숙인 고개, 그리고 다문 입술을 보면 눈은
뜨개질에 가 있지만 온 신경은 사내 아이의 말에 있는 듯합니다. 그녀의 머리를 묶고 있는 보라색 머리 끈이
풀리면 여자 아이는 처녀가 될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모여라 꿈 동산’ 에 나오는 인형 정도의 머리 크기를
가진 사내 아이도 복장은 청년의 그 것입니다. 정말 각별한 순간입니다. 무슨 이야기였을까요?
뮤니에르는 삼형제 중 둘째였는데 형제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다니던 공장에 입학(?)하는데 루이 14세의 소유였던 고블랭 태피스트리 공장에서는 금속공예와
목공예 그리고 프레스코화 작업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술과 기술을 배우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3형제 중
맏이만 끝까지 공장에 남았고 아버지처럼 선임 기술자가 됩니다. 저도 맏이이지만 맏이들이 좀 고지식한 면이
있죠. 아닌가요?
(편지 La Lettre / The Letter)
편지를 마지막으로 써 본 것이 언제인가 싶습니다. 봉투를 열어 편지지를 펼치고 글씨와 함께 편지를 보낸
사람의 얼굴 그리고 마음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편지를 접은 순서만 봐도, 편지지의 색깔과 무늬만 봐도
보낸 사람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한 참 흘렀어도 서랍 속 예전 편지를 펼치면 변하지 않은
목소리와 얼굴들이 나옵니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고 했지만 저에게는 편지가 남았습니다.
이제는 편지를 받아서 행복한 얼굴을 그림 속에서만 봅니다.
고블랭에서 뮤니에르는 아버지의 뒤를 따르기 위해 드로잉과 회화, 해부학, 원근법과 같은 미술 분야와 염색과
관련된 화학 수업을 받았습니다. 뮤니에르는 아벨 루카스로부터 드로잉을 지도 받았는데 스승과도 친했지만
스승의 가족들과도 친했습니다. 그러다가 스승의 딸인 앙리에뜨와 21살 되던 해, 1861년 결혼을 합니다. 스승이
장인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또 다른 재주도 좋으셨군요, 뮤니에르 선생님!
(제일 좋은 친구 Her Best Friend / 1882)
친구는 서로 닮는 것일까요? 아이의 눈과 고양이의 눈이 닮았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표정이 여러 가지로
읽힙니다. 고양이를 빼앗길까 봐서 몸을 돌린 듯한 것으로 보면 울기 바로 전의 얼굴입니다. 또 어찌 보면
고양이를 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대견해 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살짝 입 가에 미소가
걸린 듯 합니다. 묘한 얼굴입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고양이 눈입니다.
‘당신 뭐야!’ 고양이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장인이 된 스승 루카스 옆에서 뮤니에르는 회화 작업을 계속합니다. 부셰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장인과
함께 아카데믹 화법을 익혀나갑니다. 장인과 사위가 나란히 그림을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상상해 봤습니다. 참 유쾌한 장면 아닐까요? 우리와 달리 서양은 사위와 장모 사이가 안 좋다고 하는데 사위와
장인 사이는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큰 언니 La Grande Soeur / Big Sister)
우유를 한 숟가락 든 큰 언니는 동생을 채근하는데 동생은 영 딴 짓입니다. 큰 언니의 듬직한 팔을 잡고 있는
동생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성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큰 언니도 언니를 떠나서 엄마의 표정과
자세로 옮아가는 중입니다. 두 아이의 아빠인 제 막내 동생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에게 막내 모습은
제 팔을 베고 자는 초등학교 1학년의 모습에서 더 자라지 않고 있습니다. 둘 앞에 서 있는 부지런한 닭은
언니의 또 다른 모습 같기도 제 모습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검은 닭이군요 ----.
1860년대에 에콜드 보자르로부터 3개의 메달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실력이 사회로부터 인정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모든 것이 잘 풀릴 것 같던 뮤니에르에게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찾아
왔습니다. 살다 보면 불행이 골목길에 숨어 있다가 우르르 떼거리로 몰려 나올 때가 있는데 그나마 다행입니다.
(아이 어르기 Distracting the Baby)
장난감을 잡고 싶은 아이의 손보다 눈이 먼저 닿을 것 같습니다. 엄마의 손과 뻗은 아이의 손 사이의 거리는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줄어들겠지요. 줄어드는 거리만큼 세상의 중심으로 아이는 조금씩 다가 갈 것이고
엄마에게는 ‘아이를 어르는’ 시간이 차지했던 공간으로 세월이 채워지면서, 엄마를 조금씩 세상 밖으로
밀어내겠지요. 그게 부모들이 사는 길 아닐까요?
