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6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오 19,3-12)
For this reason a man shall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be joined to his wife,
and the two shall become one flesh? So they are no longer two, but one flesh. Therefore, what God has joined together,
man must not separate
말씀의 초대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다. 나이가 많아 죽음의 때에 이른 여호수아는 모든 이를 한곳에 모이게 하여 약속의 땅에 대한 주님의 약속을 상기시킨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에 관한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대하여, 부부는 본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니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부란 본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으로 둘이 아니라 한 몸이기 때문에, 사람이 함부로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군 생활을 할 때 뜻하지 않게 ‘군기 교육대’에 간 적이 있습니다. 군인들의 복무 자세를 바로잡는다는 그곳에서 저는 얼차려(기합)를 받다가 난생처음으로 체력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그때에 저는 탈진 상태에 있으면서, 도저히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십자가의 길을 떠올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라는 언덕까지 오르실 때 세 번 쓰러지셨는데, 그 고통이 생각보다 매우 처절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더 나아가, 당시 군인 신학생이었던 저는 사제 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 ‘사제로 평생 살아가려면 적어도 세 번은 처절하게 쓰러지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부부 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여 가정을 일구고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일을 많이 만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겪는 가운데 자신의 배우자와 도저히 함께 살 수 없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의 위기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곧 십자가의 길이 그렇고, 사제나 수도자의 길이 그러하듯, 부부 생활에서도 적어도 세 번은 쓰러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쓰러짐은 도저히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처절하게 다가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이 오더라도 좌절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부르심에는 이러한 위기가 따르기 마련이고,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그러한 위기를 이겨 내며 다시 일어섭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고, 교회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신앙인들이 그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한 몸이 된 부부들 또한 쓰러져도 일어서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를 원하시고, 또한 그렇게 일어서도록 힘도 주실 것입니다.
- 결혼이란
- -김명숙-
‘결혼은 아름다운 오해로 시작해 참담한 이해로 끝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배우자로 함께 산다는 것은 성숙과 인내를 요한다는 뜻인 것 같다.
창조 때부터 부부로 맺어지게 되었다는 남자와 여자.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하지만 인간의 성이 둘로 나뉜 이래, 하나의 성으로는 주님의 모상을 담을 수 없다. 그래서 둘이 하나 되어 하느님을 닮는 과정이 혼인의 신비인 듯하다. 절대자에게는 없는 성의 세계가 인간에게 주어진 이유는 세상을 채우고 번성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인간이 하느님을 닮았지만 결코 하느님이 될 수 없다는 메시지도 숨어 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될지 묻자,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대답하신다. 힘을 가진 배우자가 상대의 약점을 잡아 이혼하고 싶을 때, 버려도 될지를 물었기 때문이다. 가정 폭력이나 심한 음주, 도박 때문에 유지 자체가 불행한 결혼의 경우가 아니라, 힘의 논리로 약한 배우자를 버리는 것은 창조 때의 하느님 모습을 훼손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한 쌍이 아름다운 오해로 결혼했다가 참담한 이해로 끝난다 해도, 인간에게 담긴 하느님의 모상이란 오랜 세월 함께 깎이면서 참담한 이해가 진정한 사랑으로 거듭나는 순간 드러나는 것 같다.
-조명연신부-
어제 운전을 해서 어디를 가고 있는데 글쎄 차 안에 파리 한 마리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운전을 하고 있으니 차 안에 들어 있는 파리를 잡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이 파리가 도대체 가만히 있지를 않네요. 좀 도망가라고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지만 그 순간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창문을 닫으면 어디선가 나타나 저의 운전을 방해하더군요.
여기 좀 앉았다가 또 저기 좀 앉았다가 그리고 금방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파리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마음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다’는 속담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재미있는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결혼 10주년 기념일,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뭐 갖고 싶어? 새 차? 다이아 반지? 아니면 밍크코트?”
이에 아내가 냉정한 눈빛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혼을 원해요.”
그러자 남편이 아내에게 심각한 얼굴로 하는 말.
“미안하지만, 그렇게 비싼 건 안 돼.”
이 부부가 과연 행복할까요? 어떤 목적을 가지고 결혼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처음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간직하면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바뀐 것이지요. 마치 파리가 한 자리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것처럼 변덕스러운 마음 때문에 처음에 간직했던 사랑의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말씀하십니다. 변덕스러운 마음으로 쉽게 갈라서서는 안 되며, 대신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성가정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결혼하는 것은 대접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즉, 무엇인가를 받고자 한다면 결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결혼생활이 힘들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숫자로 표현했더라고요.
“결혼은 3만 5천 번의 식사 준비, 1~3만 번의 이부자리 정리, 7천 번의 화장실 청소, 아기 기저귀는 2년 기준 4,320번 갈아야 한다. 따라서 남녀가 같이해야 한다.”
이렇게 힘든 결혼을 어떻게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함께 꾸려나가야 하는 것이 결혼인 것입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변덕스러운 마음이 아닌, 항상 변함없는 사랑의 마음을 주님께 청하십시오. 그리고 각자의 자리(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의 그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분명 그 자리에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미워해도 사랑해도 둘 다 바뀐다. 그러나 미워해서 바뀌면 둘 다 불행하고, 사랑해서 바뀌면 둘 다 행복하다(조정민).
성가정 만들기
사실 저는 결혼을 할 수가 없지만, 신부라는 위치 때문에 결혼 주례는 정말로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막 결혼하는 신혼부부를 보면 그렇게 멋있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영원할까요? 앞으로 삶이 이렇게 멋있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길 바라면서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지만, 실제의 삶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는 마지막으로 왕자 옷, 공주 옷을 입어보고 앞으로는 대접 받으려는 왕자의 마음, 공주의 마음을 벗어버리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신 대접하는 삶, 사랑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지요.
