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은 작품 18의 전기 현악사중주 세트를 마치고, 5년 동안이나 현악사중주에 손을 대지 않고 있다가 라주모프스키의 의뢰로 다시 현악사중주를 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3곡의 라주모프스키 현악사중주곡은 2번째 곡 까지 러시아 민요가 들어가는데, 이는 곡을 의뢰한 라주모프스키의 요청으로 베토벤이 삽입했다는 설이 있다.
라주모프스키 백작(1752-1836)은 1792년부터 빈에 주재한 러시아 대사로 베토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던 사람이며, '금요음악회'를 주관했던 리히놉스키의 형이기도 하다. 그는 리히놉스키 못지 않게 정치보다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아 이 분야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며, “정치는 음악처럼 부드러워야 한다.”는 말을 실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베토벤에게 현악사중주를 의뢰하던 시기에 자신의 집에 이미 유럽 최정상의 현악사중주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현악사중주팀은 이그나츠 슈판치히(1776-1830)가 제1바이올린, 자신이 제2바이올린을, 프란츠 바이스(1778-1830)가 비올라, 요제프 링케(1783-1837)가 첼로를 연주하였다. 따라서 베토벤의 '라주모프스키 현악사중주'는 당연히 이들에 의해서 초연되었다.
구성에 있어서는 전기의 작품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고전적 형식의 자유로운 확대와 적극적인 표현으로 한층 원숙해 졌다. 또한 주제의 전개는 깊이 있고 심오해졌으며, 구성은 복잡해졌다. 그리고 각 악기는 음색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복잡해진 기교를 연주해야 하기 때문에, 연주자에게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기 현악사중주 '라주모프스키'는, 전기 현악사중주 보다 한층 더 본질에 충실한 작품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베토벤 특유의 개성과 스타일이 이 중기 현악사중주를 통해서 한층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제7번(라주모프스키 제1번)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곡을 이해하지 못했다. 곡의 길이나 스케일은 거대한데 도처에 이해할 수 없는 혁신적인 기법까지 도사리고 있는지라, 당시 사람들은 베토벤이 이 곡을 장난처럼 쓴 것으로 오해하였고 베토벤을 비웃기도 했다. 형식에 있어서는 4개 악장이 모두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악장의 성격은 제1악장은 장대함, 제2악장은 사실상 스케르초로 이루어졌고, 제3악장의 긴장감은 역시 베토벤다운 모습이며, 마지막 제4악장에서는 러시아 민요가 주제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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