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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保寧) 땅을 왜 “만세(萬歲) 보령(保寧)”이라고 했을까? [제1편]
2023년 03월 11일
○ 오늘의 이야기는 “충청도(忠淸道) 보령시(保寧市)”에서 사용하고 있는 “만세(萬歲)”라는 별호(別號)와 관련(關聯)된 이야기로, 역사서(歷史書) 속에서 말하는 “보령(保寧)”에 대한 기록(記錄)을 찾아 고찰(考察), 고증(考證)해 본 것이다. “보령시(保寧市)”를 비판(批判) 또는 비난(非難)하는 내용(內容)이 아니다. 다만,
“만세(萬歲) 보령(保寧)”이라는 특이(特異)한 ‘선전(宣傳) 문구(文句)’ 또는 ‘알리기에 앞장서는 특이(特異)한 문구(文句)’ 때문에 검토(檢討) 대상(對象)이 된 것일 뿐이다. 이런 예(例)는, 지방자치단체(地方自治團體)에서도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관심(關心)을 끄는 것은, 정사(正史)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특징(特徵)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그 연유(緣由), 또는 이유(理由)가 무엇일까를 알아본 것이다.
○ ‘인간(人間)의 삶’을 지배(支配)하는 생존(生存)에서부터 인종(人種), 종족(種族)의 혈통(血統), 면목(面目), 토인(土人), 토산물(土産物), 사상(思想), 지형(地形) 지세(地勢), 기후(氣候) 등등의 관계(關係)는, 모두가 자연환경(自然環境)과 밀접(密接)한 관계(關係)에 있어 이것을 빼고 인간(人間)의 삶 즉(卽) 생존(生存)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
➊ 한반도(韓半島)와 같은 좁은 땅에서, ➋ 대륙(大陸)의 수만리(數萬里) 광활(廣闊)한 땅에서, ➌ 사면(四面)이 모두 바다에 둘러싸인 섬(島)에서 ➍ 사막지대(沙漠地帶)와 초원지대(草原地帶)에서 ➎ 동토(凍土)의 땅에서… …당연(當然)히 그 환경(環境)에 따라 모든 인간(人間)의 삶 방식(方式)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즉(卽),
이러한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들을 몽땅 무시(無視)하고, 대륙(大陸)에서의 삶을 한반도(韓半島)에 대입(代入), 비교(比較)한다거나. 한반도(韓半島)의 삶 방식(方式)을 대륙(大陸)에 빗대거나, 열도(列島) 땅의 삶의 방식을 대륙(大陸) 땅의 방식(方式)으로 생각하면 대부분(大部分) 오류(誤謬) 또는 잘못된 주장(主張)으로 판명(判明)될 수밖에 없다.
조상(祖上) 대대(代代)로 살아온 땅을 알아야 ‘내 나라’ 당시(當時)의 풍속(風俗)이나 관습(慣習), 사상(思想) 등에 정확(正確)한 연구(硏究)가 가능(可能)한 것이고, 믿을 수 있는 결과(結果)가 도출(導出)될 것이다.
예(例)로 보면 : 『대륙(大陸)의 수만리(數萬里) 광활(廣闊)한 땅에서 조상(祖上) 대대(代代)로 살아온 “민족(民族)”의 풍속(風俗)이나 관습(慣習) 또는 사상(思想) 등등을, 한반도(韓半島)라는 좁은 땅에 이식(移植)한다면 어찌 될까?』
초등학생(初等學生) 어린이들이 칠십(七十), 팔십(八十) 먹은 노인(老人)네 의복(衣服)을 입고 있는 모습과 같게 된다. 소위(所謂) 조국(祖國) 또는 선대(先代) 조상(祖上)들이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자(者)들이 무슨 얼어 죽을… …그래서 우리나라는 늘 정통성(正統性)이 결여(缺如)된, 사이비(似而非) 학자(學者)들로 넘쳐나는 것이다.
동양고전학(東洋古典學)을 연구(硏究)하시는 학자(學者)란 분들이 특히 그렇다. 우리들의 선대(先代) 조상(祖上)님네들이 “어느 땅에서 살았는가?”조차 알지 못하면서 옛 고전(古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 꼭 초등학생(初等學生) 어린이들이 칠십(七十), 팔십(八十)이 넘는 노인장(老人丈) 의복(衣服)을 입고 있는 모습과 같게 된다. 그 모습을 상상(想像)해보라! 얼마나 웃기는 모습이겠는가!
특히 요즘 먹물께나 흘렸다는 젊은 학자(學者)들이 그렇다. 유교(儒敎)가 어쩌니 무속(巫俗)이 어쩌니 하면서 입으로만 작업(作業)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열도(列島) 일본(日本)은 민간(民間)에서 전래(傳來)되는 무속신앙(巫俗信仰) 또는 그들이 모시는 신(神)의 종류(種類)가 일천(一千)도 넘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일본을 무속국가(巫俗國家) 또는 미신국가(迷信國家)라고 부르고 있는가?
유교(儒敎)가 왜 태어났으며, 그 유교(儒敎)가 무엇 때문에 한(漢) 나라에서 꽃을 피웠는가?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가 그 땅의 이야기요, 그 땅이 아닌 곳에서는 그 이야기는 또 다르게 전개(展開)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걸 무인지경(無人之境), 무주공산(無主空山)과 같았던 반도(半島) 땅에 옮겨 놓으면 어찌 될 것 같은가?
○ 『보령(保寧)』은, 오늘날의 충청도(忠淸道) 서(西)쪽 한 모퉁이에 있는데, 북(北)쪽은 홍성(洪城: 洪州), 남(南)쪽은 서천(舒川), 동(東)쪽은 청양군(靑陽郡)과 맞닿고, 서(西)쪽은 모두 바다에 임하는 ‘농촌(農村)과 어촌(漁村)’이 함께 하는 반도(半島) 땅 서해안(西海岸)의 이곳저곳 모두와 같은 형편(形便)을 가진 땅(地)으로 특이(特異)함이 없는 그저 그런 땅이다.
➨ 이곳이 충청도(忠淸道) 즉(卽)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에 속해있었다는 그 자체(自體)가 넌센스다. 충주(忠州)와 청주(淸州)는, 한 울타리 안에 있고, 서해(西海)를 끼고 있는 많은 고을은,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땅에 있기 때문이다.
특이(特異)함이 전혀 없는 그런 흔한 땅에 “보령(保寧)”이라는 지명(地名)에 대한 전고(典故)가 전혀 발견(發見)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령(保寧)”이란 지명(地名)이 탄생(誕生)된 것인가? 또 당시(當時)의 봉건왕조(封建王朝)하에서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던 ‘황제(皇帝)’만의 전용어(專用語)라고 할 수 있는 “만세(萬歲)”를 지명(地名) 앞에 붙여 “만세(萬歲) 보령(保寧)”이라고 했다는 것이 특이(特異)한 것이다. 전례(典例)가 없기 때문이다.
