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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文選 제90권
서(序)
1.증 화엄 중덕 의침 서(贈華嚴中德義砧序)
2.송 신진사 한유문 서(送新進士韓有紋序)
3.증 우야운 상인 후서(贈玗野雲上人後序)
4.송 운 설악상인 서(送雲雪岳上人序)
5.수찬 중원 배규가 사서를 볕에 쬐기 위하여 칠장사에 가는데 전송한 서[送裴仲員修撰曬史七長寺序 規]
6.송 영암상인 유방시 서(送嬴庵上人遊方詩序)
7.송 국자전부 주선생 탁 사환시 서(送國子典簿周先生 倬 使還詩序)
8.송 행인 단공 우 사환시 서(送行人段公 祐 使還詩序)
9.정삼봉 도전 문집서(鄭三峯 道傳 文集序)
10.하 문하좌시중 평양조공 준 시 서(賀門下左侍中平壤趙公 浚 詩序)
11.심기리 삼편 서(心氣理三篇序)
12.심기리 삼편 후부집 서(心氣理三篇後附集序)
13.송 충청도 도관찰사 한공 상경시 서(送忠淸道都觀察使韓公尙敬詩序)
14.증 맹선생 시권 서(贈孟先生詩卷序)
15.송 밀양 박선생 돈지 봉사일본 서(送密陽朴先生敦之奉使日本序)
16.유항선생 한문경공 수 문집 서(柳巷先生韓文敬公脩文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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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1.증 화엄 중덕 의침 서(贈華嚴中德義砧序)
권근(權近)
부도사(浮屠師) 의침(義砧)이 우리 좌주(座主) 목은 상국(牧隱相國)의 시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나는 화엄종 주공(珠公)의 문도로 그대의 형 남공(南公)과는 동문이다. 내가 비록 세속 밖에 노니지만 진신 선생(搢紳先生)으로 포은(圃隱) 정공(鄭公), 약재(若齋) 김공(金公), 도재(陶齋) 이공(李公) 같은 이가 모두 나더러 글을 아는 사람이라 하여 멀리하지 않았다. 지금 여러분에게 시문을 청할 생각인데, 내가 시문을 청하는 것은 역시 까닭이 있어서다. 우리 불교는 마음이 항상 비어서 외물에 집착되지 않는 것을 도로 삼는데, 이는 세상에 대하여 아무런 즐거움도 없어야 된다. 그러나 사람이 마음이 있는 이상 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동하면 즐기는 것이 없지 않으니, 즐김과 욕심이 외물의 꼬임에 빠져 내 마음을 해롭게 하는 것이 무궁하기로, 내가 시문을 즐기는 것은 그것에 의탁하여 모든 것을 도피하자는 것이다. 공허한 데 도피하여 한가히 거하고 홀로 처하여 문자의 사이에 노닐며 세상일을 소견하고, 그 낙으로 근심을 잊게 하자는 것이 나의 뜻이다. 저 물욕에 빠져서 자기 본심을 상실하는 것에 비하면 차이가 있지 않은가. 예전 유가의 사대부와 종유하여 시문을 즐겼던 저 당(唐)나라 문창(文暢) 같은 자를 나는 실로 사모하니, 그대는 내가 불자(佛者)라 해서 멀리 하지 말아 달라.” 하므로, 나는 그 말이 도(道)가 있는 말이라 반갑게 듣고 고하기를, “스님은 진실로 주공(珠公)의 문에서 배우고 방금 말한 여러분에게 배척을 당하지 않은 처지니, 비록 스님의 설명을 듣지 아니했더라도 나는 믿을 터인데, 하물며 그 설명이 도가 있음에랴. 감히 정성을 베풀어 서로 허여하지 않으랴. 시문에 있어서는 여러분의 작품이 반드시 스님의 뜻을 남김없이 발휘하였을 것이니, 나 같은 자야 어찌 글을 아는 자이랴. 우선 그 설명만을 써서 증(贈)하는 바이다.” 하였다.
2.송 신진사 한유문 서(送新進士韓有紋序)
권근(權近)
한유문(韓有紋)이 직강(直講) 중질(仲質)을 통하여 나를 찾아와 《상서(尙書)》를 배우는데, 오랠수록 더욱 삼가 학문이 나날이 진보되었다. 이듬해 봄에 도은(陶隱) 이 선생이 성균진사과(成均進士科)의 주시(主試)가 되어 문장에 대한 고선(考選)이 심히 자상하였는데, 한유문이 높다랗게 선발되었다. 그래서 청주(淸州)로 내려가서 그 어버이에게 영광을 바치려 하니, 국자선생(國子先生) 약재(若齋) 김공 이하 박사(博士)와 제생(諸生)이 다 시가를 지어 그 행(行)을 빛나게 하였다. 길을 떠날 때에 나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며 말하기를, “제가 선생님의 문하에서 수업한 지가 2년이었으니, 지금 유사에게 선발되어 우리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모두 선생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어버이가 제게 바라는 것과 제가 선생에게 배우고자 하는 것은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닌데 지금 멀리 떠나게 되어 조석으로 좌우를 모시고 교훈을 듣지 못하게 되었으니, 선생께서는 한마디 말씀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자네가 나에게 《상서》를 배웠으니, 내가 자네에게 이야기할 것도 어찌 상서를 벗어날 수 있으랴. 옛날 우리 공부자(孔夫子)께서 어느 사람의 물음에 답하기를, ‘《서경》에 효도를 이르잖았는가. 오직 효를 하며 형제끼리 우애하여 정사에 펼쳐 가라.’ 하였고, 맹자께서 조교(曹交)의 물음에 답하기를, ‘요순의 도는 효제(孝悌)일 따름이다.’ 하였으니, 성현으로 사람을 가르친 뜻이 적절하다고 이르겠다. 무릇 《서경》이란 것은 제왕이 정치하는 일이니, 학자의 신분에는 적당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 도는 모두 효제로부터 미루어 가는 것이다. 요 임금이 구족(九族)을 친한 것과, 순 임금이 차츰차츰 바로잡아 크게 간악한 데 이르지 않게 한 것은 효도와 우애를 지극하게 한 것이니, 삼대 시대 성인의 도도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이 어찌 성분에 더하는 것이 있겠는가. 역시 스스로 극진히 할 따름이다. 자네가 어버이를 봉양하는 여가에 시험삼아 이 생각을 가지고 사대(四代)의 서(書)에서 찾아보면, 요순(堯舜)ㆍ우탕(禹湯)ㆍ문무(文武)의 도와 고기(皐夔)ㆍ이부(伊傅)ㆍ주소(周召)의 사적이 위기(爲己)의 학문에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효도하고자 하면 반드시 순 임금이 고수(瞽瞍)를 섬기듯이 하고, 우애하고자 하면 반드시 주공이 무왕(武王)을 섬기듯이 하여, 강습하고 밝혀서 알 수 있는 것을 다하고, 힘써 행해서 미루어 나아가 만사 만물에 각각 그 도를 다하면, 학문을 하는 도를 얻었다 할 것이다. 아, 몸소 실천하는 자라야 남에게 미루어 가게 되고, 제 집에서 시행하는 자라야 나라에 미치게 되는 것이니, 훗날 정사를 다스리는 것도 그 근본이 이에 있지 않겠는가. 부디 힘써 주기 바란다.” 하였다.
