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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칼럼] 그들은 몸으로써 악의 세력이 누군지 말한다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
예수는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다. 예수 같은 예언자는 정치적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위험인물이 된다. 예수와 같은 종교인이 어떻게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는지, 어떻게 로마제국에게 위험할 수 있었는지, 우리는 물을 수 있다.
예수와 빌라도가 다투고 있다. 예수의 죽음은, 죽음을 낳는 하느님 반대 세력에 저항하여 그 희생자를 보호하려 했던 예수 삶의 결과다. 예수는 예루살렘의 안보와 질서라는 정치적 이유만이 아니라, 로마의 평화를 보장하는 로마 ‘국가의 신’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였다. 예수가 죽은 뒤 부활 신앙이 생기지 않았다면, 예수는 억울하게 죽임당한 죄 없는 의인 중 하나로만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불의에 저항하다 죽은 죽음이 갖는 선한 영향력
예수 죽음 이후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예수는 왜 죽임 당했는가. 예수가 당한 폭력적 죽음은 우연한 운명이 아니라 예수 운명의 맥락에서 늘 예상할 수 있었던 사건이다. 예수는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끝까지 충실하면서, 사람을 섬기면서 죽음을 향해 걸어갔다. 예수는 역사 속에서 겸손하게 하느님과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깊이 고뇌하는 사람이었다.
‘예수는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 예수 죽음으로 우리 죄가 용서받았다’ 부류의 말이 교회 성당에서 자주 쓰인다. 그러나, 정확히 해명하지 않으면 크게 오해될 수 있고 불필요한 상상까지 줄 수 있는 표현이다. 예수 죽음 덕분에 우리 죄가 용서받았으니, 예수를 죽인 로마군대에게 우리가 감사해야 할까? 전혀 아니다. 인간 목숨을 제물로 받아야만 하느님의 화가 풀린다는 말도 아니다.
예수는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죽기 싫었는데 죽임 당했다. 예수 죽음은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의에 저항하다가 죽임 당한 사람의 죽음은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가 죽임 당한 역사적 이유가 분명히 있다면, 왜 역사에서 같은 일이 되풀이 되는가. 왜 죄 없이 희생당하는 사람이 늘 생기는가. 그럴 때 하느님은 왜 당신 사랑을 보여주지 않는가. 왜 죄악이 계속 큰 힘을 가지는가.
남양 성모성지에 설치된 십자가 위의 예수상.
예수 십자가는 희생자들과의 연대
역사에서 이름 없이 희생당하는 사람의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단순히 힘 없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죽어가는 사람의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억울하게 죽어간 제주 4.3 희생자들의 죽음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 그래서는 안된다.
예수의 십자가를 개인의 고통과 흔히 연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들을 통해 십자가에 계속 못 박히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좋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더 자주 말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상징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인 예수 십자가 안에서 하느님 앞에 서게 된다. 십자가의 고통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느님은 십자가 고통 앞에서 무엇을 하시려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에게 아무 할 말이 없다고 답하면 안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중요하지 않다고 우리가 말하면 안 된다.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침묵은 역사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들과 예수의 연대로 해석할 수 있다. 브라질 해방신학자 보프는 말한다. “하느님이 고통 앞에서 침묵을 지킨다면,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고통당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고통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우리를 절망 속에 버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역사의 모든 십자가를 끝장내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희생당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해준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아래 있어야 하고, 역사의 십자가 아래 있어야 한다. 십자가 아래 있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에게 다가서야 한다. 그런 자세 없이는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희생당하는 사람을 편들고 억압자에 저항하는 예수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는 사람들을 편들고 이해하는 일이다. 그래서, 고통을 없애려고 고통에 맞서 투쟁할 때 겪는 고통만이 인간에게 의미 있는 고통이 된다.
제76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일인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을 찾은 유족이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있다. 2024.4.3 [제주도사진기자회]
제주 4.3 희생자들의 삶과 죽음을 비추는 예수
제주도 주민의 10분의 1에 달하는 3만여 명이 희생되었던 제주 4·3 76주년이다. 1978년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하여 4·3문학의 대표작가로 자리잡은 현기영 선생은 초등학생 시절 목격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오마이뉴스, 2024.4.2. 순이삼촌' 현기영의 탄식 "이런 역사인식의 정권이라니!" [제주 사름이 사는 법] 현기영 작가와 제주4·3. 황의봉 기자)
“유격대 사령관 이덕구의 주검을 십자가처럼 생긴 형틀에 매달아 놨더라고요. 뭐 예수도 아닌데 말이죠. 제가 나중에 역시 순교자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요.”
백성이 집권 측의 학정으로 인해 백성이 도탄에 빠졌을 때, 제주도에서는 자주 민란이 발생했다. 이때 민란의 지도자인 장두가 나와 민중을 이끌고 목적을 달성한 후 자기 목숨을 내놓곤 했다. 유격대 이덕구 사령관이 장두였다면, 장두의 원조는 나자렛 예수 아니던가. 이덕구 사령관이 민중의 순교자라면, 예수는 인류의 순교자 아니던가.
무방비 상태에서, 죄 없이, 대량으로, 이름 없이, 죽임 당하는 사람들은 자기 몸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우고 있다. 캄캄한 세상을 빛으로서, 더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제주 4.3 희생자들이 바로 역사의 순교자들이다. 예수 죽음이 가해자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내 주었듯이, 4.3 희생자들은 가해자가 누구인지, 살아있는 악의 세력이 누구인지 폭로해 주었다.
내 스승 해방신학자 소브리노 신부의 저서 <해방자 예수>를 나는 2015년 4월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스승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제목의 글’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순교자들은 나자렛 예수를 닮았다. 예수는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을 비추고 있다.” 나는 그 말을 바꾸어 말하고 싶다. “제주 4.3 희생자들은 나자렛 예수를 닮았다. 예수는 4.3 희생자들의 삶과 죽음을 비추고 있다.”
4.3 희생자들은 예수의 삶과 죽음에 연결된다. 4.3 희생자들은 한반도 역사의 어두운 질곡에 희망의 빛을 주고 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4.3 희생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한민족 역사에 있고, 또 부활하여 지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우리는 제주 4.3 이후 신학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제주 4.3 안에서 신학하고 있다.
출처 : 오늘 우리 곁에 부활하는 제주 4.3 십자가 희생자들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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