즉(卽) ‘만세보령(萬歲保寧)’이란 말은 : [평안(平安)하게 만대(萬代)를 보존(保存)한다. 또는 만대(萬代)를 평안(平安)하게 보존(保存)하라]는 뜻이다. 황제(皇帝) 체제(體制)하에서의 최고(最高)의 찬사(讚辭)자, 찬미(讚美)다.
이걸 지명(地名)으로 만들면 : 『보령(保寧)이여, 영원(永遠)하라』는 뜻이 된다. 최고(最高), 최대(最大)의 찬미(讚美)이자 수식어(修飾語)랄 수 있을 것이다.
옛적의 전례(典例)에 따르면 : 『‘황제(皇帝)나 천자(天子)’에게나 ‘안녕(安寧), 태평(太平)’과 함께 붙일 수 있는 것이라면 분명(分明) ‘황제(皇帝)나 천자(天子)’와 직접적(直接的)인 관련(關聯)이 있는 곳이고, “신주(神州)”와 같은 곳이다.』 라고 해도 틀림 말이 아닐 것 같다.
이곳 ‘보령(保寧)’ 땅은, 해방(解放) 이후(以後), ‘대천(大川) 해수욕장(海水浴場)’으로 알려져 있을 뿐,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농어촌(農漁村) 땅인 이곳에 1970년대 들어 석탄(石炭)이 채굴(採掘)되면서 엄청난 환경파괴(環境破壞)가 이루어졌고, 하루아침에 부(富)를 쌓은 자(者), 하루아침에 패가망신(敗家亡身)한 자(者)가 속출(續出)하기도 했고, 채굴(採掘) 중 다수(多數)의 광부(鑛夫)들이 생(生)을 달리했고, 폐광(廢鑛) 이후(以後)엔 또 많은 광부(鑛夫)들이 직업병(職業病)으로 고생(苦生)하다가 숨을 거둔 전형적(典型的)인 탄광촌(炭鑛村)으로 온통 석탄(石炭) 가루를 날리기도 했던 곳으로, 지금은 ‘보령(保寧) 댐’으로 인해 다시 많은 곳이 수몰(水沒)된 곳으로, 반도(半島) 땅의 농촌(農村)과 어촌(漁村)의 전형적(典型的)인 마을, 촌락(村落)이었다.
‘보령(保寧)’ 땅은, 서(西)쪽 모두가 바다(海)다. 즉(卽) ‘서북(西北)쪽도 바다(海)’요, ‘서남(西南)쪽도 바다(海)’로 바로 “서해(西海)”에 닿는다.
➨ 지명(地名) 앞에 ‘만세(萬歲)’라는 문구(文句)를 넣어 “만세(萬歲) 보령(保寧)”이라고 부르는 ‘예(例)’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예(例)인 것 같다. 또 “만세(萬歲)면 만세(萬歲)지, 만세(萬世)는 또 뭘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만세보령문화제(萬歲保寧文化祭)’를 찾아보면 :
〈의의와 평가 : 지자체에서 시민 문화축제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행사로서 만세보령문화제는 이 지역의 고유한 역사를 살리기 위해 머드축제 등을 지속적으로 포함시키거나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체육대회 등을 열고 있다. “만세보령문화제(萬歲保寧文化祭)의 지역적 정체성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역사적(歷史的) 고증작업(考證作業)을 거쳐 만세보령풍어기원제 등 의식행사나 기타 유무형의 문화재들과 연계하는 작업이 더욱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설명(說明)이 뒤따르고 있다는 것은 “만세(萬歲) 보령(保寧)”이라고 지칭(指稱)하는 연유(緣由)나 기원(起源) 등에 의문(疑問), 즉 문제(問題)가 있다는 뜻이다. 곧 더 많은 연구(硏究)와 역사적(歷史的) 고증(考證) 작업(作業)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향토사학(鄕土史學)의 문제(問題)가 바로 이런 것이다.
○ 설날 즈음에 보령(保寧) 남포(藍浦) 바닷가에 있는 동백정(冬栢亭? 동백관)에 가족(家族)과 함께 야영장(野營場)에 갔다가 이런 “문구(文句)”의 광고판(廣告板)을 보니, 참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정말 궁금해졌다. 과연(果然) 무엇이 진실(眞實)일까?
더불어 2차 답사(踏査)를 마쳤다. 그리고 이에 대해 기록(記錄)을 찾아본 것이다. 오해(誤解) 없으시길 부탁드린다.
‘보령(保寧)’ 땅은,
(1) 대동여지지(大東輿地志)에서는 : 《‘군(郡)의 이름(郡名)은 신읍(新邑)’이다》라 했고,
(2) 世宗實錄地理志 : 《保寧縣 : 本百濟新村縣,新羅改爲新邑縣.中略.四境,東距洪州二十四里,西距大海十三里,南距藍浦二十一里,北距結城二十二里. : 본래 백제(百濟)의 신촌현(新村縣)인데, 신라(新羅)에서 신읍현(新邑縣)으로 고쳤다. 사방 경계는 동(東)쪽으로 홍주(洪州)에 이르기 24리, 서(西)쪽으로 대해(大海)에 이르기 13리, 남(南)쪽으로 남포(藍浦)에 이르기 21리, 북(北)쪽으로 결성(結城)에 이르기 22리이다. 戶三百六十五,口一千二百十三. 土姓一, 崔; 亡姓三, 張、任、李; 村姓四, 文、陳、兪、邢。: 호수가 3백 65호요, 인구가 1천 2백 13명이다. 토성(土姓)이 하나이니, 최(崔)요, 망성(亡姓)이 셋이니, 장(張)·임(任)·이(李)요, 촌성(村姓)이 4이니, 문(文)·진(陳)·유(兪)·나(那)이다.》라고 하였다.
➊ “동(東)쪽으로 홍주(洪州)에 24리”라고 하였으나, 지도(地圖)를 놓고 보니, 보령(保寧) 땅 어느 곳에서 봐도 ‘홍주(洪州)는 북(北)’쪽이지 ‘동(東)쪽이 될 수 없다.’ 【보령(保寧)의 동(東)쪽은 계룡산(鷄龍山), 대전(大田) 쪽이다.】
➋ 당시(當時) 세종대왕(世宗大王) 때의 보령현(保寧縣)은, 무인지경(無人之境),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는 이야기다. 365호에, 1,213인의 백성(百姓)들이 오순도순 살았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현(縣)은 웃기는 얘기고, 그 땅에 몇 개의 조그마한 촌락(村落)만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원전(紀元前)의 삼한(三韓)이나 그 이전(以前)엔 누구도 이곳 땅에 살고 있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도 향토사학(鄕土史學)에서는 이곳에 마한(馬韓)의 54개 나라 중에 한 국가(國家)가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백성(百姓) 없는 국가(國家)도 존재(存在)하나?』 참 답답한 얘기다.
