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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인터넷에 게재하도록 허락해주신 <미주현대불교> 잡지사에 감사드립니다.
중국, 대만, 한국의 불교 평화운동가들
문찬주(성원스님) 영어로 쓰고, 한창호 번역함
중국불교 승려 개혁가인 태후(太虛[태허]; 1890-1947) 스님은 다양한 불교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스님은 현대 중국불교에서 인본주의 불교의 체계를 세운 이로 알려져 있다. 16세에 임제선 불교의 사미승이 되었다. 스님은 중국에서 불교와 정치를 개혁하고 현대화함에 있어, 저명한 중국 개혁가들인 량치차오(梁啓超[양계초]; 1873-1929),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 탄시퉁(譚嗣同; 1865-1898), 장타이얀(章炳麟; 1868- 1936)의 진보적 저서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1912년에 포쟈오 시에진-휘(佛教協進會[불교협진회])를 설립했다. 1917년, 대만과 일본을 방문했고, 1909년에 재가불자인 양 렌샨(1837-1911)이 난징에 설립한 ‘경전서각협회’를 방문했다. 1920년, 불교 정기간행물 하이차오인(海潮音 [해조음])을 간행했고, 1922년에 최초의 현대적 중국불교 강원(講院)인 우창 불교 연구소를 설립해 파팡, 닥싱, 모찬, 웨이팡, 파즌, 탄수안을 포함한 많은 승려를 교육했다. 1923년, 스님은 세계불교도연맹(World Buddhist Federation)을 결성했고, 1925년에 토쿄에서 열린 동아시아불교도대회에서 중국 대표단을 이끌었다. 1925-1926년간에, <<인본주의 불교(Humanistic Buddhism)>>라는 책을 출간해, 불교가 오늘날과 같이 매우 문제가 많은 현대사회의 맥락에서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인본주의 불교는 불교에 관한 스님의 주된 사상을 특징지었고, 중국과 대만에서 훗날 등장한 대부분의 사회참여적 불교도에게 영향을 미쳤다. 인 슌(印順導師[인순도사]), 싱 윤(星雲大師[성운대사]), 셍 옌(聖嚴[성엄]), 쳉 옌(證嚴法師[증엄법사]) 등이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다. 태후 스님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일반적으로 인본주의 불교도라 불린다. 1927년, 스님은 민난불교연구소 소장이 되었고, 1928년에 치앙카이-섹의 재정적 후원으로 세계 일주여행을 했다. 1929년, 같은 해에 유안잉 스님(圓瑛法師[원영법사]; 1878-1953)이 상하이에 설립한 중국불교도협회에 합세했다. 1930년에 스님은 총킹에 중-티벳불교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훗날 전쟁 기간인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불교협회 본부로 기능했는데, 전쟁기간 스님은 중국의 지지세력을 획득하기 위한 중국불교도 대표로서 버마,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지아를 방문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중국 지식인과 공무원 들은 불교 재산과 수입을 대중교육을 위해 활용하고자 애썼는데, 스님은 공공연한 반(反)불교도 분위기에 대항했고, 중국 불교도한테 중국불교를 현대화하고 개혁하자고 제안했다. 보수적 불교도는 스님의 생각이 급진적이고 수용할 수 없다고 여기면서, 불사(佛事)를 놓고 그를 비판했다. 스님은 전쟁이 끝난 뒤 1947년에 열반했다.
