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이야기(178)
< 姓氏에 관한 고찰 >
잘 아시다시피 원시시대엔 정해진 짝이 없이 남녀가 혼거하는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였다.
그러니 아버지가 누군지 불확실해, 아이를 낳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하는 모계사회를 구성했던 것이다.
수렵생활에서 농경사회로 바뀌면서 정착생활이 시작되고, 가족제도가 형성되면서 아버지 중심의 부계사회로 전환이 된다.
성(姓)은 모계사회에 근거해 여자에게 붙인 것으로 女+生, 즉 여자가 낳은 아이를 뜻한다.
성씨의 발생 근원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고대 씨족사회에서 다른 씨족과 구분하기 위해 지배자에게 부여해 사용한 호칭이 성(姓)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조선시대 부족장이나 왕족에서부터 처음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 초기엔 이름만 있었다.
그후 중국의 영향을 받아 한자식 표기로 이름 앞에 동일한 계열의 혈족집단의 명칭인 성(姓)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명에 관한 법률에서는 자녀는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나, 부모가 어머니 성을 따르기로 합의한 경우 예외를 인정하며, 이름의 글자 수는 성(姓)외에 5자까지만 허용하고 있다.
한편 삼국시대의 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고구려 시조 주몽은 성이 고(高)씨이며, 백제 온조왕은 성을 부여(扶餘)로 하였다.
그리고 신라는 박(朴)•석(昔)•김(金)의 왕족 외, 3대 유리왕 때 6부 촌장들에게 성을 하사했는데, 그 성씨가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李氏, 崔氏, 孫氏, 鄭氏, 裵氏, 薛氏이다
또한 가야국 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許黃玉) 공주와 최초 국제 결혼한 왕으로, 황금알에서 태어나 성을 金氏로 했고, 왕자의 일부는 김해 許氏가 됐다.
고구려와 백제는 20여개, 신라는 10여개 성씨가 기록에 보이는데, 신라가 3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성(姓)은 차츰 사라지고, 신라에서 발생된 성씨가 한반도 전체로 확산됐다.
고려 왕실의 성은 왕씨(王氏)로 왕건의 증조부 왕국조(王國祖)가 개성王氏의 시조이다. 왕건은, 개국공신들에게 성을 내렸는데, '홍유'는 부계 洪氏, '신숭겸'은 평산 申氏, '배현경'은 경주 裵氏, ‘권행’은 안동 權氏, ‘이도’는 전의李氏, 그리고 저의 시조 금용 할아버지는 인동 張哥의 시조가 됐다.
한편 고려 중엽인 11대 문종때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응할 수 없도록 제도를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중기이후에는 성씨가 일반화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더욱 확장돼 천민을 제외한 대부분의 백성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 초기엔 천민이 전체 인구의 1/2로, 백성의 반 정도만 성이 있었다.
백성(百姓)이란 백 가지 성씨란 뜻인데, 국민을 뜻하는 말로 변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신분제가 폐지되고, 1909년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누구나 본관과 성을 갖게 된다.
전 국민의 절반 가까이 되던 노비들은 주인의 성을 따르거나 명문세가에 투탁(投托)하면서 성을 사고 팔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씨 자료인 '세종실록 지리지'엔 250여 개, 성종이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개, 후기 영조 때는 298개 성이 수록돼 있다.
1930년대와 1980년대 국세조사에도 250여 개로 나온다.
동•서양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 결혼하면 여자는 남편의 성을 따르지만,
한국만 예외이다. 중국도 일부는 남편 성을 따르기도 한다.
10대 성씨는 金•李•朴•崔•鄭•姜•趙•尹•張•林의 순서인데, 그 10대 성씨가 64.1%, 20대 성씨까지는 전 인구의 약 80%를 차지한다.
金氏가 21.6%, 李氏가 14.8%, 朴氏가 8.5%이다.
본관 기준으로는 김해 김씨가 9%, 밀양 박씨 6.6%, 전주 이씨 5.7%의 순서이며, 저의 본관인 인동 張哥는 1.3%로 12위이다. (이어서 제2편에서는 귀화姓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