결혼을 하면 이제 여자와 남자가 아니라, 인간이 된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가정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갖추어야 하고 이를 통해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가득한 성가정이 가득한 우리 사회가 될 때, 비로소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 혼인은 새로운 태어남이다 >
-전삼용신부-
옛날 서양에 남의 양을 훔친 죄로 「양도둑(Sheep Thief)」이라는 두 글자의 약자인 ST를 이마에 낙인으로 받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중 형은 모욕을 참을 수 없어 외국으로 도망가 자신을 감추며 살아보려 했으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마에 있는 두 글자가 무슨 뜻이냐고 캐묻는 바람에 결국은 이곳저곳으로 떠돌다가 더 이상 숨어살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 끝에 먼 타양에서 외롭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내가 양을 훔친 사실은 내가 딴 곳으로 달아난다 해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 남아서 내 이웃과 나 자신에게 다시 정직과 믿음을 되찾도록 노력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해가 바뀌는 동안 그는 정직하다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물론 수많은 수모를 참아가며 노력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이곳을 지나치던 낯선 사람이 그 동생의 이마에 있는 글자를 보고 동네 노인에게 “저 사람 이마에 있는 글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글쎄요,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 그분은 매우 성실하고 훌륭한 분이니 그 글자는 성인(Saint)의 약자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사제가 되어 고해성사를 들어보니 결혼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 뱃속에서 나온 형제들도 서로 싸우는데, 하물며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함께 맞춰가며 살아간다는 게 쉽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힘이 든다고 현실을 회피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위의 예화에서의 형처럼 현실을 회피하려든다고 해서 있는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으로 묶인 것은 어느 것이나 영원성을 가집니다. 혼인은 성령으로 두 사람이 하나로 묶였기 때문에, 마치 밀떡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처럼, 이젠 둘이 갈라질 수 없는 하나로 영원히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인도 성사인 것입니다.
오히려 동생의 경우처럼 힘들고 어렵지만 잘 받아들이면 나에게 혼인이 큰 영광으로 남게 됩니다. 양 도둑, ST(Sheep Thief) 이니셜이, 성인 ST(Saint) 이니셜이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한번 하면 그만이라면 참고 끝까지 가야합니다.
창세기에 “하느님이 아담(사람)을 동산에서 내쫓았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내쫓다’는 동사는 히브리말로 ‘가라쉬’라 쓰는데, 이 가라쉬는 내쫓는다는 말 대신 ‘이혼하다’라는 뜻도 지닙니다. 어찌 보면 인류 최초의 혼인은 하느님과 인간이었고, 인류 최초의 이혼도 하느님과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당신 집에서 내쫓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혼인을 통해 당신 집으로 다시 들어오게 할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한 번 잘못을 했다고 내치는 그런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당신과 합당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준비가 되도록 잠시 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하는 방식도 ‘혼인’의 신비로 하셨습니다.
혼인은 하나의 새로운 탄생입니다.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면 이전의 우리가 아닌 새로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처럼 혼인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아리가 어찌 알로 돌아갈 수 있고, 개구리가 올챙이로 되돌아갈 수 있으며, 나비가 어찌 애벌레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가 어찌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혼인도 존재와 본질의 변화인 것입니다. 그래도 되 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탄생인 것입니다.
하느님이 한 번 인간을 사랑하셨다면 인간이 되돌아서지 않는 이상 그 인연을 끊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연을 끊으려한다면 우리는 그런 하느님의 사랑을 닮은 사람이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이 나오면 일본을 비롯해 전 세계가 들썩입니다. 그런 명작들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쏟아낼 수 있을까요?
그는 “여행이 나를 키웠다”고 말을 합니다. 아무 계획도 없이 그냥 배낭 달랑 메고 여행을 떠나면, 그 여행에서 그는 풍부한 정신적 고양과 판타지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행이 그를 눈물 흘리게 하고, 여행이 그에게 글을 쓰게 한다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을 통해 항상 ‘새로 태어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결혼도 이와 같은 것 같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해 준 것, 사랑을 알게 해 준 배우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만남을 그렇게 깊을수록 그 만남 속에서 내가 새롭게 잉태되고 태어나게 됩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지요. 그렇다면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만들고 있을까요?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중요한 인연은 부부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크고 중요한 인연이기에 옷깃 스치는 것을 넘어서 살을 비비면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렇게 큰 인연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중요성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때로는 ‘우리는 인연이 아닌가봐.’라는 말을 하면서 헤어지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요?
저는 지금까지 결혼은 해보지 못했지만, 주례는 참으로 많이 섰습니다. 가톨릭 안에는 혼인성사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런데 결혼식장에서 보면 신랑 신부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느낍니다. 화장발과 조명발이라고도 하지만, 그보다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말처럼, 결혼식으로 인해 무척이나 긴장되고 피곤하지만 그래도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멋있는 모습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신랑 신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을 합니다. 때로는 심한 싸움으로 인해서 헤어짐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좋다고 사랑한다고 도저히 헤어질 수 없다고 결혼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도저히 같이 못살겠다고 헤어질까요? 나의 입장에서 사랑을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결혼 전에는 어떻습니까? 내 입장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무슨 행동을 하든지 상관없이 다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 후 나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니 상대방의 모습이 모두 형편없이 보이는 것이지요.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추면 정반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모습도 거울에 비추면 이렇게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하물며 자란 환경도 다르고 개성도 다르며 입맛도 다른 배우자와 연인이 나와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결혼에 대해 이러한 말씀을 전해주시지요.
“남자와 여자는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한 몸인 부부. 특히 하느님께서 맺어 주셨다면, 절대로 갈라져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랑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득 어느 신부님께서 혼배 미사 강론 때 하신 이 말씀이 기억납니다.
“사랑하기에 결혼하지 말고 사랑하기 위해 결혼해야 한다.”
진정한 사랑 안에서 모든 부부가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 과업 중에 가장 어려운 마지막 시험이다. 다른 모든 것은 그 준비 작업에 불과하다.(마리아 릴케)
완고한 마음
-이연수-
30,40년 전만 해도 ‘이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고 사는 이들처럼 보았기 때문이죠. 지금에는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숨길거리도 아니어서 당당히 밝히는 분위기입니다. 소송으로든 합의로든 이혼에 이르면, 그 상처를 보듬어 안는 게 순서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려고 이혼의 근거를 캐묻는 바리사이들에게, 혼인과 이혼의 토대를 마련해 주십니다. 남자와 여자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한몸이 되었기에(창세 1,27; 2,24; 5,2)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본뜻은 부부일심, 부부동체이기에 이혼은 절대 안 된다는 말씀이시지요.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는 모세의 말을 들어(신명 24,1) 예수님을 궁지에 몰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는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저 이혼을 허락한 것뿐이라며, 아내가 불륜한 경우가 아니면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완고한 마음을 가진 남자들이 얼마나 많이 아내를 버렸으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남편의 재산으로 여겨졌던 아내가 버림받고 내쳐져 존엄한 한 인간으로서 살 수 있었을까요? 아무 경제력도 없이 버려졌던 여성의 삶은 어디에 있나요? 한 사람의 완고함은 다른 한 사람을 이처럼 비참하고 처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유들 너머의 이유
우리가 무엇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다양합니다. 식사를 하는 것만 하더라도 ‘배가 고프기 때문에’, ‘건강하게 살기 위해’, ‘식사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등의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이가 잘못을 저지르는 데도 이유가 있습니다. 뉴스에 나오는 끔찍한 범죄들도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일어납니다. 그 범죄 이유가 사람들한테 받은 상처에 대한 좌절과 분노였다면, 우리는 마음 한구석에 아픔을 느끼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부부가 결별을 선택하는 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히 사랑의 감정이 식었다는 차원을 넘어 서로에 대한 깊은 실망과 상처에 뿌리를 둔 근원적 이유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을 살펴보면 서로 헤어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이유들을 뛰어넘는 이유로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바리사이들이 말하는 이유가 ‘세상의 차원’에 있다면 예수님의 이유는 ‘하느님의 차원’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하거나 복음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게 되는 데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 이유는 ‘세상의 차원’에서 볼 때는 합리적이고 지혜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고자 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이유, 곧 ‘이유들 너머의 이유’를 선택해야 합니다.