인 슌(印順導師[인순도사]; 1906-2005) 스님은 상하이 근처 제지앙성(省) 하이닝군(郡)에서 태어났다. 인 슌은 인본주의 불교옹호자였는데, 인본주의 불교를 실질적으로 체계화한 선각자 태후스님으로부터 주요 개념을 물려받았다. 인 슌은 대만불교 비구니 스님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교자선 단체인 자제공덕회(慈濟功德會) 설립자 쳉 옌(證嚴法師[증엄법사]) 스님의 스승으로 매우 유명하다. 인 슌은 대만에서 더 나중 세대 불교 선사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인 슌의 영향을 받은 이로 포광샨 선원(佛光山寺[불광산사])의 싱 윤(星雲大師[성운대사]), 법교산(法鼓山)의 셍 옌(聖嚴[성엄]) 스님 등을 들 수 있다. 1918년에 인 슌은 중학교를 마친 뒤, 고대 중국 글자를 연구했고 중국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1921년, 의학에 흥미가 없어 종교적 도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므로, 인 슌의 아버지는 아들이 걱정스러워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주선했다. 인 슌은 1930년까지 계속 교편을 잡았다. 1928년에 유교, 도교, 기독교를 공부하고 여러 집안 문제를 겪은 뒤 인 슌은 승려가 되기로 결심했다. 1930년, 푸추안사(寺)의 큉니안(清念[청념]) 스님 문하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31년, 민난과 용추안 불교 강원에서 불교를 연구했다. 1932년과 1933년 사이, 혜제사(慧济寺) 도서관에서 불교 경전을 읽었다. 1934년, 인 슌은 또한 우창 불교 강원과 혜제사에서도 경전 공부를 했다. 1936년, 우창 불교 강원에서 자체 프로그램을 개설하자, 인 슌은 세 가지 주요한 중관학파 저술에 관한 연구를 감독하라는 태후 스님의 요청에 응했다. 1938년에서 1946년까지 8년 동안 인 슌은 쓰촨성(四川省[사천성])에서 불교를 연구하고 가르쳤다. 1938년 가을부터 1939년 말까지, 인 슌은 쓰촨성 중-티벳불교 교수연구소에서 동료 파준(法尊[법존])과 더불어 불교 연구를 수행했다. 저명한 티벳불교 전문가 파준으로부터 티벳불교 일반, 그 중에서 특히 겔룩파 전통을 배워 중관학파 철학에 관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켰다. 1940년, 유가행파 불교에 관한 최초의 저서를 출간했다. 1941년에 쓰촨성 헤지앙군 소재 파왕사에 파왕연구소가 설립되었으니, 훗날 인 슌은 이 연구소에서 3년 간 불교를 가르쳤다. 1947년, 태후 스님이 열반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인 슌은 <<태후선사전집>> 발간을 서둘러 1948년에 편집을 끝내고 출간했다. 1949년, 인 슌은 중국 본토를 탈출해 홍콩으로 갔다. 1949년부터 1952년까지 홍콩에 있던 3년 동안, 인 슌은 불교 포교에 힘썼고 15권의 책을 출간했다. 1952년, 중국불교협회 권고에 따라 인 슌은 중국불교를 대표해 세계불교도우의회 제 2차 국제대회에 참석했다. 1952년, 인 슌은 홍콩에서 자신이 살던 대만으로 가 2005년 열반할 때까지 불교를 홍포했다. 1953년에 유명한 불교잡지 <해차오인(海潮音[해조음])> 사장이 되었는데, 이 잡지는 태후 스님이 30년 전에 창간호를 출간한 바 있다. 1953년에서 1965년까지 13년 동안 인 슌은 잡지를 책임졌다. 1953년, 지안푸 정사(精舍)를 설립하자 많은 학자 승려들이 인 슌 주위로 모여들었다. 1954년, 인 슌이 폐결핵에 걸렸음이 밝혀졌다. 즉각적인 의학적 치료가 필요했음에도, 인 슌은 5달 동안 필리핀으로 가 일련의 불교 강연을 했다. 이 여행이 인 슌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1957년, 불교 종단 내 비구니 스님들에 대한 성차별주의적 견해에 대응해 인 슌 스님이 교육에 대해 강조하자, 이에 고무된 후안셴 비구니 스님이 이통사(一同寺[일동사])에 신주 여성불교도 연구소를 설립했다. 1958년과 1959년에 인 슌은 학교 하나와 장학재단 하나를 별개로 설립했다. 1960년, 인 슌은 자신이 재가불자 제자들에게 체계적으로 불교를 가르쳤던 타이페이에다 ‘휘리(慧日[혜일])강당’이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강연장을 건립했다. 1963년에 인 슌은 쳉 옌과 조우해 쳉 옌 비구니 스님의 스승이 되었다. 