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2일 오늘은 101년전인 1923년에 의열단원이었던 김상옥 의사가 순국한 날입니다. 일제 통치의 앞잡이였던 일본 순사와 조선인 순사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처벌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서울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바로 그 김상옥 의사가 숨진 날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 통치의 핵심중 한곳이었던 종로경찰서가 1월 12일 밤 피폭당하자 일본 순사들과 조선인 순사들은 범인 색출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종로경찰서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범인을 잡기 위해 당시 서울인 경성 소재 순사들은 종로 일대에 총집결합니다. 결국 거사 10일만에 은신처가 발각되고 김상옥 열사는 수많은 순사들에게 쫓깁니다. 한명을 잡기위해 동원된 수많은 순사들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피신하던 김상옥 열사는 결국 순사들에게 포위당하고 집중 사격을 받았지만 최후까지 저항하다 마지막 자신이 쏜 총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식민지였던 나라가 해방이 되고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가지 방법이 존재합니다. 식민지 지배를 하던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패배를 당해 어쩔 수 없이 독립하는 경우와 식민지를 당한 나라 국민들이 식민지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대부분이 전자의 경우이고 후자의 경우는 베트남이 프랑스를 무찔러 항복을 받아낸 상황으로 매우 드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처럼 식민지국과 맞짱을 떠서 승리를 거두는 경우는 더할 나위없는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지만 타국에 의해 어쩔 수 없는 독립의 경우에는 여러가지 풀어야 할 일들이 산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 36년후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 전쟁의 결과 일본이 항복을 하면서 한반도는 독립을 이뤘습니다. 한반도인들의 융합된 저항으로 일본군을 몰아낸 것이 아닌 만큼 독립과정에서 겪어야할 엄청난 혼란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반도인들은 일본을 향해 끊임없는 저항을 펼쳐왔습니다. 수많은 의사와 열사들이 바로 그분들이었습니다. 여러 의사와 열사들 가운데 김상옥 열사는 유독 총을 잘 다루기로 유명했습니다. 일본 순사들 사이에서 경성 피스톨이란 이름으로 유명했습니다.
김상옥 열사는 1890년에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김 열사는 경성 영어학교를 다니면서 국제 정세와 안목을 넓혔습니다. 22살때는 종로구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를 경영하기도 합니다. 23살때는 결혼을 해서 슬하에 2남1녀를 둡니다. 그는 사업수완도 좋았는지 직원 50명을 둔 사업체를 운영해 나름 돈도 꽤 벌게 됩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바로 3.1운동 직후였습니다. 당시 나이 29살이었습니다. 나름 돈도 벌고 자녀도 3명이나 둔 가장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직원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고 현신공보라는 서적을 발간해 독립운동을 계몽하고 고취시키는데 열중했습니다.
그는 나이 국내에서 수많은 저항 운동을 펼쳤고 일본 경찰들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30살때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합니다. 그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조소앙,신익희 선생 등과 독립운동 거사계획에 참여하면서 의열단에 입단합니다. 김상옥열사는 조선총독부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거사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에게 정보가 새어나가게 되자 종로경찰서로 목표를 정합니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내고 처벌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곳입니다. 김상옥 열사는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초토화시켜 버립니다. 당시 일본 순사와 조선인 순사들은 그야말로 범인 색출에 혈안이 됩니다. 결국 김상옥 열사의 거처를 확신한 일본 순사대는 엄청난 병력을 동원해 김 열사 체포에 나섭니다. 김 열사는 혼자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입니다. 종로경찰서 유도 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한 것을 비롯해 여러 순사들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혔습니다. 당시 주변 가옥들의 옥상을 뛰어 다니며 달아나는 김 열사의 모습에 일본 순사들도 넋을 잃고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순사들의 고문끝에 주변 인물들이 실토를 하는 바람에 1월 22일 은신처가 발각되고 맙니다. 당시 경성 시내 경찰서 4곳에 총비상령이 내려졌습니다. 기마대와 무장 경관 400여 명이 동원됩니다. 직접 추격에 나선 병력만 이렇고 다른 외곽 경비 병력을 포함하면 천여 명이 넘는 병력이 김상옥 열사의 체포에 동원된 것입니다. 조선 독립운동가 한 명을 체포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병력이 동원된 것은 김상옥 열사의 경우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그만큼 김상옥 열사의 활약이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순사들의 직장중 상징과도 같았던 종로경찰서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데대한 자존심이 상한 것도 그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일본 순사들의 포위망을 좁혀 오자 김상옥 열사는 최후의 결전을 준비합니다. 권총 2자루로 무려 3시간 반동안이나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총알이 떨어지자 벽에 기댄 채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마지막 1발을 스스로 머리에 쏘아 자결합니다. 그곳이 지금 서울 종로구 대학로 36-4번지 일대입니다. 김상옥 열사는 순국하고 나서도 일본 순사들을 공포속에 떨게 했습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문 채 양손에 권총을 꼭 쥔 채로 사망을 해서 그의 시신을 본 일본 순사들이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의 시신을 부검한 의사에 따르면 김상옥 열사는 일본 순사들에게 10발을 맞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총알 10발을 맞고도 끝까지 저항한 김상옥 열사의 투혼에 그냥 머리가 숙여질 뿐입니다. 현재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는 김상옥 열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종로 4가 북쪽 서울 효제초등학교 앞길은 그의 이름을 딴 김상옥로로 명명되었습니다.
한국의 해방과 독립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물론 독립운동가들과 독립군들이 일제와 직접 부딪혀 독립을 이뤄냈으면 더할 나위가 없고 일제 청산도 이뤄졌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지푸라기)처럼 생각한 독립 의사와 열사가 존재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고 그들의 정신을 물려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최근 일본을 관광한 나라가운데 한국인이 절대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쓴 돈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일본을 찾은 외국인 10명중 3명이 한국인이라 합니다.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 관광객이 일본 여행산업을 크게 개선시켰다고 하지요. 일본을 여행하는 것을 무작정 뭐라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엔화 약세와 함께 항공 노선 증편 등으로 일본여행이 상대적으로 쉬워졌다는 것이 주요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김상옥 열사의 기일을 맞아 이런 소식들이 참으로 가슴 아프게 여겨집니다. 자녀들 3명이나 두었고 부인도 있는데다 돈도 충분히 벌어서 당시 친일파적인 사고로는 한평생 아무 걱정없이 호의호식할 수 있는 인물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조국의 독립운동에 나섰고 결국 일제의 핵심부에 폭탄을 터뜨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김상옥 열사의 기개가 더욱 돋보이는 그런 날입니다.
2024년 1월 22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