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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주尹世胄(1901 - 1942) '약산(若山)의 오른팔' 의열단 제1급 책사(策士) "
1901년 6월 24일 경상남도 밀양군 성내(城內) 노하골(현 밀양시 내이동)에서 군청 서리(胥吏) 윤희규(尹熺奎)와 경주 김씨 경이(卿伊)의 4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무송(茂松)이고, 호는 석정((石正·石鼎·石井)), 초명은 소룡(小龍), 이명은 윤세수(世洙)·윤정호(正浩)·윤세호(世浩)이며, 중국에서 석생(石生)을 필명으로 썼다.
1910년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다녔다. 1911년 김원봉(金元鳳)이 조직한 연무단(練武團)에 가입 활동하며, 단군개천일에 시가행진을 벌였다. 1914년 서울 낙원동 오성학교(五星學校)에 진학하여 주시경(周時經)·유근(柳瑾) 등으로부터 교육받고 1917년 3월 졸업하였다.
1919년 고종 장례 참례 차 서울을 다녀온 후 밀양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전홍표(全鴻杓)의 지도아래 김병환(金鉼煥)·윤치형(尹致衡)·정동찬(丁銅燦)·김소지(金小池) 등과 3월 13일 내일동 장터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 주모자이자 현장 지휘자로 밝혀져,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도피 은신 중 3개월가량 『조선독립신문』 경남지국장을 자임하고 3종 지하신문의 기사를 편집하여 배포하다가, 7월경 윤치형과 만주로 탈출하였다.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쿠산쯔(孤山子)로 가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속성과정을 다닌 것으로 알려진다. 지린에서 김원봉과 만나 비밀결사 조직 준비에 동참하였고, 동향선배 황상규(黃尙奎)의 지도로 1919년 11월 10일 창립된 의열단(義烈團)의 단원이 되었다
창단 직후 의열단이 추진한 국내 일제기관 총공격 거사에 가담키 위해 1920년 3월 경 밀입국하였다. 서울 교남동의 한 여관에 은신하던 중, 밀정의 제보로 6월 20일경 이성우(李成宇)·황상규와 경기도 경찰부에 붙잡혔다. 이어서 10여 명의 동지들도 붙잡히고 폭탄 16개도 압수되어, 의열단의 ‘제1차 국내의거’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7개월여 예심을 거쳐,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받고 궐석재판 선고형이 가산되어 마포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7년 2월 7일, 감형과 특사 조치로 풀려나 귀향하였다. 이후 이름을 ‘소룡’이 아닌 ‘세주’로 썼다.
1927년 4월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 정기대회에서 황상규·윤치형과 집행위원으로 선출되고, 10월에는 위원장이 되었다. 12월 신간회(新幹會) 밀양지회 창립을 주도하고 조직부 총무간사에 선임되었다. 1928년 7월 밀양청년동맹 설립 시 초대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연령제한’ 규정을 들어 자진 사퇴하였다. 1927년 11월 조선일보 밀양지국 기자가 되었고, 이듬해 2월 부산에서 열린 경남기자동맹 제1회 정기대회에서 「신간회에 관한 건」이 의안으로 상정되자 ‘전 민족적 정치투쟁’에 관한 열변을 토하다 경찰에 연행되었다. 1930년 4월 밀양에서 열린 제5회 경남기자대회에서도 축사를 하다가 일제 경찰에 제지당하였다.
1928년 12월 백산상회(白山商會) 관련 회사로 부산 영주동에 있던 경남인쇄주식회사의 최선임 등기이사가 되었다. 이사직에서 물러나는 1930년까지 부산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측면 지원하였다. 1929년 10월에는 중외일보사 영업국 서무부장이 되어 경영 실무에 참여하였다. 백산 안희제(安熙濟)가 동향인 부호 이우식(李祐植)과 ‘민족언론 육성’ 의도로 인수하여 주식회사로 바꾸고 부산으로 본사를 옮겨 사장이 되면서였다. 1930년 초부터 10개월 동안 기사 삭제·압수 조치가 110회에 이르던 끝에 재정 악화로 1931년 6월 종간하고 9월에 회사해산이 결의되었다.
1931년 9월 황상규 사회장(社會葬)을 주관한 후, 1932년 5월경 중국 망명을 결행하였다. 펑톈(奉天)으로 가서 재회하게 된 이육사(李陸史)와 9월에 김시현(金始顯)의 안내로 난징(南京)으로 가서 김원봉과 만나 의열단에 복귀하였다.
