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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53.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72, лл.192об.∼196
계정서: 현금과 신용장에 의거하여 수령하지 않은 액수
1896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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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 7시 10분 4개 기관을 가동하고 라자레프 항으로 출발했습니다. 이번에는 장교들이 항구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도록 서쪽 통로로 나왔습니다. 11시에 관이 새서 4번째 기관을 껐습니다. 소코브닌 대위의 요청으로 원산 만에 정박하기 전 라자레프 항에 들렀습니다. 전망대 곶(옵세르바치야мыс Обсервации)註 072 뒤로 통과하여 배를 돌려 다시 나왔습니다. 평균속도 8.68노트로 9시간 30분 82마일 항해하여 오후 4시 40분 원산에 정박했습니다.
라자레프 만과 원산만은 현재 결빙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원산만은 원래 몇 백 피트에 이르는 전체 지역에서 해안가 얕은 곳들만 얼어붙을 뿐이고 혹한의 겨울에만 얼음이 도시에서 갈마각(무라비요프 곶 мыс Муравьева)까지 뻗어나와 소도, 국도까지 항구의 남쪽부분을 덮습니다. 세관 정박소와 정박지는 그 어느 때도 결빙 걱정이 없습니다. 라자레프 항의 해만은 만으로 흘러내리는 강과 북쪽 지역이 비교적 얕고 겨울의 북서풍을 막아주는 위치 덕분에, 한국인들의 말을 빌리자면 약간 더 얼어붙지만 얼음은 두께가 얇아서 한국배가 다니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북풍이 때때로 이 얼음들을 영흥만으로 이동시키지만 얼마되지 않아 서풍이 바다로 밀어냅니다. 올 겨울에는 가장 온도가 낮았습니다. 북서풍이 강할 때 영하 15°입니다. 겨울에 심한 남서풍은 때때로 북동풍이 됩니다. 상인인 셰벨료프 요원과 그레이(Грей)가 관측한 자료 즉, 신력으로 11월 1일부터 2월 29일까지 원산의 기상관찰 결과를 같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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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중령 _________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21.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0, лл.61/69∼76об.
1895년 8월 7일
블라디보스톡
№ 470
수신:태평양연합함대 사령관 각하
탐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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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조선 국왕을 알현했고 이 자리에서 조선 국왕은 러시아 황제와의 우정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밝혔고 조선이 어려운 상황이므로 러시아 정부와의 협력을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7월 20일:저희는 즈푸에 정박하였고 여기서 ‘보브르’호와 순양함 ‘자비야카’호를 보았습니다. 저는 ‘자비야카’호의 승무원에게 제물포에서 온 전보를 전달했습니다.
7월 31일:저희는 원산항을 조사하기 위해서 출항했습니다. 하루 반나절이 걸려서야 저희는 원산항 주변의 교주(Киау-Чау) 만에 정박하였습니다. 31-го Июля, в исходе 4-го часа по полудни, оставил рейд бухты Киау-Чау, для следования в порт Генсан, взяв курс на W-ую оконечность острова Кельпарт.
8월 2일:저희는 섬을 살펴보려는 목적으로 거문도 항구에 접근하여 정박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군함도 없었습니다. 단지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가 거문도로부터 일본을 가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일본 기선이 출항할 때 저희는 거문도항 정박 중에 영국함대로부터 받은 예포를 쏘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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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중장 _____________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91. РГАВМФ, ф.417, оп.1, д.924, лл.23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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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의 주 수출품은 사금으로서 매년 250-300만 달러 정도가 주로 중국으로 반출되어 왔으나, 얼마 전부터는 일본으로도 수출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막대한 양의 가죽, 털이 있는 개의 가죽, 대두(大豆) 등이 일본으로 수출되어 밀가루와 교환되고 있으며, 생선은 비료와 맞바꾸는 물물교환 형태로 교역되고 있습니다. 조선 내륙으로 식료품을 조달하는 지역이 부산인데, 막대한 양의 생선이 그곳으로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세관장의 말에 따르면 얼마 전 원산으로부터 매우 근접한 곳에 2개의 은광과 양질의 석탄광산이 개발되어 채굴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수입품에는 원산뿐만이 아니라, 조선 북부 전체 주민을 위한 공산품, 소금 그리고 등유(러시아산 포함) 등이 있습니다.
