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의 "None But the Lonely Heart"
차이코프스키의 "오직 고독한 마음뿐"
"None But the Lonely Heart" (Goethe) for Voice, Op.6 --- Net, tol’ko tot, kto znal(러), Nur wer die Sehnsucht kennt(독) ---
Tchaikovskii, Pyotr Il"ich (1840.5.7 ~ 1893.11.6)

이번에는 여러분께 애절하고 슬픈 특별한 선율을 하나 소개드립니다. 뜨거운 한여름을 이겨내는 마음으로,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하얗게 눈 쌓인 한겨울의 드넓은 벌판, 차갑게 뺨을 스치는 바람 속에 홀로 서서 쨍 소리가 날 것 같은 얼음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 볼 뿐. 끝없는 고독과 그리움 속에 잠겨 있는 한 사람을 상상하면서 이 애절한 선율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소개드리는 음악으로 인하여 혹시 여러분께서 저를 슬픈 음악들만 좋아하는, 낮게 가라앉아 사는 그런 아주 처량한 사람으로 오해하실 분들도 계실까 염려도 됩니다만 자주 드리는 말씀대로, 서정성이 높은 음악들을 제가 좋아하다보니 선곡하는 음악들이 대부분 아다지오(Adagio)가 많거나 조용하고 부드러운 곡들을 주로 많이 소개드리게 된 것 같습니다. 오늘 들려드릴 이 연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곡임에는 틀림없으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의외로 제목 이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 곡이어서 벌써부터 제가 여러분께 꼭 한 번 소개드리려고 마음 먹고 곡에 대해 공부하면서 해설할 자료를 준비를 하고 있었던 음악입니다. (자료가 부족하여 애를 먹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감상하시는 곡은 원래 차이코프스키(Tchaikovsky)의 러시아 가곡입니다만 "바이올린의 전설" 아이작 스턴(Stern, Isaac)의 명연주로 정말 특별한 감동을 맛 볼 수 있는 곡입니다. "오직 고독한 마음뿐"이라는 우리말로 번역되는 "None But the Lonely Heart" 독일의 대문호 괴테(Goethe, Johann Wolfgang von, 1749.8.28 ~ 1832.3.22)의 독일어 시(詩)에 차이코프스키(Tchaikovsky)가 곡을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 곡은 그가 작곡한 100여 러시아 가곡 중 하나로 29살의 젊은 시절 작품이라고 합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St. Petersburg)에 음악학교들이 설립되면서 차이코프스키나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 1829∼1894) 같은 뛰어난 음악가들에 의해서 러시아 음악 예술이 화려하게 꽃피게 됩니다. 이들의 활동은 러시아 음악이 지역성을 탈피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럽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들로부터 러시아의 예술 가곡도 눈부시게 발전하게 됩니다. 루빈스타인은 러시아어 뿐만 아니라 독일어에도 능통하며 2백여 곡의 가곡을 작곡하였다고 합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양식은 러시아적이기보다 유럽적이라고 평가되고 있더군요. 그가 남긴 100곡의 가곡은 서정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으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우수적이면서 열정적이며 감상적인 러시아의 시(詩)를 폭넓은 서정성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소개 드리고 있는 <"None But the Lonely Heart" (Net, tol’ko tot, kto znal, Op.6)>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Goethe)가 1807년 착수하여 1829년에 완성한 "빌헬름 마이스터의 방랑시대(Wilhelm Meisters Wanderjahre)" 속에 있는 詩에 곡을 붙인 것으로 `None but the lonely heart" - "오직 고독한 마음뿐"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Only one who knows loneliness" -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라고도 번역되어 남모르는 외로움에 빠진 이가 홀로 고독을 호소하는 애절한 노래로서 러시아 예술 가곡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교향곡 "비창"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과 정서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음악은 슬픔이나 절망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자식을 모차르트 같은 신동을 만들고 싶었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아버지는 음악가가 되려는 아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베토벤이 어머니께 위로를 받고 안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차이코프스키는 어머니를 잃고 어려서부터 유모와 가정교사의 손에 자랐고 철이 들면서는 기숙 학교에 보내져 자랄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그에게는 "어머니"란 그저 막연한 그리움과 동경의 대상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외롭고 고독한 자의 그리움은 그의 음악적 뿌리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감상하시는 이 음악도 서주 부분의 선율부터 끝까지 가슴 저미는 애절함으로 가득 차 있어서 절로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곡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외롭거나 슬플 때, 빠르고 경쾌한 음악을 듣는 것이 좋을 것 같지만 아마도 실제로는 그런 곡은 귀에 거슬려 들을 수 조차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서정적인 음악을 듣거나, 차라리 아주 진한 슬픔을 맛 볼 수 있는 음악을 듣는 것이 훨씬 더 빨리 그러한 상황에서부터 자신을 구해내거나 벗어 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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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감상하시는 음악은 여러분께서도 너무나 잘 아시는 아아작 스턴의 명연주입니다.