나중에 인 슌은 쳉 옌이 전개하는 자비(慈悲) 활동 속에서 종교적으로나 영성적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1964년, 팔리어 삼장(三藏) 일본어 번역본에 토대해 여러 논문과 책을 간행했다. 1965년과 1966년 1년 동안, 대학생들을 상대로 중국문화연구소에서 불교를 가르쳤으니, 인 슌은 대만의 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친 최초의 승려 학자였다. 1970년, 인 슌은 <<중국에서 선불교의 역사>>를 출간했고, 초창기와 1971년의 중국 선불교 역사를 다루었다. 솅 옌(1930년 출생) 스님의 권유로, 일본인 우쉬바 신겐은 이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고자 마음 먹었다. 1973년, 번역을 마치자마자 신겐은 저명한 천태 불교와 선불교 학자인 세키구키 쉰다이와 더불어 인 슌 스님을 자기네가 있는 타이쇼 대학에 추천했고, 대학측은 스님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2004년, 인 슌의 신도와 제자 들은 인슌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인 슌은 또한 필리핀, 싱가포르, 말레이지아를 포함 여러 나라를 방문해 불교를 포교했다. 2005년, 인 슌은 후알리안 소재 자제공덕회 병원에서 열반에 들었다.
중국불교 승려인 싱 윤 스님(星雲大師[성운대사] 1927년 사망)은 현대 개혁가인 태후(1890-1947) 스님으로부터 인본주의 불교 전통을 물려받았다. 싱 윤은 1927년에 중국 본토에서 태어났다. 1941년에 비구계를 수지했고, 1949년에 대만으로 이주했다. 1962년, 대만 카오슝에 슈샨불교대학을 설립했고, 이어 불교 교학연구와 비구 및 비구니 교육과 성장을 위한 12개의 불교대학을 세웠다. 1967년, 싱 윤은 대만 카오슝에 세계 최대 규모의 종교적이고 인본주의적 단체인 불광산 불교 사원을 건립했다. 1967년 설립때부터 1985년까지 싱 윤은 불광산사(佛光山寺) 주지로 봉직했다. 1985년, 싱 윤은 주지직을 상수제자(上手弟子) 신 핑에게 양도했다. 1977년, 싱 윤은 삼장편집위원회를 조직해 새로운 주석, 마침표, 단락으로 불광산 삼장(三藏)을 펴냈다. 1992년, 싱 윤은 ‘붓다의 빛 국제연합’(BLIA)을 설립했고, 자신의 종단과 교학을 세계화했다. 싱 윤은 세계 6대륙 곳곳을 누비며 불교를 포교했다. 승려 제자만 1,000명이 넘었고, 신도 수는 300만을 상회했다. 전세계에 걸쳐 200개 이상의 지부 사찰이 있는데, 로스엔젤레스의 시 라이 사원, 오스트레일리아의 난 티엔 사원, 남아프리카의 난 후아 사원 등이 그것이며, 180개 이상의 관련 센터, 지부, 대학 들이 존재한다. 불광산 종단은 영아원, 무료진료소, 양로원, 감옥포교, 재난구조, 그밖에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서비스와 유치원, 고등학교, 도서관, 박물관, 칼리지와 종합대학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교육적 사업과 같은 인본주의적 사업을 펼치고 있다. 싱 윤 스님은 3개의 불교제휴 대학을 건립했으니, 1990년에 미국 로스엔젤레스군 소재 더웨스트대학교(이전에는 시래[西來 (서래)] 대학교로 알려졌음), 1993년에는 대만 포광(佛光[불광])대학교, 1996년에는 대만 난화(南華[남화])대학교가 그것이다. 싱 윤의 비구니 제자인 이파 스님은 스승 싱 윤 스님의 인본주의 불교를 다음과 같은 6가지 특징을 지닌 것으로 요약한다. (1) 붓다의 인간적 본성에 집중하기, (2) 일상생활에 강조점 두기, (3) 항상 유념하고 실행해야 하는 이타주의 실천하기, (4) 모든 중생을 위해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기쁨을 제공하기, (5) 시간 제약 없이 인본주의 불교를 적용하기, (6) 인본주의 불교를 모든 존재한테로 보편적으로 적용하기. 싱 윤은 신도들을 다음과 같은 4가지 주요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1) 불교 가르침을 펼 때 문화를 활용하기, (2) 스스로의 재능을 개발할 때는 교육을 강조하기, (3) 사회에 이익을 줄 때는 인정많은 활동 펼치기, (4) 마음을 정화시킬 때는 공동체적 수행하기.”
