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 - 눈물의 해협(海峽)
김상화 작사 / 박시춘 작곡
지금 흘러나오는 이 노래 “눈물의 해협”은 남인수가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고
18세 되던 해에 서울에서 작곡가 박시춘을 맞나 처음으로 취입 발표된 유행가입니다.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 최고의 찬사를 받는 미성 가수 남인수는 고음
저음처리를 잘하고 가사발음과 감정표현이 정확하여 모든 음악을 소화하는데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고 하여 불멸의 기린아라고 칭송들 합니다.
1935년 당시 일제 강점기에 현해탄의 관부 연락선에서 피고 지는 애틋한 사연을 담은
이 노래 (김상화 작사. 박시춘 작곡)가 남인수의 본명 강문수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지만
신통한 반응을 얻지 못하고 세상에서 파묻혀지고 말게 됩니다.
이유는 유명 레코드사가 아닌 좀 뒤쳐진 시에론 레코드사의 재정적 결핍으로 유통망
미약과 음반제작과정의 음질 차이 등. 여러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암울했던 시대사조에 깊숙이 우수에 파고들지 못했고 가수의 예명조차
세련되게 이를 뒤바쳐주지 못한 원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 강문수의 타고난 미성과 재질을 알아차린 명성이 있는 일류
OK레코드사에서 그를 우선 본명인 강문수를 예명 남인수로 바꾸고 전속가수로 대우하는
한편 “범벅 서울”과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 두곡을 데뷔곡으로 선보이면서 박시춘과
다시 만나게 하여 1938년 “눈물의 해협”을 “애수의 소야곡”(이부풍 작사)으로 제목과
노랫말을 바꾸어 발표하게 됩니다.
이 노래가 대 히트하면서 남인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그의 가요황제 전성시대가
열렸는데 인기가 얼마나 컸던지 그가 극장에서 공연을 할라치면 권번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가 극장 앞에 진을 쳤고 끝날 때쯤 되면 남인수 모시기 쟁탈전이 벌어졌다고 하니
그의 인기가 얼마나 컸던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그리고 이 “애수의 소야곡” 음반은 출시되자마자 놀라운 판매실적을 올렸다고 합니다.
순식간에 매진되어 레코드를 구하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들로 하여금 회사 일대의
여관에는 빈방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요?
그는 애석하게도 1962년 45세의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폐병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연예협회 주관으로 서울 조계사에서 “애수의 소야곡”을 장송곡으로
대신하여 거행되었으며 그의 고향 진주에 묻혔습니다.
-----처음 시에론 레코드사의 "눈물의 해협" 노래발표 당시의 광고-----
-----1957년 고복수 은퇴공연시. 앞 왼쪽으로 부터 남인수,신카나리아.황금심.고복수-----
애수의 소야곡 (박시춘 작곡. 이부풍작사)
[현재 인터넷에 회자 되어 있는 "애수의 소야곡"은 거의가 남인수의 육성이 아니고
모창가수의 노래인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당시 SP레코드의 음감인것 같아 선곡을 해 보았습니다만은 자신은 없습니다.
남인수의 음성은 정말 아름답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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