결혼, 셋이 이루는 하나
-김찬선신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혼배주례를 하면서 이 말씀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때마다
저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하고 그래서 자신 있게 얘기하지 못합니다.
저를 포함하여 수도자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신자들에게는 그렇게 살라고 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부부만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것 아니지요.
수도자들이 한 형제로 같이 살게 된 것도 하느님 뜻이고,
어쩌면 부부보다 이것을 더 깊이 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 만나서 좋아 사귀다 마음에 맞으면 결혼을 하지만
수도자는 같이 살게 된 형제들을 전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같이 살게 된 것이 내가 선택한 것도 네가 선택한 것도 아니라면
우연히 또는 어쩌다 같이 살게 되었거나
하느님께서 같이 살게 해주신 것인데,
신앙인이라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저는 자문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주님께 여쭙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 형제를 나에게 주셨을까?”
“주님, 이 형제를 저에게 주신 당신의 뜻은 무엇입니까?”
“주님, 당신은 저를 괴롭히시기 위해 이 형제를 주셨습니까?”
하느님의 뜻을 일일이 그리고 다 알 수 없지만
그를 사랑하라는 것,
그를 사랑하여 하느님 사랑에 동참하라는 것,
이 사랑을 발판과 디딤돌 삼아 하느님 사랑의 경지에까지 오르라는 것,
이것이 사랑이시고 좋으신 하느님의 뜻일 것이라고 늘 결론 짓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은
결혼을 하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시는데
그 하나는 둘이 하나가 아니라 남편, 아내, 하느님, 셋이 이루는 하나,
곧 삼위일체입니다.
어제 새벽에는 정말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날 신부님들과 아주 늦게까지 만남을 가져서 보통 피곤한 것이 아니거든요. 지난 번 새벽 묵상글에도 썼듯이 교포사목을 하는 신부님이 다시 소임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간다고 해서, 송별식 겸해서 늦게까지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남 중에 그 신부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형, 나 소원이 있는데 좀 들어주라.”
“뭔데? 내가 들어 줄 수 있으면 들어줄게.”
“형! 내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와라.”
후배신부가 있는데 한 번도 와 보지 않느냐면서 너무 좋은 곳이니까 꼭 와달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남아공 교포들을 위해서 강의도 해달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글쎄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비행기로 갈아타는 시간 포함해서 23시간이나 걸린다고 하는데, 그곳에 제가 가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지요. 술이 원수입니다.
그러면서 이제야 걱정이 됩니다. 그렇게 먼 곳까지 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 약속을 깰까도 생각했지만, 후배의 부탁도 들어주지 못하는 못된 선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네요.
물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먼 미래의 일이지만, 문제는 이렇게 쉽게 약속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저는 힘들 것을 뻔히 알면서도 또 하나의 약속을 잡고 만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체념하게 되네요.
‘그래, 힘들더라도 갈 수 있도록 해야지…….’
제가 이렇게 체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약속 깨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부부 관계 안에서 저는 종종 보게 됩니다.
혼인성사를 받으시면서, 부부는 이러한 서약을 주님과 사제 그리고 하객들 앞에서 합니다.
“나 ( )는 당신을 [아내로 / 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이 신의를 너무 쉽게 깹니다. 그러면서 상대의 문제점만을 지적합니다. 바로 내가 신의를 깬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신의를 깼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심지어 상대방이 신의를 지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바로 내가 나의 입으로 신의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신의를 깨서는 안 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가장 기본적인 가정 공동체가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가족 서로간의 신의가 두터워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있는 것입니다.
판단을 서두르면 후회도 빠른 걸음으로 달려온다(라틴 속담).
식사와 별미
-윤원진 신부-
보좌신부인 저는 함께 사는 주임신부님이 멋있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드시는 음식을 따라 먹어보기도 하고, 어설프지만 신부님의 말투를 흉내내기도 합니다. 어느 날은 함께 식사를 하다가 그분이 매운 고추를 맛있게 잡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삭” 하고 씹으시며 땀을 뻘뻘 흘리시고는 “이거 제대로 된 고추네!” 하시는 모습이 멋져보여서, 저도 은근슬쩍 고추에 손을 대었더니 저를 보시며 “그거 맵다”라고 하십니다. 괜스레 ‘나도 먹을 수 있다’라는 용맹심에 한입 베어 물었다가 끝내는 삼키지 못하고 도로 뱉어버렸습니다. 먹지 않아도 되었던 그 고추, 하지만 주임신부님이 맛나게 드시는 모습에 저도 먹을 수 있으리라 믿었나 봅니다. 저에게는 독하게 매운 고추이지만 주임신부님에게는 맛깔스러운 음식이었습니다. 그 맛이 고통이었다면 어떻게 그리 맛있게 드실 수 있겠습니까. 흔히들 사람들이 성직자에게 “어떻게 결혼하지 않고 사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함께 사는 그 맛을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별미’임을 알 것입니다.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받아들여보십시오.
인간의 본모습
- 안소근 수녀-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고, 율법의 정신을 온전히 실현하고자 하셨습니다. 율법의 짐에 눌려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다고 하지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충실하게 지킨다는 것은 사실 율법의 모든 규정들을 지키는 것보다도 더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한 예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혼인 관계를 인간의 손으로 깨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 곧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간이 죄로 물들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완고하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 고 하신 그때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법의 규정을 어기지 않는 데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그분의 계획에 전적으로 일치하여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은 그런 본보기를 보여주십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 대신 목숨을 주라고 명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이겠지요. 내 경우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마음이 완고합니까? 하느님은 나에게 어느 선까지 요구하십니까?