➌ 《土姓一, 崔; 亡姓三, 張、任、李; 村姓四, 文、陳、兪、邢。: 토성(土姓)이 하나이니, 최(崔)요, 망성(亡姓)이 셋이니, 장(張)·임(任)·이(李)요, 촌성(村姓)이 4이니, 문(文)·진(陳)·유(兪)·나(那)이다.》라고 한 것을 이해(理解) 할 수 있겠는가?
(3) 新增東國輿地勝覽 保寧縣 : 《군명(郡名)이 ‘신촌(新村)ㆍ신읍(新邑)’이다》라 했으며,
(4)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보령(保寧) : 《백제(百濟)의 신촌현(新村縣)【사촌(沙村)】인데, 신라(新羅) 때 ‘신읍(新邑)’으로 개명(改名), 고려(高麗) 때 보령(保寧)으로 고쳤으며, 효종 임진년【3년 壬辰年 1,652】에 부(府)로 승격(昇格)시켰다가 을미년(乙未年)에 도로 강등(降等)시켰는데, 8면(面),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3리이다.》라고 하였는데,
‘신촌(新村)이니 신읍(新邑)’이니 하는 말은, ‘새롭게 또는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라는 뜻밖에 없다. ‘보령(保寧) 땅’을 상징(象徵)하는 그 무엇도 없다. 그저 새롭게, 새로운 마을이라는 뜻밖에 말이다. 지명(地名)이란 대부분 그 전고(典故) 또는 특색(特色), 산천(山川) 지세(地勢) 등과 연관(聯關)되기 마련인데, 이곳 보령(保寧)이란 지명(地名)은 엉뚱한 곳에, 생뚱맞는 지명(地名)일 뿐이다.
(5)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 《建置沿革 : 本百濟新村縣。一云沙村。新羅景德王時,改新邑,爲潔城郡領縣。高麗初,改保寧。郡名 : 新邑. : 본래 백제(百濟) 신촌현(新村縣)이다. 또 사촌(沙村)이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고쳐 신읍(新邑)이라고 하였다. 고려(高麗) 초에 고쳐서 보령(保寧)이라 하였다. 군명(郡名) : 신읍(新邑)이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忠淸道 右道 公州鎭 / 公州牧 : 차현(車峴) : 차령(車嶺)이라고도 부른다. 주 북쪽 57리에 있다. 직산(稷山)의 성거산(聖居山) 남쪽에서 천안(天安)과 전의(全義)의 경계를 거쳐 서쪽으로 뻗어나가 이 고개가 된다. 또 서쪽으로 이어져 각흘산(角屹山)과 무성산 등이 되고, 보령현(保寧縣) 경계에 이르러 오서산(烏棲山)이 되며, 바닷가에서 멈춘다. 이곳은 바로 대로(大路)의 요해처로서, 고려 태조의 〈훈요(訓要)〉에서 “차현(車峴) 남쪽은 산형(山形)과 지세(地勢)가 모두 등지고 달린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 그렇다면 보령현(保寧縣)의 오서산(烏棲山) 남(南)쪽은 ‘차현(車峴) 이남(以南)’으로 “배반(背叛)의 기운(氣運)이 움트는 땅”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그곳의 인물(人物)들을 요직(要職)에 쓰지 말라고 했다는 고사(古事)가 태어난 곳이란 이야기다.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이게 반도(半島)의 보령(保寧) 땅인가?
그렇다면 풍수지리(風水地理)의 원조(元祖)라고 지칭(指稱)하시는 ‘도선국사(道詵國師)’님의 말씀은 뭔가? “만세영화지지(萬歲榮華之地)”가 “배반(背叛)의 기운(氣運)이 움트는 땅”인가? 이게 뭔 소린가? 【차현(車峴) 등과 관련(關聯)된 것은, 오늘의 주제(主題)가 아니므로 이것으로 마무리입니다.】
東國輿地志 3권 / 忠淸道 右道 洪州鎭 / 보령현(保寧縣) 객관(客館) : 무이정(撫夷亭) 중략(中略), 최부(崔溥)가 기문을 지어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북해에 표류하여 구월(甌越)에 정박하고, 강회(江淮)를 건너 북쪽으로 갔다. 지금 오성산(烏聖山) 등 여러 산을 보니 회계산(會稽山)이나 사명산(四明山)과 서로 비슷하다. 안면(安眠)의 형세는 마치 태주(台州)의 해문(海門)과 같고, 바다에 높이 솟은 고만도(高巒島)는 태호(太湖)의 포산(苞山)보다 나으니……”하였다. 崔溥作記曰:“余嘗漂溟渤,泊甌越,渡江淮而北也。今觀烏聖諸山與會稽、四明相似,安眠形勢如台州之海門,高巒峙海勝於太湖之苞山。云云.》
➨ 여기서 ‘포산(苞山)’이라 함은 ‘동정호(洞庭湖)와 태호(太湖)’의 서동(西東)에 있는 두 산(山)을 말하고 있는데, 이 산(山)들은 해발고도(海拔高度) 200∼300m로 수면(水面)에서 바라보면 우뚝 솟아 있는 것이다. 보령(保寧)시 앞바다에 높이 솟아 있는 고만도(高巒島)라는 섬은 해발고도(海拔高度)가 118m라고 하는데 포산(苞山)보다도 더 높다고 하였다. 118m가 더 높은 건가? 이게 높이 솟은 땅인가?
(6) 택리지(擇里志)【이중환(李重煥, 1690~1752)】에서는 : 《충청도(忠淸道)에서 보령(保寧) 땅은 산천(山川)이 가장 훌륭하고, 호수(湖水)와 산(山)의 경치(景致)가 아름답고 확 트여서 명승지(名勝地)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➊ 보령(保寧) 땅은, 『그 어디에도 ‘호수(湖水)’는 없다.』 다만 보령(保寧) 땅 북(北)쪽에 태안반도(泰安半島)의 천수만(淺水灣)이 있을 뿐이다. 천수만(淺水灣)은, 호수(湖水)가 아니라 바다(海)다. ➋ 또 높은 산(山)은 없다. 다만 해발고도(海拔高度) 800m 이하의 성주산(聖住山)과 오서산(烏棲山) 등이 있고, 성주산(聖住山)은 그 골이 조금 깊다.
『보령(保寧)의 산천(山川)이 가장 훌륭하고, 호수(湖水)와 산(山)의 경치(景致)가 아름다워 명승지(名勝地)이다』라는 설명(說明)은, 참으로 민망(憫惘)한 이야기로 “반도(半島) 보령(保寧) 땅이 아니라 다른 땅에 있는 보령(保寧)을 설명(說明)하는 것이다.” 자연환경(自然環境)은,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 이렇게 향토(鄕土)에 관한 기록(記錄)을 접하면서 향토사학자(鄕土史學者)들은 뭔 생각을 하는 걸까? 진짜로 믿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그냥 믿는 척하는 것일까? 이것이 정말 궁금하다.
(7)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일성록(日省錄)’ 등에 의하면 : 보령현(保寧縣)은, 중조(中朝)【중앙(中央) 조정(朝庭)】의 신하(臣下) 또는 죄를 지은 죄인(罪人)들의 유배처(流配處)로써 유배지(流配地) 노릇을 했던 곳 중의 하나이다.
