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문열씨가 문학적 초심(初心)을 찾기 위해 영국 요크셔지방 하워드에 있는 ‘폭풍의 언덕’을 찾았다. 이씨는 에이콤의 뮤지컬 ‘명성황후’의 원작자로, 한국 공연사에 한 획을 그은 이 작품의 영국 웨스트엔드 진출무대를 지켜보기 위해 런던에 갔다. 현지 언론을 위한 공연을 지켜본 그는 5일(현지시간) 런던을 출발, 2박3일의 일정으로 폭풍의 언덕 기행을 했다.
폭풍의 언덕은 영국 소설가 에밀리 브론테(1818~1848)의 유일한 소설 ‘폭풍의 언덕’(1847년 발표)의 무대가 된 곳. 이씨는 이번 여행이 “지난 한해 요란스레 치른 내전(內戰)과 거기서 입은 내상(內傷)이 불러일으킨 문학에의 초심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겨울 비바람을 헤치며 황무지를 걸어간 이씨는 폭풍의 언덕에서 느낀 절대고독의 세계를 통해 문학의 본령을 찾아가고 있다. 이씨의 기행기를 꽦, 꽨 2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폭풍의 언덕에서 쓰다듬는 內傷’
이문열
궂은비에 젖은 런던을 뒤로하고 잉글랜드 북동부 하워드로 떠난다. 영국 근대문학의 기봉(奇峰) 브론테 자매의 생가(生家)를 찾아 나선다. 그 중에서도 에밀리 브론테를, 그녀가 거닐었던 폭풍의 언덕을 보고 싶어 천리 길을 달린다.
이미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 그것도 전업(專業)작가로서 벌써 이십여 년을 산 뒤에, 이 무슨 객쩍고 쑥스런 문학탐방인가. 꼭 200년을 앞서 살아갔지만, 단 한편의 소설로 서른 나이를 못 채우고 이승을 떠난 이 규수(閨秀)작가가 런던행 비행기에 오를 때부터 머릿속을 떠다닌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영국에는 세계문학사에 찬연한 빛을 뿜는 작가도 많고, 그들의 자취를 찾아볼 여유가 있었던 영국방문 또한 처음이 아닌데도 왜 이번이며, 에밀리 브론테고, 폭풍의 언덕인가.
고속도로에 오르자 더욱 굵어진 빗방울이 떨어지는 차창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내 어쭙잖은 문학적 역정(歷程)을 겸허하게 돌아본다. 조금 전에 품었던 의문의 답은 바로 거기 있다. 내 문학의 요람기에 소설이 주는 휘황한 감동을 처음 맛보게 한 것이 그녀이고 ‘폭풍의 언덕’이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노란색 표지의 ‘학원 소년소녀 세계명작전집’. 그 중의 한 권인 ‘폭풍의 언덕’ 표지화에는 난데없는 눈보라가 내려치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어느 겨울방학, 대본점에서 빌려온 그 책을 밤새워 읽은 뒤의 감동은 거의 충격적이었다. 그 훨씬 전에 이미 축약본이나마 ‘걸리버 여행기’를 읽었고, ‘플란더스의 개’와 ‘인어아가씨’에 가슴 저렸던 적도 있었지만 그때와는 질을 달리하는 강렬하고도 섬뜩한 감동이었다. 그리하여 ‘폭풍의 언덕’은 얼마 뒤에 완역본(完譯本)을 얻었으되 내가 축약해 읽지 않을 수 없었던 ‘좁은 문’과 더불어 내 소년기의 가장 인상깊은 문학적 경험이 되었다.
어떤 이는 ‘폭풍의 언덕’을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도달한 비극성과 시적(詩的) 성취에 비견하기도 하고, 서머싯 몸 같은 작가는 서슴없이 ‘세계 10대 소설’에 넣기도 했다. 내가 공연히 시건방져지고 쓸데없는 지적 허영에 내몰려 지드와 헤세를 멀리하기 시작한 20대 이후에도 에밀리 브론테만은 가슴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의 출발은 그 무엇보다도 내 문학의 요람, 혹은 초심에의 향수였다. 그리고 그 향수를 일으킨 것은 아마도 지난 한해 요란스레 치른 내전과 거기서 입은 내상이었을 것이다.
이었다 그쳤다 하는 겨울비 속을 달려가는 천리 길은 멀었다. 거기다가 여행의 속된 효율성을 외면하지 못해 도중에 셰익스피어 생가를 훑고 처칠의 생가격인 말보로성(城)을 들르느라 하워드에 가까운 할리팍스 시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밤 10시에 가까웠다. 할 수 없이 교외의 허름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름하여 오기장(五旗莊·Five Flags Hotel). 밤새도록 창문을 흔들어대는 비바람 소리가 벌써 폭풍의 언덕이 가까웠음을 실감하게 했다.
비는 이튿날도 줄기차게 내렸다. 브론테 자매의 생가가 있는 하워드는 뜻밖에도 오기장에서 차로 달려 채 20분도 안되는 거리에 있었다. 나지막한 산들이 이어진 계곡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이었다.