1932년 10월 의열단이 중국국민당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 속칭 남의사[藍衣社])의 지원으로 난징 교외 탕산(湯山) 동쪽의 선사묘(善寺廟)(혹은 선수암[善壽庵])에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통칭 의열단 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33년 3월 졸업하고, 6월 말의 의열단 정기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동년 9월부터 장수성(江蘇省) 캉닝현(康寧縣) 장닝진(江寧鎭) 증조사(曾祖寺)에서 6개월간 운영된 제2기 정치과 교관으로 의열단사·조선운동사·각국 혁명사·중국혁명사·유물사관·당조직 문제 과목을 강의하였다. 뛰어난 교수능력과 자상한 지도로 “전체 학생의 애대(愛戴)와 경앙(敬仰)이 한 몸에 집중되었다”고 한다. 1935년 4월 장수성 캉닝현 상팡진(上方鎭) 천녕사(天寧寺)에 개설되어 6개월간 운영된 제3기 과정에서도 정치과 교관으로 유물론 철학, 세계경제·지리, 사회학 과목을 강의하였다. 제2·3기 졸업생 관리 책임자로서 생도들의 졸업 후 진로와 국내·만주행 특파공작을 지도하였고, 대일 결전기 무장투쟁 추동조직이 될 전진대(戰進隊)를 조직할 임무도 부여하였다.
1934년 4월 단일대당(單一大黨) 결성을 목표로 상하이(上海)에서 5개 독립운동단체의 협의체로 설립 운영되고 있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의 6인 상무위원 중 의열단 몫 1인으로 선임되었다. 6월에는 코민테른 극동부의 상하이 주재원 파벨 미프(Pavel Alexandrovich Miff)와 회견하고 국내정세와 반일 민족통일전선 구축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 회견 후 간부학교 졸업생이자 의열단원인 윤공흠(尹公欽)과 오용성(吳龍成)을 국내로 들여보내, 단일당 형태의 국내 민족협동전선 조직 문제와 관련하여 서울의 배성룡(裵成龍), 평양의 송봉우(宋奉瑀)와 논의하도록 하였다.
1935년 2월 대일전선통일동맹 제3차 대표대회에서 선전부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6월 하순 개최된 한국혁명단체대표대회에 김원봉·이춘암(李春岩)과 의열단 대표로 참석하여 신당창립 대표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이 무렵 '약산(若山)의 오른팔'로서 의열단의 제1급 책사(策士)이고 사실상의 2인자로 평가되었으며, 중국국민당 인사들로부터 ‘의열단의 정신’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7월 5일, 5개 당·단의 해소-통합으로 결성되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중앙서기부(서기장 김원봉) 부원과 선전부원을 겸하였다. 10월에 김규식(金奎植)의 후임으로 당 훈련부장이 되어, 군관특별훈련반을 설치하고 의열단 간부학교 제3기와 동일한 교육과정을 운영하면서 교관직을 겸임하였다. 또 10월부터 당원용 비밀소식지인 『당보(黨報)』의 순간(旬刊) 발행을 주관하였다. 대외선전 기관지인 『민족혁명』 제1호(1936년 1월 20일자)에 ‘석생’이라는 필명으로 「우리 운동의 새 출발과 민족혁명당의 창립」을 게재하였다.
1935년 늦가을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로 가서 민족혁명당 선전활동을 펼쳤고, 1936년 9월 재차 광저우에 가서 11월까지 민족혁명당 화남지부(華南支部)의 반당사태(反黨事態)를 수습하였다. 1937년 1월의 제2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재선되었고, 신설된 자금위원회 주임직도 맡았다. 3월부터 주간(週刊)으로 발행된 당 소식지 겸 논설지 『앞길』의 편집에 참여하면서 사설을 쓰기도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상하이로 가서 8월부터 10월까지 김동우(金東宇)·정순갑(鄭淳甲) 등 비밀당원들의 항일공작을 지도하였다. 9월 말부터 상하이방송국에서 일본인과 국내민중을 대상으로 한 심리전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11월 난징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이 결성될 때 5인 간사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1938년 1월 후베이성(湖北省) 장링(江陵)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싱쯔(星子)분교에서 특별훈련반 제6기(황푸[黃埔])군관학교 제13기에 해당)의 조선학생대(朝鮮學生隊) 정치교관이 되어, 5월까지 한국독립운동사를 강의하였다. 이때 항일가요 「최후의 결전」을 작사하여 「바르샤바 혁명행진곡」의 선율을 붙여 보급시켰고, 나중에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노래로 애창되었다.
1938년 5월 장링에서 열린 조선민족혁명당 제3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재선된 후 '졸업생들의 진로와 동북으로의 진출' 문제를 놓고 당내 공산주의그룹의 우두머리인 최창익(崔昌益)과 설전을 벌였다. 6월 초 싱쯔분교 특훈반 졸업생들을 인솔하고 우창(武昌)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을 토대로 10월 10일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될 때 본부 정치조 부조장(副組長) 겸 훈련주임 직을 맡았다. 10월 하순 광시성(廣西省) 구이린(桂林)으로 철수해서 동장진(東江鎭) 동령가(東靈街)의 사무소에서 집무하였다.