➨ 유배(流配)란 무엇인가? ‘귀양보내는 형벌(刑罰)’을 말하는 것이고, 귀양이란, 본시 귀향(歸鄕)을 말하는 것인데, “옛날 죄인을 먼 변방이나 외딴섬에 보내어 살게 하던 형벌을 말한다.” 또 도배(徒配) ·유배(流配) ·찬배(竄配) ·정배(定配) 등의 뜻으로 쓰였다. 당연(當然)히 자연환경(自然環境)이 아주 열악(劣惡)한 곳으로 유배(流配)를 보내는데, “만세영화지지(萬歲榮華之地)의 풍요(豐饒)로운 땅으로 죄인(罪人)들을 유배(流配) 보내겠는가?”
➨ 즉(卽) ‘보령현(保寧縣)’은, “만세영화지지(萬歲榮華之地)의 풍요(豐饒)로운 땅”이 아니었고, 자연환경(自然環境)이 열악(劣惡)한 유배지(流配地)로 적당(適當)했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증거(證據)는, 고려(高麗)의 최해(崔瀣)가 이곳으로 유배(流配)를 와 지은 시(詩) 구절(句節)에서 당시(當時)의 ‘보령(保寧)’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을 알려주고 있다. 즉(卽),
‘고려(高麗) 최해(崔瀣)’【1287(忠烈王 13)-1340년(忠惠王 復位 1)】가 이 고을로 유배(流配)되어 살았는데, 그 시(詩)에서 이르기를(曰) : 《朅來孤嶼上, 旅食度晨昏 : 외로운 작은 섬에 오고 가면서, 나그네살이로 아침저녁을 보낸다. 婦矮行如鼈, 民窮貌似猿 : 키 작은 아낙네들 걸음걸이 흡사 자라 같고, 곤궁한 백성들은 얼굴이 원숭이 비슷하네. 俗雖乖習尙, 禮或識卑尊 : 풍속은 비록 육지와 다르지만, 예절만은 더러 존비를 분별하네. 日落醒煙合, 秋深瘴氣溫 : 해지자 비린 연기 모여 자욱하고, 가을 깊었는데도 장기(瘴氣)는 후끈하다. 중략(中略)》이라고 하였다.
즉(卽) 이곳 ‘보령(保寧)’ 땅은, 『“아열대성(亞熱帶性) 기후대(氣候帶)”를 가지고 있는 땅이다』라는 이야기다. 반도(半島) 땅은 그 어디에서도 ‘장기(瘴氣)’를 논(論)할 수 있는 지세(地勢)나 기후대(氣候帶)를 가진 땅이 없다.
‘장기(瘴氣)는 장독(瘴毒)’을 말하는 것으로, 대륙(大陸)의 장강(長江) 유역(流域) 및 그 이남(以南) 지방의 아열대성(亞熱帶性) 기후(氣候)를 가진 땅에서 발병(發病)하는 대표적(代表的)인 풍토병(風土病)이다. 이걸 한반도(韓半島)로 옮겨 놓으면, ‘멍청이[聐] 중의 멍청이[聐]가 되는 것이다.’
(8) ‘인터넷’ 등지에 떠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 즉(卽) ‘충청수영성 내에는 여러 가지 시설물이 있다. “임란(壬亂) 당시와 연관되는 곳은 영보정과 계금청덕비”를 설명(說明)하는 글 중에서 : 「임진왜란(壬辰倭亂) 후기(後期) 조선(朝鮮)에 들어왔던 명(明) 장수 장양상(張良相)은, 이곳 영보정에 머물면서 조선의 영보정은 중국의 악양루(岳陽樓)보다 낫다고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에 입국했던 명(明) 장수 가상(賈祥)은 영보정은 중국의 악양루(岳陽樓), 황학루(黃鶴樓)보다 낫다고 평가했다. 이들이 남긴 시(詩)가 현재 “신안현지”【신안(新安)은 보령(保寧)의 옛 이름】에 실려 있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그러나,
“신안(新安)”이 ‘보령(保寧)의 옛 이름’이라고 사족[蛇足 : 화사첨족畫蛇添足]을 달아 놓았는데, 위의 “(1)+(2)+(3)+(4)+(5)+(6)” 등의 지리지(地理志) 어느 곳에서도 『“신안”이 “보령(保寧)”의 옛 이름이라는 설명(說明)이 없다.』
➨『증보신안지』라는 읍지(邑誌)는, 1,748년 보령현감(保寧縣監)을 지낸 ‘정권(鄭權, 1692-1757)’이 한양(漢陽)에서 편찬한 ‘보령현(保寧縣) 최초의 읍지(邑志)’라고 하는데, 그 진위여부(眞僞與否)가 확인(確認)되지 않은 1,907년 이전(以前)에 필사(筆寫)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출처불명(出處不明)의 읍지(邑志)라고 전해진다. 이건 진짜 웃기는 얘기다.
여기에서『‘신안(新安)’은 ‘뉴성(杻城)’과 함께 보령(保寧)의 별호(別號)이다』라고 밝히고 있다는 것인데, 그 유래(由來) 또는 연유(緣由)가 밝혀진 것이 없다. 문제(問題)는 “신안(信安)”이라는 지명(地名)이 뭐냐는 것이다. “보령(保寧)의 옛 이름”이라는 건가?
➨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 있다는 “뉴성(杻城)이 보령의 옛 별호(別號)였다”는 것은 “큰 오류(誤謬) 즉(卽) 잘못이다.”다. 왜냐하면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서는 “면천군(沔川郡)” 조(條)에서 설명(說明)하기를 『혜성군(槥城郡)』에 대한 “혜(槥)”자(字)를 『추(橻) 또는 뉴(杻) 자로 세속(世俗)에서 쓰나 이는 잘못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즉(卽), 추성군(橻城郡)이니 뉴성(杻城)이니 하는 말은, “혜성군(槥城郡)”의 오류(誤謬)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혜성군(槥城郡)은, 면천군(沔川郡)으로 오늘의 당진시(唐津市)다.
