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편 이전(吏典)편 6조는 1. 속리(束吏아전을 단속함) 2. 어중(馭衆부하통솔) 3. 용인(用人인재임용) 4. 거현(擧賢어진사람의 천거) 5. 찰물(察物아전들의 부정이나 민간의 실정 등 물정을 살핌) 6. 고공(考功성적을 고과함)입니다. 지방 관아의 인사관리 등을 논한 것입니다.
제3조 용인(用人인재임용)에는 9개의 꼭지가 있습니다.
목민심서 이전(吏典) 제3조 용인(用人)
1.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인재를 잘 임용하는 데 달렸으니, 군ㆍ현이 비록 규모가 작지만 사람을 쓰는 일은 나라와 다르지 않다.
2. 향승(鄕丞)은 현령(縣令)의 보좌관이다. 반드시 한 고을에서 가장 착한 사람을 골라서 그 직책에 있게 해야 한다.
3. 좌수(座首)는 빈석(賓席)의 우두머리니 진실로 옳은 인재를 얻지 못하면 모든 일이 다스려지지 않는다.
4. 좌우별감(左右別監)은 수석의 다음이니, 또한 올바른 인재를 얻어서 모든 정사를 의논해야 한다.
5. 적격자를 얻지 못하면 그냥 자리나 채워 둘 뿐이지, 모든 정사를 맡겨서는 안 된다.
6. 아첨을 잘하는 자는 충성하지 못하고, 간쟁(諫諍)을 좋아하는 자는 배반하지 않는다. 이 점을 살피면 실수하는 일이 적을 것이다.
7. 풍헌(風憲)ㆍ약정(約正)은 모두 향승(鄕丞)이 추천하는데, 올바르지 못한 사람을 추천한 향승은 그 차첩(差帖)을 회수해야 한다.
8. 군관(軍官)과 장관(將官)으로서 무반(武班)에 서게 되는 자는 모두가 씩씩하고 용감하여 외적을 방어할 기상이 있어야 옳다.
9. 막비(幕裨)를 두는 수령은 신중하게 인재를 고르되 충성되고 진실함을 우선으로 하고 재주 있고 슬기로움을 다음으로 해야 한다.
목민심서 이전(吏典) 제3조 용인(用人)
1.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인재를 잘 임용하는 데 달렸으니, 군ㆍ현이 비록 규모가 작지만 사람을 쓰는 일은 나라와 다르지 않다.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원이 되었을 때 공자가, “인재를 얻었는가?” 하고 물으니, 자유가, “담대멸명(澹臺滅明)이란 자가 있는데,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제 방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담대씨(澹臺氏)를 그저 읍중의 민간으로만 여기나 그렇지 않은 듯하다. 자유가 담대를 얻어서 보좌관으로 삼은 것은, 마치 후세의 주부(主簿)와 위(尉), 그리고 우리나라의 향승(鄕丞) - 지금 향소(鄕所)라 한다. - 과 같은 것이므로 공자가 인재를 얻었느냐고 물었고, 자유가 이와 같이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읍중의 민간 중에서 어진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고 보면, 응당 인재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칭찬해 주는 말도 ‘사(私)를 끊고 공(公)을 따른다.’라고 하는데 불과했을 것이다.
지름길로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협문이나 옆길을 경유하여 관부(官府)를 드나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공사가 아니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오직 나라의 일과 백성의 일로만 들어와서 의논한다는 것이니, 이것이 향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향정(鄕亭)의 직책을 맡기려 하는 자는 마땅히 이 글을 숙독해야 한다.
중궁(仲弓)이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 되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는 어진 사람을 등용하는 일에 힘쓰게 하였다.
무릇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어진 사람 등용하는 것을 급무로 삼아야 한다. 치도(治道)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니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향승ㆍ군교(軍校) 등 여러 이서(吏胥)에서부터 풍헌(風憲)ㆍ약정(約正)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인재를 얻는 데 힘써야 하고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를 다스릴 때 스승으로 섬기는 자도 있고, 벗으로 사귀는 자도 있고 부리는 자도 있었으므로 거문고나 타고 당(堂)에서 내려오지 않아도 선보는 다스려졌다. 무마기(巫馬期) 역시 선보를 다스렸다. 그는 아침 일찍 나가고 밤늦게 들어오는 등 밤낮 쉴새없이 몸소 일을 했는데 선보가 또한 다스려졌다. 무마기가 그 까닭을 묻자, 복자천은, “말하자면, 나는 사람에게 맡겼고, 그대는 노력에 맡긴 것이니, 노력에 맡기면 고생스럽고 사람에게 맡기면 편안한 것이다.” 하였다. - 《설원(說苑)》에 보인다. -
[주-D001] 자유(子游) : 춘추 시대 오(吳)나라 사람으로 성은 언(言), 이름은 언(偃), 자는 자유(子游)며 공자의 제자다. 《史記 仲尼弟子列傳》
[주-D002] 담대멸명(澹臺滅明) : 역시 공자의 제자로 노(魯)나라 무성(武城) 사람이며 자는 자우(子羽)인데, 얼굴은 못생겼으나 품행이 훌륭하였다. 《史記 仲尼弟子列傳》
[주-D003] 자유(子游)가 …… 않습니다 : 이 말은 《논어》옹야 편에 보인다.