콘크리트
-전삼용신부-
어떤 중년 수녀님께서 말씀 중에 느닷없이 당신이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남자가 있다고 털어놓으셨습니다. 당신이 수녀님이 된지 얼마 안 되어서 알게 된 수사님인데 둘은 오랫동안 영적 동반자로서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털어놓은 사람은 고해사제 외에 제가 처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동료 수녀님들이나 수녀원에서 알게 되면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수녀님은 그 수사님과 온전히 영적인 관계지 주님보시기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서로 힘들 때 힘이 되어주고 관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깨달아나가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런 관계는 수도원에서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도원에 입회하면 일반적으로 4년 동안 수련을 받게 됩니다. 그 때 외부로 보내는 편지나 외부에서 오는 편지는 지도자 수녀님이 일일이 다 읽어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개인적인 관계는 철저히 배제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적인 관계가 공동체적 일치를 저해한다는 우려에서 이런 수련과정을 거치는지 모릅니다.
한 예로 수련기 때 특별히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금지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동기 내에서도 친한 몇 그룹이 형성이 되고 또 소외되는 사람도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과의 관계가 너무 깊어지지 않도록 주위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함께 입회한 동기에게까지 이렇게 개인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지를 못하게 하니 이성과의 관계야 얼마나 안 좋게 보여지겠습니까? 한 사람을 너무 깊이 사랑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소홀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과연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완전한 사랑을 하셨습니다. 모든 신앙인은 예수 사랑의 모델을 닮아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현재 수도회나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관계 맺는 방법과는 다른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인류가 시작된 지 수천 년이 넘지만 예수님은 단지 한 세대만을 짧게 살고 가셨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시대에 산 사람은 소외된 것일까요? 또 세상이 넓지만 좁은 팔레스타인에서만 활동하시고 어쩔 수 없이 이집트로 도망 간 것 외에는 외국으로도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소외된 것이고 오직 이스라엘만을 사랑하신 것일까요? 또 세상에는 수많은 가정이 있지만 예수님은 당신 생애 33년 중 30년을 조용히 요셉과 마리아와만 지내셨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부모들은 무시 된 것일까요? 또 예수님은 수 많은 사람 가운데 12제자를 뽑고 그들과만 함께 다니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편애를 한 것일까요? 또 예수님은 그 12사도들 중에서 특별히 중요한 사건 때, 즉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 타볼산에서 변모하실 때, 겟세마니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 그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리고 베드로에게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평하게 사랑하지 못하신 것일까요? 그리고 왜 부활하셔서는 공평하게 남녀 만인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한 여자에게만 나타나신 것일까요? 그리고 부활하셔서 유일하게 그녀의 이름만을 부르신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구체적으로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면 누구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수도자 성직자에게 사랑을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체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하느님께서 남녀를 한 몸으로 엮으신 것을 사람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구체적인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하여 한 몸이 되도록 사랑하지 못한다면 누구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녀의 사랑은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모델이기도 하면서 사랑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한 남자가 혹은 한 여자가 한 명의 이성 앞에서 온전한 사랑을 할 능력이 없을 때 그 사람에겐 더 이상 사랑에 대한 희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며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될 뿐입니다.
오늘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님은 가정이 있는 한 사람을 대신하여 굶어죽기를 청합니다. 만약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능력이 없다면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꼴베 신부님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나라를 위해 고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허황되게 사랑을 부르짖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께서 구체적인 사람의 살인 성체로 우리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모든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분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콘크리트는 집을 짓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벽돌과 벽돌을 연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콘크리트가 없으면 벽돌집은 완성될 수 없고 지었다 하더라도 곧 허물어집니다. 콘크리트는 또한 ‘구체적인’이란 뜻입니다. 콘크리트가 없으면 집이 완성될 수 없는 것처럼 구체적이지 않으면 사랑도 완성될 수 없습니다.
먼저 내 옆에 있는 배우자부터 완전히 사랑하도록 합시다. 그렇지 못하면 항상 콘크리트가 부족하게 지어진 집에서 사는 것과 같을 것이고 참 사랑의 맛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한 몸
-임문철 신부-
젊은 시절에 국보급 투수라는 선동렬 선수에게 흠뻑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의 승리에 기뻐하고, 패배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는 그 선수의 공 하나 하나에 손에 땀을 쥐고 응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본으로 진출해 예전만큼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저의 응원은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제가 그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상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좋은 부분만 받아들이고 싫은 부분은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좋은 부분만 받아들인다면 열렬한 팬이 될지는 몰라도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성체로 나에게 오시어 나와 한 몸을 이루시는 그분은, 나의 선함과 아름다움뿐 아니라 나의 추악함과 더러움, 약함과 모자람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저 태양이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빛을 주듯이, 주님의 사랑은 모든 이에게 머물고, 나를 흠뻑 적시어 이 모습 그대로 안기게 해주십니다. 부부는 서로간의 친밀한 일치를 통해 이 사랑의 증인이 되도록 불리운 사람이며, 하늘 나라 때문에 독신이 되기를 원한 저는 신자들과의 친밀한 일치를 통해 이 사랑의 증인이 되도록 불리운 사람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남편은?
-전의이 수녀-
요즘은 교우들 간에도 이혼이 빈번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절대 명령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의 이혼 사유를 대하면서 아주 근원적인 문제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이혼은 물론 우리 삶이 분열되고 흐트러지는 것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남편’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깊게 바라보게 되었다.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동산에서 사람을 ‘내쫓았다’는 심각한 표현이 나온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함께 거닐던 아담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의 말을 듣고 난 후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이때 사용된 단어가 히브리어로 ‘가라쉬(vrg)’라는 동사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가라쉬’는 ‘쫓아내다’라는 의미뿐 아니라 ‘이혼하다’라는 뜻도 지닌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최초의 이혼 사례는 하느님과 아담인 셈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혼불가 원칙은 참으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머물게 하는 절대 안전장치다. 예수께서는 원조 아담이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뱀의 말을 들어 갈라서게 된 것처럼, 하느님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취하는 것을 영적 간음이라 하며 바로 이것만이 이혼 사유가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사실 우리 영혼의 진정한 짝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 세상 온갖 남자를 취해도 만족함이 없었던 여인처럼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은 우리 안에 먼저 계셔야 할 분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성경의 역사는 진정한 짝, 하느님을 찾는 역사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몇 번의 이혼을 거듭했던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이며 바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주의 깊게 들어보자. 여인이 말한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남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실상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심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내가 너의 진정한 남편이다.”라고. 이제 사마리아 여인도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탄성을 지른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여인은 드디어 일곱 번째로 진정한 짝을, 영적인 남편 그리스도를 만났다.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사건이야말로 큰 신비라고 탄복하며 외친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1-32) 이제 우리 차례다. 사마리아 여인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그분이 마련하신 샘터로 나가 그분과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
왜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과 꼭 마주쳐야 하는지..
