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하면 많은 부족한 점에도 불구하고 '개정약사법'은 받아들일 만하며 이번 재 폐업이 의사들의 이기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득보다는 실이 많은 투쟁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약사법의 몇몇 세부 조항의 개정보다도 더 중요한 의료개혁의 과제가 앞으로 산적해 있으며, 이를 성공적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국민과 여론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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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분업과 개정약사법에 대한 밝누모의 견해
밝누모 (밝은 의료사회를 위한 누가들의 모임)
약사법 재개정안이 국회복지위를 통과하였습니다. 많은 의사들이 이 법안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으며, 이 안이 국회 본회의마저 통과된다면(현재로선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이는 기정사실로 보입니다), 이제 의사들은 중대한 결단의
갈림길에 서야 합니다. 불만족스럽더라도 일단 받고서 투쟁할 것인가? 아니면
전면적인 투쟁(총파업이나 불복종 운동 등)에 나설 것인가?
이 글은 여러분들의 판단에 일정한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며 작성되었습니다. 적어
도 의협 통신망에 올라오는 의사 선생님들 다수의 견해와는 다른 입장에 서 있는
글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견해가 의사들의 정상적 생존과 국민의 건강에 도움
이 되는 입장이라고 조심스럽게 평가해 봅니다. 긴 글이지만, 통신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소수입장의 의견으로 이해하시고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글의 순서)
1. 의약분업 다시 보기
- 동네의사들의 정상적 생존이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1) 동네의사들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2) 의약분업과 동네의사들의 생존
(3) 의약분업, 출발점인가 종착역인가?
(4) 분업의 파기가 동네의사들에게 유리한가?
2. 재개정 약사법에 대한 평가
- 몇 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1) 임의조제
(2) 대체조제
1. 의약분업 다시 보기 - 동네의사들의 정상적 생존이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의약분업과 관련된 수많은 논쟁의 핵심에는 결국 이 제도가 의사들의 정상적 생존
에 도움이 되겠는가, 아닌가라는 근원적 질문이 놓여있습니다. 여기서 정상적 생존
이라 함은 경제적 자립 뿐만 아니라, 사회적 명예(직업적 긍지)의 확보 둘 다를 포
괄하는 개념입니다.
이 글에서는 의사들의 정상적 생존 - 특히 경제적 자립이라는 관점 속에서 의약분
업을 다시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의약분업 자체는 의사들의
정상적 생존에 득이 되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선, 분업에 대한 우리의
대응의 내용이 이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제 한가지씩 검토해 보겠습니다.
(1) 동네의사들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의약분업으로 인해 동네의사의 정상적 생존이 어려워 질 것이라는 게 의사집단 내
부의 주류 견해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선 의약분업이
동네의사들의 생존에 있어서 '결정적 변수'라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실이
그러합니까? 의약분업 - 특히 의약간 직능의 합리적 배분 - 이 중요한 변수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으나, 이것이 결정적 변수라는 주장은 과도한 것입니다. 동네의
원의 생존을 위해선 의약분업 자체에 국한된 문제뿐만 아니라, 분업이 촉발한 의료
계의 여러 문제 - 특히 정부의 책임성 부족과 저수가 정책 - 에 대한 전면적 수술
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분업 이외에 동네의원의 생존과 관련한 중요 변수들은 여럿 있습니다. 첫째로, 의
료재정의 확충과 수가정상화를 들 수 있습니다. 둘째, 매년 3000명 씩 쏟아지는 의
료인력의 과잉 문제가 있습니다. 셋째, 외래환자의 45%를 담당하고 있는 병원과의
관계 - 의료전달체계의 정상화 문제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상위 30%가 전체 수익
의 70%를 가져가는 동네의원 내부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모두가 동네의원의 정상
적 생존을 위해 중요한 변수임에 틀림없으나, 이 중 첫째인 의료재정 확충과 수가
정상화가 가장 중요한 변수입니다. 의약분업을 막아내도 이 점이 해결되지 않는 한
동네의사의 어려움은 지속될 것이며, 반면 의약분업이 되더라도 이 문제가 해결되
면 동네의원의 정상적 생존은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의약분업과 총체적 의료개혁의 과제(현행 저부담-저수가-저급여 체계의 적정
부담-적정수가-적정급여로의 전환)는 원래 별개의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두 과제는 의료재정과 수가문제를 매개 고리로 하여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하나의
정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즉, 수가의 정상화와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재정의 확보
가 분업의 성공이나 총체적 의료개혁 모두에 핵심적 요구가 된 것입니다.