솅 옌(聖嚴[성엄]) 스님(1930년생)은 상하이 근처 지앙수성에서 태어나, 1943년에 난통군 늑대언덕 소재 광지아오 사원의 불교 승려가 되었다. 솅 옌은 현대 중국불교의 위대한 개혁가 중 한 사람인 태후 스님의 제자가 설립한 강원에서 불교를 공부했다. 강원은 화엄불교, 천태불교, 선불교, 유가행파, 율종, 중관학파, 밀교라는 전통 중국불교의 8종파에 대한 초교파적 태도를 지녔다. 1949년, 공산주의자들이 중국을 장악했을 때, 솅 옌은 국방군에 지원해 대만으로 갔다. 10년간의 군복무 뒤 1959년, 솅 옌은 타이페이에서 동추 스님 휘하 불교문화센터에서 다시 구족계를 받았다. 1959년과 1961년 사이, 스승의 선불교적 인도 아래 집중적인 훈련을 받았다. 1961년과 1968년 사이, 차오유안 사원에서 혼자 안거했다. 1969년, 일본으로 가 니찌렌(日蓮 [일련]) 불교에 기반해 설립된 토쿄 리쇼 대학교 불교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해, 1971년에 석사학위를, 1975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에 있는 동안, 솅 옌은 다양한 선불교와 밀교의 고승들을 만났고 선센터에서 강도높은 겨울철 안거에 참여했다. 1975년, 조동종 선의 전통을 이어받는 동추 선사로부터 정식으로 법을 전수받았고, 1978년에 임제선 전통의 링유안 선사로부터도 공식적으로 법을 전수받았다. 1976년에 미국에서 일요 명상교실을 열었고, 1977년에 7일 명상 수련회를 개최했다. 1977년, 스승인 동추 선사의 사망으로 솅 옌은 대만으로 돌아갔다. 1978년 중국문화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타이페이 소재 중화불교문화관 관장이 되었다. 1979년, 대만 농찬 사원 주지가 되었으며, 1980년에 뉴욕에 선명상 센터와 중화불교문화관을 설립했다. 1985년, 싱 윤은 베이토우 소재 중화불교문화관 내에 중화불교연구소를 설립했고, 1989년에는 법고산(法鼓山)에다 연구소를 설립했다. 1990년, 솅 옌은 제 1회 중화국제불교대회를 개최했다. 1992년, 영적 환경을 보호하자고 제의했고, 1994년에 법고산 내 사회적 환경을 보호하자고 주창했다. 1997년, 바티칸을 방문해 교황을 만나는 등, 솅 옌은 다른 종교 지도자와 종교간 대화를 나누고자 애썼다. 1998년, 뉴욕에서 달라이 라마와도 대화를 나눴다. 1999년, 솅 옌은 법고산 재단이 대만에서 일어난 9월 21일 지진 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구제하도록 이끌었다. 2000년 8월 28-31일, (세계를 좀더 내적으로 연결되게 하고, 지속적 평화를 확립한다는) 두 가지 목적을 지닌 제 1회 ‘유엔 종교 및 영적 지도자 새천년 세계평화 정상회담’에서 기조 연설을 했다. 1000여명에 이르는 전세계에서 온 저명한 종교 지도자와 영적 지도자 들이 정상회담에 참석했다. 2002년, 솅 옌은 뉴욕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연례회의에 유일한 불교 지도자로 참석했고, 태국 방콕에서 열린 종교지도자 세계평의회 첫 회담에 참석했다. 2003년, 종교지도자 세계평의회가 조직해 일본 쿄토에서 열린 세계청년 평화정상회담을 위한 첫 준비모임에도 참석했다. 2004년12월 26일, 끔찍한 해일이 남아시아 나라들에 들이닥치자 법고산 재단은 인도네시아와 스리랑카의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기 위해 요원들을 파견했다.