-임영숙 -
정말 속상했습니다. 왜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과 꼭 마주쳐야 하는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서너 명을 악연으로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제 앞에서는 간이라도 빼줄 듯이 잘하는데 뒤에서는 저를 헐뜯고 다녔습니다. 심지어는 결혼한 제가 직장 동료와 연애한다는 헛소문까지 퍼뜨렸습니다. 마주앉아 경위를 따지면 금방 잘못했다고 빕니다. 그러고는 다시 뒤에서 이상한 말을 하면서 저와 동료들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결국 저는 그를 피해 다른 부서로 옮겨갔습니다. 또 한 사람은 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그가 저를 싫어하는지도 모르고 그와 마주치면 꼬박꼬박 인사를 했는데 하루는 면전에서 “아유, 재수없어” 하고 지나가더군요. 그 당시 제가 느낀 당혹감과 모멸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함께 한 사무실에서 몇 년을 일해야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제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로 인해 인사상의 불이익, 이른바 물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이 악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짝지워 주신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체하지만 속으로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저를 위해 짝지워 주신 동반자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동시에 오지 않고 차례차례 제 곁에 머물렀는데(물론 하느님이 그렇게 하신 거지요) 그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교만함에 걸려 넘어졌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뒤늦게 온 것입니다. 자신을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제 무심함이 상대방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가 됐을지, 제 존재 자체가 걸림돌이 된 상황이 상대방에게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편과 아내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많은 동반자들을 하느님은 짝지워주시는 것 같습니다. 악연으로 보이는 것까지도 말입니다.
- 차성현 신부-
저는 결혼도 해보지 못했고 이혼 경험도 없습니다. 결혼은 해도 후회고 안해도 후회라고 하는데, 안해본 저로서는 조금 억울합니다. 결혼 생활을 너무 자기 중심적으로만 하는 말 같아서 그렇습니다. 결혼 생활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얘길할 것 같습니다. '결혼은 하면 행복하고 안해도 불행할게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세계에서 몇위 안에 든다고 합니다. 언젠가 한번은 40%에 이른다는 기사를 본기억도 납니다. 지금 이 나라에 오셔서 예수님께 한 말씀 여쭙는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수 있으실까요...
이천년전에 하신 말씀이 오늘 복음내용입니다. 결혼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니 갈라서면 안된다는 요지입니다. 모세를 핑계삼아 이혼을 정당화 하려 했지만, 오히려 무디어질대로 무디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그때 사람들보다 마음이 어떠할까요? 더 무디어졌을까요, 아니면 조금 나아졌을까요... 물음 자체가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땐 그래도 예수님께 묻고 대답을 들을려는 마음이라도 있었지만, 요즈음은 아예 들을 생각도 없습니다. 내가 싫으면 그만입니다.
독신으로 살아야하는 저로서는 결혼 생활이 언제나 신비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서로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신비일까? 이런 생각에서부터 세월이 흐르면서 그 신비의 내용도 새로와집니다. 도대체 서로 다른 사람이 평생을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을까?
신부인 저는 독신으로 살면서 힘든 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혼자이기 때문에 편한 것도 없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편한 것은 조금씩 조금씩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너무 편한 것만 찾는 것은 우리 삶에 가장 큰 유혹임을 잊지않고 있습니다
부부의 삶도 마찬가지겠지요... 결혼해서 편하고 좋은 것도 있고 반면에 불편하고 힘든 것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어느 하나가 더 많아지든지 아니면 적어지든지 하겠죠... 헹복한 가정은 편하고 좋은 것을 놓치지 않을려고 할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가정은 불편하고 힘든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것입니다. 예외없이 사람이면 누구나 편하고 좋은 것만을 가질려고 하겠지만, 모두가 부족한 사람이다 보니 늘 바보같은 선택을 자꾸하게 됩니다.
독신으로 사는 신부이지만, 만나는 사람은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솔직한 마음으로 보면 볼수록 그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혼자 살다보니 자꾸만 자꾸만 제 편한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남편이 자기 생각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내 역시 자기 생각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부모는 늘 자녀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녀 또한 부모를 결코 무시하면 안될 것입니다.
모두가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양보하지 않으면, 가정이란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서로가 목숨을 내어놓고 지키지 않는 한 가정 공동체는 언제든 깨어져버리고마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칠순, 팔순의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 절로 마음깊은 곳에서의 존경심이 솟아나는 것은 그 많은 세월을 목숨을 내어 놓은 마음으로 자신을 죽이며 살아왔던 희생과 사랑에 대한 경외심 때문일 겁니다.
희생이니 봉사니 용서니 이런 말들은 신부의 단골 메뉴이지만, 사실 실생활에 있어서는 함께 사는 부부들이 이런 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성숙한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말 잘하고 실천은 좀 게을러도 별로 표가 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가정을 가진 부부들이야 이것 실천하지 않으면, 당장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혼자 사는 우리는 밥 먹기 싫을 때 먹지 않아도 아무 간섭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이 사는 사람은 내가 먹기 싫어도 준비해야 하고 내가 더 먹고 싶어도 참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어디 먹는 것 뿐이겠습니까? 입는 것, 자는 것, 노는 것, 부모 모시는 것, 자녀 교육 문제등 모든 것을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해결해야 합니다.
늘 나보다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 삶, 분명 그런 면에서는 결혼의 삶이 독신의 삶보다 더 성숙한 모습의 삶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혼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존경하게 됩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며 양보하고 희생하는 삶에 깊은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제도 단지 편하고 자유로와서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늘 인간적인 약점에 넘어지기도하고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켜나가는 것이 어렵지만 인간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제들의 독신도 주님이 축복해주신 삶입니다.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않은 저희 사제들을 위하여 마련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게 살고 못살고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우선은 사제로서의 독신의 삶이 하늘나라를 위해 너무도 자유롭고 복음적인 삶의 모습임이 살면 살수록 은혜롭게 다가오며 체험됩니다.