바이올린의 전설’ 아이작 스턴(Stern, Isaac, 1920.7.21 ~ 2001.9.22)

금세기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세계 최고 공연장인 미국 카네기홀의 운영자로서 20세기 세계 음악계를 지배해온 아이작 스턴(Isaac Stern)은 2001년 9월 22일(현지시간) 81세의 나이로 뉴욕 맨해튼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크라이나 태생 유태인으로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한 아이작 스턴(Isaac Stern)은 8세때 늦깎이 데뷔를 했지만 이후 빠른 속도로 실력을 키워나갑니다. 특히 고전음악 분야에서 유럽에 열등의식을 갖고 있는 미국민들에게 천재적인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큰 사랑과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되니 그의 이미 20대 초반에 세계 음악계의 총아로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90년대 중반까지도 첼리스트 요요마, 피아니스트 에마누엘 엑스 등과 함께 트리오(trio)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해왔습니다.
아이작 스턴(Isaac Stern)은 세계 최대 클래식 음악인 매니지먼트사인 ICM의 고문, 미국 국립예술진흥원(NEA) 회장직 등 미국 문화예술계 주요 요직을 맡았고 ‘아메리카-이스라엘 재단’ 등 미국내 유대계 단체의 대표도 두루 맡아왔습니다. 그에 힘입어 이착 펄만(Itzhak Perlman), 핀캐스 주커만(Pinchas Zukerman), 길 샤함(Gill Shaham)등의 유태인 음악인들도 세계적으로 크게 빛을 발했을 뿐 아니라 “인종학살을 자행한 나라”라며 평생 독일공연을 거부하는 등 언제나 유태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대외적으로 과시해왔었던 예술가입니다.
아이작 스턴(Isaac Stern)의 유명한 카네기홀(Carnegie Hall) 살리기 운동 일화. 그는 1955년 재정난에 부딪혀 부동산업자에게 팔릴 위기에 놓인 카네기홀을 살리기 위해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벌여 결국 뉴욕시가 1960년 홀을 구입케 하였고 자신이 회장직을 맡아 카네기홀을 세계 최고의 예술의 전당으로 만들었습니다. 소니(SONY)와 종신 계약을 맺은 아이작 스턴(Isaac Stern)은 그의 음악적 공로를 기려 1995년 소니(SONY) 측이 44장짜리 앨범으로 제작해준 ‘아이작 스턴-음악생애’를 비롯, 번스타인의 ‘세레나데’, 바르톡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 지금까지 100여장의 명반을 발표하여 그의 예술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카네기홀을 살린 공로로 ‘알버트 슈바이처 음악상’을 수상했고, ‘그래미 종신공헌상, 프랑스 레지옹도뇌르, 미국 대통령 자유메달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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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이올린 연주로 감상하고 계시는 차이코프스키의 "None But the Lonely Heart"가 원래 성악을 위한 가곡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여러분께 드리는 특별한 선물을 또하나 준비했습니다. 테너 마리오 란자(Mario Lanza 1921~1959)의 목소리로 감상하는 가곡입니다. 요즘 신세대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만 드높았던 명성은 그가 타계한지 오래된 지금도 고스란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 1901년, 독일 작가 W. 마이어푀르스터(Wilhelm Meyer-Forster 1862~1934)가 그의 중편소설 "Karl Heinrich(1899)"를 5막짜리 희곡으로 각색, 베를린 극장에서 초연한 후 획기적인 상연기록을 계속 세우게 되자 1954년 미국 MGM사가 라는 뮤지컬 영화로 내놓은 것이지요.