한편 의약사간 임의조제를 둘러싼 갈등이 왜 집중적으로 부각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호간의 불신 등 여러 요인이 있으나, 핵심은 작은 파이를 서로
나누는 형세로 의약분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의사가 진찰료와 처방료만
으로 만족할 수 있고, 약사가 조제료 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의료재정이 확
보되었다면 의약분업과 관련된 여러 논란은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도 있었을 것입
니다. 재정확충과 수가정상화를 내걸고 의약사가 연합하여 정부를 상대로 싸울 수
는 없었던가? 더군다나 의료재정의 확충은 의료계보다 앞서 시민사회도 지속적으
로 주장해왔던 것이기에 아쉬움은 더욱 크다고 할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임의조제와 약사법의 재개정 문제가 동네의원의 생존에
있어 중요한 변수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정적 변수는 아니다는 것입니
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은 수가의 전면적 개선입니다. 만약 전자에 집중한 싸움
이 후자의 해결에 도움이 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러나 그 반대라면 전자의 싸움은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당장 9월에 수가계약제와 관련한 격랑이 예정되어 있고,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선 머지 않은 시기에 현행 저부담-저수가-저급여 체계의 적정부담-적정수가-적정
급여로의 전환이라는 과제가 전면화될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이 총체적 의료개혁의
과제는 국민들의 부담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의사들의 힘이 아무리 강화되어도 우
리들의 힘만으로 관철할 수 없는 고위정책(High politics)인 것입니다. 따라서 당면
한 약사법 재개정 투쟁 국면에서 우리 의사들이 정부가 아닌 국민과 여론을 상대
로 싸우는 우를 반복해선 안될 것입니다. 또한 총체적인 의료개혁의 비전을 제시하
며 나서기 보다 어떤 의미에선 지엽적으로 보이는 문제에만 집중하는 전략적 오류
를 범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총체적인 의료개혁을 둘러싼 정부와의 진검 승부의 시기는 머지않아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 때 정말 후회 없는, 멋진 투쟁을 해봤으면 하는 바램
입니다. 지금처럼 고립되고 외로운 투쟁이 아니라, 국민건강을 전면에 내걸고서 국
민 및 여론과 함께 무책임한 정부를 옥죄는 그런 아름다운 투쟁을 말입니다.
(2) 의약분업과 동네의사들의 생존
현재의 판을 크게 볼 필요가 있다는 전제를 하고서, 이제 분업 자체에 국한하여 논
의를 전개해 보겠습니다. 분업과 관련한 동네의사들의 생존은 크게 두 가지 변수에
의해서 좌우될 것입니다. 하나는 가장 중요한 변수로 앞서 언급한 수가정상화의 문
제이고, 둘째는 분업 이후 환자수의 감소여부입니다.
환자수의 감소여부는 다시 다음의 다섯 가지 변수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1) 임의조
제의 감소정도 2) 의약품분류 - 일반의약품의 폭 3) 본인부담금의 인하정도 4) 동
네의원 자체의 경쟁력 5) 환자들의 의원 이용형태의 변화가 그것입니다. 이 글에서
이 변수들을 다 살펴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편 환자수 감소 여부는 '현상적'으로
는 두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됩니다. 즉, 불편 등의 이유로 동네의원으로부터 환자
가 얼마나 감소할 것인가 하는 점, 소위 '탈락률'과 약국으로부터 의원으로 이전되
는 환자, 소위 '회송률'이 얼마나 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느 누구도 환자수가 증가할 것인가 혹은 감소할 것인가, 감소한다면 어느 정도일
것인가에 대해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각각의 변수에 대한 해석도 다
양할뿐더러 다양한 변수를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정확한 예측을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대략의 예측은 해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민초의사들의 예상은 대단히 비관적인 데 비해(예를 들면 환자수의
급격한 감소로 인해 동네의사의 30%가 구조조정될 것이다) 의쟁투나 의협 중앙에
서 정책을 담당해오셨던 분들의 예측은 그리 비관적이지만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민초의사들의 예상은 크게 보아 두 종류의 판단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자신들이 써오던 약의 상당부분이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되었고, 이 때문에 이런 환
자들이 굳이 불편을 감수하며 의원에 오겠느냐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분업에도 불구
하고 약사들의 임의조제는 별로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예측
의 근거가 다분히 심정적인 것입니다. 즉, 구체적 자료와 통계에 근거한 판단이 아
니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판단하는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의약품분류에 대한 근거있는 고려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통신에 글을 올리
시는 분들 중에도 직접 분류 내용을 검토하고 발언하시는 분들은 많아 보이지 않
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생각하듯 우리의 약품분류가 완전히 엉망인 것은 아닙
니다. 복합제의 용량별 분류, 외용 스테로이드 등 문제가 있는 부분이 분명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선진국 수준에 근접해 있다는 평가가(특히 단일제) 크게 틀린 것
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임의조제의 관행이 만연된 우리 나라에선 선진국의 분류보
다 더욱 엄격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며, 이는 우리 역시 주장해왔던 바입니다.)