➨ 輿地圖書 上 / 忠淸道 保寧 郡名 / 新村, 新邑, 杻城, 新安, 新城 : 여지도(輿地圖)는 1757년∼1765년에 걸쳐 만들어진 전국 지방지, 읍지(邑志)라고 한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여지도서(輿地圖書)】 이것으로 보면, 위에서 말하는 “1748년 보령현감(保寧縣監)을 지낸 정권(鄭權, 1692-1757)이 한양(漢陽)에서 편찬한 보령현(保寧縣) 최초의 읍지(邑誌)”와 같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시기(時期)적으로 겹치기 때문이다. 또 풍속(風俗) 편에서 이르기를 : 輿地圖書 : 《風俗 ; 本業耕織, 不務奢靡。 : 본업(本業)은 농사와 길쌈하는 것이다. 사치(奢靡: 사미)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먹고 살기에도 힘든 곤궁(困窮)한 백성(百姓)들이 사치(奢侈)할 여유(餘裕)가 있을까? “서(西)쪽과 서북(西北), 서남(西南)쪽” 바닷가 백성(百姓)들도 바닷가에서 물고기와 해산물(海産物)을 채취(採取)하지 않고, 바닷속에서 농사(農事)를 짓고 길쌈을 했다는 말일까? “진짜 웃기는, 뭐 짜장 같은 ‘뭐’ 같은 이야기다”
➤ 여지도(輿地圖)는, 1757년∼1765년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일제(日帝)에 의해 편집(編輯)되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증명(證明)한다. 3백 년도 되지 않은 시간(時間), 반도(半島) 땅에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있었다는 것일까? 즉(卽) 엉터리 설명(說明)이기 때문이다.
ⓐ 高麗史節要 卷4 靖宗容惠大王 靖宗 七年 1월 [1041년 1월 미상(음)] : 상주 관내의 민전을 다시 양전하다 : 戶部奏, “尙州管內中牟縣洪州管內杻城郡長湍縣管內臨津臨江等縣民田多寡膏瘠不均. 請遣使量之, 均其食役.” 從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홍보[韓洪甫] : 추성(橻城) [高麗史]
ⓒ 국역고려사 : 한홍보[韓洪甫] : 추성(橻城:唐津郡)인이다.[韓洪甫, 橻城人] [高麗史]
ⓓ 高麗史節要 17권 / 高宗安孝大王 四 己未 46년(1,259)[송 개경(開慶) 원년ㆍ몽고 헌종 9년] : 겨울 10월에 야속달의 사자 한홍보(韓洪甫)가 왔다. 본래 우리나라 추성(杻城) 사람이다【冬十月,也速達使者韓洪甫來,洪甫本杻城人】
➨ 추(橻) : ‘고을 이름 추(橻)’ 곧 “면천군(沔川郡) 출신(出身)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輿地圖書 上 또는 증보신안지’에서 말하는 ‘유성(杻城)’등이 ‘보령(保寧)’의 옛 이름이었다는 말은, 큰 오류(誤謬)이자 거짓말이 된다.》 이는 ‘지명(地名)’을 이동(移動)시킬 때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즉(卽) 반도(半島) 땅의 지명(地名)은 모두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때의 오류(誤謬)였다는 뜻이다.
ⓔ 동국여지지 제3권 / 충청도(忠淸道) 우도(右道) / 홍주진(洪州鎭) 면천군〔沔川郡〕: 군명(郡名) : 혜군(槥郡), 혜성(槥城), 【‘혜(槥)’-세속(世俗)에서는 ‘추(橻)’자로 쓴다. 혹 ‘유(杻)’ 자로 쓰기도 하는데, 잘못이다.】
명환(名宦) 신라(新羅) : 김준(金俊) 진성왕(眞聖王) 때에 추성군태수(橻城郡太守)가 되었다.
ⓕ 新增東國輿地勝覽 : 면천군(沔川郡) : 郡名 : 혜군(槥郡)ㆍ혜성(槥城) 【혜(槥)를 우리나라 속자(俗字)로 추(橻)로 쓰기도 하고, 혹은 유(杻)로 쓰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마산(馬山)ㆍ해종(海宗)ㆍ면주(沔州). ➨ 명환(名宦) / 신라(新羅) : 김준(金俊) 진성왕(眞聖王) 때에 혜성군 태수(槥城郡太守) 김준(金峻)을 고주사(告奏使)에 임명하여 보냈다.
※ 추성군(橻城郡)은, “혜성군(槥城郡)=면천군(沔川郡)”을 말하는 것인데, 즉(卽) 〈‘혜(槥)’-세속(世俗)에서는 ‘추(橻)’자로 쓴다. 혹 ‘유(杻)’ 자로 쓰기도 하는데,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혜성군(槥城郡)이 맞다”는 얘기다.
➊ 신안현(新安縣) : 仁祖實錄 24권, 인조(仁祖) 9년 4월 8일 신해[1631년 명 숭정(崇禎) 4년] : [이조에서 역적의 출신지인 거창과 성주의 처리 문제에 대해 아뢰다] : 이조가 아뢰기를 :《"역적 여후망(呂後望)은 거창(居昌) 사람이고 박흔(朴訢)은 성주(星州) 사람이니, 그 고을 수령을 파직하고 읍호(邑號)를 강등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성주(星州)는 일찍이 혼조 때에 신안현(新安縣)이라고 하였지만 지금 그 읍호를 그대로 쓸 필요없이 성산현(星山縣)으로 내려야 온당하겠습니다. 그러나 거창의 경우는 이름은 현이지만 실은 영남우도의 큰 고을로서 물산이 풍부하고 지역이 넓어 합병하기가 곤란한데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거창 또한 혁파하지 말라." : 辛亥/吏曹啓曰: "逆賊呂後望, 居昌人, 朴訢, 星州人。 當罷其守令, 降其邑號, 而星州曾在昏朝, 爲新安縣, 今不必仍用其號, 宜降爲星山縣。 居昌則名雖爲縣, 實爲嶺右之巨邑, 物衆地大, 難於合幷, 何以處之?" 答曰: "依啓。 居昌亦勿革罷"》하였다. 【필자(筆者) 주(注) : “거창(居昌)의 경우는 이름은 현(縣)이지만 실은 영남우도(嶺南右道)의 큰 고을로서 물산(物産)이 풍부(豐富)하고 지역이 넓어(地大)”라는 말도 참 웃기는 이야기다. 】
➨ 신안현(新安縣) : 경상도(慶尙道) 성주목(星州牧)의 군명(郡名)이었다.
➋ 신안군(信安郡)은 : 「閬中市(낭중시)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편을 보면 : 6세기에 신안군(信安郡)이라 했고, 그 후 후당(後唐) 때는 보령군(保寧軍)으로, 원(元) 이후 민국(民國) 초까지도 보령부(保寧府)라고 불렸던 곳인데, 사천분지(四川盆地)의 북부(北部)로 가릉강(嘉陵江) 중류(中流)에 있는 도시(都市)로, 閬中土地肥沃,氣候溫和,雨量充沛,光照適度,屬於副熱帶季風氣候,動植物及各種自然資源豐富」라고 하였으며,
또한 보령현(保寧縣)은, 성도부(成都府)에 속한 현(縣)의 이름이다. 위주(威州)라고도 했다.
➨➨➨ 정확(正確)하게 밝혀지지도 않은, 학계(學界)에서조차 인정(認定)하지 않는, 불투명(不透明)한 필사(筆寫)본의 내용(內容)을 가지고 “지방자치단체(地方自治團體)”가 “자신들이 속해 있는 땅의 이름”을 가지고 시민(市民)들을 상대(相對)로 펼치는 행정(行政)이라면 뭔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이야기다.