대만불교 비구니 쳉 옌 스님(證嚴法師[증엄법사]: 1937년 출생)은 인본주의 불교에 관한 고(故) 인 슌(1906-2005)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분으로 자제공덕회를 설립했는데, 이 재단은 아마 전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 자선단체일 것이다. 1966년, 자제공덕회는 후아리안 소재 푸밍 사원에서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기 위해, 매일 미화 2센트에 지나지 않는 돈을 저축했던 가정주부 30명으로부터 시작되어, 1967년 제1회 기념식에는 10명의 위원과 300명 이상의 회원이 참여했다. 첫 해에 미화 719달러 상당을 모아 15가족을 도왔다. 1969년, 푸밍 사원이 더 이상 급속하게 성장하는 자제공덕회 회원들을 수용할 수 없었으므로, 정사정사(靜思靜舍)를 짓기 시작했다. 재단은 현재 450만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재단은 자선, 의약, 교육, 문화의 네 가지 주요 임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재단의 자선 임무로는 “(1) 저소득 가족들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재정 지원, (2) 저소득 가족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쌀이나 물품 지원, (3) 의약품 구입을 위한 수입 지원, (4) 의료 지원, (5) 재난 구제, (6) 가족이 없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장례 지원” 등이 포함된다. 1979년, 재단은 불교적 임무를 수행하는 대형 종합병원을 설립하기로 결정해, 1986년에 병원이 완공되었다. 설립된 종합병원은 곤궁한 이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대만 입법부가 1993년에 신체장기 기증 법률에 대한 수정안을 통과시킨 후, 자제공덕회는 같은 해에 ‘골수기증 등록소’를 개설했다. 현재 이곳은 세계 최대 규모의 중국인 골수기증 자료은행이다. 한편, 문화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재단은 잡지와 책을 간행하고, 라디오와 TV 프로그램을 마련함에 있어 친절과 순수한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자제공덕회는 교육적 임무 완수를 위해 1989년에 자제 간호전문대학을, 1994년에 자제 의과대학을 설립했다. 자제공덕회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종합대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자제공덕회에는 소수의 비구니 스님만이 있어, 자원봉사자로 이루어진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활동을 전개한다. 비구니 스님들은 그들 자신을 위한 헌금을 받지 않으며, 농사짓고 장갑 짜고 기저기, 전류차단기 및 그밖의 물품을 직접 만든다. 자제공덕회는 전세계 적어도 60개 나라에서 재난 구조 활동을 전개한다. 쳉 옌 스님은 1991년에 막사이사이상(아시아의 노벨상으로 간주됨)을 수상했고, 1993년에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되었으며, 1998년에 미승인국가민족협회(UNPO)로부터 국제인권상 및 그밖의 상을 받았다.