- 최종수 신부-
사제에게 어려운 일 중 하나가 혼인성사 강론입니다. 그것은 결혼생활이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 결혼하는 부부에게 강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부터 이혼하는 부부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세 쌍 중 한 쌍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이혼하는 부부가 많아질까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돈이 최고가 되어버린 황금만능주의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엠에프 시기에 이혼이 급증한 예가 바로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의 실직과 박봉으로 인해 생활하기가 어렵게 되자 이혼하는 가정이 늘어났던 것이지요. 씀씀이를 줄이고, 무엇이라도 열심히 해서 살림을 꾸려나가기엔 사회적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고 할까요. 이혼율이 급증하는 이유를 개인의 탓만으로 돌리는 것도 그렇습니다. 국가의 역할이 미흡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혼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가정들을 향한 국가의 지원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개성이 강하고, 자유가 충만할수록 공동체가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종교의 위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믿기에, 그 말씀을 믿기에 자신부터 낮추는 자세가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나’를 낮춤으로 인해 사랑이 높아지는데 어떻게 갈라섬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고아수출 1위 국가가 바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한국임을 자녀를 가진 모든 어른들은 다시 한번 되새겨보아야 하겠습니다.
-김충귀신부-
인디안 종족 중에 아파치족이 있는데, 그들은 결혼하는 젊은 부부에게 이런 축시를 읽어 주면서 축복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의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 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 하리라
참 아름다운 축시인 것 같습니다. 살아온 모습들이 다르고 성도 다른데, 만나서 서로 지붕이 되고 서로 따뜻함이 되어 주며, 동행이 되고, 하나의 인생을 산다는 것, 외로운 인생길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입니다. 이 세상에 올 때에도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으로 홀로 와서 다시 그분께로 돌아갈 때에도 홀로 가야하는 것이 우리의 정해진 이치인데 그 과정에 서로 자신을 내어주며 사랑함으로써 태어나게 되는 생명체인 자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세상사 안에서 참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같이 각박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함께 할 수 있는 혼인은 참으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혼자 살아가는 신부 입장에서 보게 되면 더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 삶 안에 있는 아름답고 거룩한 혼인이 많이 퇴색되어 감으로써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혼인을 하지만 스스로 그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외면하고 단절시킴으로써 일어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단절해서 갈라서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나름대로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지만 자세히 좀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서로 내어주지 않고 희생하지 않으려는 이기심으로 시작된 보상심리의 냄새가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지붕이 되어주기보다는 상대방이 먼저 그 지붕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따뜻함이 되어주기보다는 상대방이 먼저 따뜻함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동행이 되어주기 보다는 상대방이 먼저 나의 입맛에 맞는 동행이 되어주기만을 바란다는 것 입니다. 요즘 한국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참 추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그 아름답고 거룩한 것들이 인간 스스로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이 참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속을 떠보려고 이혼에 대해 물어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혼인의 궁극적이고 진정한 의미에 대해 얘기해주십니다. 바리사이인들의 질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때 당시의 혼인의 주체는 하나의 성에만 국한되어있고, 다른 성은 하나의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에수님은 그들의 잘못과 과오를 구체적으로 지적해주시며 이성의 동등성과 일치는 바로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혼인의 일치는 인간에 의해 갈라져서는 안 됨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때 당시의 이혼의 모습을 보게 되면 남성의 이기적인 권리가 너무나 강하게 드러난다는 것 이고, 오늘날의 이혼의 모습을 보게 되면 남성과 여성, 모두 서로의 너무나 이기적인 인간적 권리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 어디에도 하느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있다면 자신의 감정과 이기적인 욕망만이 남아있는 것이죠. 거룩하고 아름다워야 할 혼인이 너무나 추접한 모습으로 서로에게 상처로만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남녀가 만나 이루는 사랑이 맺어지는 혼인에 대해 우리교회는 인간의 그 아름답고 하느님의 거룩함을 보전하기위해 혼인법을 신자들에게 교육시키며, 혼전 혼인교리도 하고 있습니다. 과연 혼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나아가 하느님의 창조질서 안에 있는 인간으로써 성숙되고 완성될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아름답고 거룩한 혼인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하며 자녀들에게 그 아름다움과 거룩함이 이어질 수 있도록 서로 가꾸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라
-김광태 신부-
중학교 때부터 매우 절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싸움도 잘하고, 인간성도 좋고, 또 요즘 식으로 말하면 얼짱이라서 여자아이들이 줄줄 따랐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하겠다고 내게 소개한 여자는 여러모로 시원찮았습니다. 우려스런 느낌은 곧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여자가 원치 않아 홀어머니와 따로 살았고, 봉급이 적다고 불평하는 통에 퇴근하자마자 또다른 일을 찾아갔다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여자 역시 돈 번다고 야식집에서 밤새도록 일하는 바람에 둘은 거의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수년이 지나도 자식이 없어서 그 이유를 물으니, 여자가 돈 벌려고 남편 몰래 여러 차례 낙태를 하는 바람에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여자가 기계를 다루다가 손가락이 잘려 한 손을 못 쓰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날 함께 있던 다른 동창 하나가 술기운을 빌려 그 친구에게 이혼을 종용했습니다. ‘착한 네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홀어머니가 불쌍하지 않느냐.’ ‘너도 이제 사람답게 좀 살아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나 눈물을 흘리면서 묵묵히 듣고 있던 친구는 너무도 뜻밖의 얘길 했습니다. ‘정말 못났고 또 미웠지만, 이젠 병신이 된 여자를 내가 아니면 누가 돌보겠는가.’ 그날, 난 신자도 아닌 그 친구의 얼굴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더 힘들게 하려고 교회가 이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했으니 결혼한 거 아닌가요?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좀 더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김흥주 신부-
◆우리 민족의 결혼 풍습 중에 혼례를 앞두고 신랑측에서 신부측에 보내는 함 속에는 붉은 비단 한 감과 푸른 비단 한 감 그리고 청색과 홍색 명주 실타래로 묶은 채단(采緞)이 들어 있는데, 거기에는 부부의 연을 맺는 신랑 신부에게 주는 소중한 교훈이 담겨 있다. 붉은 비단과 푸른 비단은 물론 청실과 홍실 역시도 신랑 신부를 상징하는데, 비단이라는 것이 명주실을 한 올 한 올 엮어서 만들어지는 만큼 신랑 신부도 이제는 부부로서 각자가 한 올 한 올씩 서로를 엮어가며 비단이라는 가정을 만들어 가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또한 청홍색의 비단 천을 굳이 청홍색의 명주 실타래로 묶는 까닭은 명주실이 지닌 특성 때문인데, 여기에도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우선 명주실은 질겨서 잘 끊어지지 않는데, 마찬가지로 이제 신랑 신부가 부부라는 끈으로 연결되는 만큼 질긴 명주실처럼 죽는 날까지 한 몸을 이루며 살라는 것이다. 또한 명주실은 쉽게 잘 엉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엉킨 부분을 조금만 인내를 가지고 한 올씩 풀어나가면 쉽게 풀리는 것이 특성이다. 부부간에도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 많은 일을 겪으면서 서로 엉키고 꼬일 때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럴 때도 부부가 함께 인내를 가지고 차분하게 하나씩 풀어나간다면 엉켰던 명주실이 풀리듯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엉킨 명주실을 풀려고 하다가 잘 안 된다고 해서 조급한 마음에 가위나 칼로 잘라버린다면 결국 실타래를 망가뜨릴 뿐이다. 이와 같이 부부간에도 서로 엉키고 부딪치는 일이 있어도 그 인연의 끈을 끊어버리고 갈라서려 한다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만 남길 뿐이다. 사실 요즘 많은 부부들이 쉽게 갈라서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함 속에 들어 있는 채단에 담긴 교훈이 새삼 귀중하게 여겨진다.