(9) 현재(現在) ‘보령시(保寧市)’ 지방자치단체(地方自治團體)에서는 : “만세(萬世) 또는 만세(萬歲) 보령(保寧)”이라는 문구(文句)를 내걸고 “보령(保寧)” 알리기에 분주한 것을 볼 수 있다. 헌 데 뭔가? 만세(萬歲)인가? 또는 만세(萬世)인가? 이것 또한 1,988년 이후(以後)부터라니, 참 기막힌 이야기다.
‘지방(地方) 알리기’가 아무리 중요(重要)하다 해도 사실확인(事實確認)부터 해야 되지 않을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만세(萬歲) 보령(保寧)’이라는 지명은 1586년(선조 19)에 호국공신 안대진(安大進, 1561~1604)에게 내린 교지(敎旨)의 “진충보국(盡忠報國) 만세보령(萬歲保寧)”이라는 기록(記錄)에서 유래(由來)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說明)한다.
즉(卽) 확실(確實)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유추(類推)한다는 말이다. “만세(萬歲) 보령(保寧)”이란 무슨 뜻을 의미(意味)하는 걸까? 이곳이 오늘날의 ‘충청도(忠淸道) 보령(保寧)’ 땅일까?
➤➤➤ 그러함에도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어떤 지리지(地理志)에서도 이를 기록(記錄)해 놓은 곳이 없다. 그저 그렇게 유추(類推), 추측(推測)한다는 것일까? “진충보국(盡忠報國) 만세보령(萬歲保寧)”이라면 두고두고 후세(後世)인들에게 널리 알려야 할 훌륭한 일이 아니었던가? 헌데 오죽하면 “고전번역원의 DB”에서조차 검색(檢索)되지 않는 단어(單語)다.
일설(一說)에는 ‘그 교지(敎旨)의 글씨가 후대(後代)에 따로 써진 것이다’라는 주장(主張)이 있을 정도로 진위여부(眞僞與否)조차 불분명(不分明)한 것이다.
『만세(萬歲)』란 말 그대로 “만년(萬年)”을 말하는 것으로 “영원(永遠)히 사는 것, 또는 번영(繁榮)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고, “만세(萬歲)란 말은, 황제(皇帝)에게나 가능(可能)한 말로 만만세(萬萬歲)를 외칠 수 있는데, 이건 만세(萬歲)를 강조(强調)하는 말이다.” 견주어 말하면 제후(諸侯)는, 천천세(千千歲)일 뿐이며,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하면 : 반도(半島) 땅의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는, ‘천천세(千千歲), 전하(殿下)’의 왕조(王朝)였을 뿐이다.
하물며, 이러한 ‘천천세(千千歲), 전하(殿下)의 조정(朝廷)’에서 “만세(萬歲)”라는 말은,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봉건왕조(封建王朝) 때로 보면, 황제(皇帝)를 모독(冒瀆)하는 말과 같다.
반도(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죽었다 다시 태어나 회귀(回歸)해도 제후국(諸侯國)으로, “천천세(千千歲)”의 전하(殿下) 신세(身世)를 면할 수 없다. 이런 천천세(千千歲) 나라에서 특정지역(特定地域)을 골라 “만세(萬歲) 보령(保寧)”이라고 했다면 “보령(保寧)”이란 곳은 황제(皇帝)가 사는 신주(神州)였다는 말과 같다. 도대체 뭔 “만세(萬歲)”란 말일까?
곧 “만세(萬歲) 보령(保寧)”이라는 “별호(別號)”까지 내릴 정도였다고 하면 :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當時)에 보령(保寧) 땅에서 출생(出生)하고 자란 인물(人物)이 전국(全國) 각지(各地)의 왜군(倭軍)을 무찔러 나라를 구(救)한 구국(救國) 영웅(英雄)의 출생지(出生地)였다고 한다면 그 땅을 일컬어 별호(別號)를 하사(下賜)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별호(別號)를 내린 선조대왕(宣祖大王)은, 황제(皇帝)의 신분(身分)이어야 이런 “별호(別號)”를 하사(下賜)할 수 있을 것이다.
➤ “보령(保寧) 땅”에 상륙한 명군(明軍)과 그 장수(將帥)에게 내린 것도 아니요, 그 명군(明軍)을 안내한 ‘접반사(接伴使)에게 내렸다.’는 것은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이고, 황당(荒唐)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예(例)를 들어보자. 즉(卽) 東史綱目 7하 정사(丁巳)년 文宗 31년[송 신종 희령 10, 요 도종 태강 3, 1077] 조에 따르면 :
《춘2월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관악(觀樂)하였다. 중광전(重光殿)에 연등회를 특설하여 무릇 3일 동안 계속하였다. 【안】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문종 27년 2월 교방(敎坊)에서 여제자 진경(眞卿) 등이 전한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를 연등회에 쓰도록 주청하니 이에 좇았다. 11월 팔관회에서 교방 여제자 초영(楚英)이 새로 전래한 포구락(抛毬樂)을 연주하였다. 이해(31년) 2월의 연등 때에 왕이 중광전에 임어하여 가무를 관람하였는데, 초영 등이 왕모대가무(王母隊歌舞)를 연주하였다. 이 가무는 1대(隊)가 55 인이고 춤으로 네 글자를 만들어내는데, ‘군왕만세(君王萬歲)’ㆍ‘천하태평(天下太平)’이 되었다.”》고 설명(說明)한다.
이때의 『고려(高麗)는 황제국(皇帝國)이었고, 당시(當時)의 고려(高麗) 군왕(君王)은 짐(朕) 즉(卽) 천자(天子)【황제(皇帝)』였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 東史綱目 7 下 丁巳年 文宗 31년 춘(春) 2월 조 [이미지 출처 : 고전번역원DB]
(10)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16 地理典故 산천의 형승(形勝) : 보령(保寧)의 영보정(永保亭) : 최고(最高)의 명승지(名勝地)라고 일컫는다. 박은(朴誾)의 시에, 《땅은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려는 날개와 같고 : 地如拍拍將飛翼 / 누각은 흔들흔들 매지 않은 배와 같다 : 樓似搖搖不繫篷》고 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11) 忠南 保寧 성주산(聖住山)(677m) 【인터넷[Inter net] 등에 떠도는 이야기에 의하면】
《성주산(聖住山)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의 발자취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풍수지리, 도참사상의 선조(先祖)로 알려진 신라(新羅)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보령(保寧)지방에 대해 말하기를 : "오성지간(嗚聖之間)에 만세영화지지가 있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오서산(烏棲山)과 성주산(聖住山) 간의 땅에 만대(萬代)에 걸쳐 재난(災難) 없이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하였으니, "만세보령(萬歲保寧)"이라는 말이 회자(膾炙)된 것이 아닐까 추측(推測)된다.【‘嗚聖之間’이란 : 오서산(烏棲山)과 성주산(聖住山) 사이의 아주 작은 땅을 말한다.】》고 하였다.