[주-D004] 주부(主簿)와 위(尉) : 모두 진(秦)ㆍ한(漢) 이후 역대로 두었던 주군(州郡)의 관원으로서 주부는 문서를 담당하고, 위는 도적 잡는 일과 부정 사찰을 담당하였다.
[주-D005] 향정(鄕亭) : 여기서는 향읍(鄕邑)을 가리킨다. 한대(漢代)의 지방구획 제도에 10리(里)를 1정(亭)으로 하여 정에는 장(長)을 두고, 10정을 1향(鄕)으로 하여 향에는 삼로(三老)를 두었다. 《漢書 百官公卿表》
[주-D006] 중궁(仲弓) : 노나라 사람이며 공자의 제자인 염옹(冉雍)의 자(字)이다. 그는 십철(十哲)의 하나이기도 하다. 《史記 孔子弟子列傳》
[주-D007] 계씨(季氏) : 노나라 계손씨(季孫氏)이다. 그는 장공(莊公)의 아우 계우(季友)의 후손으로, 대부(大夫)가 되어 노나라의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주-D008] 가신(家臣) : 대부의 집에서 일보는 사람을 가신이라 한다.
[주-D009] 중궁(仲弓)이 …… 하였다 : 이 말은 《논어》자로(子路) 편에 보인다.
[주-D010] 소 …… 것이다 : 대도(大道)로써 소읍(小邑) 다스림을 비유한 말이다.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원으로 있을 때 예악(禮樂)으로 교화를 펴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현가(弦歌)를 불렀다. 공자가 무성에 가서 그 현가 소리를 듣고 기뻐서 빙그레 웃으며 “닭을 잡는 데 어찌 소잡는 칼을 쓰겠느냐?〔割鷄焉用牛刀〕”라고 한 바 있다. 《論語 陽貨》
[주-D011] 복자천(宓子賤) : 공자의 제자로 노나라 사람이며, 이름은 불제(不齊), 자천은 그의 자이다. 성품이 인자하고 재주와 지혜가 있었다. 《史記 孔子弟子列傳》
[주-D012] 무마기(巫馬期) : 역시 공자의 제자로 노나라 사람이며, 이름은 시(施), 기(期)는 그의 자이다. 《史記 孔子弟子列傳》
[주-D013] 복자천(宓子賤)이 …… 것이다 : 이 말은 《여씨춘추(呂氏春秋)》찰현(察賢) 조와 《몽구(蒙求)》 등에도 보인다.
爲邦在於用人。郡縣雖小。其用人無以異也。
子游爲武城宰。孔于問得人。對曰。有澹臺滅明者。行不由徑。非公事。未嘗至於偃之室。今人以澹臺氏。只作邑子看。恐非也。子游得澹臺爲佐貳。如後世之主簿尉。吾東之鄕丞。今名曰鄕所。 故孔子問得人。而子游得以是對之。若於邑子之中。見一賢者。則不當曰得人也。乃其所以稱譽之言。又不過曰絶私殉公而已。行不由徑者。不由夾門邪蹊。出入官府也。非公不入者。唯國事民事。乃入議也。此非鄕丞而何。欲辨人邪正。以任鄕亭之職者。宜熟讀此經。
仲弓爲季氏宰。問政。孔子勉之以擧賢。凡爲國家者。必以擧賢爲急。道無大小。牛刀亦可以割雞也。鄕丞軍校群吏諸胥。以至風憲約正。一以得人爲務。不可忽也。
宓子賤治單父。有師事者。有友交者。有役使者。彈琴身不下堂。單父治。巫馬期。亦治單父。以星出。以星入。日夜不處。以身親之。而單父亦治。巫馬期問其故。宓子曰。我之謂任人。子之謂任力。任力者勞。任人者佚。說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