결혼생활은 수도생활
-강영구신부-
결혼에 대한 수 없이 많은 경구(警句)들이 있습니다. 독일의 시인 하이네는 결혼을 이렇게 말합니다. “결혼은 어떤 나침반도 일찍이 항로를 발견한 적이 없는 거친 바다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한 부부도 예측할 수 없는 풍랑을 만나서 이혼(離婚)이라는 암초에 좌초하기도 하고,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한 결혼이지만 거친 풍랑을 헤치고 백년해로(百年偕老)하기도 합니다. 결혼이라는 바다에는 뚜렷한 항로(航路)도 없고 어떤 풍랑이 몰아칠지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가 ‘사랑과 믿음’이라는 키를 놓지 않는다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항해 중에 이혼으로 좌초하거나 파선 당한 이유는 ‘사랑과 믿음’이라는 키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혼(結婚)을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선남선녀(善男善女) 중에서 하필이면 ‘당신’을 내 남편이나 아내로 만났다는 것이 우연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닿았기에 맺어진 인연(因緣)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아름답게 꽃피우고 열매 맺어야 합니다. 결혼으로 생겨나는 가정은 ‘사랑과 믿음’이라는 규칙을 가진 작은 수도원입니다. ‘사랑과 믿음’이라는 규칙을 잘 지키면서 자신을 깎고 다듬으면 아름답고 행복한 부부(夫婦)가 되고 부모(父母)가 됩니다.
세상은 거친 바다입니다. ‘사랑과 믿음’만이 당신과 당신의 가정의 지켜줄 것입니다.(一明)
† 창조주의 대원칙과 바람직하지 못한 도피성의 선택
-박상대 신부-
마태오복음에서는 공동체설교(18장)를 끝으로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우리는 지난 연중시기 10주간부터 참된 의로움을 가르치는 산상설교(5-7장), 참된 제자상을 훈시하는 파견설교(10장), 하느님나라에 관한 복음의 선포와 그 나라의 신비스러운 성장을 일곱 가지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는 비유설교(13장), 그리고 복음의 씨앗으로 건설된 교회 구성원들을 위한 공동체설교(18장)를 듣고 배웠다.
아울러 예수께서 갈릴래아 지방을 거점으로 북쪽과 동쪽의 시로 페니키아 지방과 바테네아 지방, 데카폴리스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악의 세력을 몰아내고 가난한 자와 죄인들을 가까이하여 그들을 위로하시고, 병자들의 고통을 덜어주시는 놀라운 사랑과 자비의 행적을 눈으로 보았다.
이제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 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신다.(마태 19,1) 자신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16,21; 17,22-23)를 성취하시러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예루살렘 입성(21,10)까지를 우리는 ‘예루살렘 상경기’라고 한다.
마태오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는 일단 마르코복음 10장의 흐름을 미소한 수정과 함께 크게 따르고 있다. 마르코복음 10장은 결혼과 이혼논쟁, 어린이 축복, 부자청년과 낙타와 바늘귀 비유, 예수추종의 법칙과 추종에 대한 상급, 세 번째 수난예고, 예리고의 소경치유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마태오는 자기 고유의 두 가지 특수사료를 삽입하였다. 하나는 오늘 복음의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獨身)에 관한 단절어(19,10-12)이고, 다른 하나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20,1-16)이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막 길을 떠나신 예수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아내를 소박해도 좋으냐는 질문으로 결혼과 이혼에 관한 논쟁이 시작된다. 왜 느닷없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결혼과 이혼문제를 들고 와 예수의 길을 가로막는 것일까? 그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이에도 이 문제에 대하여는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혼인법은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있고, 일부다처제도 허용하고 있었다.(신명 21,15) 게다가 남자에게 여자는 항상 위험스러운 존재로 여겼고, 경건한 자들은 여자가 다가오면 인사를 하기는 커녕 아예 눈을 감아 버리기도 했다. 결혼한 여자가 독신 남자나 비유대인과 성적 관계를 맺으면 간음을 범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혼인한 남자가 그와 동일한 행위를 해도 간음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았다. 여자는 남자와 동일한 차원에서 취급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혼인법이 완전히 남자의 편에서부터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간음을 예방하려는 경우에도 여자의 권리를 보호하려기보다는 여자의 위험성을 더 강조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남의 아내를 유혹하는 남자는 자신의 혼인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혼인을 깨뜨리는 결과가 된다.
이런 통념 위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혼에 관한 두 가지 이견을 보였다. 바리사이 샴마이(Shammai)파는 아내가 간음한 경우만이 이혼의 사유가 된다고 여겼고, 바리사이 힐렐(Hillel)파는 아내가 남편에게 불만스러우면 어떤 경우에도 이혼은 자유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무튼 그들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로 찾아왔고, 예수께서 답을 주셔야 한다.
예수님의 답은 딱 한 하나다. 처음부터 아버지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며,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창세 1,27; 2,24) 무슨 말인가?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 앞에 부부로서의 짝을 맺으면 둘은 ‘한 몸’이라는 것이다. 하나가 된 몸을 어떻게 다시 가를 수 있는가. 가르면 둘 다 죽는다. 하나가 된 부부를 가를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느님뿐이다.
물론 모세는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 남편의 눈 밖에 나면 이혼 증서를 써 줄 수 있다고 했다.(신명 24,1) 여기서 ‘수치스러운 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바리사이 샴마이파와 힐렐파의 이견(異見)과 같이 결과는 달라진다.