3.증 우야운 상인 후서(贈玗野雲上人後序)
권근(權近)
도은 선생(陶隱先生)이 나에게 말하기를, “불자(佛者)의 도가 우리 유도와는 같지 않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 선한 자는 역시 거절하지 않고 거두어서 벗을 삼았었다. 지금 우야운(玗野雲)이라는 자가 있는데, 나옹(懶翁)을 모시던 사람이다. 그는 나옹을 모시기를 오랠수록 삼가니, 옹이 몹시 사랑하였다. 옹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그는 화장하여 사리(舍利)를 얻어 탑 속에 안치하고 비를 세워 기록하매 무릇 옹에 대한 일이라면 힘써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윽고 한탄하였는데 하는 말이, ‘우리 스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내가 못 보는 것을 보게 하고, 내가 못 듣는 것을 듣게 하였는데도 나는 아직껏 그 우매한 소견을 버리지 못하였다. 지금 우리 스님은 뵈올 수 없이 되고, 우리 동방에는 또 스님과 견줄 만한 분이 없으니, 내 우매한 것은 장차 나날이 깊어가서 마침내 못 보고 못 듣는 몸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우리 스님의 덕은 오히려 수천리를 멀다 아니하고, 연(燕)나라 지방에 가서 지공(指空)을 만나고 강남(江南)에 가서 평산(平山)을 만난 다음, 그 얻은 것을 질문하고서야 올바른 길로 돌아왔다. 내가 우리 스님을 바라보는 것이 하늘과 땅 같지만, 그러나 우리 스님도 그러했는데 나만이 그렇게 하지 말란 말이냐.’ 하고, 이에 그 친구 웅중영(雄仲英)과 약속하고 중국에 가서 명산을 편답하여, 지난번에 말한 저 지공(指空)이나 평산(平山)과 같은 고승을 찾아서 바른 길로 들어가려 하는데, 나는 이미 중영(仲英)에게 증언(贈言)한 터이라, 야운(野雲)에게 재차 말을 줄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청하는 것이니, 그대는 부디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나옹의 제자가 무려 수백 명이지만 그 문장(門墻)에 들어선 자도 적은데, 더구나 그 당(堂)에 오른 자가 있겠는가. 오직 야운(野雲)이 좌우를 모시어 친히 배운 적이 아주 오래였으니, 그가 거의 당에 올랐다고 보겠다. 그러나 오히려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천하를 편답하여 스승을 구하기로 하니, 도를 향하는 뜻이 부지런하다 하겠다. 그러나 도(道)치고 배워서 전(傳)할 수 있고, 말로써 비유할 수 있는 것은 지극한 도가 아니다. 내 마음에 있는 것은 배워서 전하고 말로써 비유할 수 없는 것이니, 그 배워서 전하고 말로써 비유할 수 있는 것은 옹에게 다 들었을 터인데 달리 구할 것이 또 어디 있으며, 그 배워서 전하고 말로써 비유할 수 없는 것은 비록 스승이 있더라도 어찌할 수 없으며 다만 나의 자득에 달렸을 뿐이다. 지금 야운(野雲)이 제 몸에서 구하지 않고 남에게서 구하려 들며, 마음에서 구하지 않고 외면에서 구하려드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일을 어찌 야운이 모르리오. 그렇다면 그가 중국의 머나먼 길을 꺼리지 않는 것은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가 그 스승 나옹을 만나서 배우기를 급급히 하며 미치지 못할 듯이 하다가 지금 여의고 나니, 마치 어린아이가 그 어미를 여읜 것 같아서 사랑이 깊을수록 사모함이 더욱 간절하고 모시지 못한 적이 오랠수록 슬픔이 더욱 심하지만, 그 스승을 다시 얻어 볼 수 없으니, 그 스승과 같은 인물을 구하되 널리 국중(國中)에서 구해보고, 그래도 못 얻으면 또 멀리 천하에서 구해서 반드시 스승과 같은 인물을 얻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어찌 스스로 구해도 유익할 바 없다 하여 그만둘 수 있으랴. 그 뜻과 정성이 부지런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선생은 도덕 문장이 우뚝하여 우리 유가의 본이 되어 항상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자기 책임으로 삼고 있는 데도, 야운을 배척하지 아니할 때는 그 사람됨을 알 만하겠다. 그러므로 서문을 짓고 또 야운송(野雲頌)을 지어서 돌리는 것이다. 그 사(辭)에 이르기를,
뭉게뭉게 피어나는 저 구름이여
아득하여 남은 자취 없구려
오직 남은 자취 없는지라
어디고 집착이 없다네
동서남북 따질 것 없이
가고픈 데로 갈 뿐이라네
작은 데서 생겨나서
육합에 가득 차네
펴지다 걷혔다 하나
그 자체는 그대로세
만물이 영화롭게 피어나니
비를 내린 은택이라네
4.송 운 설악상인 서(送雲雪岳上人序)
권근(權近)
나옹의 사제자 운(雲) 설악(雪岳)이 산에서 내려와 서울에 들러 우리 좌주(座主) 목은(牧隱)선생을 뵙고 자기 당(堂)에 대한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니, 선생은 부훤당(負暄堂)이라 하게하고, 기(記)까지 지어 주었다. 그 기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나는 목은 댁을 찾아가서 내 당의 이름과 기를 받았다. 그러나 내 몸이 일정한 곳이 없는데, 어찌 이른 바 당이란 것이 있겠는가. 그저 억지로 당이라 이름을 갖는 것은 도(道)에 의탁하자는 것이다. 내가 우리 스님을 섬긴 적이 20년이란 오랜 세월이었으나, 오히려 그 도에 비슷한 것도 얻지 못했는데, 지금 우리 스님을 여의고 나니 안으로 마음에서 구하고, 밖으로 이름에서 구하여 사방의 선각(先覺)에게 질문할 작정이다. 그래서 진신(搢紳)의 말을 얻어서 멀리 떠나는 밑천을 살고자 하는데, 내가 머리를 깎은 이래로 한번도 도성에 들어간 일이 없으니, 어떻게 진신을 알 수 있겠는가. 댁은 목은의 문인이니, 목은이 나를 배척하지 아니하였는데, 댁이 나를 배척하겠는가. 그러므로 오직 댁에 청하는 것이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도가 전하기 어려운 것이 이다지도 심할까. 영산(靈山)의 백만억 중생이 부처의 도를 듣지 아니한 자 없는데, 정법안장(正法眼藏)은 오직 가섭(伽葉)이 홀로 전하였고, 행단(杏壇)의 3천 제자가 우리 공부자의 도를 듣지 아니한 자 없는데, 오직 안자(顔子)만이 그 도에 가까이 갔을 뿐이니, 도가 전하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다. 하물며 성인이 떠나신 수천 년 뒤에 있어서랴. 근세에 와서 우리 동방의 불자(佛者)로는 오직 사(師)의 스승 나옹이 있어 지공(指空)과 평산(平山)의 통서(統緖)를 이어받고 동으로 돌아와 후학의 문호를 열었으며 그가 죽어서는 사리의 특이한 것이 있었으니, 능히 사람이 전하지 못한 바를 전한 것이 진실하다. 아무리 오랫동안 친히 배웠다 하지만 어찌 그 한계를 엿보기 쉬우랴. 그러나 도(道)는 형기(刑器)를 떠나지 아니하니 아득하고 황홀한 것을 이름이 아니요, 또한 형기에 섞이지도 아니하나니 천근하고 구차한 것을 이름함도 아니다. 안으로 내 마음에 갖추어 있고, 밖으로 사물에 엉겨 있으니, 내 마음을 놓아 버리면 근본이 없어서 체(體)가 서지 못하게 되고, 사정을 떠나면 갖추지 못하여 용(用)이 행하지 못하는 것이니, 체와 용이 겸전하고 안팎을 똑같이 기르는 것이 우리 유가의 학문이다. 불자의 도는 내가 비록 알지 못하나 또한 이 마음에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이 마음의 크기는 저 허공과 같아서 피아(彼我)와 내외(內外)가 없다. 사(師)가 마음에서 구하고 또 이름에서 구하는 것은 능히 내외가 두 가지 이치가 아님을 알기 때문일 것이니, 다른 날 선각자에게 질문하면 반드시 합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5.수찬 중원 배규가 사서를 볕에 쬐기 위하여 칠장사에 가는데 전송한 서[送裴仲員修撰曬史七長寺序 規]
권근(權近)