1939년 2월 구이저우성(貴州省) 전위엔(鎭遠)의 국민정부 군정부 제2포로수용소(‘화평촌’[(和平村)])에 가서 한인포로 31명에 대한 교도공작을 하고, 경과보고문(「화평촌 통신」)을 『조선의용대 통신(通迅)』 제7기부터 제10기까지 4회 연재하였다. 1939년 여름, 한인포로들이 제2포로수용소 충칭분소(重慶分所)(‘박애촌’(博愛村))로 옮겨질 때 동행하여 인계받았다. 9월 9일 ‘해방식’을 거쳐 31명 전원을 조선의용대에 자원입대시켰다. 그 후 8월부터 9월까지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서 열린 ‘조선혁명운동 7단체 통일회의’에 성주식(成周寔)과 조선민족혁명당 대표로 참석하였다. 10월 조선의용대 총대부(總隊部) 편집위원회의 한문간(韓文刊) 주편위원(主編委員)이 되어, 국한문판 기관지 『전고(戰鼓)』 발간을 주관하였다.
1940년 3월 조선의용대 총대부가 구이린에서 충칭으로 이동하여, 남안(南岸)지구 탄자석(彈子石) 아공보(鵝公堡)의 손가화원(孫家花園)에서 조선민족전선 연맹원들과 함께 거류하였다. 같은 해 10월, 조선민족혁명당 제5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재선되고, 선전부장을 겸하였다. 이 무렵, 조선의용대가 동포 다수 거주지역인 화베이(華北)로 진출하여 중국공산당 팔로군(八路軍, 정식 명칭은 국민혁명군 제18집단군)의 항일근거지인 타이항산(太行山)으로 들어가 싸울 것을 김원봉에게 강력히 건의하였고, 9월경부터 제3지대를 충칭으로 이동 집결시키는 등으로 ‘북상항일’ 준비를 착착 진행해갔다. 11월 4일부터 보름간 개최된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에서 화베이 진출, 전지선전(戰地宣傳)으로부터 적후조직(敵後組織)으로의 '공작 중점' 변경이 공식 결의되자, 김구(金九)를 찾아가 조선의용대의 북상 방침을 통고하였다. 중국정부 군사위원회에도 정식 건의하여, 황허(黃河) 건너의 제24집단군 총사령 팡빙쉰(龐炳勳) 부대에 배속되는 조건으로 승인받았다.
1941년 1월 초에 조선민족혁명당 화북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제3지대가 주축인 북상대오와 충칭을 떠나 화베이로 향했다. 떠나기에 앞서 김원봉 등 간부들 앞에서 “금년에 화북 근거지를 건설하고, 명년에 동북근거지를 건립할 것이며, 내명년에는 조국으로 진입하겠다”고 공언하였다. 2월에 뤄양(洛陽)에 도착한 후, 제1지대와 합류하여 신편지대(대장 박효삼[朴孝三])를 창설하고 정치위원이 되었다. 제1전구 장관사령부로부터 받은 도하증(渡河證)으로 3월 중순 1진으로 황허를 건넌 후, 허베이성(河北省) 린현(林縣)으로 가서 팡빙쉰 부대에 합류하고 4개월 간 유격선전공작을 수행하였다.
6월에 의용대원 80여 명의 도하가 완료되니 7월 초 대원들을 이끌고 린현을 몰래 빠져나와, 팔로군 전방총사령부의 지령대로 산시성(山西省) 료시엔(遼縣) 통위전(桐峪鎭)의 상무촌(上武村)으로 들어가 주둔하였다.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하고 흥복사(興福寺)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8월에 조선의용대 간부훈련반(일명 화북조선청년학교)이 개설되자 '조선문제' 과목을 강의하였다. 11월에 결성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 진기예변구지회(晉冀豫邊區支會) 부지회장을 맡고, 이듬해 3월경까지 적후공작(적구 내 한인동포 조사·조직 활동)의 기획과 요원 지도에 주력하였다.
1942년 5월 초부터 일본군이 20개 사단, 40만 병력으로 타이항산 항일근거지에 대한 포위공격전을 재개하여 항일근거지를 위협하니, 팔로군과 조선의용대 합동의 기동반격전('반소탕전')이 개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대의 40여 명 남녀 비전투원 대오를 인솔하며 이동하던 5월 28일 허베이성 써현(涉縣) 폔청진(偏城鎭) 북동쪽의 화옥산(花玉山) 장자령(庄子嶺)에서 일본군과 맞닥뜨렸다. 변변한 무기도 없었던지라 다른 대원들을 지켜내기 위한 유인질주를 하여 피격, 총상을 입고 석굴에서 5일간의 고투 끝에 숨을 거두었다. 1942년 10월 10일 중국공산당 북방국(北方局) 및 팔로군 야전정치부 주관으로 유해가 수습되어 써현 석문촌(石文村)의 연화산(蓮花山) 자락에 안장되었다가, 1950년 10월 허베이성 한단시(邯鄲市)의 진기로예열사능원(晉冀魯豫烈士陵園)으로 옮겨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