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호 시인의 문장을 옮겨 적습니다.
이현호
(1983년 4월 5일 ~)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
2007년 현대시 등단
2014년 6월 첫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 출간
속으로는 불을 껴안고 있으나 겉으로는 소화기처럼 차가운 온도를 자랑하는 ‘라이터’라는 존재는 시적 거리감을 설명하려 할 때 얼마나 적절한 예시가 되어주는 사물인가. 게다가 빌리겠다니. 첫 시집임을 감안할 때 이른바 숨을 내쉬는 콧구멍 속으로도 들었다 나가는 선배 시인들의 수많은 시 구절구절을 그대로 흡입하기보다 잘 기억해두었다가 내 주된 요리에 양념 정도로 여기겠다는 객기 어린 치기가 얼마나 솔직한 감정의 발로인가.
*
그렇다 소년. 그럼에도 여전한 소년. 오늘 우리가 이현호라는 젊은 청년의 시집에서 소년을 불러낸 건 첫 시부터 마지막 시까지 예민하게 촉이 선 소년의 솜털이 눈물이 땀이 분노가 사랑이 두려움이 좌절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 서평 발췌)
필자가 임의로 간추려 적습니다.
때문에 시인의 세계와 문장에 온전히 닿지 않습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시집을 직접 만나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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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처럼 녹아떨어질 그 말은,
널 종교로 삼고 싶어, 네 눈빛이 교리가 되고 입맞춤이 세례가 될 순 없을까
차라리 나는 애인이 나의 유일한 맹신이기를 바랐다
잠든 애인을 바라보는 묵도 속에는 가져본 적 없는 당신이란 말과
곰팡이 핀 천장의 야광별에 대한 미안함이 다 들어있었다
/ 붙박이창
너는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다.
풍문처럼 떠도는 생은 없다고 믿는다.
/ 매음녀를 기억하는 밤
너 없이도 세상이 계속된다고 믿는 것들에겐 함부로 칼을 꽂았고
다음엔 불빛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술집 창가에 비친 널 똑바로 볼 수 없어 나는 눈을 도려내고 말았지
그토록 아름다운 것 앞에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요
희열에 찬 살인자의 얼굴이 아니고는
/ 금수의 왕
에로스가 잠든 정오
나는 빛의 구두를 신는다
당신이 깜깜하다
이 갸륵한 연애의 끝은 붉은 달이 뜨는 내 밀실에서 시작되었다
나도 모르게 떨어뜨린 노란 땀방울
혹은 환희의 눈물
어쩌면 창틈으로 틈입한 볕뉘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당신은 나를 정오의 광장에 패대기쳤다
날 안아줘야 했을 그 손가락만은 나를 더러운 년이라고 손가락질하지 말았어야 했다
벨벳처럼 보드라웠던 그 눈길은 처음부터 나와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다
/ 마녀의 사랑
이토록 평화로운 지옥에서 한 무명 시인이 왕이었던 시절
세상은 한 권의 책이고 그 책엔 네 이름만이 적혀 있었을 때
나는 온누리를 사랑할 수 있었지
데워지지 않는 슬픔이 통째 구워진 생선같이
구부러진 젓가락 아래 삼켜지길 기다리고 있다 해도
너에게 골몰하는 병(病)으로 혀끝이 화하다
조용히 미쳐가고 있다, 나는
/ 13월의 예감
조용히 오는 비 령(零)
마침 너는 내 맘에 조용히 내리고 있었으므로
령, 령, 나의 零
나는 네 이름을 안았다 앓았다
/ 령(零)
나는 저주하는 이유를 모르고 여전히 저주한다
불행하게 태어나는 건 없다는 당신의 말을
너 따위가 알까, 추락한다는 것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맹목의 시간 속에
뜨내기 같은 마음의 바큇자국을 망망연히 들여다보다가
나는 무서운 게 없어져버렸다
죽은 별들의 궤적사진에서 참혹한 선의를 본다
나의 불행은 누가 꿈꾸던 미래였을까
/ 궤적사진
구만 구천 편의 시 속에 네가 없는 것은 참혹하다.
세상의 낡은 비유는 내 전생(前生)의 전생(全生)에 걸쳐 네게 불태운 백단향의 기원.
내 일대기는 거리에 지문 한번 찍고 돌아서는 눈과 비,
네게 각인되기 위해 구름으로 빚은 인장(印章)들의 역사다.
심해어 같은 숱한 잠상(潛像)들이 활개치는 여기,
다시 네 이름만이 내 전생(轉生)의 마르지 않는 고해이다. 그대여,
새로 쓰는 모든 서정시의 서문은 너다.
/ 새로 쓰는 서정시
재채기 같은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목을 옥죄는 이물감과 스스로 목을 꺾는 목련의 창백한 진실
너와 나의 행간이 피워낸 적자(嫡子)
/ 꽃의 온도
너를 경(經)처럼 읽던 밤이었지
낯선 문법에 길 잃고 자주 행간에 발이 빠져
시든 줄기 같은 문맥을 잡고, 점자인 양 널 더듬거렸지
/ 국제여관
이를테면 낭만이라는 말
농밀한 안개를 뚫고 새벽의 손등을 건너온 연인의 깃을 이마로 쓸어주는 일
한 번의 떨림으로 방구석에서의 시간을 둥글게 털어내는 기타
은백양 가지에 앉아 계절풍을 기다리는 담배 연기
말하자면 노래라는 발음
날개를 돛처럼 펴고 섬의 절벽 위를 선회하며
종일 빈 눈동자로 응시하는 아청빛 파도
모래바람의 등을 타고 별자리들의 국경을 넘는
기후조(氣候鳥)들의 질긴 울음
/ 네 쪽짜리 새들의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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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시집이에요.
불펌 금지.
첫댓글 글 하나하나 너무 예뻐서 책 주문했어요..ㅠㅠㅠ 너무 좋네요ㅠㅠ
글이 너무 예뻐요...ㅠ ㅠ 시집 주문해야겠다
당장 주문하러 갑니다 ㅠㅜㅠㅠㅠ
문장하나하나가 주옥같아요ㅠㅠㅠㅠ 애정과 애증의 표현이 맘에들어요ㅠㅠㅠ
뜬금포지만 책표지에서 순간 암이 걸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