나는 일찍이 《논어》에서, “나는 사가(史家)가 사(史)의 의심나는 대목을 빼놓은 것을 보았다.”고 하신 공자의 말씀을 보았는데, 인하여 해설하기를, “역사는 반드시 문(文)이 있음으로써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지만 문이 많아서 실상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 문이 많아서 실상을 잃기보다는 차라리 문이 적은 것이 낫다. 주(周)나라가 쇠하여 문이 그 실상보다 지나치니, 공자께서 몹시 상심하였다. 그러므로 《상서(尙書)》에서는 그 번잡하고 산란한 것을 삭제하였고, 《춘추(春秋)》에서는 곧장 한 말로 한 가지 일을 단정하였다. 《상서》나 《춘추》는 역사이다. 더구나 성인이 필삭(筆削)하여 수정하였기 때문에 경(經)이 된 것이며, 좌씨(左氏)는 성인의 필단을 도왔다 하여 전이 된 것이나, 오직 비유에 통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화(浮華)하고 과장하는 실수가 있음을 면치 못하였고, 사마자장(司馬子長)은 소탕한 기운을 발로하여 웅장하고 굳건한 글을 썼기 때문에 양사(良史)라 칭한다. 그러나 오직 《춘추》에 법을 두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일이 허술한 데가 많고 시비가 사뭇 그릇되었으니, 군자가 한스럽게 여긴다. 이 두 사람도 오히려 그렇거든 하물며 그 밖이랴. 역사의 문은 많은 것을 귀히 여기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역사는 천하의 시비를 공정하게 하여 만세의 권계(勸戒)를 남기는 것이다. 위로 군상(君相)의 정치에 대한 잘잘못과, 아래로 민속의 풍속에 대한 아름답고 악한 것과, 고금의 치란과 국가의 흥패와 모든 인사(人事)의 거세(巨細)ㆍ종시(終始)와 정미(精微)ㆍ곡절(曲折)로부터, 멀리 천지ㆍ일월ㆍ풍정(風霆)ㆍ상박(霜雹)의 변과, 세밀히는 초목ㆍ조수(鳥獸)ㆍ우모(羽毛)ㆍ인개(鱗介)의 특수한 것까지, 일에 따라 빠짐없이 써서 뒷날의 신봉이 되게 하였으니, 문이 아니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문의 치례를 아니할 수 없는 것이 또 이와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이치를 밝히는 데 달렸을 따름이다. 이치가 밝으면 사연은 반드시 요약하되 곡진하며, 문은 반드시 솔직하고 성실하여 들어서 천하일을 논하면 저울추로 경중을 맞추는 것 같고, 자로 장단을 재는 것 같으며, 촛불이 비치듯 하고, 거북으로 점치듯 하여, 시비가 어긋나지 않고 권계(勸戒)가 분명할 것이다.” 하였다. 경산(京山) 배군(裴君) 중원(仲員)이 태학관에 있으면서 《춘추》를 공부해서 필삭(筆削)의 뜻을 강론하여 그 이치를 밝게 알므로 문에 있어서도 능히 성하였고, 대과(大科)에 오르자 관한(館翰)의 추천으로 사직(史職)에 보충되어 의리의 문으로 사책에 대하여 포폄(褒貶)을 가한 자가 해가 넘었다. 요즈음 사책을 볕에 쪼이라는 명령을 받들고 붓을 싣고 떠나니, 진신(搢紳) 선생이 노래하여 증정하고 나로 하여금 서문을 짓게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아, 우리 공부자께서 《춘추》를 찬수(纂修)한 것은 쇠한 세상의 뜻이니, 역사로서 또한 세상의 변함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가 해동을 차지한 지 수백 년이라. 처음에 국사를 가야산 해인사에 수장하였으니, 혹시 후세에 난리가 일어나면 잃어버릴까 염려해서 그런 것이다. 가야산은 서울에서 가장 멀고 또 길이 험하며, 해인사는 가야산에서도 가장 궁벽하고 깊은데 있기 때문에 국가가 비록 변이 있어도 병화는 한 번도 미치지 아니하였으니, 조종(祖宗)의 생각이 원대한 것이었는데, 요즈음 왜적을 제어하는 일에 규율을 잃어서 그놈들이 깊이 들어와 주ㆍ현을 침략하니, 가야산도 거의 지키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기미년 가을에, 재마루를 넘어 북으로 가서 충주(忠州) 개천사(開天寺)에 옮겼더니, 금년 계해년 여름에 왜적이 또 충주 부근 고을을 육박하므로, 7월에 또 개천사에서 죽주(竹州) 칠장사(七長寺)로 옮겼다. 험하고 먼 땅도 족히 믿을 수 없으며, 적은 깊이 들어와 침략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아, 이를 보면 세변(世變)을 짐작할 수 있는 동시에 나는 여기서 느낀 바가 있다. 옛날에 주(周)나라가 쇠하여 난신적자가 발호하므로, 공자는 그것을 두려워하여 《춘추》를 편수하였는데, 요즈음 난이 극도에 달하고 시대의 변이 너무도 심하다. 중원(仲員)이 가니, 나는 그가 반드시 특필(特筆)이 있을 것으로는 안다. 중원이 태학관에 있을 적에 나는 좨주(祭酒)가 되었고, 지금 또 사직(史職)에 같이 있으니, 서문의 부탁을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전일 《논어》에서 얻은 것과, 오늘날에 대한 느낌을 써서 서문을 하는 것이다.” 하였다.
6.송 영암상인 유방시 서(送嬴庵上人遊方詩序)
권근(權近)
승(勝) 영암(嬴庵)이 사방을 유람하는 길에 명유(名儒)와 시승(詩僧)이 시를 증정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옷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서문을 청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당(唐)나라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은 일세의 거유(鉅儒)이지만 부도(浮屠) 문창(文暢)은 그 두 사람의 시를 다 얻었다. 그래서 문창의 이름이 천 년을 전하여 한(韓)ㆍ유(柳)씨와 더불어 함께 썩지 않으니, 이는 시문의 힘이다. 문창은 이미 영광을 거의 다 하였지만 한ㆍ유씨의 문장은 고금에 우뚝하니, 후세에서 모두 한자(韓子)를 종(宗)으로 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문창에 아첨하지 않은 까닭이다. 아첨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도를 곧게 고하여, 그의 그른 점을 배척한 것이니, 문창이 흔연히 받았는지 혹은 분연히 성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유씨는 유자(儒者)로서 오히려 지석(知石)을 들어 한자를 헐뜯었으니, 문창이 성낸 것은 알 만하겠다. 한자는 다만 그 도를 밝하는 데 힘을 다했을 뿐이니, 어찌 유씨가 헐뜯고 문창이 성낼 것을 헤아렸겠는가. 지금 영암(嬴庵)이 여러 선비에게 얻은 시가 역시 많다. 하지만 능히 한자처럼 아첨하지 않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랴.
아, 도(道)는 천리에 근원하여 인륜에 나타나므로 요순(堯舜)은 이 도로써 임금이 되고, 이윤(伊尹)ㆍ주공(周公)은 이 도로써 신하가 되고, 공자ㆍ맹자는 이 도를 얻어서 아래 있었고, 증자(曾子)ㆍ민자(閔子)는 이 도를 얻어서 어버이를 섬기어, 닥치는 곳에 따라 각각 그 직책을 다하였으니, 이것은 성현이 인륜을 다하고 천리를 온전하게 한 것이다. 예악(禮樂)ㆍ형정(刑政)ㆍ관혼ㆍ상제의 대사와, 부부(夫婦)ㆍ거실(居室)ㆍ경농(耕農)ㆍ잠직(蠶織)의 작은 일에까지도 어디고 존재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미세하다 해서 생략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유도는 곧 일용 사물의 상도에 입각하여 물건마다 각기 법칙이 있어 친함에 따라 사랑이 있기 마련이요, 엄함에 따라 공경이 있기 마련이며, 구(矩)를 잡아서 모가 나오고, 규(規)를 돌려서 원(圓)이 형성되나니, 행하는 데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고, 증험하는 데는 가장 확실하며, 베풀면 잘 다스려지고, 전해도 아무런 폐단이 없다. 은(殷)ㆍ주(周) 시대 이전에는 이 도를 얻어서 천하가 다스려졌고, 진(秦)ㆍ한(漢) 시대 이후에는 이 도를 상실해서 천하가 어지러웠으며, 노(老)ㆍ불(佛)의 설이 그 사이에 일어났는데, 불자(佛者)가 더욱 크게 번성하여 천 년을 내려오고 육합(六合)을 휩쓸어서 배우는 자는 더욱 많아지고 받드는 자는 더욱 삼가니, 그 도가 크게 행한다 이를 수 있는데, 천하가 잘 다스려지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윤리를 끊는 것을 높이 알고 사물을 떠나서 도를 구하니, 이는 구규(矩規)를 철폐하면서 모나고 둥근 것을 구하려는 격이므로 끝내 잘 다스려지지 못한 것이다. 상인은 신심(身心)ㆍ성명(性命)의 이치와 이륜(彝倫)ㆍ일용(日用)의 상도에서 도를 구하지 아니하고, 외로이 사방을 헤매기로 나는 이른바 말타기에 유탕하여 돌아갈 바를 모르듯이 될까 걱정한다. 나는 한자(韓子)가 아첨하지 않는 것을 사모하기 때문에 상인에게 말하는 것이니, 흔연히 받아줄는지 성낼는지 모르겠으나, 이는 상인이 스스로 알아 할 일이다. 내가 어찌 협의하랴.” 하였다.
7.송 국자전부 주선생 탁 사환시 서(送國子典簿周先生 倬 使還詩序)
권근(權近)
황제가 대위에 오른 18년 가을에, 국자학록(國子學錄) 장보(張溥)와 부사(副使) 단우(段祐)를 보내어 조서를 받들고 와서 선왕의 시호를 추증하여 공민(恭愍)이라 하였고, 국자전부(國子典簿) 주탁(周倬)과 부사 낙영(雒英)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받들고 와서 사군(嗣君)을 봉하여 국왕으로 삼았다. 처음 국경에 도착할 적에 왕은 배신(陪臣)을 시켜 노상에서 맞아 위로하기 위하여 문하평리 정몽주(鄭夢周)와 밀직부사 하륜(河崙)을 수주(隨州)로 보내고, 문하찬성사 심덕부(沈德符)를 평양(平壤)으로 내보내고, 용천(龍泉)에 당도하자 문하시중 임견미(林堅味)와 수문하시중 이성림(李成林)이, 근교(近郊)에 당도하자 판문하부사 조민수(曹敏修)가 서로 계속해서 나갔다. 9월 16일 을해에 장공(張公)ㆍ단공(段公)이 오고, 이튿날 병자에 주공(周公)ㆍ낙공(雒公)이 오니, 왕은 면복(冕服)과 의장(儀仗)과 악대(樂隊)를 갖추어 배신을 거느리고 서대문 밖에 마중나가 왕궁으로 인도하는데, 부복(俯伏)하여 행례할 적마다 더욱 삼가니, 황제의 덕을 공경하고 사명을 존중하였기 때문이었다.