몇 가지 대표적인 예만 들겠습니다. 우선 대표적인 오남용의 주범으로 지적되던 항
생제, 스테로이드 등 호르몬제, 고혈압약, 당뇨병약, 이뇨제가 모두 전문의약품입니
다. 미국에선 비처방약인 저용량 라니티딘 정제도 우리의 경우 처방약입니다. 미국
과 영국에서 비처방약인 로페라마이드도 우린 처방약입니다. 약국에서 관절염 치료
를 위해 환자들에게 스테로이드와 함께 사용하던 디클로페낙, 피록시캄, 나프록센
(나프록센의 저용량은 일반)의 경우도 전문입니다. 사실 의원급 내원 환자의 질병
분류 순위 10위에 드는 질환중 일반의약품만으로 '적절한 처방'이 가능한 질환은
단순감기(상기도 감염, 급성비인두염) 정도 뿐입니다. (의료보험통계연보 참고)
더군다나 의약품분류는 내년에 재분류하기로 되어있고, 남은 기간동안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우리 측에 더욱 유리한 변수가 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용량별 문제에 대해선 반드시 손을 봐야 하는데, 이 점은 '5개월 유예
가 큰 문제인가?'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결국 일반의약품 만으로, 그것도 개봉
이 금지된 판매 형태의 투약만으로 치료될 수 있어, 의원으로부터 탈락하는 환자는
대다수 민초의사들의 예상처럼 아주 많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단순감기 등
경미한 질환으로 동네의원을 찾았던 환자 위주로 탈락될 것이고, 여기에 환자들에
대한 처방기간의 연장에 따른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가 더욱 중요한 부분인데, 의원급에서의 탈락률만 고려할 뿐 약국으로부터의
회송률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약국에서 임의조제를 받던
환자는 년간 3억건 정도(약품의 단순 판매 제외)로 추정되는데, 이는 전체 동네의
원급의 처방 숫자와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양입니다. 이게 우리나라 임의조제의 현
실입니다. 이 중 얼마나 의원급으로 이전될 수 있을까요? 기존에 임의조제를 받던
환자 중, 일반의약품의 매약 만으로 조절이 가능한 환자와 투약 중지나 다른 대체
요법의 선택 등을 통해 빠져나가게 되는 부분을 제외한 환자 중 상당수가 의원급
으로 회송될 것입니다. 사실 이 회송률이 20% 정도만 되어도 현재의 수가체계에서
의사들의 수익에는 변화가 없으리라는 예측이 있을 정도로, 약사들의 임의조제의
폭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환자 회송과 관련하여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YMCA 등의 표본조사에 따
르면, 약국에서 단순감기로 조제를 해도 약의 가짓수가 평균 5-7 가지였습니다. 여
기에는 항생제뿐만 아니라 스테로이드 등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약국이 소
위 약발이 잘 들어 경쟁력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조제는
금지되고, 판매할 수 있는 약품도 일반의약품으로 국한되며, 약의 가지수도 통약판
매에 따른 환자의 수용성을 고려하면 3가지 이상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단순감기
에서도 소위 약발이 먹히긴 쉽지 않으며, 더구나 심한 감기나 항생제 처방이 필요
한 합병증을 동반한 감기는 약국에서의 단순 투약만으로 조절되기 어렵습니다. 그
러면 그 환자가 어디로 가게 될까요? 대부분은 동네의원을 찾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고혈압약이나 당뇨병약 등 전문의약품을 약국에서 매약하던 환자들은 결국은
동네의원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추가적인 내용은 '임의조제 얼마나 줄 것인가?'
를 참조)
한편, 환자의 탈락과 회송은 동네의원의 정상화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실 동네의
원에서 단순감기 환자들을 주로 보아왔던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의료 선진
국의 경우 단순감기는 투약과 주사가 아니라, 며칠 쉬면 낳는다는 인식이 일반적입
니다. 단순감기는 병원에 갈 게 아니라, 쉬거나 타이레놀의 단순 매약 정도로 스스
로 관리할 수 있는 질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자들이 동네의원의 주고객이
되어왔던 것은 우리 국민들의 의료이용 관행에 기인하기도 했지만, 동네의원에서
치료하고 관리해야 했던 많은 환자 - 특히 전문의약품 투약 환자 - 들이 약국에
방치되어 동네의원에 회송되지 않았던 데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분업은 환자의 탈락과 회송을 통해 동네의원의 환자군을 정상화하는 계기가 되기
도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대략적인 예측에도 불구하고, 환자수가 급격히 감소하진 않을 것이라는 보
증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 시행해 보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예측일 뿐입니
다. 따라서 이를 대비한 안전장치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이 6개월 간 동네의원
의 수익구조에 대한 평가 및 보전 약속입니다. 이것은 대통령이 분업으로 의사들이
손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언급으로 약속되었고, 지난 투쟁의 성과로 6개
월이라는 기간이 명시된 것입니다. 따라서 설사 환자수가 감소한다 하더라도 이를
수가로 보전할 수 있는 안전장치는 마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부의 약속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반문하실 분들이 있겠지만, 만약 정부가 약속을 안지키는 상황이 전개
된다면 투쟁의 명분은 우리에게 있게 되고, 지금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투쟁을 벌
여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금융노련 파업사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금융종
사자에 대한 구조조정이 없을 것이라는 과거 정부당국자의 약속이 결국 이를 번복
할 수 없는 족쇄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우리의 문제는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약속한
것 아닙니까?)
중장기적 안목에서 볼 때 의약분업이 동네의원의 경쟁력 강화와 정상적 생존에 도
움이 되는 제도라는 점은 '임의조제 얼마나 줄 것인가?'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
습니다.
(3) 의약분업, 출발점인가 종착역인가?