아마도 신라(新羅) 때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생존(生存)해 있을 당시에, 이 보령(保寧) 땅은, 단 1명의 백성(百姓)도 없었을 것으로 추측(推測)된다. 왜냐하면 이후 5백 년이 지나간 뒤의 보령(保寧) 땅에 “호수가 3백 65호요, 인구가 1천 2백 13명”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 이곳 보령(保寧) 땅의 ‘성주산(聖住山)과 오서산(烏棲山)’을 직접 답사(踏査)해보면 : 아주 조그만 시골 농촌(農村)으로 산(山)과 산(山)의 거리가 수십(數十) 리에 불과(不過)한 곳으로, 비옥(肥沃)한 땅도 별로 없으며, 매우 메마른 땅이 많았던 곳이다. 그 사이에는 여러 야산(野山)과 논과 밭, 마을이 산재(散在)해 있는데, 이런 풍경(風景)은 반도(半島) 땅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별 볼일 땅이다.
이곳을 두고 “오성지간(嗚聖之間)에 만세영화지지(萬歲榮華之地)가 있다.”고 한다면 그곳 주민(住民)들은 뭐라고 답(答)할까? 성주산(聖住山)과 오서산(烏棲山) 사이의 땅에는 그 흔한 야산(野山)·촌락(村落)·전답(田畓)·시내(川) 등(等)으로 이루어진 그저 그런 땅이 있는 아주 조그마한 땅이다. 이러한 특이(特異)함이 전혀 없는 이 땅에 “만세영화지지(萬歲榮華之地)가 있다.”라고 했다면, 풍수지리(風水地理)를 좋아했던 조상(祖上)님들이 이 땅을 그대로 놔두었을까?
과거(過去)의 이 땅을 설명(說明)하는 아주 적절(適切)한 이야기는, 『고려(高麗) 최해(崔瀣)가 일찍이 이 고을로 유배되어 살았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 《朅來孤嶼上, 旅食度晨昏 : 외로운 작은 섬에 오고 가면서, 나그네로 아침저녁을 보낸다 婦矮行如鼈, 民窮貌似猿 : 키 작은 아낙네들 걸음걸이 흡사 자라 같고, 곤궁한 백성들은 얼굴이 원숭이 비슷하네. 俗雖乖習尙, 禮或識卑尊 : 풍속은 비록 육지와 다르지만, 예절만은 더러 존비(尊卑)를 분별하네. 日落醒煙合, 秋深瘴氣溫 : 해지자 비린 연기 모여 자욱하고, 가을 깊었는데도 장기(瘴氣)는 후끈하다.》라고 한 것이다.
➤ 수차(數次) 왜구(倭寇)에 침탈(侵奪)당하고, 또 왜군(倭軍)에 짓밟힌 이곳 ‘땅’이, 풍토병(風土病)으로 ‘장기(瘴氣)=장독(瘴毒)’이 만연(蔓延)한 이 땅을 가리켜 “만세영화지지(萬歲榮華之地)”라고 한다면 얼마나 웃기는 얘긴가! 이곳은 지금도 그저 흔하디흔한 그저 그런 땅이다. 누가 이를 “만세영화지지(萬歲榮華之地)가 있다.”라고 했을까?
‘유배지(流配地)’가 ‘만세영화지지(萬歲榮華之地)’가 될 수 있을까? ‘장기(瘴氣)=장독(瘴毒)’이 만연(蔓延)한 이곳 땅은, 유배지(流配地)로써는 안성맞춤이겠지만, ‘만세영화지지(萬歲榮華之地)’가 될 수 없음은 당연(當然)한 이야기다. 이건 “다른 곳의 보령(保寧) 땅”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반도(半島)’ 땅은, 수천(數千) 년 변할 것이 없는 땅에 속한다. “신라(新羅) 때나, 고려(高麗) 때나, 조선왕조(朝鮮王朝) 시절(時節)이나 변함이 없는 그런 땅이었다는 뜻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또는 대명률(大明律)’등에 의하면 : 유배(流配)는 2 천리(千里), 2천 5 백리(百里), 3 천리(千里) 등으로 등급(等級)이 나누어져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어재연(魚在淵) [1823(純祖 23)~1871(高宗 8)]의 예(例)로 보면 : “이에 대한 형벌로 관직을 모두 빼앗고 장형 1백 대에 대해 돈으로 바치고 한양(漢陽)에서 3 천리(千里) 밖으로 유배를 보냈어야 했다고 전해진다.” [출처 : 나무위키]』
이런 예(例)는 검색어(檢索語)로 누구든지 관심(關心)만 있다면 직접 찾아볼 수 있다. “즉 한양(漢陽)에서 3 천리(千里) 밖(外)에도 조선(朝鮮)의 땅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걸 반도(半島) 땅에 맞춰 넣으려 ‘몇 백리(百里)에서 1 천리(千里) 정도로 고쳐 이용(利用)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건 왜곡(歪曲)이요, 중대(重大)한 오류(誤謬)다.’
오늘날의 ‘보령시(保寧市)’에서는 : 『기록(記錄)으로는 1,586년[宣祖 19년이다] 선조(先祖)가 안대진(安大進, 1561~1604)에게 내린 교지에 적힌 "진충보국(盡忠報國) 만세보령(萬歲保寧)"에서도 확인되거니와 현재 보령시는 지역 통합브랜드로서 '만세보령'을 공식화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지만 이는 그저 홍보(弘報)용으로 자치단체(自治團體)의 선전(宣傳)일 뿐이다.
➨ 아마도 “宣武原從功臣錄, 扈聖原從功臣錄, 淸難原從功臣錄 : 즉(卽) 일만임란구국공신록(一萬壬亂救國功臣錄(宣武ㆍ扈聖ㆍ淸難)”에서 언급하는 것들을 말하는 것 같은데, ‘번역주관기관 : 광주안씨친목회’로써 광주 안씨(安氏) 종친들이 선조(先祖)들의 행적을 기념키 위해 편찬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근거(根據)로 했다는 말은, 야사(野史)일 뿐이며, 정사(正史)와는 그 성격(性格)이 전혀 다르다.
그런데 또 이를 “만세(萬世)”라고도 사용(使用)한다고 한다. 도대체 뭔 일일까? “만세(萬歲)가? 만세(萬世)인가?” 그렇다면 본래(本來) "진충보국(盡忠報國) 만세보령(萬歲保寧)"과는 관계(關係)가 없다는 뜻일까? 참 알 수 없는 이야기다.
➤ 설사(設使) 안대진(安大進, 1561~1604)에게 교지(敎旨)를 내렸다고 치자. 왜 "진충보국(盡忠報國) 만세보령(萬歲保寧)"인가? 개인(個人)의 교지(敎旨)에 말이다.
“진충보국((盡忠報國) 만세보령(萬歲保寧)”이란, “나라의 은혜(恩惠)를 갚거나, 나라를 위(爲)하여 충성(忠誠)을 다하였으니, 보령(保寧)은 영원(永遠)하라”는 뜻일 게다. 이건 개인(個人)에게 내리는 교지(敎旨)가 아니라 “보령(保寧)”이라는 땅을 위해 내리는 교지(敎旨)일 것이 명백(明白)하지만, 이때 ‘보령(保寧)’에서 뭔 일을 했다는 말일까?