주 선생(周先生)은 성천자의 어진 이를 구하는 시초에 높은 과거를 땄고 큰 벼슬에 올랐는데 그 호쾌하고 탁월한 자질과 통민(通敏)하고 명백한 학문은 반드시 조석으로 좌우에 모시어 황가(皇家)의 정책을 빛나게 할 것이니, 어찌 다만 사방에 사신하여 전대(專對)에만 능할 따름이랴. 나라 사람이 오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동시에 가는 것을 서운히 여겨, 서로 시를 노래하여 그 사모하는 정을 풀어 한 책이 이뤄지게 되었는데 나에게 맡겨 그 머리에 서문을 쓰게 하였다. 우리 동방이 상고 시대로부터 습속이 예의를 숭상하여 중국을 높일 줄을 알았으며, 우리 공민왕은 성천자의 황극(皇極)을 세우는 시기를 만나서 표를 올리어 조공을 바치고, 만세를 동번(東藩)의 신하가 되기로 맹서하였고, 사왕(嗣王)은 천위(天威)를 대하고 선지(先志)를 따라서 감히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므로, 천자는 가상히 여기어 역명(易名)의 은전과 계세(繼世)의 명령을 내리어 한꺼번에 모두 거행되게 하니, 덕이 지극히 거룩하다. 이제부터 우리 동방의 귀화하는 정성이 더욱 천총(天聦)에 들리어 나눠 주는 복에 참여할 수 있게 되리니, 실로 선생에게 바라는 바가 크다.
8.송 행인 단공 우 사환시 서(送行人段公 祐 使還詩序)
권근(權近)
고려가 해동에 있어 대대로 중국을 섬기어 신하의 직분을 다하였거니와 우리 선왕에게 미쳐서는 천명을 공경하여 성조(聖朝)에 귀부(歸附)하였고, 사왕(嗣王)은 그 뜻을 계승하여 조공을 바치는 것이 더욱 정성스러웠다. 홍무(洪武) 18년 가을에, 천자는 선왕의 귀부한 일을 생각하고 사왕이 선왕의 뜻을 계승하는 것을 가상하게 여겨, 조서를 내려 선왕의 시호를 공민(恭愍)이라 하고, 사왕을 봉하여 습작하게 함과 동시에 국자학록(國子學錄) 장공(張公) 보(溥)와 행인(行人) 단공(段公) 우(祐)를 명하여 소국에 보내어 덕음(德音)을 선포하게 하니, 이 나라 사람은 대소를 막론하고 느껴운 눈물과 즐거운 웃음으로 서로 집에서 경축하고 길에서 노래하여 천자의 아름다운 명령을 선양하였다. 그들이 돌아갈 무렵에, 선비들이 국민의 뜻을 서술하여 각기 시가를 짓고 나로 하여금 서문을 짓게 하였다.
내가 생각해 보니, 옛날 성인이 중국을 통치할 적에 만국(萬國)을 세우고 제후(諸侯)를 친히 하여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두호하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어 각기 그 정성을 다하였기로 원근(遠近)이 평화를 이룩한 것이다. 황명(皇明)이 만방을 차지하여 인이 깊고 덕이 두터우니, 천지에 있는 모든 동물이나 식물도 모두 그 은택에 젖었다. 그러므로 해외에 있는 우리나라로도 동인(同仁)의 덕화를 입어 종시(終始)를 올바르게 하는 은혜로운 조서가 이미 구비되었으니, 천명을 즐기고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인(仁)이 지극하다 하겠다. 단공은 우뚝한 기상과 넓은 식견으로 성조(聖朝)를 만나서, 행인(行人)의 직무를 띠고 유거(輶車)를 타고 사방에 사신으로 와서 위로 천자의 덕을 선포하고 아래로 먼 곳 사람의 충정을 달하게 하여 성스러운 교화에 같이 젖게 하리니, 진실로 성천자가 위임한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가 돌아가면 우리 임금의 천명을 두려워하고 대국을 섬기는 정성이 더욱 상달될 것이다. 상하의 사이에 성의(誠意)가 모두 신실하고 원근이 골고루 화평하여 만세라도 싫증이 없게 하는 것이 오늘로부터 비롯될 것이니 자못 다행한 일이다.
9.정삼봉 도전 문집서(鄭三峯 道傳 文集序)
권근(權近)
문(文)이 천지간에 있어 도(道)와 더불어 소장(消長)을 같이하므로 도가 위에서 행해지면 문이 예악과 정치교화의 사이에 나타나고, 도가 아래서 밝혀지면 문이 간편(簡編)과 필삭(筆削)의 안에 깃든다. 그러므로 《시경》 《서경》 《역경》 《춘추》가 그 도를 실은 것은 마찬가지다. 주(周)나라가 쇠하여 도가 희미해 지자, 백가(百家)가 한꺼번에 일어나서 각기 그 학술로 울리게 되어 문이 병들기 시작하였으니, 한(漢)나라 사마천(司馬遷)이나 양웅(揚雄)의 무리도 그 말이 오히려 순아(醇雅)하지 못하였으며, 불씨(佛氏)가 중국에 들어오자 사계(斯界)의 문이 더욱 병들었고, 위(魏)ㆍ진(晉) 이후로는 계속 묵어 소문이 없다가, 당(唐)나라에 와서 한자(韓子)가 인의를 높이고 이단을 물리쳐 8대(代)의 쇠함을 일으켰고, 송(宋)나라가 흥기하여 정(程)ㆍ주(朱)의 서(書)가 나와서야 도학이 다시 밝아져서, 사람들이 우리 도가 크고 이단이 그른 줄을 알게 하여 후학을 열어주고 만세를 밝게 하였으니, 아, 거룩하도다. 우리 동방이 비록 해외에 있으나 벌써 기자(箕子)가 8조(條)로 가르쳐 풍속이 염치를 숭상하게 되었으며, 문물이 아름답고 인재가 쏟아져 나와 거의 중국과 짝할 만하였다. 이로부터 대대로 문치를 숭상하여 과거를 베풀고 선비를 취택하는 것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랐으며, 인재를 육성하여 수백 년을 내려오니, 경사대부(卿士大夫)가 모두 성하고 빛나는 문학의 무리였다.
우리 집 문정공(文正公 국재(菊齋) 권보(權溥)를 말함)이 비로소 주자(朱子)의 사서(四書)를 간행하게 하여 후학을 권장하니, 그 사위 익재(益齋) 이 문충공이 스승으로 섬기고 친히 배워 의리의 학을 제창하여 일세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가정(稼亭), 초은(樵隱) 제공(諸公)이 따라서 흥기하였고, 담암(澹庵) 백공(白公)이 이단을 물리치는 데 더욱 힘썼고, 우리 좌주(座主) 목은(牧隱) 선생이 일찍이 가훈(家訓)을 이어받아 중국에 들어가 정대하고 정미한 학문을 연구하고 돌아오니, 유림들이 모두 존숭하였다. 포은(圃隱) 정공, 도은(陶隱) 이공, 삼봉(三峯) 정공, 반양(潘陽) 박공, 무송(茂松) 윤공 같은 이가 다 그 당(堂)에 올랐는데, 삼봉은 포은ㆍ도은과 더불어 가장 친절하여 서로 강론하고 연마하여 더욱 소득이 있었다. 그래서 항상 후진을 가르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았고, 시서를 강론할 적에는 알기 쉬운 말로 지극한 이치를 형용하여 학자가 한번 들으면 곧 그 의(義)를 알았으며, 이단을 물리칠 적에는 그 책에 능통하여 먼저 그 자상한 것을 말하고서 그른 점을 배척하니, 듣는 자가 모두 복종하였다. 이로써 경(經)을 듣고 종유하는 자가 골목을 메웠으며, 일찍이 그에게 배워서 드러난 벼슬 자리에 오른 자가 어깨를 나란히 서게 되었고, 비록 무부(武夫)나 속사(俗士)라도 그 강의를 들으면 갈수록 싫증이 나지 아니하며 부도(浮屠)의 무리도 또한 상종하여 감화된 자가 있었다. 그리고 예악(禮樂)ㆍ제도(制度)ㆍ음양(陰陽)ㆍ병력(兵曆)에도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팔진(八陣)을 조(祖)로 하여 36변(變)의 계보를 작성하고, 태일(太一)을 요약하여 72국(局)의 도해(圖解)를 만들었는데, 간략하면서도 곡진하니, 세상의 명장(名將)이나 술사(術士)가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것쯤은 다 선생으로서는 여사(餘事)이다.