산등성이의 초지(草地)들은 잘 가꾸어져 있었지만, 그 경계마다 둘러쳐져 있는 돌담은 우리나라 제주도 만큼이나 척박한 지질을 말해주었다. 200년 전 사는 사람이 훨씬 적고 땅에 손이 덜 갔던 시절에는 황무지 속의 작은 마을, 옛날의 강원도 산골쯤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직도 지나는 산등성이 곳곳은 소설에 나오는 ‘히스’로 덮인 황무지였다. 히스는 우리의 땅향(눈향)같은 키 작은 침엽수 떨기로 그곳 사람들은 ‘헤더’라고 불렀다. 하지만 여름에 보랏빛 꽃이 피면 그 황무지는 그대로 볼만한 화원을 이룬다고 한다.
주차하기 좋은 곳을 찾다 보니, 하워드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은 브론테 일가가 묻혀 있다는 교회묘지였다. 한 1000여평이나 될까, 그곳을 빽빽이 채우고 있는 묘비들이 겨울비에 젖어있는 광경은 어찌 그리도 황량하고 음산한지. 또 그곳에 묻힌 사람들의 수명은 왜 그리도 짧은지. 스무살 안팎에 죽은 이들로부터 두살배기 어린아이의 것까지 여남은 개의 묘비명을 읽어나가다가 공연히 심란해져, 그곳 어디에 있을 브론테 자매의 묘비 찾기를 단념하고 바로 그녀의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가 목사로 봉직했다는 교회를 찾았다.
교회는 당시의 하워드로서는 과분했을 성싶을 만큼 규모에서도 설비에서도 갖춰진 고딕 양식의 건물이었다. 아직도 마을교회로 이용되는 듯 안에서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특히 교회 한쪽에 관광객을 위하여 진열된 듯한 지역 특산물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조잡한 상혼(商魂)까지 드러내 그 뒤뜰 묘지와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교회를 한바퀴 둘러보기 바쁘게 브론테 자매의 생가가 되는 목사관으로 갔다. 교회 바로 곁에 있는 이층집으로서 지금은 브론테 자매의 기념관으로 바뀌어 10파운드(약 1만8000원)의 입장권을 사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 되어 있었다. 에밀리 브론테의 체취가 묻어있는 곳이라 첫사랑의 옛집이나 찾는 것처럼 감회에 차 문을 두드렸으나 관광객이 많지 않은 겨울철이라 그런지 개관은 11시부터라고 한다. 그것도 겨울 한철은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여는데, 그게 바로 사흘 전이었다.
하는 수 없이 폭풍의 언덕부터 먼저 돌아보기로 했다. 폭풍의 언덕은 에밀리 브론테가 소설속의 저택 ‘폭풍의 언덕’의 원형으로 삼았다는 산비탈 농가까지의 언덕길로, 생전에 브론테 자매가 즐겨 산책했다는 길이기도 했다. 마을에서 5, 6마일 되는 곳에 있었는데, 먼저 문제가 된 것은 그 마일을 ㎞로 착각한 일이었다.
4마일 정도를 차로 이동하고 나서는 도보로 걸어야할 길이 나왔지만, 2마일을 2㎞로 믿은 바람에 왕복으로 그 배를 걸어야하는데도 겁 없이 나섰다. 하지만 ‘폭풍의 언덕’의 모델이 되었다는 농가를 저만치 등성이 너머로 바라보게 된 것은 1시간 가까이나 걸은 뒤였다. 거기다가 비바람은 또 왜 그리 거세던지. ‘폭풍의 언덕’이란 이름이 전혀 과장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거센 바람과 찬 겨울비에 내몰리듯 걸으면서 30여년 전 눈보라 속에 넘었던 창수령(蒼水嶺)을 문득 떠올리기도 했다.
원래 나는 그런 경우에 대비해서 런던에서부터 에이콤 단원들로부터 방수 파카를 빌려 입고 갔다.
그러나 바람 때문에 우산을 받지 못해 파카를 타고 내린 찬 빗물이 바지를 함빡 적시게 되면서 더 이상의 전진은 무리가 되었다. 더 나아갈수록 늘어날 돌아가는 길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는 ‘폭풍의 언덕’ 원형은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낡고 허물어졌으나 웅장한 장원(莊園) 쯤으로 머릿속에 그려왔는데, 눈앞에 나타난 것은 사방 2마일 안에는 히스 숲과 잡초밖에 없는 황무지 속의 작은 농가에 지나지 않았다.
목적지가 1㎞도 남지 않은 곳에서 포기하는 것이 아깝기는 했으나 나는 별 미련 없이 돌아섰다. 나는 꼼꼼한 현장답사를 온 것이 아니라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느껴보려고 왔을 뿐이고, 그 느낌은 그때까지의 악전고투만으로도 충분하였다. 비바람을 헤치며 걸은 그 1시간 동안 나는 리비아의 사막이나 시나이의 바위산에서처럼 어떤 절대고독(絶對孤獨)같은 것을 맛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잘 손질된 초지와 드문드문 들어선 농가가 있었지만 거센 폭풍우가 시각과 청각을 가로막아 인간으로부터의 한없는 격리(隔離)를 느끼게 한 탓이었다. 끝모를 사막 가운데 홀로 섰을 때처럼, 혹은 높은 바위산 가운데서 갑자기 훤히 뚫린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처럼. 아마 200년 전 에밀리 브론테도 그러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