의약분업을 반대하는 분이든 찬성하는 분이든 의약분업 자체에 지나친 위상을 부
여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분업을 반대하는 분들은 보험체계의 문제, 진료의 자율
성 훼손, 의료전달체계의 문제, 의권의 실추 등 거의 모든 의료계의 문제점이 마치
분업 때문인 것처럼 분노를 표출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분업을 찬성하
는 분들 중 어떤 분들은 의약분업을 의료 인프라가 모두 완비된 상태에서의 최종
적 결과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씩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분업을 반대하시는 분들의 의료체계 전반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되, 그것이 분
업 자체에 집중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의약분업이 파행적인 의료
체계의 여러 문제점을 촉발하고 부각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한 책
임이 아직 본격적으로 실행되지도 않은 의약분업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의료인프라의 완비 이전에 의약분업을 해선 안된다는 주장은 의약분업
을 모든 의료개혁의 최종적 결과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분업이 무슨 지고
의 선입니까? 분업 자체로 그런 의의를 부여하는 건 과도한 것입니다. 오히려 의약
분업은 잘못된 의료제도 - 특히 전근대적 의료관행 - 를 개혁하는 '계기'이자, '출
발점'이라는 게 정확한 지적일 것입니다. 분업이 이처럼 논란되지 않았다면, 수가정
상화나 보험제도의 개혁 문제는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이후에나 부각되었을 것입
니다. 의료전달체계의 정상화문제도 의약분업으로 인해 더욱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동력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의약사의 비율 문제도 분업이 아니라면 제기
될 이유가 없는 이슈입니다.
역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분업이라는 계기가 아니었다면 의료전달체계의 정상화 문
제도, 수가정상화 및 보험제도의 개혁 문제도 지금처럼 부각되고 문제화되기 어려
웠을 것입니다. 문제의 부각은 그 자체로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의사들의 대응입니다. 분업 자체도 중요하지
만, 분업이 촉발하고 공론화시킨 의료계의 온갖 문제를 의사들이 어떤 식으로 대응
하며 풀어나가는가 하는 점이 향후 의료사회의 향방을 결정할 것입니다. 의약분업
은 종착역이 아니라 출발점이며, 동네의사의 정상적 생존을 위한 투쟁은 끝이 아니
라 이제 시작입니다.
(4) 분업의 파기가 동네의사들에게 유리한가?
많은 분들이 현재의 의약분업에 대해 만족해하지 못합니다. 의약분업의 성공적 정
착을 주장하는 우리들도 현 분업안에 100% 만족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럼에
도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분업 자체를 파기할 정도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선 몇 가지
고려가 필요합니다. 첫째, 현 분업안의 헛점이 분업을 파기해야 할 정도로 심대한
것인가에 대한 판단, 둘째, 분업의 파기가 동네의사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그것입니다. 첫 번째 문제는 '재개정 약사법에 대한 평가'에
서 다루도록 하고 여기서는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분업의 파기는 동네의사들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습니다.
첫째, 분업의 파기는 향후 동네의사들의 중장기적 생존전략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
입니다. 분업은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그 동안 자유롭게 이루어지던 약사들의 임의
조제를 제한해 그들의 관할 하에 있던 환자를 동네의원으로 회송시키는 제도입니
다. 물론 이는 이전에 의사들의 관할 하에 있던 환자의 탈락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위에서 설명했듯이 이는 동네의원의 정상화를 의미하기도 합니다(분업을 안하면서
국민건강에 심각한 위해가 되고 있는 약사들의 임의조제를 막을 수 있으면 그도
좋겠지만, 문제는 현실적으로 그런 방도를 찾아 합의를 도출하고 그것을 제도로 관
철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분업이 되지 않으면 현재처
럼 투약과 주사 중심의 진료형태가 쉽사리 변하기 어려우며, 환자들에게 의사들의
무형의 가치 - 상담과 교육 등 지적활동 - 의 중요성과 그에 대한 대가의 지불(기
술료 인정)을 인식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진료에 대한 이런 인식이 극복
되지 않는 한, 동네의사의 정상적 생존은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분업이 촉발한 '진료의 패러다임 변화'와 관련하여 다음에 다시 설명하겠습니
다.
둘째, 단기적으로도 결코 유리하지 않습니다. 분업이 파기된다고 해서 리베이트나
할인할증이 '이전처럼' 되살아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분업이 좌절되면 약가 마진
의 매커니즘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시민 단체가 과도한 약가의 거품을 그냥 두고
보겠습니까? 이런 상태에선 약품관리 비용 및 외형적 매출에 대한 세무부담은 지
속되는 등 약으로 인해 이익을 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설사 약으로 인해 이익을 계속 획득할 수 있는 구조가 된다 하더라도, 상황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당면한 수가계약제부터 이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
나 우리가 약에서 손을 놓게되면, 진찰료나 처방료 등 지적기술료 인상에 대한 우
리의 주장은 이전보다 투명성과 합리성을 갖게 되고, 더욱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
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간과해서 안되는 점은, 현 분업을 파기시켰을 때 전개될 상황입니다. 분
업을 파기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마도 8월 1일부터 전면적인 불복
종 운동에 나서는 것일 겁니다. 의사들의 이 투쟁이 성공하여 정부가 항복한다고
할 때 과연 어떤 상황이 전개될까요? 그리고 의사들의 불복종 투쟁이 실패하였을
때는 어떤 상황이 전개될까요? 어찌되든 다시 원점에서 올바른 분업 - 완전의약분
업 - 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오히려 분업이 왜곡되고 누
더기가 된 상태로 정착되게 될 소지가 많을 것입니다. 이때는 국민건강을 위한 완
전의약분업이 힘을 얻기보다는 아마도 국민편익을 위주로 모든 논의가 재편될 것
입니다.
