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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감사] 일제시대에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워준 외국인 (호머 헐버트, 어니스트 베델, 앨버트 테일러)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ㅣ뉴튜브 - 사진관 [94회] / YTN2
https://www.youtube.com/watch?v=WNo_V0KQnkg
1863년 미국 버몬트주[2] 뉴헤이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들베리 칼리지의 총장을 지낸 목사였고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교 창립자의 증손녀였다.
다트머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대를 수료한 뒤 1886년 길모어(George W. Gilmore) 부부,
벙커(Dalzell A. Bunker) 부부와 함께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영어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에 응해 국내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점차 한국의 생도들이 학업에 열정을 보이지 않자 이에 실망하였고[3] 1891년 12월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한국에서 일하다가 일시 귀국한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1893년 9월에 재입국하였다.
이때 그는 외국 서적의 한글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 구전으로만 전하는 형편이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한 것도 그이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헐버트는 조선 내외의 정치, 외교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최측근의 자리에서 보좌, 자문의 역할을 하며, 미국 등 서방 강대국들과의 외교 관련 업무에도 힘썼다.
비슷하게 고종의 신임을 받고 이런저런 일을 맡으며 조선 주재 미국공사까지 역임했던 미국인 호러스 뉴턴 알렌은 조선의 국권 상실이 가시화되고 있던
1905년에 일찌감치 조선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지만,[4]
그는 조선이 가장 약해진 시기에도 줄곧 한국의 자주 독립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특히, 1905년에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 한 시도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이 유명하다.
이런 공로로 3인의 헤이그 특사에 뒤이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1906년, 고종은 헐버트를 '특별 위원'에 임명하여 외교 업무에 전권을 부여하고,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 중 미국을 비롯한 9개국[5]의 국가 원수에게 1906년 6월 22일자로 된 을사늑약 무효를 선언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1907년 7월 20일자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여 헐버트의 밀사 임무는 중단되고 만다.
호머 헐버트
https://namu.wiki/w/%ED%98%B8%EB%A8%B8%20%ED%97%90%EB%B2%84%ED%8A%B8
이 땅을 사랑한 예수의 증인들│조선 독립을 염원한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
https://www.youtube.com/watch?v=yvtZGNyk1lU
대한제국과 일제 치하에서 활동한 영국 국적을 가진 언론인으로 《대한매일신보》와 《데일리 코리안 뉴스》의 발행인이다.
한국식 이름은 배설(裵說).
영국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 브리스톨(Bristol) 출생으로 16살 때부터 일본 고베에서 거주하며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분쟁이 발생하여 사업을 접었고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직에 지원하여 1904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처음에는 러일전쟁 관련 취재를 위한 입국이었지만 일제가 한국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2]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3]
당시 체결되어 있던 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4]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신문사에
"개와 일본인은 출입을 금한다."는 간판까지 달아 저항하였으나[5] 일본 정부가 영국 정부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간청하여
제소까지 걸어 결국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데 금고 기간이 끝나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6]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1909년 5월 1일 한국에서 향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병 요소 중 하나인 심근비대증으로 사망했으며 시신은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장지연이 비문을 썼지만 늘 베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일제는 이 비문마저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수난당한 묘비는 1964년 4월 4일 편집인 협회가 전국의 언론인 뜻을 모아 성금으로 그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하였다.
호머 헐버트와 함께 한국을 위해 몸을 바친 외국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유언인 "내가 죽더라도 신문은 살려 한국을 구하게 해야 한다."는 베델이 진심으로 한국을 위해 힘썼음을 잘 보여준다.
어니스트 베델
https://namu.wiki/w/%EC%96%B4%EB%8B%88%EC%8A%A4%ED%8A%B8%20%EB%B2%A0%EB%8D%B8
[3.1운동 100주년]3.1운동은 누가 알렸을까?(feat.앨버트테일러)
https://www.youtube.com/watch?v=ajokBfRDIDQ
1875년 3월 14일 미국에서 금광 기술자였던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George Alexander Taylor, 1829년 3월 17일 ~ 1908년 12월 10일[1])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금광 기술자가 되었고,
1896년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운산금광의 직원으로 일하였다.[3]
1908년 아버지 조지가 사망한 후에도 테일러는 한국을 떠나지 않고, 한국에서 금광 사업과 무역상을 하였으며[4]
UPI 통신사의 서울 특파원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1917년 영국 출신의 연극배우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 1889년 ~ 1982년)와 결혼하였고, 1919년 경성에서 외아들 브루스를 낳았다.
그 해 3월 1일 한국 민족대표 33명이 작성, 낭독한 독립 선언서를 앨버트 테일러가 입수[5]하였고,
그것을 앨버트 테일러의 동생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몸에 지니고 도쿄로 반출하여,
도쿄의 통신사망을 통해 타전하면서 한국의 3·1 운동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고, 스코필드,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 총독을 항의 방문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협조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테일러 일가족은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고,
이듬해 5월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광복 직후인 1945년에는 한국에 남겨두고 간 재산을 찾기 위하여 미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하기도 하였다.[6]
1948년 6월 29일 미국에서 73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이송되어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앨버트 테일러
https://ko.wikipedia.org/wiki/%EC%95%A8%EB%B2%84%ED%8A%B8_%ED%85%8C%EC%9D%BC%EB%9F%AC
대장동, 성남FC, 백현동, 정자동, 법인카드, 변호사비 대납, 대북송금, 돈봉투, 불법코인, 태양광 사건도 주범을 꼭 잡아야 합니다.
[국민감사] 일제시대에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워준 외국인 (호머 헐버트, 어니스트 베델, 앨버트 테일러)
https://cafe.daum.net/justice2007/Wy5y/10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