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 산제비 넘나더는 성황당 길에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
새파란 꽃잎이 물에 떠서 흘러 가더라 /
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
가수 백설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는 어르신들이 술 한 배 돌아 얼굴이 불콰해지면 즐겨 부르는 노래이다.
같은 노래를 장사익도 부르고 조용필도 부르는데, 감정을 담아 부르는 노래가 그리 구성지고 처량할 수가 없다.
이전에는 부모 세대의 노래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덧 나도 그 낭에 가까워지다 보니 그 정서를 이해하겠더라고.
어차피 이제는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으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젊은 날에 대한 회한이려니……
제목만 같은 뿐 가사가 각기 다른 한영애와 김윤아의 노래도 있고, 허진호 감독이 만든 영화 <봄날은 간다>도 있다.
곰곰히 헤아려 보니 시인이 쓴 <봄날은 간다>도 여러 편이 되거늘,
그중에서 공감이 가는 이재무, 안도현, 허수경, 이승훈, 정일근, 이응준, 이향아의 글들을 모아 한번에 정리해 보았다.
남들은 서른 즈음에 벌써 <봄날은 간다>를 썼는데, 나는 이제서야 그런 감정에 동조하니
그들이 조로(早老)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젊게 살아왔던 것일까?
스무 살에 부르던 투쟁가처럼 꽃이 핀다
그러나 꽃을 노래하지는 말아라
괴로운 건 꽃이 아니다
꽃을 가지고 싶은
꺾이기 쉬운
멍들어 가는
청춘이다
붉은 꽃을 보고 있는 사형수의 마음 같은
- 이응준 詩, <봄날은 간다> -
사카린 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박분薄紛의 햇살아
연분홍 졸음 낮술 마음 졸이던 소풍아
안타까움보다 더 광폭한 세월아
순교의 순정아
나 이제 시시껄렁으로 살아가려 하네
시시껄렁이 나를 먹여 살릴 때까지
- 허수경 詩, <봄날은 간다> -
봄날 오후 투명한 햇살
이런 날은 저승의 안방에까지도
훤하게 보일 듯하다
물 오른 신입생들의 통통 튀는 종아리
반짝이는 소음으로 세상은 청년이 된다
점심 거르고 전투처럼 치러낸 강의
내 달변의 혓바닥에 실린
진실의 질량은 얼마나 될까
불쑥 허기 몰려와 몸, 휘청거린다
먼 곳에서 크고 작은 길들은
꼿꼿이 고개 쳐들고
어디론가 바삐 달리고 있다
내가 뱉어낸 그 많은
장식의 허언들은 붕붕거리며
긴 복도 서성이거나
휴게실 담배연기 자욱한 소음에 갇혀
날개 다친 나비처럼 비틀,
부유하고 있을 것이다
봄날 오후 햇살은 투명해서
이런 날은 맨살에 비단을 걸쳐도
아플 것이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다
밥그릇 비워내지 못하는 날이 늘어갈 뿐,
체중은 줄지 않고
누구의 안부도 그리 간절하지가 않다
꽃처럼 화들짝 피어나 한 순간의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저 웃음의 화원 속으로
아직도 겨울을 다 보내지 못한
두꺼운 몸 밀어 넣으며
물 밖으로 아가미 내민 물고기처럼
헉, 가쁜 숨 몰아쉰다
모든 게 봄날 투명한 햇살 탓이다
- 이재무 詩, <봄날은 간다> -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 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나는 흐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아 달고 떠나려는
한척의 커다란 범선을 보았다
살구꽃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안도현 詩, <봄날은 간다> -
누가 맨 처음 했던가 몰라
너무 흔해서 싱겁기 짝이 없는 말
인생은 짧은 여름밤의 꿈이라고
짧은 여름 밤의 꿈같은 인생
불꽃처럼 살고 싶어 바장이던 날
누가 다시 흔들어 깨웠는지 몰라
강물은 바다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
실개천 흘러서 바다로 가는 길
엎드려 흐느끼는 나의 종교여,
나를 아직도 용서할 수 있는지. 꽃이 지는 봄,
땅 위에 물구나무 서서
영원의 바다 같은 하늘을 질러
나 이제 길을 떠나도 돌아올 수 있는지,
봄날은 간다. 탈없이 간다.
- 이향아 詩, <봄날은 간다> -
벚꽃이 진다, 휘날리는 벚꽃 아래서 연분홍 치마가 휘날리더라,
그런 늙은 유행가가 흥얼거려진다는 것, 내 생도 잔치의 파장처럼 시들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늘어진 벚나무 가지 사이로 경축 제 40회 진해 군항제 현수막이 보인다
40년이라, 내 몸도 그 세월을 벚나무와 함께 보냈으니
쉽게 마음 달콤해지거나 쓸쓸해지지 않는다
이 나무지? 벚나무 아래서 그녀와 만나는 것을 지켜본 옛 친구는
시들한 내 첫사랑을 추억한다, 벚나무는 몸통이 너무 굵어져버렸다
동갑내기였던 그녀의 허리도 저렇게 굵어졌을 것이다
담배를 피워 물다 말고 친구는 지나가는 말로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했던 유씨와 류씨 성을 가진 친구들의 뒤늦은 부음을 전한다
친구들의 얼굴이 실루엣으로 떠올랐으나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류씨 성을 가진 친구는 나와 한 책상을 썼는데......
잠시 쓸쓸해졌으나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이 별에 없다
벚나무 아래서 만났던 첫사랑 그 소녀도 없다
터질 것처럼 뛰는 가슴을 가졌던 열일곱 나도 없다
돌아보면 화무십일홍, 잔치가 끝나기도 전에 꽃이 날린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삶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구경꾼일 뿐이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누구에게도 그런 알뜰한 맹세를 한 적은 없지만,
봄날은 간다
시들시들 내 생의 봄날은 간다
- 정일근 詩, <봄날은 간다> -
낯선 도시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 당신과 함께 봄날은 간다
달이 뜬 새벽 네시
당신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봄날은 간다
맥주를 마시며
봄날은 간다
서울은 머얼다 손님 없는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
달이 뜬 거리로 간다
술에 취한 봄날은 간다
안개도 가고 왕십리도 가고 노래방도 간다
서울은 머얼다
당신은 가깝다
내 목에 두른 마후라도 간다
기차는 가지 않는다
나도 가지 않는다 봄날은 가고 당신도 가지 않는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해가 뜨면 같이 웃고 해가 지면 같이 울던 봄날은 간다
바람만 부는 봄날은 간다
글쟁이, 대학교수, 만성 떠돌이, 봄날은 간다
머리를 염색한 우울한 이론가, 봄날은 간다
당신은 남고 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 이승훈 詩, <봄날은 간다> -
첫댓글 봄날이 가는것에 이리많은 사연들이 있는줄 몰랐네오ㅡ공감하며 읽었습니다
'봄날'은 단순히 계절만이 아니고 한때 '자신이 잘 나가던 시절'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이용자나 활동보조인에게도 평범했던 지난 날이 어쩌면 '봄날'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오름님!
올려주신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詩가 주는 영향력에 공감합니다.
코스모스 님, 잘 지내시죠?
전 안도현님의 시가 가슴에 닿아요, 나도 그렇게 봄을 보내고 늙어 가거든요,
예, '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삶'이었다면 곱게 나이든다 거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