현 의약분업의 파기가 과연 국민건강 뿐만 아니라 의사들에게도 바람직한 완전의
약분업으로 귀결될 것인지, 아니면 국민건강과 의사들에게도 미흡한 왜곡된 제도의
정착으로 귀결될 것인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채 현재의 투쟁이 진행되고 있
다는 데서 우리는 그 심각성을 봅니다. 올바른 의약분업을 위한 의사들의 충정과
투쟁이 그나마 차선책이라도 되는 제도를 무산시키고, 그 결과로 국민건강이 아니
라 국민편익을 중심으로 왜곡된 의약분업을 불러오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재개정 약사법에 대한 평가 - 몇 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1) 임의조제
* 39조 2항의 삭제 만으론 부족한가?
사실 39조 2항은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습니다. 이 조항의 삭제는 시민단체가 그렇
게도 애지중지하던 5.10 합의안의 수정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법안
에서 이 조항은 삭제되었습니다. 5개월의 유예기간과 함께.
그런데 많은 의사들은 이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원천적 분업
반대파는 약사법을 어떻게 고치든 만족하지 못할 분들이니까 차치하더라도, 올바른
의약분업을 주창해오셨던 분들에겐 5개월 유예 조처와 포장단위(30정 이상)에 대한
규정이 없었던 점이 불만족스러웠을 것입니다(우리 역시 100 % 만족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불만을 하나 덧붙이자면 OTC 약품의 수퍼판매 허용 문제 정도이겠지
요. 이 글에서는 포장단위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행처럼 이에 대한 규정이 없이 제약회사의 자율에 맡긴다면 당연하게도 소포장
단위(2정, 5정, 10정 등)에 대한 유혹을 느낄 법 합니다. 그런데 모든 일반의약품에
대해 제약회사가 이런 방식을 취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
다.
첫째, 환자와 약사 입장에서의 경제적 메리트와 관련된 것입니다.
소포장 단위가 작아질수록 개수 대비 생산가는 월등히 증가합니다. 1정 포장이든
30정 포장이든, '약품설명서와 약품포장에 따른 기본비용'(이하 기본비용)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소단위 포장일수록 전체 비용중 약품원가를 뺀 기본비
용의 비중이 증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소포장 단위일수록 단위별 생산원가가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소비자와 약사에게도 그대로 전가됩니다. 소비자가 바
보거나 포장별 가격차가 무시할 정도가 아니라면 가격과 편익의 분기점이 될 수
있는 단위를 선호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약사 입장에서도 소포장 단위의 판매로 만족스러운 마진을 남기긴 어려울
것입니다. 한 환자를 기준으로 약사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환자가 일정
기간 반복적으로 그 약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전제가 있지 않다면, 약품 단위별 마
진 및 총마진이 월등히 많을 대포장의 판매를 선호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소단위
포장으로 혼합판매를 한다해도 그 마진은 3700원 하는 조제료 수익에 비하면 턱없
이 부족할 것입니다. 결국 환자와 약사 입장에서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포장단위
는 사멸해 갈 것입니다.
둘째, 혼합판매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혼합판매를 할 때 포장단위가 일치하지 않으면 환자 입장에서 수용성에 문제가 생
깁니다. 예를 들어 A약은 2정 단위, B약은 5정 단위, C약은 10정 단위라면 당연히
환자입장에서 이런 판매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투약 후 불균등하게 남
는 약들이 생길 테니까요. 혼합판매가 용이하려면 제약회사별 각각의 약들의 단위
가 공유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단위를 지나치게 세분하는 건 제약회사 입
장에서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단위 세분에 따른 상당한 이윤이 보장되지 않는
한, 각 생산라인을 따로 가동하는데 따른 부담을 안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
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39조 2항의 삭제만으로 부족한 면이 분명 있지만, 포장단
위를 제약회사에 일임한다 해도 아주 심각할 정도로 포장단위의 세분은 없을 것이
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상의 견해가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를 전제도 한 가지 안전장치를 제안하겠습니다. 만약 제약회사들이 소포장 생산에
주력하는 식으로 나오고, 그 약들이 회충약이나 소화제와 같은 환자의 편익성을 뛰
어넘어 임의조제의 통로로 이용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면 그 때 다시 나서자는 것
입니다. 의사들이 임의조제에 대해 지금 정도의 민감성만 유지하고 있다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제약회사 몇 곳을 선택하여 불매운동, 비처방 운
동에 나섭시다. 일전의 대웅팜 사건처럼 전공의 협의회 차원에서만 나서더라도 제
약회사가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명분만 분명하다면 말입니다.
* 5개월 유예가 큰 문제인가?