한 일이라고는 ‘명군(明軍) 3,000여 명이 상륙(上陸)하여 왜군(倭軍)을 무찔렀다’는 것이고, 당시(當時)에 명(明)으로부터 출정(出征)한 명군(明軍)은, 조선(朝鮮) 각지(各地)에서 왜군(倭軍)을 몰아내기 위해 많은 전투(戰鬪)를 치룬 것 역시(亦是) 똑같다. “보령(保寧)” 땅에서만 벌어졌던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 당시(當時) 전함(戰艦) 수백(數百) 척에, 수군제독(水軍提督) 진린(陳璘) 휘하 1만3천여 병사들은 제(諸) 장수들과 부장(副將) 진잠(陳蠶), 등자룡(鄧子龍), 유격(遊擊) 마문환(馬文煥), 계금(季金), 장량상(張良相) 등이 모두 속해 있었는데, 이들은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도(慶尙道)의 여러 해구(海口)에 상륙했다【明史 列傳 135 : 陳璘 : 陳璘,字朝爵,廣東翁源人。嘉靖末,為指揮僉事。從討英德賊有功,進廣東守備。與平大盜賴元爵及嶺東殘寇。萬歷初,討平高要賊鄧勝龍,又平揭陽賊及山賊鐘月泉,屢進署都指揮僉事,僉書廣東都司。二十五年,封事敗,起璘故官,統廣東兵五千援朝鮮。明年二月,擢禦倭總兵官,與麻貴、劉綎並將。部卒次山海關鼓噪,璘被責。尋令提督水軍,與貴、綎及董一元分道進,副將陳蠶、鄧子龍,遊擊馬文煥、季金、張良相等皆屬焉,兵萬三千余人,戰艦數百,分布忠清、全羅、慶尚諸海口.】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령(保寧) 해구(海口)에 상륙(上陸)한 계금(季金)과 그 병사(兵士)들을 맞이한 안대진(安大進, 1561~1604)과 보령(保寧) 땅”에게만이 “만세(萬歲)”라는 칭호(稱號)를 내리고, ➨ ‘전라도(全羅道), 경상도(慶尙道)’ 등 여러 해구(海口)에 상륙(上陸)한 다른 곳에서는 명(明) 수군(水軍)을 맞이한 조선(朝鮮)의 접반사(接伴使)가 없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상륙(上陸)한 명군(明軍)이 왜군(倭軍)을 무찌르지 않고 피해 다녔다는 말일까?
왜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는 ‘전라(全羅), 경상(慶尙)’ 등 여러 해구(海口)에 상륙(上陸)한 수많은 ‘명(明)’ 수군(水軍)과 그 땅에 대한 은혜(恩惠)를 ‘나 몰라라’하며, 입을 싹 닫았는가? 하는 점이다.
문제(問題)는, 이러한 교지(敎旨)가 어디에 존재(存在)하고 있으며, 그 교지(敎旨)가 진품(珍品)이라는 증거(證據)는 어디에 있는가? 일설(一說)에는 ‘후대(後代)에 누군가가 그 교지(敎旨)의 글씨를 쓴 것이다’라는 주장(主張)도 있다. 「땅이 그 땅이 아닌데, 어떻게 그게 진품(珍品)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問題)가 대두(擡頭)되는 것이다. 뭔가? 이건!
➤ 아래의 글을 보자.
➨ 유격장군(遊擊將軍) 계금(季金)의 청덕비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661-12번지] 지정(등록)일 : 2000.09.20. : 《흠차통령절직수병유격장군계공청덕비(欽差統領浙直水兵游擊將軍季公淸德碑) : 이 비를 처음 세운 뒤 1689년(숙종 15) 충청수사 조동진이 비를 영관사 남쪽 아래에서 관덕루 아래로 옮겼다. 현재의 위치는 운주헌 뒤쪽에 해당되므로 다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규모는 높이 1.04미터, 폭 0.48미터, 두께 0.143미터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비(碑)’가 여러 번에 걸쳐 옮겨져 있어, 사실(事實)대로 말하면 의문(疑問)투성이다. 설명(說明)에 따르면 :
➤ 《1598년 4월에 세운 유격장군(遊擊將軍) 계금(季金)의 청덕비로, 유격장군 계금은 중국 명나라 절강성(浙江省) 수군장으로 임진왜란 때 3000명의 수군을 이끌고 이곳 오천(충청 수영)으로 상륙하고 전라도로 이동하여 왜군을 토벌하였음. 비문(碑文)은 장군의 덕(德)을 칭송하고 왜적을 빨리 무찌르기를 기원하였으며, 장군의 위엄을 빌려 바다에서의 안녕을 기도(祈禱)하자는 내용으로 임진왜란 대 명나라 수군이 상륙한 지점을 알려주고, 당시의 민속을 엿볼 수 있는 비로써, 비문은 안대진(安大進)이 지었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전라(全羅), 경상(慶尙)의 여러 해구(海口)에 상륙(上陸)한 많은 장수(將帥)와 유격(遊擊)들에 대한 칭송(稱頌)과 비문(碑文), 교지(敎旨)는 왜 없느냐?” 하는 문제(問題)가 제기(提起)된다.
○ 향토사학(鄕土史學)의 수준(水準)이 아무리 낮다고 하더라도 이건 지방자치단체(地方自治團體)에 속해 있는 시민(市民)들을 상대(相對)로 하는 행정(行政)이다. 야사(野史)는 어디까지나 야사(野史)일 뿐이다. 즉(卽) 정사(正史)로 대접(待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제2편으로 계속(繼續)] / 2023년 03월 11일 [글쓴이 :문무(文武)]
첫댓글 한반도 땅에 있는 각각의 행정조직의 이름, 지명등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 땅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들로 메꿔져 있음에도, 누구 한 사람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한다. 가능하면 순응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일 게다.
그러는 한 편에서는 수백년 "종가"가 어떠니 수백년 내려온 집성촌이니 하는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 이해불가한 장면이 하나 둘이 아니다. 특히 공중매체에서 이것을 큰 전통인 냥, 이 땅의 풍속인 냥, 이 땅의 것인 냥 떠들어대는 것을 보면 :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거기다가 족보이야기까지 꺼내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우리는 언제 쯤 우리들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 쯤 일제와 양키들에게 향한 사대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 쯤 자주, 자립을 떳떳하게 대 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좋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러브 선"님!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내용을 회원님들께 소개해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여러가지 제약으로 인해 한정된 주제의 해설을 한다는 것이 정말 아쉽습니다. 원전을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옛 조선왕조와 한반도는 관계없다는 것으로 밝혀집니다.
가장 궁금한 것은 "한반도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인데,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 형편이니, 아쉬움이 많습니다.
기록은 있으나 숨겨 놓은 것일까?
아예 없는 것일까?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기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