선생은 절의가 가장 높고 학술이 가장 정밀하였으며, 일찍이 바른 말로 재상을 거슬려 남방으로 유배되어 10년을 났으나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하였고, 공리(功利)의 무리와 이단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업신여기고 헐뜯어도 그 지킴이 더욱 견고하니, 선생은 도의 믿음이 독실하여 의혹하지 않는 분이라 이를 만하다. 선생의 저술에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몇 편이 있는데, 의리의 정밀한 것이 환하게 눈앞에 나타나서 능히 전대 현인들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다하였고, 《잡제(雜題)》 몇 권은 신심(身心)ㆍ성명(性命)의 덕에 근본하고, 부자 군신의 윤리에 밝으며 크게는 천지ㆍ일월과, 적게는 조수ㆍ초목에 까지도 이치가 주도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이 정미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왕국(王國)의 사명(辭命)에 대한 문(文)은 전아(典雅)하여 체를 얻었고, 고율(古律)의 시는 위(魏)ㆍ진(晉)을 도습하고 한(漢)ㆍ당(唐)을 따랐으나, 이취(理趣)는 아송(雅頌)에서 나와 질박하고도 정연하며 온화하고도 담담하여 진실로 옛 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악부소서(樂部小序)》는 번잡하고 음란한 것을 삭제하고 오직 성정의 바른 데서 감발된 것만을 기록하였으니, 어허, 선생의 문은 다 명교(名敎)에 보탬이 있어 공언(空言)에 비할 것이 아니요, 이는 그 도와 더불어 아울러 후세에 전하여 썩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비록 하국(下國)에 나서 그 문을 황조(皇朝)의 전책(典策)에 시용하지 못하였으나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조회할 적에 요해(遼海)를 건너고 제(齊)ㆍ노(魯)를 지나면서 지은 시문이 모두 중국의 문사에게 칭탄을 받았으니, 이는 능히 문장으로 일방에 울리어 동점(東漸)의 교화를 찬양하여 동쪽 사람으로 하여금 만세를 두고 노래하여 선대의 융성한 치도(治道)와 함께 무궁토록 전할 것이 역시 의심없다. 내가 비록 변변찮은 몸이나 다행히 종유의 열에 참여하여 여론(餘論)을 들었고, 또 다행히 더럽게 여기지 않고 서문을 하라 하기에 감히 책머리에 쓰는 바이다.
10.하 문하좌시중 평양조공 준 시 서(賀門下左侍中平壤趙公 浚 詩序)
권근(權近)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예는 더할 나위 없다. 성인이 스승을 임금과 어버이에게 견주어 섬기기를 한결같이 하게 하였으니, 미덕을 이루고 인륜을 후히 하자는 것이다. 삼대 시대 이상에는 스승에 대한 도가 가장 밝았다. 그러므로 정치가 융성하고 풍속이 아름다웠으며, 한(漢)나라의 과거가 시행됨으로부터 스승 제자의 예가 오히려 다 변하지 아니하였고, 당(唐)나라에 이르러서는 그 법이 자못 성하여 시험을 맡은 이는 좌주(座主)라 칭하고, 선발된 자는 문생(門生)이라 하였으니, 스승과 제자의 예가 겨우 이에 그쳤다. 그래서 그 문생이 좌주의 생존시에 스승의 뒤를 이어 시험자리를 맡게 되면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여 성사로 여겼다. 우리 동방은 고려 광종(光宗)으로부터 그 예가 극히 풍성하여 시험을 맡은 자는 반드시 성찬(盛饌)을 장만하고 예복을 갖추어 문생을 거느리고 좌주를 받들어 모셔다가 자기 집에서 잔치를 하였으니, 그 어버이를 대접하는 것과 구별이 없었으며, 임금은 유사에게 명하여 잔치를 하게 하고, 특별히 궁중의 아악을 내려 주어 영광을 입혔다. 이로 말미암아 좌주는 문생을 보기를 자식과 같이하고, 문생은 좌주를 보기를 아비와 같이하니, 스승 제자의 예가 후했다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오랫동안 태평하여 오로지 문교(文敎)만을 숭상하여 사치성만 늘어갔는데 비용이 너무도 많이 들어 간혹 군ㆍ현에까지 징수하여 몇 달 만에 치르는 일도 있었다. 공민왕 기유년에 이 폐습을 개혁하고자 하여 모조리 중국의 회시(會試) 보는 제도를 따르게 하고, 잔치 베푸는 일을 금지하였다.
갑인년에 광양(光陽) 이공(李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공사(貢士)의 시험을 맡았는데, 현 시중(侍中) 평양(平壤) 조공(趙公)이 대전(大殿)의 하유로 발탁되어 높은 과거에 오르니, 좋은 사람을 얻었다는 평이 돌았다. 명성이 날로 전파되어 홍문관에서 제고(制誥)제고(制誥)를 맡고, 사헌부에서 헌강(憲綱)을 떨치며, 형조의 장이 되어서는 간활하고 사특한 자는 숨을 못 내쉬고, 남방을 순찰하면 바다 도적이 도망갔으니, 사람이 모두 그가 크게 쓰이기를 희망하였다. 무진년에 금상 전하가 당시 대장으로 대의에 입각하여 군사를 돌이켜 내란을 평정하고, 으뜸으로 공을 발탁하여 사헌부의 장으로 삼으니, 공이 정성껏 봉직(奉職)하여 알고서는 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고,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경계를 올바르게 하고, 기강과 법도를 세워 간흉을 복종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워서 왕씨의 제사를 회복하게 하니, 온 나라 안팎이 흡족하게 여겨 지극한 정치를 우러르게 되었다. 경오년 여름에 문하평리로 문형을 맡게 되었는데, 당시 광양공(光陽公)이 일찍이 검교시중을 지내고, 나이 팔순에 접어 들었으나, 강건하여 쇠하지 아니하며, 맑은 덕과 굳센 절개가 진신(搢紳)의 표본이 되고, 감식안에 정미하여 능히 선비를 얻고 복록이 창성하여 능히 천수를 누리니, 사람이 공경하고 흠탄하지 않는 자 없었다.
임신년 가을에 공양(恭讓)이 도를 상실하여 멸망을 자초하니, 공이 부상(副相)으로서 대의를 제창하여 계획을 정하고 대덕(大德)을 추대하여, 만세의 반석 같은 업을 터잡아서 공훈은 개국에 으뜸하고, 직위는 시중(侍中)에 올랐으니 귀(貴)가 이미 극도에 달했다. 그러나 광양공을 섬겨 순순히 자제의 예를 받들되 더욱 근신하였다. 광양공이 문생을 거느리고 공을 청하여 자기 집에서 잔치하여 시 일절(一絶)을 지어 시중에 제수된 것을 축하하니, 그 동문으로 조정에서 벼슬하는 문사들이 운자를 나누어 시를 지어서 큰 축(軸)을 이루었다. 이듬해 여름에 또 공사(貢士)를 맡았으니, 무릇 문생으로 좌주의 생존시에 만약 좋은 벼슬에 오르고, 한 번만 시석(試席)을 맡게 되어도 역시 영화로 여기는데, 하물며 총재의 자리에 있고 두 번이나 시석을 맡음에 있어서랴. 과거가 생긴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병조정랑 송인(宋因)은 공의 동방(同榜)인데, 찾아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시에는 반드시 서가 붙는 것이 옛법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그 미덕을 칭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자네는 그 머리에 서문을 쓰라.” 하였다. 나 생각하건대, 평양 조씨는 대대로 어질고 후한 덕을 쌓아서 정숙공(貞肅公)이 충렬왕(忠烈王)을 도와서 지위가 백관의 으뜸이 되고 우뚝한 공적이 있었으며,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지금에 와서는 공이 이윤(伊尹)ㆍ여상(呂尙)의 재주로 육경(六經)의 문을 강명하고, 주자(周子)ㆍ정자(程子)의 학으로 백대의 사(史)를 통달하여 넓은 도량은 백성을 구제할 수 있고, 바른 명망은 세속을 진압할 수 있으며, 위엄은 사직(司直)에 나타나고 덕은 구첨(具瞻)의 지위에 알맞아서 능히 집안 계통을 잇고 왕업을 보좌하여 사적은 역사에 빛나고 여유는 후세에 미칠 만하다. 그 풍성한 공적은 종정(鍾鼎)에 새기고, 죽백(竹帛)에 실어서 만세를 유전하여 썩지 않을 만하니, 어찌 시인의 글이 필요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기욱(淇澳)의 풍(風)이 아니면 위무공(衛武公)의 문덕(文德)을 알 길이 없고, 대명(大明)의 아(雅)가 아니면 사상보(師尙父 여상(呂尙))의 매[鷹]처럼 드날린 무열(武烈)을 볼 수 없으니, 시도의 관계됨이 어찌 적다 하랴. 그러므로 공의 개국(開國)한 공은 국사에 실려 있으니, 스승을 존숭한 도는 마땅히 여러 어진 이의 시가 있어야 한다. 공은 스승을 섬기는 도가 있어 지극히 후하여 이미 이로써 그 좌주를 섬겼고, 또 이로써 그 문인을 거느렸으니, 이 도를 미루어 사람에게 베풀면 인륜이 어찌 후하지 아니하며, 풍속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공의 문인이 또 명사와 달재(達才)가 많으니, 다른 날에 반드시 공이 광양공(光陽公)을 섬기듯이 공을 섬길 것은 의심없는 일이다. 아, 스승의 예가 행함으로써 스승의 도가 다시 밝아지니, 스승의 도가 밝아지는 것은 교화의 근본인즉, 풍속이 순박하고 아름다워 지극한 정치를 이룩할 것이, 반드시 이로 말미암아 비롯됨과 동시에 저 융성한 삼대 시대도 또한 거의 바라볼 수 있게 되리니, 보좌하는 업적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즐겨 서문을 하는 것이다.