결혼 6년 만인 1867년, 아들 앙리를 얻은 것은 행복이었지만 아내 앙리에뜨가 심각한 류머티즘으로 아이를
낳고 3개월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두 사건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 저는 아내와
아이를 바꾼 것이라고 쓰고 싶습니다. 엄마가 너무 젊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옛날에 Autrefois (Long Ago) /1888)
‘독서 수업( The Reading Lesson)’ 이라는 또 다른 제목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눈부신 흰 드레스를 입은
아이의 얼굴에는 살짝 짜증이 어렸습니다. 턱 밑으로 깍지 낀 손을 보면 어지간히 수업이 싫은 모양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책을 펴고 읽을 곳을 가리키는 엄마의 표정은 단호합니다.
‘다시 읽어 봐, 어서’
저는 엄마 편입니다. 엄마 파이팅!
아내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1869년 뮤니에르는 파리의 살롱에서 첫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그 후 뮤니에르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주 파리 살롱에서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고블렝에서의 경력
쌓기를 포기합니다. 일주일에 어른들을 상대로 3일은 밤에 회화 수업을 하고 남은 시간은 혼자서 회화 공부에
전념합니다.
(마리 루이지의 초상 Portrait de Marie Louise /1880)
마리 루이지는 뮤니에르의 딸입니다. 그의 주요 모델이었죠. 막 잠에서 깬 모습인가요? 아이들을 천사라고
부르는데 항상 그렇지는 않지요. 그러나 이 순간만은 천사의 얼굴입니다. 돌 사진이 없는 저는 화가를 아버지로
둔 이런 아이들의 그림을 보면 아이가 부럽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그럴지 모르지요.
이 즈음 뮤니에르의 가슴으로 한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사르지니 (Sargines / 발음은 자신이 없습니다)는 장인인
루카스의 제자이자 아내와 친구였던 여인이었습니다. 파스텔로 초상화가로 명성도 있었고 살롱에서 전시회도
꾸준하게 개최하고 있었던 화가이자 드로잉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홀아비 생활을 정리하고 뮤니에르는
사르지니와 결혼합니다. 역시 ----.
(제발 --- May I / 1881)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나 봅니다. 손을 깍지 끼고 살짝 올려다 보는 눈에 빠지지 않고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간절함과 애원이 그대로 얼굴에 써 있습니다. 어른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얼굴이죠. 아니 가지고 있었다가
어디엔가 놔두고 이제는 기억도 못하는 얼굴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맑은 얼굴을 벗어 던지는
것의 다른 표현인가요? 맑은 얼굴 찾기 여행이라도 떠나야겠습니다.
재혼 무렵 뮤니에르는 윌리엄 부게로의 화실에 들어갑니다. 부게로의 작품은 젊은 뮤니에르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죠. 얼마 뒤 뮤니에르는 부게로의 최고 제자로 인정 받았고 나중에는 열 다섯 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친구처럼 지내게 됩니다. 부게로는 뮤니에르에게 별명을 지어 주었는데 ‘지혜(The Wisdom)’ 였습니다.
글쎄요, 제 기준으로는 ‘똑똑이’라고 번역하고 싶은데요 ----, ‘똑똑아, 이리 좀 와봐 ---‘ 어떠신가요?
(꽃병을 깼어요 The Broken Vase)
큰일났습니다. 줄이 달린 장난감을 휘두르다 꽃 병을 깨고 말았습니다. 손으로 눈을 가려보지만 피할 수
없지요.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잘못을 아는 순간 그만 두는 가 아니면 계속하는가의 차이입니다.
수 많은 화병과 유리, 컵을 깨면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컵이나 화병을 깨지는 않지만 사람 마음을
깨뜨릴 때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스승인 부게로의 영향은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도자기 색 같이 뽀얀 피부나
그림 속 모델들의 자세에서는 부게로의 작품과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 뮤니에르에게 다시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미국 출신의 화상 조지 루카스가 뮤니에르를 방문해서 미국의 작품 수집가와 딜러들을 소개
합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그 후 12년간 계속되는데 수 많은 뮤니에르의 작품들이 판매됩니다. 행운은 물론
준비된 사람들에게 오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 간혹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듯 그렇게 올 때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기를 빼앗긴 큐피드 Cupid Disarmed / 1886)
화살을 가지고 수 많은 사람들을 사랑에 빠지게 했던 큐피드가 자신의 무기인 화살과 활을 빼앗겼습니다.
