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
오늘 아침부터 비가 오더니 이곳 운조루에 하차 하자 비가 제법 많이 온다. 버스가 큰 길에서 작은 길로 진입하면서부터 주변에는 기와지붕의 전통적인 한국 가옥이 곳곳에 있었다. 우리는 그 중에서 운조루를 탐방한다. 운조루雲鳥樓는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다. 지리산의 구름과 새가 머무는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 낙안부사를 지냈던 안동출신의 문화 유씨인 유이주가 99칸 집을 지었다. 운조루라고 불리는 사랑채를 비롯한 이 집은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는데, 운조루가 자리한 터는 '조선의 풍수'를 지은 일본의 풍수지리학자 무라야마 지준의 글에도 소개될 만큼 널리 알려진 명당이다. 운조루 입구에 있는 표지판에 따르면, 오미리 마을은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낙지金環落地의 형상이다. 이런 곳을 찾아 집을 지으면 자손 대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몇백 년 전부터 전해 내려왔다. 명성이 자자하여 이곳이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곳에는 위쪽에 금거북이 진흙 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의 금구몰니金龜沒泥, 중간에 금환낙지, 아래쪽에 다섯가지 보석이 모여 있는 형상의 오보교취五寶交聚의 명당이 있다. 중간 지대의 명당 금환낙지는 운조루가 이미 차지했지만, 금환낙지와 오보교취의 명당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가 호구조사를 실시한 통계에 따르면 1918년 70호에 350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4년 만에 148호에 744명으로 불어났다. 운조루는 1,400평의 대지에 건평 273평인 99칸(현재는 70여 칸) 저택으로, 문중 문서에 따르면 한때는 883마지기의 농토가 있었고 대한제국 말에만 해도 농사를 짓기 위해 한 해에 2백~4백여 명의 노동력이 조달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위세를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저택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이 마을 일대에 집을 지었던 사람이 몇십 명에 이르렀으며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될 무렵에는 3백여 채가 들어섰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400여 평의 대지에 세워진 운조루(주인이 거처하였던 곳)와 손님을 맞았던 귀래정, 그 아랫마을 환동에 금가락지 같은 형국으로 높은 담벼락을 두른 채 대숲에 싸여있는 기와집(박 부잣집) 한 채뿐이다. 무라야마 지준은 '이 꽃이 떨어지면 모든 사람이 애석하게 되니 이 땅은 모든 사람에게 애석함을 주는 인물을 낼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한편 운조루 근처에 있는 사도리는 도선국사가 어떤 기인에게 풍수지리를 배울 때 모래를 이용하여 산세도山勢圖를 만들어 익혔다고 해서 사도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타인능해다. 곡식을 담아두는 뒤주가 놓여 있고, 그곳에 양식을 넣어 놓고는 언제든지 배고픈 사람들이 퍼 가도록 허락했다는 것이다. 훈훈하고 아름다운 정경이다. 그래서 운조루가 더욱 훌륭하게 오늘날까지 보존 유지되는 것 아닐까 싶었다. 운조루에서 나오니 우람한 지리산이 보인다. 구름이 하얗게 걸쳐 있어 운조루라는 이름과 아주 잘 어울리는 고운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