한국 불교 평화운동가
한용운(1879-1944)은 불교 개혁가였고, 한국에서 아주 잘 알려진 유명한 시인일 뿐 아니라 일제 강점(1910-1945)으로부터 나라의 독립을 추구하는 독립운동가였다. 한용운은 필명인 만해(萬海)로도 불린다. 충청남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전통적인 마을학교에서 유학을 공부했다. 16세 때인 동학혁명기에, 일제 군대가 한용운의 부모와 형제를 끌고가 살해했다. 한용운 역시 반(反)정부적이고 혁명에 찬동하는 군대에 참여했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피신했다. 그후 한용운은 사람들이 처한 곤경을 절감하고,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 1905년, 오세암 근처에 자리잡은 백담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이어 다양한 불교 학자 승려들의 지도 아래 주요 대승 경전을 공부하며 선수행을 했다. 몇 년 동안 시베리아를 여행하기도 했다. 1908년, 국내 다른 불교 대표자들과 더불어 서울 원흥사에 원종(圓宗)이라는 이름의 통합 한국불교 본부를 설립했고, 소위 선진국을 견학해 제국주의 일본의 영향력으로부터 한국을 구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자 토쿄로 갔다. 1909년,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이란 제목의 책을 집필했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1910년 이후 한용운은 자신이 독립운동가와 병사 들을 격려했던 만주와 시베리아를 방문했다. 1910년, 박한영(1870-1948), 진진응(1873-1941)과 더불어 한국불교 원종을 일본불교 조동종에 복속시키려 애썼던 친일본 승려 지도자 이회광을 축출하고자 전라남도 송광사에서 전국 승려대회를 주도했다. 당시 이회광은 원종의 종정(宗正)이었다. 한용운은 부산 범어사에 새로운 임제종을 설립하려는 노력을 경주해, 권한대행이 되어 친일본적 원종에 맞서 힘차게 싸웠다.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출간했고, 불교의 개요를 담은 <<불교대전>>을 편집했다. 1915년, 불교연구소격인 ‘불교학무원’를 설립했고, 2년 동안 한반도 남단에서 법회 여행을 이끌었다. 1918년, <유심(唯心)>이라는 불교 정기간행물을 발간했다. 1919년, 백용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해 3.1 독립운동 33인 민족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한용운은 독립선언서를 수정해 공약3장을 덧붙였다. 일본 경찰은 그를 체포해 3년 동안 투옥시켰는데, 그 기간 동안 ‘조선독립의 서’라는 제목의 매우 유명한 글을 썼다. 1922년, 감옥에서 석방되어 1924년에 한국청년불교도협회 고문이 되었다. 1925년, 반(反)일제 식민주의 정서를 담은 <<님의 침묵>>이라는 제목의 시선집을 간행했다. 1927년, 전국적인 반일 단체인 신간회를 설립해 서울지부장이 되었다. 한용운은 또한 조선청년불교도협회를 조선청년불교도연맹으로 바꾸어 독립을 위한 조선 청년불교 운동을 강화시켰다. 1930년, 월간지 <불교>를 인수해 반일운동을 확산시키고 불교를 대중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용운은 또한 반일지하 단체인 만당(卍黨)의 영적 지도자로 되었으니, 만당의 성원들은 독립을 옹호하는 젊은 승려들이었다. 1937년, 일본 경찰은 만당의 지하 지도자라는 혐의로 그를 체포해 투옥했다. 그후 한용운은 계속적으로 일본 식민주의를 몰아내고 한국불교를 개혁하고자 헌신했다. 1944년, 한용운은 독립을 불과 한 해 남겨두고 열반했다.