약사법 개정과 관련된 또 하나의 쟁점은 5개월 유예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 정부는
이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약국과 제약회사의 경우 현행 약사법 - PTP,
Foil의 소분허용 - 을 기준으로 분업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조항이
폐지되게 되었습니다. 약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재고량을 소진해야 하고, 제약회사
는 새로운 포장단위의 준비에 따른 시간이 필요합니다. 만약 이 유예기간을 주지
않는다면, 약사 및 제약회사들이 정부를 상대로 피해보상소송을 낸다해도 정부가
패하게 되어있습니다. 반면 의사들의 약품 재고문제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는 약사
법 '재개정' 문제에 의해서 영향받는 사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이해하더라도 남는 문제가 있습니다. 즉, 이 유예기
간동안 임의조제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PTP, Foil의 소분 판
매를 허용하는 현행 약사법이 개정약사법에 비해 임의조제의 통로로 이용되기 쉬
울 것이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간 시범사업을 주장해왔던 의협
이 이 유예기간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
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5개월은 전국적 차원의 실질적인 시범사업 기간일 수도
있겠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 5개월 동안 약사들의 임의조제가 지금보다 심해질까요? 그건 아니지
요. 전문의약품의 임의조제는 물론이고, 일반의약품의 판매에 있어서도 PTP, foil이
라는 형식으로 인해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됩니다. 지금에 비해선 상당한 정도로 감
소할 것이라는 게 타당한 예측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아래에서 다시 살펴보겠습
니다. 그렇다면 국민건강이라는 차원에서도 명분은 없는 겁니다. 다만 한가지 명분
은 의약사 간의 불공정 게임이라는 것이며 우리도 이 점에선 불만스럽지만, 이게
얼마나 사회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설사 불공정 게임이라는
사실을 이해해 준다해도 5개월도 못 참느냐고 반박하면 뭐라 해야 할까요?
한 가지만 덧붙이고자 합니다. 5개월의 유예기간동안 의사들이 놀고만 있어선 안됩
니다. 약사들의 임의조제의 행태를 조사하고, 이를 근거로 '증거'를 가지고 내년에
있을 의약품재분류에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함량별
분류의 경우 의사들의 주장이 단지 약사들에 대한 과도한 불신에 근거한 것이 아
니라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함량별 분류가 가능한 것은 약
사들이 정해진 함량의 알약을 두배씩 주지 않을 직업윤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5개
월의 유예기간동안 약사들이 두배씩 주는 방식으로 '규칙'을 어기는 것이 드러나면,
이 분류체계를 수정할 타당성이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것입니다. 이 때는 의약품 분
류에 대한 의사들의 대응이 선험적, 감정적 대응이 아닌 경험적, 과학적 대응이 될
것입니다.
* 임의조제 얼마나 줄 것인가?
임의조제의 감소여부는 법과 제도의 정비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점은 다들 인식하는 바입니다. 약사법이 의사들의 요구대로
100% 개정된다 하더라도 임의조제가 그 때문에 근절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
게 낙관적인 생각입니다. 법만으로 사회문화적 관행이 하루아침에 뜯어고쳐지는 것
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의약분업이 임의조제와 무분별한 매
약이라는 전근대적인 사회문화적 관행을 개선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의약분업은 약사의 임의조제가 얼토당토않다는 것과 의사들의 지적 활동 - 무형의
진료행위 - 의 가치를 국민들에게 인식시킬 수 있는 제도입니다. 하루아침에 될 일
은 아니지만, 제도의 변화와 사회적 캠페인, 진료실에서 의사들의 노력 등이 함께
어우러질 때 국민의식은 훨씬 효과적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언제 지적
소유권 개념이 있었습니까? 요즘도 불법 CD가 유통되긴 하지만, 이제 지적 소유권
은 국민들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집니다. 이건 무엇보다도 불법복제 등을 처벌하는
법률의 제정과 제도의 변화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임의조제는 얼마나 감소할까요? 여기에는 여러 이견이 있지만, 최소
한 매년 1억 6천만에서 1억 8천만 건으로 추산되는 전문의약품에 의한 임의조제
(새로운 의약품 분류 비율을 기준 할 때 이 숫자는 더욱 증가할 것임)는 근절될 것
이라는 점입니다. 동네의원과 병원을 포함한 총 조제건수가 일년에 5억 건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이는 엄청난 양입니다. 여기다가 약포지를 이용한 일반의약품의 조
제도 근절될 것이며, 일반의약품의 혼합판매도 일정한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
다. 더구나 39조 2항이 폐지되면 혼합판매는 더욱 제약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남는 문제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는 끼워팔기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생약과 한약의 판매 확대입니다. 전자의 경우 선보완이 되었더라면 좋았을 문제이
지만, 안되었기에 이제 분업 이후 약사들의 행태를 모니터해, 의사들의 우려가 근
거 없는 게 아님을 증명함으로써 개선시켜야 합니다. 후자의 경우는 결국 한약분업
(한약사를 제외한 약사의 한약조제 금지)으로 풀어야 하며, 단기적으론 제약회사에
서 생산한 과립제에 한한 판매허용이나, 100방 이내 조제에 대한 규제강화 등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임의조제의 문제는 단순히 약사법 규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앞서 얘기한대로 사회적 캠페인이나 임의조제를 근절하기 위한 진료실에
서 의사들의 노력, 덧붙여 적절한 감시시스템과 post-marketing surveillance 가 필
요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동네의원이 약국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동네의원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선 전문의약품의 확대와 본인부담금 인하와 같은
제도적 보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선 이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
것은 의약분업으로 바뀐 진료의 패러다임에 걸맞게 동네의사들이 스스로의 위상과
역할을 새롭게 함으로 확보되는 경쟁력입니다.