왕자와 하숙집 딸과의 사랑을 그린 동화같은 이 뮤지컬 영화에서 유명한 학사주점 "붉은 황소(Roter Ochsen)"에서 테이블 위를 오가는 왕자가 맥주잔을 들고 춤추며 노래하던 명장면이 눈에 선하고 Drink! Drink! Drink!라고 부른 노래 "Drinking Song"이 귓가에 생생합니다. 하이델베르그의 왕자 Karl역은 에드먼드 퍼덤(Edmund Purdom)이 맡았습니다만, 그가 립싱크한 노래는 실제로는 테너 마리오 란자(Mario Lanza)의 목소리였습니다. |
1921년은 이태리 오페라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한 해였습니다. 금세기 최고의 테너라는 신화를 창조했던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가 1921년 이 해에 세상을 떠나지만, 다행하게도 이 해에는 그의 신화를 이어 나가고 빛낼 또 다른 테너들이 세 사람이나 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오 란자(Mario Lanza 1921~1959)가 바로 1921년에 출생했고, 카루소, 질리를 이어 이태리 테너의 계보를 이으며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달콤한 미성의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Jiuseppe di Stefano 1921~ ), 힘과 격정적인 음색의 테너 프랑코 코렐리(Franco Corelli 1921~ )도 태어났습니다. 이태리가 자랑하던 위대한 성악가 카루소는 죽었지만, 어찌보면 신기할 정도로 위대한 성악가가 될 또다른 세 사람이 마치 그의 혼을 이은 듯 태어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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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중 어쩌면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할 수 있는 마리오 란자는 1921년 이태리계 부모의 외동 아들로 South Philadelphia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란자는 카루소를 우상으로 삼았고 훗일 카루소 같은 훌륭한 성악가가 되기를 바라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마리오 란자는 오페라 무대가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유명해졌습니다.
트럭 운전사로 일하면서 성악 교사의 지도를 받고 지내던 마리오 란자는 20세가 되던 어느날 커티스 음악원 강당에 피아노를 배달하러 가서 평소처럼 오페라 아리아를 흥얼거리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당시 보스톤 심포니의 지휘자 쿠세비츠키(Sergey Koussevitzky 1874~1951)가 이를 지켜보고는 그의 재능에 놀라면서 버크셔(Berkshire) 음악센터에 그를 소개, 잠재된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게 되었습니다. |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마리오 란자는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인 1945년에는 드디어 당시 미주 대륙 최대의 레코드사였던 RCA사와 전속 레코딩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1947년에는 헐리우드에서 영화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1949년 "That Midnight Kiss"를 시작으로 마리오 란자는 영화계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고 당시의 인기 발라드 뿐만 아니라 베르디 오페라의 유명한 아리아도 불렀습니다. 그의 두 번째 영화 "The Toast of New Orleans"도 흥행에 성공했고 유명한 그의 노래 "Be My Love"로 세계 음악 차트의 10위권 안에 들었습니다.
Mario Lanza의 Be My Love 듣기
그의 세 번째 영화가 바로 유명한 "The Great Caruso- 위대한 카루소"인데,
카루소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이 영화에서 주인공 카루소 역을 맡아 명성을 떨치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제 오페라 무대에는 자주 서지 못했다고 하는데 1948년에 푸치니의 <나비부인>의 핀커톤 역으로 단지 두 번만 섰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음악계에서는 그를 정통 오페라 가수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더군요.

영화 에서 감독과의 논쟁을 벌인 이후로 헐리우드 영화계를 떠난 마리오 란자는 1957년에 로마로 이사를 갑니다. 거기에서 그는 영화 두 편을 찍고 유럽 콘서트 여행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오페라 무대 복귀를 준비하던 그는 1959년 8월 7일 로마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카루소의 계승자로 불리던 마리오 란자는 38세의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영화와 RCA에 10여 년간 남긴 400회의 레코딩으로 그의 멋진 전설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가 불러 히트를 쳤던 "Be My Love", "The Lovelist Night of the Year", "Because You"re Mine" 등은 지금도 세계 유명 성악가들에게 널리 애창되고 있다고 합니다.