예수께서는 이를 아내의 음행으로 간주하여 이 경우의 이혼을 허락하시는 듯하지만(9절), 천만부당이다. 예수님의 원칙은 어느 경우에도 같다. 우리는 이 확고부동한 창조주의 원칙을 십계명의 제6계명(출애 20,14; 신명 5,18)과 제9계명(출애 20,17; 신명 5,21)보다 더 우위의 것으로 생각해야 하며, 나아가 산상설교에서의 해석(마태 5,27-32)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결혼을 하여 부부로 살든, 결혼을 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났든,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복음과 하늘나라를 위하여 살든, 여성의 권리와 고유성은 언제나 중시되어야 하며, 여성의 고유한 삶이 남성의 욕망이나 잘못된 판단에 의해 위협받아서는 아니 됨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어떤 모양의 삶을 선택하든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도피성의 선택’은 바람직하지 않다. 문제는 결국 우리 인간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마태 19,1-12)
-유광수 신부-
어제 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라디오 프로를 듣게 되었다. 그 프로에 초대된 어느 중년부부의 이야기를 들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감사패"에 얽힌 이야기였다. 남편은 자주 직장 관계로 한 달에 약 20여 일은 집을 비워야 했다. 주위에서는 남편이 바람이 났다는 등 남편 관한 많은 구설수가 있었지만 부인은 남편을 믿고 딸 넷을 꾸꿋하게 교육시키면서 남편이 없는 가정을 지켜왔다. 그렇게 살아오기 어연 32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남편도 직장에서 정년 퇴직하여 가족들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가지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가족간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부부의 이야기였다.
남편이 집에 있으면서 그 동안 자기 가 없는 동안 아이들을 키우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내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였는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자기를 믿고 꾸꿋하게 가정을 지켜온 아내에게 무엇을 고마움의 표현을 할까를 고민하던 끝에 아내에게 바치는 "감사패"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감사패의 내용에는 그 동안 가정을 지켜 와 준 것에 대해 그리고 자식들을 잘 키워준 것에 대한 감사의 글을 적었다. 남편은 '감사패"를 만들어 아내의 생일 선물로 하려고 준비해두었다가 생일날에 아내의 나이만큼의 장미꽃다발과 함께 이 "감사패"를 전달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은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남편이 아내에게 바치는 "애정의 표현"인가 하는 노래의 가사를 써서 작곡을 의뢰하여 노래를 만들었고 본인이 직접 노래를 불러 테이프를 만들어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다는 것이다.
딸들이 다 커서 그들도 시집갔지만 그날 엄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온 딸과 함께 아내에게 "감사패" 수여식을 하였다는 것이다. "지나간 긴 세월들을 홀로 가정을 지키며 자식을 키우느냐고 고생한 당신에게.."라는 글을 큰 딸이 읽어내려가다가 목이 매여 울먹이는 소리로 읽었고 그 내용을 듣고 있던 아내도 울어서 그날 생일날에 때아닌 눈물 바다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었다. 나는 요즈음 자주 눈물을 흘린다. 어떤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거나 어떤 가슴 아픈 장면을 보면 자주 눈물이 나온다. 기뻐서 울고 슬퍼서 울고 가슴 아파서 울고 안쓰러워서 운다. 강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나약한 존재인가 보다. 아니 부드러운 남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철이 들었기 때문일까?
요즈음 같은 세상에 남편이 아내에게 "감사패"를 만들어 생일 선물로 바쳤다니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인가? 거기에다 노래까지 직접 작사하여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불러 테이프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다. 아! 부부란 참 아름답다.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정말 저런 것이 부부인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저런 모습으로 늙어가야 하는데..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기 때문에 서로 저렇게 사랑해야 하는데. 요즈음 우리는 이런 부부의 아름다움을 보기가 쉽지 않다. 부부의 아름다움은 한쪽만이 아니라 함께 일구워 나가는 것인데 그런 노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쉽게 결혼하고 쉽게 이혼하는 요즈음 이 중년 부부의 이야기는 많은 감동을 주고도 남는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에게 빛을 주신 것은 "하느님의 일과 인간의 일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있고 인간이 해야될 일이 있다. 이것을 착각해서는 불행해진다. 즉 하느님이 하실 일을 인간이 하려고 한다든가 또는 인간이 해야될 일을 인간이 하지 않고 하느님께만 맡겨둔다든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하느님이 하시게 놔두고 인간이 해야할 일은 인간이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이 삶의 원칙이다. 만일 그것을 뒤바꾸어 놓을 때에는 혼란스럽고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럼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지켜야할 삶의 원칙은 무엇인가?
첫째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라는 것이다. 즉 남자를 만들든 여자로 만들든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지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남자로 태어났든 여자로 태어났든 그것은 하느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내가 남자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또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불평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다. 또 우리 부부에게 아들을 주시든 딸을 주시든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지 여자가 하는 일도 아니요, 남자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때 남자 선호사상이니 뭐니해서 딸이 푸대접을 받게 되고 많은 태아가 살인을 당하게 된다. 또 아들을 못 낳는다고 여자들이 시집식구들이나 남편한테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는가? 삶의 원칙을 모르는 데에서 오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다.
두 번째,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는 원칙이다. 많은 경우 결혼한 이들이 부모를 떠나지 않는다. "부모를 떠나라."는 말은 더 이상 부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자립하라는 말이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부모에게 의존하고 사는 시기였다면 이제 결혼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는 것이다. 이 원칙을 지키면 부모와 자식간에는 더 할 수 없이 화목해지고 그것이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이다. 그런데 부모를 떠나지 못할 때 그것은 부모에게 두고 두고 짐이 되는 것이며 가장 큰 불효이다.
세 번째,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하느님은 결혼할 때 혼인 성사를 통해서 자녀를 낳아 번성하고 잘 살으라고 축복해주셨다. 그런데 이것을 인간이 지키지 않고 이혼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한 몸이 둘로 갈라지고 그로 인해 부모와 자식간에 갈라지고 형제와 형제가 갈라지고 가정이 파탄에 이르게 된다.
네 번째,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려고 하는 꿈을 버려야 한다. 이 원칙을 지키지 않을 때 스스로 성직자의 삶 또는 수도자의 삶을 떠나는 경우가 생긴다.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자기 삶의 자리에서 많은 어려움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 식별의 기준은 언제나 삶의 원칙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이다. 하느님의 일이면 하느님께 맡기고 인간이 해야할 일은 인간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하느님의 일을 인간이 하려고 한다든가 인간이 해야할 일을 하느님께 맡기려고 할 때 혼란이 오고 더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각자 자기 자리를 지키고 그곳에서 개발하여 발전시키고 꽃을 피워야 한다.
개나리는 개나리 꽃을 피우고 진달래는 진달래 꽃을 피워야한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려고 그렇게 서쪽 새는 울었나보다."
아름다움은 인내의 결과요, 삶의 원칙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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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