백용성(1864-1940)은 한국불교 개혁가요 일제 식민주의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추구했던 활동가였다. 1884년, 15세에 해인사에서 승려가 되어 선수행을 했다. 1910년, 백용성은 불교포교를 시작했고, 1911년에 서울에 대각사를 세웠다. 1919년, 3.1 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었으므로, 일본 경찰은 그를 체포해 1년 6개월 동안 투옥시켰다. 1921년에 출소한 후, 백용성은 대각교(大覺敎)라는 이름의 새로운 불교조직을 만들었고, ‘삼장역회’(三藏譯會)라는 불교삼장 번역협회를 창립했다. 화엄경, 금강경, 원각경, 대승기신론소 등과 같은 30권의 주요 불교 경전을 대각사에서 번역했다. 백용성은 또한 불교 합창단을 조직했고, 불교 노래를 작곡했으며, 불교를 대중화하기 위해 그 노래들을 일반대중에게 보급했다. 1926년, 127명의 승려와 함께 조선총독부가 한국불교에 강요한 일본화(日本化)에서 주된 두 가지 쟁점인 결혼과 육식을 조선 사찰에서 금지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비망록을 제출했다. 9월에 백용성은 다시 서울의 일본 총독부와 토쿄의 일본 내무성에 서한을 보냈다. 백용성은 서한에서 대처승 제도가 한국 승려의 선원생활 타락의 주된 이유라고 주장했다. 1928년, 번역협회의 공식 정기간행물인 <무아(無我)>를 출간했고, 박한영과 협력해 <불일(佛日: 붓다의 빛)>이란 제목의 잡지도 간행했다. 불교가 재정적으로 독립하길 원했으므로, 1916년부터 1919년까지 3년 동안 함경도 북청에서 금광을 운영했고, 1922년에 만주 소재 70헥타르 땅에 대각교에 소속된 지부 사찰을 건립했으며, 토지를 경작했고, 1927년에 경상남도 함양 백운산에 과수원을 조성했다. 만주에 있는 동안 백용성은 독립군에 자금을 제공했다. 백용성은 또한 1000일 동안 참선수행을 하기 위한 협회를 조직했고, 많은 참선 수행자들을 훈련시켰다. 그의 승려 제자 중 다수가 불교정화운동(1954-1962)에서 주도적 인물로 되어, 일본불교에서 유래한 대처승 제도로부터 승려의 순수성을 지켜냈고 한국불교의 독신주의 전통을 회복했다.
박한영(1870-1948)은 한국 불교교육 개혁가였다. 1888년, 19세의 나이로 전주 태조암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1890년 이후, 박한영은 여러 저명한 승려 학자의 지도 아래 전통적인 방식으로 불교를 연구했고, 1896년 이후 여러 강원에서 불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910년, 한용운과 함께 일하면서 한국불교 원종을 일본불교 조동종에 복속시키려는 이회광의 음모를 차단했다. 박한영은 일본불교의 영향력으로부터 한국불교 전통을 지키고자 애썼다. 1913년, <해동불교>라는 잡지를 간행했고, 계속해서 잡지에다 불교개혁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1914년, 여러 불교 교육기관에서 승려와 재가불자 들을 교육했다. 1929년과 1946년 사이, 한국불교 종정의 소임을 맡았고, 1948년에 열반에 들었다.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정화불교운동(1954-1962) 지도자 이청담(1902-1971)과, 중국 불교경전을 한국 토착어로 번역했고 독립운동가였던 이운허(1892-1980)였다.