자신의 상징을 빼앗긴 큐피드는 애가 타지만 여인은 즐겁기만 합니다. 큐피드와 같이 있는 여인을 비너스로
볼 수도 있겠지만 여인에게 활을 쏘러 왔다가 그림 내용 그대로 빼앗긴 것일 수도 있겠지요. 아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어린 녀석이 너무 많은 사람을 힘들게 했죠-----. 물론 지금도.
두 번째 아내와 결혼을 한지 2년 후 딸 마리 루이지가 태어납니다. 나중에 딸 루이지와 아들 앙리는 뮤니에르
작품의 주요 모델이 되었는데 아이들은 그의 예술 정신을 끝 없이 자극하는 소재였습니다. 뮤니에르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이들이 포함된 풍속화나 풍경화를 계속 그렸는데 자신의 자식이기도 했지만 뮤니에르의 천성이
따뜻했고 맑기 때문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잘 건져 Le Sauvetage (The Rescue) / 1894)
큐피드 수난 시대입니다. 활을 뺏기더니 이제는 화살 통을 물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큐피드 맞습니까?
옆에 있는 어린 천사는 잘못하면 아래로 떨어질 것 같습니다. 저러다 떨어지기도 하지요. 우리 옷을 입혀
놓으면 어렸을 때 우리 모습과 똑 같습니다. 엉덩이가 어찌나 통통하고 하얀지 한 번 톡 때려 보고 싶네요.
생활의 여유가 생긴 뮤니에르는 여름 휴가를 노르망디 해안가나 프랑스에서 가장 큰 호수인 부르게 호수에서
보냈습니다. 이런 기간에는 수 많은 수채화와 드로잉을 제작했습니다. 특히 그가 정기적으로 찾았던 곳은
오베르뉴였는데 농장의 동물들과 함께 있는 시골 아이들의 모습에 관심을 가졌고 그 모습들이 화폭에 담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면 전업 화가가 되는 것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Pears Soap)
그의 가장 큰 성공은 1885년 45살의 나이에 살롱에 전시한 ‘좋아하는 애완 동물 (Favorite Pets)’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통통한 소녀가 고양이를 안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이 작품은 파리지엔들의 대단한
호응을 얻었고 급기야는 세계 최초의 브랜드인 Pears Soup을 쓰고 있던 비누 회사의 광고 포스터에 응용됩니다.
이 작품으로 어린 아이와 애완 동물을 그리는 최고의 화가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 후 뮤니에르는 아기천사들을 주제로 한 그림에 착수합니다. 그의 작품은 특히 파리의 중산층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작품 속에는 풍부한 감정과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내용 그리고 맑고 깨끗한 배경 속의 풍경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편한 그림이었겠지요.
(엄마 미안해요 Pardon Mama / 1888)
세상의 처음과 끝에는 엄마가 있습니다. 저는 자주 늙어 태어나서 점점 젊어지고 어려지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엄마의 뱃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이별하는 것이 사람의 삶이었다면 지금보다 세상은 훨씬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합니다. 사람을 지켜주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엄마의 품이기 때문입니다.
오베르뉴의 풍경과 정원의 모습을 묘사한 수채화 작품에 몰두하던 뮤니에르는 55세 생일이 지난 며칠 후 수업을
끝내고 뇌출혈로 쓰러진 후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나이 55세였고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그래도 손자를
봤으니까 떠나는 길이 조금 덜 아쉬웠을지 모르겠습니다.
(엄마와 어린이 Mother and Child / 1892)
한 손에는 빵을 들고 한 손은 엄마의 팔을 잡았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얼굴입니다. 빵은 아이의 몸을
만들겠지만 엄마의 팔은 아이의 영혼을 지켜주겠지요. 엄마가 너무 곱습니다. 하긴 세상에 곱지 않은 엄마가
어디 계시겠습니까? 이상하게 아이보다 엄마의 눈과 입에 살짝 걸린 미소에 시선이 멈추네요.
뮤니에르의 작품은 스승이었전 부게로의 작품과 비교되면서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저 같은 아마추어가 보기에는 뮤니에르의 작품이 좀 더 인간적으로 보이지만 말입니다. 뮤니에르는 스승이었던
루카스, 부게로와 함께 유럽의 여러 미술관을 함께 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그림도 함께 그렸다고 합니다.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한 사람은 전처의 장인인자 스승이었고 또 한 사람은 스승이자 친구였던 사람과 함께
다녔던 여행길은 유쾌한 기운이 가득했을 것 같습니다. 유럽 미술관 어디엔가에는 그 세 사람의 웃음 소리가
묻어 있겠지요.
첫댓글 행복이 새록새록 솟아납니다.
즐감했습니다.
네 감동에는
작은거에서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