11.심기리 삼편 서(心氣理三篇序)
권근(權近)
심(心)ㆍ기(氣)ㆍ리(理) 3편은 삼봉 선생(三峯先生)이 지은 것이다. 선생은 항시 도학을 밝히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자기 책임으로 삼았는데, 그가 말하기를, “사람이 생겨날 적에 천지의 이치를 받아서 본성이 되고 그 형체를 이룬 것은 기이다. 이와 기가 뭉쳐서 능히 신기하고 밝게 된 것은 마음이다. 유(儒)는 이를 주로 하여 마음과 기를 다스리니, 하나에 근본하여 둘을 다스리는 것이요, 노자(老子)는 기를 주로 하여 양생(養生)하는 것을 도로 삼고 석씨(釋氏)는 마음을 주로 하여 동하지 않는 것을 종(宗)으로 삼아서, 각기 그 하나만을 지키고 나머지 둘은 빼놓았다. 그래서 노자는 무위(無爲)를 추구하여 일의 시비를 따지지 않고 모두 버려 던지니, 이는 그 형체를 수고롭게 하여 그 기운을 소모시킬까 두려워한 것이나, 기운이 진실로 길러지면 정신이 모이고 안정되어 비록 하는 일이 있더라도 나의 삶은 해를 받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석씨는 무념(無念)을 추구하여 생각의 선악을 막론하고 모두 버리니, 이는 그 정신을 수고롭게 하여 그 마음을 동하게 할까 저어한 것이나, 마음이 진실로 정해지면 체는 항상 공적(空寂)하여 비록 만변(萬變)에 응하더라도 나의 마음은 동요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모두 다 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아니할 적에는 비록 사리의 당위성에 있어서도 끊어버리게 되고, 모두 다 하게 될 적에는 사리의 부당성에 있어서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ㆍ불의 학이 고고(枯槁)하고 적멸(寂滅)한 데 빠지지 않으면 반드시 방종에 흐르고 마는 것이니, 그 인의를 해치고 윤리를 무너뜨려서 성문(聖門)의 대중(大中)의 가르침 죄를 짓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다.
우리 유도는 그렇지 않다. 하늘이 명한 본성은 혼연한 하나의 이치로서, 만 가지 선(善)이 다 구비되어 있으므로, 군자는 이것을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반드시 반성하고 살펴서 마음에 싹트는 것이 이치에서 근원하면 확대하여 충만하게 하고 욕심에서 생기면 억눌러서 끊어버리며, 기(氣)에서 동한 것이 스스로 돌이켜 바르면 용기 있게 나가고, 바르지 못하면 겁내어 물러난다. 그 마음을 길러서 의리를 보존하고, 그 기운을 길러서 도의(道義)에 배합시키니, 모든 사상은 의리의 당연성이 아닌 것 없고, 모든 동작은 저절로 사벽(邪僻)의 간여가 없게 된다. 그 마음의 신령함은 사물의 이치를 관할하고 그 기운의 큰 것은 천지의 사이에 가득하니, 모두 의리를 주로 삼아서 마음과 기가 언제나 그 명령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유자(儒者)의 도로서 인륜과 일용의 상도에 갖추어져 있어, 천하 만세에 행하여도 폐단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선생이 항시 학자에게 일러준 말이다.
비록 그러하나 의리가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로 큰 것이지만, 마음은 바로 내 몸의 주장이요, 기(氣)도 역시 내 몸이 그로써 살아가는 것이니, 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저 노ㆍ불은 명심(明心)ㆍ양기(養氣)의 설을 빙자하여 우매한 백성을 꼬이고 속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즐겨 듣고 진심으로 복종하며, 왕왕 도를 아는 자가 비록 힘껏 말해서 물리쳤지만, 다만 그것이 우리 도에 합하지 않는 것만을 지적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듣는 자는 오히려 어느 것이 좋은지를 분간하지 못한다. 그런데 선생은 먼저 두 교의 취지를 밝히고서 우리 도의 정당성을 들어 꺾어버리기 때문에, 듣는 자가 환하여 어둠 속에서 태어난 것 같으니, 이단의 무리도 또한 따라서 귀화한 자가 있었다. 이로써 선생은 명교에 대한 공이 컸던 것이다. 이에 또 그 뜻을 기술하여 이 세 편을 지어 학자에게 제시하였는데, 그 심기를 말한 것은 모두 노ㆍ불의 숙어를 사용하여 그 취지를 밝히어 그 깊이를 남김 없이 발휘하였고, 또 그 말이 혼후하여 그를 심히 배척한 흔적이 보이지 아니하므로, 비록 그 무리들로 하여금 보게 하여도 역시 다 적실하게 여기어 복종하게 된다. 필경 이치를 들어 형용하는 데 이르러서는 우리 도와 이단의 편정(偏正)이 변론을 기다리지 않고, 저절로 나타나는 데야 그네들이 아무리 말한들 어찌하랴. 선생은 노ㆍ불을 논하는 데 있어 이 점이 진실로 범연히 논란하는 자와 비할 바 아니요, 또 얼굴빛을 가다듬고 크게 소리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헐뜯고 나무라는 자와 비할 바 아니다. “혹시 사람이 한갓 그 배척하지 않는 것만 보고서 3교가 일치한다고 여길까 하며, 선생은 이 글을 지어 그 도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한다면, 이는 말을 아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비루하고 졸렬함을 헤아리지 않고 대략 주석을 붙임과 동시에, 그 머리에 서문을 쓰니, 이는 선생에게서 들은 것으로 밝히는 것일 뿐이다. 홍무(洪武) 갑술년 여름.
12.심기리 삼편 후부집 서(心氣理三篇後附集序)
권근(權近)
“도가 밝지 않은 것은 이단(異端)이 이를 해쳐서이다.” 하였다. 우리 유자가 그래도 선철(先哲)의 훈계를 힘입어 이단의 폐단을 알고 있지만, 왕왕 그 도를 고수하지 못하는 자가 있는 것은 역시 공리의 사욕에 끌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높게는 공허한 데 빠지지 않으면, 낮게는 반드시 더럽고 천한 데 흐르게 되니, 이래서 도가 항시 밝지 못하고 행해지지 못하며, 이단의 무리가 또한 비근(卑近)하다 하여 배척하는 것이다. 또 그 선악에 대한 보응의 발효가 역시 엇갈려서 일정하지 않은 것이 많으므로, 착한 일을 하는 자는 게을러지고 악을 부리는 자는 더욱 방자하여, 온 세상 사람이 모두 이해 속에서 헤매고 의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석씨(釋氏)의 무리가 그 인연의 설을 팔아서 사람이 더욱 의혹하게 되었다.
아, 도가 밝지 않은 적이 오랜지라 사람의 의혹을 없애자면 어려운 일이다. 삼봉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부정한 노자와 부처의 해를 변론하여 백세토록 깜깜한 의혹을 풀어 주고, 공리를 앞세운 시속의 설을 꺾어서 도의(道誼)의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한다.” 하였다. 그 심ㆍ기ㆍ리 세 편은 우리 도와 이단의 편정(偏正)을 거의 남김없이 논하였는데, 나는 이미 그 뜻을 주해하였다. 선생은 또 일찍이 또 《심문(心問)》ㆍ《천답(天答)》 두 편을 지어 천인(天人)의 선악과 보응(報應)의 더디고 빠른 이치를 발명하여 사람에게 바른 도를 지키도록 하였는데, 그 말이 지극히 정밀하고 절실하여 공리에 끌리는 자로 하여금 보게 하면, 그 의혹을 버리고 그 병에 약을 줄 수 있기에 또 주석을 가하여 세 편의 뒤에 붙여 놓았다. 아무튼 이단을 물리친 뒤에야 우리 도를 밝힐 수 있고, 공리심을 버린 뒤에야 우리 도를 행할 수 있으리니, 이로서 선생의 작품이 세교(世敎)에 관계된 바 심히 중함과 동시에 오늘날 편찬한 뜻이기도 하다. 보는 자는 행여 경홀히 말지어다.
13.송 충청도 도관찰사 한공 상경시 서(送忠淸道都觀察使韓公尙敬詩序)
권근(權近)
홍무(洪武) 병자년(1396, 태조5) 여름에 첨서중추원사 한공(韓公)이 충청도 도관찰사가 되어 길을 떠나게 되자 나에게 말을 청하였는데, 이는 귀먹은 자에게 총력을 빌리려는 것이요, 눈먼 자에게 길을 묻는 격이다. 그러나 교유한 구의와 친척의 정분으로서 어찌 말이 없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감히 어리석은 설을 고하는 바이다. 대개 백성의 병폐가 세 가지가 있는데, 치료하는 방법은 모두 다르다. 섭양(攝養)을 잘못해서 난 것은 약과 침으로 낫게 할 수 있거니와, 타고나기를 잘못한 것은 반드시 학문으로 다스려야 하고, 정령(政令)의 잘못에서 이뤄진 것은 천품이 아름답고 학문이 올바른 사람을 얻지 못하면 도저히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모두 당연히 급히 서둘러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 두 가지는 한 사람의 이해에 불과하되, 하나는 한 나라의 치란에 관계되는 것이니, 경중과 완급(緩急)이 역시 뚜렷하다. 그런데 용렬한 의원은 그 병을 다스리지 못하고 부족한 학문은 그 기질을 다스리지 못하여, 비록 그 재질은 있을지라도 그 학문이 없으면, 그 베푸는 일이 반드시 다 적중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를테면 병을 진찰하면서 맥박을 보지 않고, 약을 지으면서 방문을 무시하는 것과 같아서 심한 경우엔 찬 데 냉(冷)을 더하고, 온(溫)한 데 열을 붙여 주듯이 할 것이니, 그릇치지 않을 수 있으랴.