영화 는 세계의 많은 성악도들에게 감명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카루소처럼 훌륭한 성악가가 되겠다는 꿈과 용기를 가지게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에스파니아 출신 테너 호세 카레라스(Jose Carreras 1946~ )는 7세 때 그의 고향 바르셀로나에서 상연 중이던 영화 "The Great Caruso"를 보고는 넋이 빠져 자신도 크면 반드시 카루소나 마라오 란자와 같은 훌륭한 성악가가 되리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천재성을 바탕으로한 이같은 결심은 그 역시 세계 최정상의 테너가 되게 하였는데 그에게 성악도의 꿈을 심어 주었던 마리오 란자를 기리며 1993년에는 "With a song in my heart"라는 타이틀로 추모앨범까지 냈다고 합니다.
마리오 란자(Mario Lanza 1921~1959)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부른 차이코프스키의 가곡 "None But the Lonely Heart"를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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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E BUT THE LONELY HEART" Tchaikovsky (based on a poem by J.W. von Goethe) --- Tenor. Mario Lanza
None but the lonely heart Can know my sadness Alone and parted Far from joy and gladness Heaven"s boundless arch I see Spread about above me O what a distance dear to one Who loves me None but the lonely heart Can know my sadness Alone and parted Far from joy and gladness Alone and parted far From joy and gladness My senses fail A burning fire Devours me None but the lonely heart Can know my sadn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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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연주시간 : 3분 1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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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 !! 안단테님! 오직 고독한 마음뿐--에 대한 많은 자료 얹어 주셔서 잘 보았습니다. 마리오란자는 저도 고등학생때 황태자의 첫사랑을 학교 단체 구경을 가는 바람에 접하게 되었지요. 대학게 가서는 드링송을 부르면서 카바이트 막걸리를 마시던 생각이 납니다. 군복 물둘인 것에 군화 신으면 그만 멋쟁이였던..ㅎ
선률에 온통 맘을 빼앗김은 물론 마치 거미줄처럼 잘 짜여진 세조각의 글들 인상깊게 읽었습니다.특히 아이작 스턴에 관한 설명 많은 도움이 되었구요 어릴적 명화시간 보는게 낙이었던 그때가 떠 오르게 하는 마리오란자의 모습과 음성이 잠시 그시절로 되돌아가게 하네요.아들내미가 언젠가 이 곡 다시 들려줄수있을려나.
안단테님의 꼼꼼한 해설 덕에 좋은 음악에 대한 색다른 이해를 가져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음악에 푹 빠져보는 여유로운 금요일 한 낮...감사^^
manhattan님, 겨울나무님 좋은 시간 가진 것은 좋은데 오해를 하신거 같아 정정해 드립니다. 제가 클래식 방에 올린 자료는 지난번에도 한번 말씀드린바와 같이 공지에 올려져 있는 '이원영수채화 갤러리 뮤직박스' 자료를 하나씩 소개해 드리는 것입니다.
아래에 있는 자료는 인터넷에서 검색한 자료를 위 내용의 보충자료로 첨부한 것입니다. 저는 클래식에 관심은 있지만 문외한 입니다. 타인의 자료를 옮기면서 본의 아니게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한 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대학시절 물들인 군복 입고 카바이트 막걸리(선조님의 보충 설명 필요함) 마시면서 드링송을 부르던 멋쟁이 시절의 선조님 사진을 보고 싶은 억제할 수 없는 갈망이, 누를수 없는 충동이, 식힐 수 없는 열망이 용솟음치는데 가능한지요?
맞네요. 카바이트 막걸리 지금은 없으니깐요. 카바이트는 아시는지.. 카바이트불도 이젠 없어진 먼 얘기니깐요.60년대에는 막걸리를 원조물자로 들어온 사료용 옥수수가루로 막걸리를 만들었답니다. 숙성을 카바이트를 써서 만들어 양푼대접에 막걸리를 담아 놓으면 불빛에 막걸리표면이 반짝거렸지요. 그걸 마시고 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