필명이 취산(鷲山)이고 법명이 천보(天輔)인 김구하(1872-1965)는 경상남도 의주에서 1872년에 태어났다. 1884년 김구하는 경상남도 양산의 천성산 내원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1890년, 경상북도 예천 용문사에서 용호 해주 문하에서 불교를 공부했다. 나중에 한반도 곳곳의 여러 산에서 많은 저명한 학자 및 참선 수행자 들을 방문해 배웠다. 1900년, 통도사에서 김성해로부터 법맥을 이어받았다. 1906년, 김구하는 서울에서 현재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명진학교를 설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명진학교는 최초의 현대적 불교 포교학교다. 김구하는 이 학교의 부교장이 되었다가 나중에 교장이 되었다. 1908년, 전국 52명의 불교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한국불교 본부 사찰인 서울 원흥사에 한국불교 최초의 현대적 종단인 ‘한국불교 원종’ 총무원을 조직했다. 김구하는 종단의 인사부장에 임명되었다. 1911년, 통도사 주지를 맡았다. 그때 이래로, 김구하는 5차례 통도사 주지로 임명되어 14년 동안 통도사에서 주지 소임을 맡았다. 1919년에 신상완은 상해 임시정부 연락관으로서 부산 범어사 승려들에게 상해 임시정부의 곤경을 전했으니, 범어사 승려들은 자기들끼리 기금을 모아 김상호를 통해 망명정부에 전달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범어사 고참 승려들인 이담해, 오성월, 김경산을 고문으로 추대했고 김상호가 추대서를 전달했다. 김상헌과 신상완과 더불어 김상호는 독립운동 기금을 모았다. 망명정부가 재정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범어사 승려들과는 달리, 통도사의 김구하만은 거액을 희사했다. 1919년 말엽, 김구하는 11명의 한국불교승려 연맹의 불교승려 대표단과 더불어 가명으로 한국 승려들이 발의한 일본 강점으로부터의 독립선언에 서명했다. 독립선언문은 한국어, 중국어, 영어 3개 국어로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김구식은 대회의 전권대사로서 독립선언문을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평화 회담장으로 가져갔다. 통도사 승려들은 김구하가 망명 정부에 사찰의 돈을 보냈다는 걸 몰랐으므로, 일본 경찰한테 그가 사찰돈을 착복했다고 말했고, 그로 인해 그는 고문을 당했다. 1925년, 김구하는 주지직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김구하는 비밀리에 반일조직과 반일 활동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엄청난 금액을 헌납했다. “구하스님 비밀지원 자료공개”(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구하 큰 스님은 비밀리에 반일독립운동에 군자금을 댔다) (1) 상해 임시정부 수반인 안창호 특사를 통해 망명 중인 상해 임시정부에 5000원, (2) 백초월에게 2000원, (3) 이종욱에게 3000원, (4) 장인섭에게 1000원, (5) 망명중인 상해 임시정부에 500원, (6) 신정흔에게 500원, (7) 김포광에게 500원, (8) 정탁에게 100원, (9) 양만우에게 100원. 그러나 1911년부터 시작해 14년 동안 통도사 주지 소임을 보는 동안, 김구하는 친일 활동에도 역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7년 4월, 김구하는 30개 교구본사 사찰로 이루어진 한국불교연맹의 3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7년 8월 31일, 김구하는 일본 방문 프로그램을 준비해 9명의 불교지도자들, 즉 이회광, 강대련, 곽법경, 권상노 등에게로 갔다. 일본 총독부 교육부 관리인 카토 칸카쿠의 안내 속에 하세카와 수키미치 총독은 300엔을 지원했고, 총독부 정치고문은 여행 경비로 100엔을 후원했다. 9월 8일, 일본 여행 중에 방문단은 총독의 토쿄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앞서의 정치고문을 만났는데, 그가 그들에게 일본 신토의 가장 신성한 장소인 ‘이세 신토사원’을 방문하도록 권고하면서 100엔을 주었다. 1917년9월 4일, 방문단은 제 18대 일본 수상(1916-1918)이자 1910-1916년 동안 한국의 초대 일본 총독이었던 테라우치 마사타케의 관저로 초대받았다. 방문단 지도자 김구하는 당시 150엔 나가던 값비싼 은제 향로를 선물로 바쳤다. 방문단은 또한 작고한 황제 메이지(1852-1912; r. 1912-1926)의 능을 방문했고, 우에노 역에서 타이쇼 황제(1879-1926; r. 1912-1926) 행렬에 환호를 보냈으며, 이세 신토사원을 방문했고, 심지어 조선 침략자 토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 묘에까지 참배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김구하의 친일행위를 동정하고 옹호하는 이들은, 그가 공적으로 조선 내 총독부와 일본 정부에 충직한 주지인 체 하면서 반일 독립운동가와 조직 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게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김구하가 주지직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독립운동가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1965년에 김구하는 세상을 떠났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왕생극락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