사실 우리 국민들이 약사들의 말에 휘둘리고 있다는 비판과, 그런 약사들을 신뢰할
수 없다는 불만 이전에 의사들 자신의 반성도 필요합니다. 결국 원칙에 충실한 의
사와 원칙에 충실하지 않은 약사 사이에서 국민이 누구를 더욱 신뢰할 것인가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된 근원적인 책임은 파행적인 의료제도에게 돌
려져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의약분업은 진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제도입니다. 이전에는 약과 주사 등
유형의 행위를 기본으로 진료해왔다면, 이제 의사들은 상담과 교육 등 무형의 행위
를 통해 자신들의 역할을 찾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제까지는 단순히 질병치료자
로서의 의사였다면 분업 이후엔 건강관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의사들이 이런 역할을 감당하며 실질적인 주치의로서 일할 수 있는 제반 조
건의 마련 - 특정질환 관리료, 상담료, 방문진료비 책정 등 - 이 필수적일 것인데,
분업이 바로 이를 공론화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분업은 의사들의 무형
의 진료 행위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이해시켜(의사는 단순히 약주는
사람이 아니다), 진료수가를 올리는 것과는 다른 인식의 전환을 가져올 것입니다.
결국 중장기적 안목에서 보자면 분업은 동네의사들의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
제도인 것입니다.
(2) 대체조제
* 외국의 예
OECD 국가중 상품명 처방에 대한 약사의 대체조제를 권장하는 나라가 4곳(미국,
독일, 캐나다, 네덜란드)이고, 억제하는 국가가 프랑스 등 8곳이며, 불간섭을 원칙으
로 하는 나라가 스웨덴 등 5곳입니다. 대체조제를 권장하는 나라의 경우도 의사가
대체불가를 명시하면 이를 따라야 합니다. (Heath : Quality and Choice, OECD
1994)
그런데 WHO의 기본 방침은 일반명 처방의 권장입니다. 최근 들어 프랑스에서도
대체조제금지를 명시한 법률을 개정하는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대체조제
억제가 아직까지는 많은 편이지만, 추세가 대체조제를 허용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 품목 제한은 정당한가?
'600 품목 내외의 상용처방의약품' 이라는 문제가 많은 의사들을 자극한 것으로 보
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약
사회 측 자료에 따르면, 15평-20평을 기준으로 할 때 구비 가능한 처방약품 숫자는
600 - 1000 품목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정도에도 비용이 8천 만원에서 1억 5
천만원 정도 들어간다고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어 보입니다. 의사들의 바램처럼
2천 품목이든 그 이상이든 제한 없이 구비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소형
동네약국 입장에서 이를 수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약국이 갖추어야 할 품목수가
지나치게 많아진다면, 소형 동네약국 앞에는 두가지 선택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약
국을 정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조제를 포기하고 다른 방향(편법)으로 약국의 활
로를 모색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모두 동네의원에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합니
다. 처방전을 수주할 약국이 인근에 없다면 그 동네의원의 경쟁력은 당연히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의사측 자료에서도 이 품목수가 얼토당토한 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
습니다. 시범적으로 지역의약협력위원회를 운영해본 김해시엔 이에 대한 자료가 있
습니다. 아마도 유일한 자료일 겁니다. 최장락 선생님이 이와 관련하여 의협 통신
망에 중요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이를 인용해 봅니다.
" 김해시의 약품 현황(내과 400여종, 소아과 150여종, 이비인후과 150여종, 비뇨기
과 40여종, 안과 30여종...) 합치면 상당하지만 거의 다 겹칩니다. 600-800종이 타당
합니다. 병원의 처방에도 무리가 없고 약국의 준비에도 별 큰 무리는 없습니다. "
의사들 내부의 조정을 전제로 하지만, 실제로 동네의원에선 이 정도 내외에서 별
무리 없이 처방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선 의사의 사전동의 없이
대체조제가 불가하므로, 거의 완벽하게 자신의 처방 내용을 고수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병원 급에서(특히 대형병원) 발급되는 처방전인데, 이는 이미 대형 문전약
국들이 처방전을 싹쓸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형병원이 자신들의 고
객이므로 그 병원에서 처방되는 약을 중심으로 2천 품목 이상을 준비하고 있다 합
니다.
600품목은 하나의 기준으로 제시된 것 일뿐, 실제론 지역 상황에 따라 재조정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600품목 '이내'를 '내외'로 고쳐달라는 것은 의약정 합
의에 대한 의쟁투 중앙위원회의 처음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바꾸긴 했지
만.) 더군다나 분업의 시대엔 미우나 고우나, 동네약국과 동네의사가 협조할 수밖
에 없습니다. 동네약국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는 동네의원은 생존하기 어렵다는 관
점 속에서 품목수 제한 문제는 다시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의약분업협력위원회에 관한 사항입니다. 자신들이 처방
할 목록을 의료인들이 주체가 되어 결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이 점이 제대로
될 것인지에 대한 의사들의 불신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데 현실적으로 어떻게 진행될 지는 좀더 두고봐야 할 것입니다. 복지위 안에서는
협력위의 구성과 운영에 대한 세부사항을 약사법에 규정하지 않고 보건복지부장관
이 정하여 고시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이 점은 모법에 규정되어 있을 때에 비해 수
정의 신축성이 크다는 점에서 다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든 의협의
주장처럼 법제화는 막은 것입니다.