왕씨(王氏)가 쇠하자 탐학의 정치로 우리 백성을 병들게 한 것이 극도에 달했는데, 우리 전하가 등용되던 날에 기강을 세우고 경계(經界)를 올바르게 하여, 우리 백성의 폐가 10에 벌써 8ㆍ9는 없어졌다. 보위(寶位)에 오르게 되어서는 인정(仁政)을 베풀어 백성의 질고(疾苦)가 다 풀려서, 앓던 것이 진정되고 상한 것이 아물고 넘어진 자가 일어나며 여윈 자가 살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베풀은 것이 넓지 못하고 건져준 것이 많지 못함을 상심하여 양리(良吏)를 선택하여 다스리게 하고, 대신을 보내어 감찰하게 하여, 깊숙하고 먼 지방이나마 한 사람도 제자리를 못 얻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하셨으니, 이야말로 인(仁)이 지극하고 의가 곡진하다 하겠다.
공은 천성이 자상하고 학문이 정대하며, 그 조행은 단정하고 정성스러우며 그 처사는 정밀하고 민첩하여, 장주(章奏)를 맡으면 내고 드리는 것이 진실하며, 추기(樞機)를 관장하면 제가하고 결단하는 것이 반드시 적당하니, 그 인격과 학문이 겸비했다 할 만하다. 그러므로 우리 전하께서 정신(廷臣) 가운데서 골라서 이 명령을 내렸으니, 대개 이목(耳目)과 같은 신하에 의탁해서 보고 듣는 것을 넓히어 백성의 병을 진찰하자는 것이요, 밖으로 내치는 것이 아니다.
아, 한 나라의 치란(治亂)에 관계되는 만 백성의 이해를 공에게 넘겨주어 다스리게 하니, 공경하지 않고 되겠으며,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전(傳)에 이르기를, “어린아이를 보호하듯 하라.” 하고, “성심으로 구하면 비록 적중하지 못하더라도 과히 틀리지는 않는다.” 하셨으니, 진실로 성심으로 구하고, 허심탄회하게 처사하되, 추운 자를 따뜻하게 하고 목마른 자를 물 마시게 하고, 신음하는 소리가 노래로 변하게 하고, 지치고 병든 자를 오래 살게 한 연후에야, 위로 국가를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저 부서(簿書)나 전곡(錢穀) 같은 것은 본래 내려오는 법이 있는 것이니, 어찌 여러 말할 필요가 있으랴.
14.증 맹선생 시권 서(贈孟先生詩卷序)
권근(權近)
초은(樵隱) 문충공과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이 두 차례 시관의 자리를 같이 맡았는데, 맹 선생(孟先生) 희도(希道)는 을사년 과거에 오르고, 나는 그 뒤를 이어 기유년 과거에 오르게 되어 맹 선생을 형과 같이 여긴 지가 몇 해가 되었다. 선생이 아들이 있어 맏은 사성(思誠)이요, 그 다음은 사겸(思謙)인데, 오래 전부터 나에게 배우더니 홍무(洪武) 병인년에 목은이 또 시석(試席)을 맡자 사성이 장원이 되었고, 무진년에 내가 또한 시관이 되자 사겸이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맹씨 부자 형제가 모두 나와 더불어 친하니, 범연한 교제에 비할 바 아니다.
선생은 문장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며, 우뚝한 지절(志節)이 있었고 일찍이 한림을 경유하여 어사(御史)를 지냈는데다, 사림(士林)의 청선(淸選)으로 뭇사람의 인증을 받아 예찬이 성하였다. 이윽고 벼슬을 하직하고 시골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어 그 어머니를 봉양하고, 학문을 강론하여 그 아들을 가르치며, 스스로 산수에 낙을 붙여 담담히 지내고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었다. 어버이가 돌아가자 3년 동안 시묘(侍墓)를 살았으니, 그 지조의 높음이 이와 같았다.
우리 금상 전하가 신무(神武)의 자품으로 천명(天命)을 받아서 나라를 세우고, 어진 이를 써서 다스리기를 생각할 제 가장 백성의 일을 중히 여겨 이에 선생을 기용하여 진주(珍州)를 맡기니, 정적(政績)이 과연 드러났다. 그러나 선생은 삼척(三尺)의 법에 마음을 얽매고, 오두(五斗)의 녹(祿)에 허리를 굽히고자 아니하여, 군인(郡印)을 끌러 놓고 은거지로 들어가 여유있게 지내며 그대로 일생을 마칠 듯이 하였다. 병자년 봄에 어가(御駕)가 온천(溫泉)에 거둥하였는데, 바로 선생의 은거한 고을이다. 그래서 선생은 천안(天顔)을 반갑게 뵙고 성덕(聖德)을 칭송하여 당률(唐律) 한 편을 지어 바치니, 호종한 여러 학사 중에 삼봉(三峯) 정 상국(鄭相國)이 첫머리로 대(大) 자를 뽑고, 제공으로 하여금 운자를 나눠서 각기 짓게 하였다. 좌정승(左政丞) 평양백(平壤伯) 조공(趙公) 이하 여러 명이 지은 장편과 단장(短章)은 봄 구름이 피어나는 것 같고, 여러 개의 옥을 엮은 듯하여, 선생의 높은 풍치를 노래한 것이 지극하였다.
이때 그 아들 장원(壯元)이 예조의랑(禮曹議郞)이었고, 내가 겸전서(兼典書)였는데, 시권을 가지고 와서 서문을 청했으나, 나는 마침 상국(上國)으로 가게 되어 미처 지을 사이가 없었다. 다음해에 돌아오자 선생이 또 서울에 와서 청하므로 나는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고하기를, “사군자(士君子)가 혹은 나가기도 하고 들어 앉기도 하여 그 도가 일정하지 않으나, 요컨대 시기와 의리에 합당하게 할 따름이다. 세도(世道)가 저하되어 권간(權姦)이 나라의 권력을 쥐고 탐관오리가 함부로 진출하게 되면 어질고 지혜 있는 선비는 멀리 피해서 적막한 곳에 빛을 감추고 있다가, 바야흐로 세상 운수가 흥하여 정치도 아름답고 교화도 아름다우면, 갓을 털고 갓끈을 떨치며 떼를 지어 조정으로 나가서 지혜를 경쟁하고 힘을 다하여 공업을 성취하여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인과 군자는 반드시 세도(世道)의 높고 낮음을 보아서 내 몸의 출처를 결정짓는 것이다. 만약에 시기와 의리를 헤아리지 않고 진퇴를 함부로 하면 벼슬하는 자는 녹을 탐낸다는 기롱이 있고, 들어앉은 자는 제 몸만 깨끗이 하려 한다는 꾸지람이 나오는 것이니, 비록 맑고 흐린 구분은 있지만 그 의에 합하지 않은 것은 한 가지다.
지난번에는 때가 비색함을 알고 선뜻 물러나서 부귀를 하찮게 보고 높은 벼슬을 초개같이 여겼으니, 그 높은 풍도와 먼 발자취는 진실로 아득하여 더위잡을 길이 없었거니와, 지금은 명군이 위에 계시고 뭇 어진 이가 조정에 가득하여 모든 관사가 모두 적임자를 얻었다. 그런데도 재주를 품고 덕을 지닌 선비와 노성한 현자들이 출세를 원하지 아니하며, 혹은 산골에 숨어살고 혹은 판축(版築)에 숨어 있을까 염려하여 빠짐없이 망라해서 돈돈한 분부를 해서 나오게 하니, 어진 이를 갈망하는 뜻이 매우 간절하다. 즉 사군자가 세상에 나와서 일을 해 볼 만한 절호의 시기이다.
선생이 홀로 오래 숨으려는가. 조정에 드날리며 배운 것을 펴서 공을 세우고 업을 세우는 것이 오직 이때일 것이다. 진실로 묘당의 위에서 가부를 논하며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서로 만나 태평가를 주고받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또한 다스리는 형상을 보고 아송(雅頌)을 지어 성세의 덕을 찬미하여 교묘(郊廟)의 제사에 올리고, 연향(燕享)의 잔치에 노래하여 녹명(鹿鳴)ㆍ청묘(淸廟) 같은 저작을 따르는 것도 위대하지 아니하랴. 어찌 산림에 숨고 견묘(畎畝)에 숨어서 이따금 순성(巡省)을 보고 한 번 노니는 것만을 즐기게 할 따름이랴. 나는 장차 숨은 선비로 선생 같은 이가 와서 그 문화를 떨치고 태평성대를 빛나게 하여 훌륭한 다스림을 노래하는 것이 오늘로부터 비롯될 것을 보게 되리니, 선생은 마땅히 힘쓸지어다.” 하였다.
