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평일 낮에도 노인들이 거리에 많다. 전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고, 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작은 배낭을 메고 여행한다. 편의점이나 마트, 아파트 관리실에서 일하는 60대와 70대도 낯설지 않다.
일본은 한국보다 먼저 초고령사회에 들어갔다. 그래서 일본 시니어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고령사회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알 수 있다. 핵심은 하나다. 은퇴 이후의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는 것이다.
65세에 직장을 떠나도 80대, 90대까지 살 수 있다. 과거에는 노후를 10여 년 정도로 생각했다면 이제는 20~30년을 생각해야 한다. 그만큼 돈도 필요하고 건강도 오래 유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가 새로운 문제가 됐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정년이 곧 은퇴를 뜻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촉탁이나 계약직으로 몇 년 더 근무하는 사람이 있고, 전혀 다른 일을 찾는 사람도 있다. 경비, 청소, 운전, 건물 관리, 마트 등에서 고령 근로자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들이 일하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소득이다. 연금만으로 생활하기 빠듯한 사람에게 월급은 중요한 보탬이다. 그러나 경제적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을 떠나는 순간 사람을 만날 기회도 크게 줄어든다. 일은 돈을 벌면서 사회와 접촉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생활비를 관리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일본 시니어 가운데는 소비 규모를 크게 줄인 사람이 많다. 슈퍼마켓 할인 상품을 이용하고 가까운 거리는 걷거나 자전거를 탄다. 외식도 비싼 식당보다 동네 음식점이나 체인점을 찾는다.
그들에게 절약은 단순한 생활습관만은 아니다. 언제까지 살지 알 수 없는 시대의 대비책이기도 하다. 지금 건강하다고 해서 10년 뒤에도 건강하다는 보장은 없다. 병원비나 돌봄 비용이 갑자기 필요할 수도 있다. 일본에서 말하는 ‘인생 100년 시대’에는 이런 현실적인 계산이 들어 있다.
가족의 모습도 변했다. 자녀가 부모를 모시고 사는 가정은 과거보다 줄었다. 자녀는 직장 때문에 다른 도시에서 살고 부모도 가능하면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으려 한다.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 뒤 혼자 사는 기간도 길어졌다.
여기에서 일본 특유의 ‘오히토리사마(おひとりさま)’ 문화가 등장한다. 혼자 식당에 가고, 장을 보고, 전철을 타고, 여행하는 것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 혼자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이 노년의 중요한 조건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집 안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지역 문화센터나 공민관에서는 서예, 그림, 바둑, 외국어 같은 프로그램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걷기와 등산을 즐기거나 골프를 치고 자원봉사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다.
여행도 인기 있는 여가생활이다. 일본 관광지나 온천에 가보면 평일에 시니어 여행객이 유난히 많다. 시간에 쫓길 이유가 없으니 주말을 피할 수 있고,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가까운 온천에서 하루를 보내거나 지방 도시를 천천히 둘러보는 식이다. 젊은 시절처럼 많이 보고 많이 돌아다니는 여행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러한 생활의 이면에는 심각한 문제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고립이다.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것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인간관계까지 끊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고 친구들과의 왕래마저 줄어들면 사회에서 고립되기 쉽다. 일본에서 고독사가 오래전부터 사회문제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제적 격차 역시 크다. 후생연금을 충분히 받는 사람과 국민연금에 주로 의존하는 사람의 형편은 같을 수 없다. 자기 집이 있는 사람과 계속 월세를 내야 하는 사람도 다르다. 건강을 잃으면 일이나 취미생활도 어려워진다. 따라서 일본 노인들이 모두 안정되고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일본 시니어들의 생활에서 눈여겨볼 변화가 있다. 노후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직장을 떠난 뒤에도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고, 형편에 맞게 소비하며, 취미와 여행으로 시간을 보낸다. 가족에게 모든 생활을 맡기기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유지하려 한다.
한국 역시 빠르게 같은 문제와 마주하고 있다. 수명은 늘어나고 자녀 수는 줄고 있다. 앞으로는 자녀에게 부양받는 노후보다 자기 생활을 스스로 꾸려야 하는 노후가 훨씬 흔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노후 준비도 달라져야 한다. 돈을 얼마나 모았느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몸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하고, 혼자 시간을 보낼 줄도 알아야 하며, 필요할 때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일본 시니어들이 먼저 보여주고 있는 것은 화려한 노후가 아니다. 오래 살게 된 만큼 생활의 크기를 줄이고,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오래 유지하는 삶. 초고령사회 일본의 노후는 이미 그렇게 바뀌고 있다. ㅅㅗ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