* 약효동등성의 문제
생물학적 동등성(생동성)와 비교용출 시험 등에 대한 여러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총 26,000 여 품목의 약제가 허용되어 있는데, 이중 생동성 대상 품
목은 USP B code에 해당하는 300여 품목에 불과합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너무
적은 것이 사실인데, 문제는 우리 나라의 실정에서 생동성 검사를 할 수 있는 기관
은 10여 곳에 불과하고, 한 품목을 검사하는 데에만 3000 내지 5000 만원이 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시간과 비용 문제 때문에 대상 품목을 축소한 것으로 보입니
다.
생동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체조제의 허용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럼
에도 이것이 분업반대의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현재는 카
피 제품이 무분별하게 난무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약
효동등성 대상 11,704개 품목 중 대체조제 허용약품으로 허가된 것이 전체의
22.9%인 2,685 품목에 불과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의사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약효동등성에 대해 고려하고서 약물을
썼습니까? 분업이 되면 제약회사의 구조조정이 촉발되고 완전하진 않더라도 약효
에 문제가 있는 카피제품의 상당수가 도태될 것입니다. 위의 수치에서 보듯이 문제
가 있는 비교용출 시험일 망정 우리 현실에선 그나마 최소한도의 안전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헛점이 좀 있는 분업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 보다는
국민건강에 이익이 될 것입니다. (사족 한마디. 정부안은 상용처방(단일제) 품목을
결정할 때 약효동등성을 통과한 약품에 국한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의협은 이 내
용에 반대했습니다. 의협의 주장은 최소한의 안전조처라 할 약효동등성을 통과하지
않은 카피약도 사용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이 지점에선 의협의 의도에 의문
을 품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런 식의 약효동등성을 전재로 대체조제를 허용하는 것은 안될 말입니
다. 정부안은 상용처방의약품 이외의 약품에 대해선 대체조제를 허용하고 있지만,
이것이 무조건적 허용은 아닙니다. 우리 입장에선 두 가지의 안전장치가 있는 겁니
다. 하나는 환자에 대한 설명이고(이건 동의가 옳습니다. 국회통과 전에 고쳐지기
를 기대해 봅니다), 또 하나는 의사에 대한 통보 의무입니다. 이제 이게 왜 안전장
치가 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 대체조제 정말 문제가 될 것인가?
상용처방목록 이외의 약품을 처방해야겠는데, 이 약이 절대 대체조제가 되어선 안
되는 약이라고 판단한다면 환자에게 설명을 하면 됩니다. 대개의 환자는 이 판단을
존중할 것입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대체조제의 문제에 있어선 의사들의 판단을
따르겠다는 환자가 70%를 넘습니다. 더군다나 뜨내기 환자가 아니라, 여러 번의
follow-up을 통해 의사와의 rapport가 확보된 환자인 경우 이 비율은 더욱 증가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환자가 약국에 갔습니다. 약사 입장에서 환자를 설득해 대체조제하
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더군다나 3일 이내에 의사에게 통보해야한
다면, 업무량의 증가는 차치하더라도, 잘못되면 약국 입장에서 고객이랄 수 있는
병원 하나를 놓쳐버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 번에 의사는 약이 구비된 약국
으로 환자를 보내려 할 테니까요. 좀 심하게 얘기하면, 대체조제를 일삼는 약국은
동네의원들이 집단적으로 왕따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약이 없어서 불가피한 경
우를 제외하면, 약사 입장에서 대체조제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이득도 별로 없는
일입니다. 약사들이 가급적 의사들의 처방에 맞추려 한다는 사실은 김해시의 경험
에서도 증명된 바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대체조제 여부는 이제 법적으로 의사가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
는 의약정 합의안보다는 발전입니다. 당시는 상용처방 이외의 경우 생물학적 동등
성을 필한 약품이나, 카피제품을 오리지날로 바꾸는 경우 의사에게 사후통보도 하
지 않도록 되어 있었으니까요. 더구나 국회 복지위 안에서는 특이체질 환자의 경우
'대체불가'라고 명시할 수 있도록 하여, 사실상 의사들의 대체불가에 대한 판단을
허용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대체조제는 의사들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면 현실적으로는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글을 정리하며...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불만족스럽더라도 약사법개정안을 받고 투쟁할
것인지, 아니면 이를 거부하고 전면폐업이나 의약분업 불복종운동에 나설 것인지를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틀린 부분도 있
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은 주류 견해 이외에는 그 어떤
입장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풍토에서 균형적인 토론과 합리적 대안 도출이 있었으
면 하는 소망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부족한 이 글이 여러분의 선택에 있어 판단 근
거 중 하나로 이용되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
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