15.송 밀양 박선생 돈지 봉사일본 서(送密陽朴先生敦之奉使日本序)
권근(權近)
일본이 바다 가운데 있어 우리와 더불어 서로 바라보는 이웃이므로 사신의 왕래가 예로부터 서로 통하였다. 고려 말엽에 문신(文臣)과 무장(武將)이 안일한 데 기울어져 변방에 대한 방비가 없으니, 조그마한 섬나라 백성이 감히 노략질을 자행하여 우리 땅에 들어와 침략한 것이 50년이었다. 다행히 하늘이 앙화를 뉘우쳐서 성인을 도와 옛것을 개혁하고 새로운 것을 취하여 우리 조선의 문명한 운수를 열어주니, 모신(謀臣)과 용장(勇將)이 모두 지혜와 힘을 다하여 안으로 정사를 닦고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되, 계획이 실수가 없어 해군이나 육군이 있는 곳마다 승첩을 올렸다. 그래서 왜적이 두려워 복종하여 저절로 항복하고 우리 백성이 되겠다고 청원하는 자까지 있으므로, 주상 전하가 그들의 의를 사모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구악(舊惡)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집과 의식을 주어 다시 삶을 갖게 하였으니, 그에 대한 회유책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그 남은 도적이 아직도 다 제거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 장교들이 누차 군사를 일으켜 분명하게 토벌을 가해서 영원히 바닷길을 깨끗이 하자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우리 전하가 문덕(文德)을 넓히고자 하여 선뜻 군사를 내지 아니하였다. 금년 가을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예방하고, 또 적의 무리를 효유하여 침범을 금단하니, 전하는 마음으로 아름답게 여겨 우대하고, 그가 돌아갈 적에 조정의 선비 중에 문학과 언변이 능히 사명을 전대할 수 있는 자를 뽑아서 보답하기로 하는데, 비서감(祕書監) 밀양(密陽) 박 선생이 실로 이 명령을 받아 떠나게 되었다.
선생은 세족(世族)의 후예로 일찍이 진사과에 장원하여 전선(銓選)을 맡았고, 사간원에도 있어 좋은 소문이 널리 전파되었다.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요해를 건너서 제(齊)ㆍ노(魯)의 들판을 걸치고 강회(江淮)를 지나 천자의 조정에 조회하였는데, 지금 또 예측할 수 없는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먼 나라로 사행 길을 떠나니, 독한 안개는 자욱하고 사나운 고래 떼는 날뛰어 극도로 두려운 곳인데도, 선생은 털끝만큼도 수고를 꺼리는 기색이 없고 개연히 이웃끼리 사귀어 호의를 계속하고 포학을 금단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으니, 어찌 참으로 경중을 아는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대장부가 나서 장수가 못 될진대 사자(使者)가 되어 언어로서 절충하면 좋겠다.” 하였는데, 이것이 내가 선생에게 바라는 바다.
일본은 천지의 극동에 있으니, 곧 천지의 물(物)을 낳는 방위이다. 그 사람들이 생겨날 적에 천지의 마음을 받아서 우리 본성의 인(仁)을 지니게 된 것은 또한 사방 사람과 더불어 균일할 것이니, 그들이 어린아이가 기어서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역시 측은한 마음이 생겨서 그를 구원하려 할 것인데, 하물며 차마 죄 없는 백성이 칼날 아래 넘어지고 구렁에 빠지는 것을 보겠는가.
아, 어진 사람의 마음은 천지 만물을 한 몸뚱이로 여기고, 사해(四海) 사람을 다 형제로 여기기 때문에 비록 바다와 산이 가로막히고, 강토가 다르고 언어와 습속이 다를지라도 인류(人類)라는 것은 마찬가지니, 반드시 서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성인이 방교(邦交)에 대한 빙문(聘問)의 예를 제정하여 통역을 두어 그 의사를 통하고 폐백을 올려 그 정을 도탑게 하고 찬란한 문장으로 서로 접촉하며, 반가운 은의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니, 이리하여 사람이 사람 된 구실을 하여 천지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지금 저쪽 사신이 와서 방교의 예를 닦고 옛 정의를 강론하니, 그 뜻이 진실로 착하다. 만약에 이와 같이 하지 않고 같은 인류를 해친다면 반드시 천지에 죄를 얻고 귀신에게 성냄을 당하여 좋지 못한 앙화가 마침내 자신에게 미쳐 반드시 칼 맞아 죽고 말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선생은 가서 이 말을 그 사람들에게 해주면 반드시 감동하고 부끄러워서 스스로 고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환담하고 술마시는 사이에 갑옷과 투구가 변해서 의관이 되고, 활과 칼이 변해서 옥백(玉帛 폐백)이 되고 완악한 흉도가 선랑으로 돌아오고, 빼앗은 물건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여 길이 화친을 맺어 이웃의 정의를 굳건히 함으로써 양국 백성으로 하여금 편안히 오래도록 천수를 누리는 지경에 앉게 하는 것이 당연히 이 겨를에 있을 것이니, 얼마나 위대하랴.
16.유항선생 한문경공 수 문집 서(柳巷先生韓文敬公脩文集序)
권근(權近)
근세의 명경(名卿)으로 유항(柳巷) 한 문경공(韓文敬公)은 행실이 높고 견식이 밝아서 한때 사람의 모범이 되었고, 필법(筆法)이 뛰어나 한 세상이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다. 공민왕에게 신임을 얻어 오래 후설(喉舌)의 직에 있어 아름다운 정책을 주달하여 도움이 퍽 많았고, 사람을 대우하고 사물을 접촉하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성심을 베풀며 함부로 헐뜯거나 예찬하지 아니하며, 더불어 종유하는 목은(牧隱)ㆍ평재(平齋) 제공이 또 모두 진신(搢紳)의 우두머리인데 점차로 강론하고 연구하여 서로 의좋게 지내니, 역시 지극하다 이를 수 있다. 공이 전선(銓選)을 맡았을 적에 나는 후진(後進)으로서 보좌가 되어 하루는 함께 대궐 안에서 숙직하는데, 내가 밥을 먹으면서 책을 보니 공은 웃고 말하기를, “나는 그대가 공경을 주로 하는 공부가 부족함을 알겠다. 입에는 밥이 들어 있고 눈으로는 보는 것이 있으니, 마음이 전일할 수 있겠는가.” 하므로, 나는 그 말을 듣고 송구하였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비록 힘써 행하지는 못했지만 또한 감히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공의 한마디 말이 나에게 종신의 이익이 되었으니, 공의 사람을 규계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은 종류였다.
공은 일찍이 시로 이름나서 익재(益齋)와 가정(稼亭)의 칭찬을 받았으며, 만년에는 더욱 정진하여 법도를 착실히 지켰고, 묻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본말을 다 가르쳐 주었다. 도은(陶隱) 같은 이들이 훌륭하다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저술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가서 물어서 버리고 취할 것을 결정지었는데, 혼연히 복종하고 만족하여 돌아가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불민한 나 또한 다행히 더럽게 여기지 않고 수긍하는 것을 입기도 했다. 공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다 어질어서 내리 높은 과거에 오른 자가 세 사람이요, 재상을 계승하여 복록이 한량 없으니, 이는 공의 교도한 힘에서 나온 것이다. 일찍이 시관의 직을 맡아 취택한 선비 가운데, 현달한 관원과 명망있는 인사가 많았으므로 세상 사람이 모두 그 정밀한 감식안에 탄복하였다.
아, 공의 언행과 재주와 식견이 다 사군자의 사범이 될 만하거니와, 시는 특히 그 여사에 불과하다. 만년에 한가한 생활을 할 적에는 또 목은(牧隱)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막대를 끌고 서로 만나서 시를 지어 주고받곤 하였으니, 두 늙은이의 풍류와 기개는 그 시를 읽으면 능히 상상할 수 있다. 유항(柳巷)은 그 마을 이름인데 인해서 호로 하였다. 평소의 저술을 스스로 불만스럽게 여겨 수집하지 아니하였는데, 돌아간 뒤에 여러 아들이 산일(散逸)된 원고를 주워 모아서 겨우 몇 수를 얻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태산에 한 털끝이라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간결하고 충담한 것을 보면 의사 밖에 높이 벗어나서 옥(玉)소리를 듣는 것처럼 청아하고 여운이 깃드니, 많아야만 하랴? 많을 것이 없는 것이다. 둘째 아들 상질(尙質)이 형제 간에 상의하고 장차 목판에 새기려 하는데, 내가 오랫동안 공을 섬겼다 해서 서문을 부탁하므로 사양하지 못하고, 공의 언행의 대강을 서술해서 편 머리에 붙임과 동시에, 후일 공의 시를 보는 자로 하여금 본받을 만한 것이 다만 시뿐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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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권 끝.
첫댓글
오늘도 좋은 자료 잘 가져 가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좋은 자료들입니다.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