일본과 중국 그리고 블라디보스톡과의 연락 업무는 일본정부와 러시아의 셰벨료프 선사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고 있는 일본 유센가이샤(遊船會社) 소속의 기선에 의해 독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조선의 소형기선 2척은 연안무역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시내에는 2개의 일본은행 지점이 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기선을 타고 도착한 16,000명의 부대원, 200문의 산악포 그리고 4,000명의 쿨리들이 모든 종류의 필수품과 말을 이끌고 원산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향했습니다. 부대원은 정원 50명 이하로 승선할 수 있는 보트를 이용하여 상륙했습니다. 이 모든 배들에는 번호가 부여되어 있으며 현재는 운하에 계류 중입니다. 제가 본 가장 높은 번호가 32번이었던 만큼, 보트의 총 수가 30척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일 것으로 보입니다. 이 외에도 어선 또한 상륙에 이용되었습니다. 해안 근처의 수심이 깊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여, 상륙이 보다 용이하도록 일본인 구역에 각각 10피트 길이의 나무 접안 시설 2개가 축조되어 있습니다. 쿨리[coolie]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중국과 인도의 하층 노동
상륙 당시 부대의 숙영과 분견대 구성이 대부분은 개활지에서 이루어졌으며, 짐을 나르는 도로를 따라 일대는 서울로 나머지는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각 분견대 마다 일정 수의 쿨리들을 동반하고 있으며, 그들 외에도 도로를 개보수하기 위하여 일당 2달러의 가격으로 다수의 조선인들을 고용했습니다. 일본군이 원산과 그 근교에서 2,000두에 달하는 가축을 구매함에 따라, 그 전에는 두 당 35달러 또는 그것보다 싸게 구입할 수 있었으나 현재는 그 가격이 50달러까지 상승했습니다.
조선인과 일본인으로부터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전체 일본 육군은 베이징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진군하여 이미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압록강변에 있는 안주(Anchiu), 하잔(Hazan) 그리고 의주(Ai-chin)를 점령했으며, 더 북쪽까지도 진군했었으나 후방과의 단절을 두려워하여 회군했다고 합니다. По собранным известиям от Корейцев и Японцев, вся Японская армия, после победы при Пеньяне, направляется большой Пекинскою дорогою к Северу и уже заняла Anchiu, Hazan и Иджеу на реке Anmok-kan, пограничный с Китаем, и были севернее, но вернулись, боясь быть обойденными в тыл.평양에서 일본군이 승리한 그 날, 승전보가 이곳에도 알려졌으며 이에 일본군들은 요란하게 축하했습니다.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원산을 통한 군수품 수송을 중단하고, 필요한 모든 물품은 기선을 이용하여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 하구에 위치한 철도로 수송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철도로 5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추가 파병할 것이라 합니다. 최근 일본 기선이 지역수비대의 형태로 잔류하고 있던 2명의 장교와 병사 200명의 부대 및 50명의 쿨리를 운송했으며, 9월 16/28일 남아있던 예비품들을 싣고 해로를 이용하여 철도로 향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중국 군대는 의주의 북쪽에 위치한 창민이라는 곳에 집결해 있다고 합니다.
평양에서의 일본 측 소식에 따르면 일본군은 다수의 대포, 소총 그리고 군용 물품을 제외하고도 2백만 달러어치가 넘는 금괴와 은괴를 전리품으로 획득했다고 합니다. 원산에는 일본 적십자가 지속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병원을 제외하고도 두 개의 병원을 더 건설할 것이라고 했으나, 부상자들을 모두 일본으로 후송하고 있기 때문에 계획이 중지된 상태입니다.
원산은 현재 이전과 같은 평화로운 모습을 되찾아서 가정에서 조선인들을 만나볼 수 있으며, 길거리에서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무리들 속에서 일본인들을 볼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피난 갔던 조선인들이 산에서 내려와 복귀했으며 논에서 가을걷이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작황이 특별히 좋고 성공적으로 추수할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특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덕분에 조선인 스스로도 배고픔을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군이 내항했을 때 협조한 조선인들에게 복수가 있을 것이라고 벌써부터 위협함에 따라 중국인이 특별한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런 중국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일본군은 원산으로 퇴각할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여자와 아이들은 산속에 마련된 임시 거처에 남아 있습니다. 원산 시내는 얼마 전 군대가 지나갔었다는 점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단지 중국인 구역의 건물들만이 폐쇄된 상태이며, 중국 글씨가 적혀 있는 두 장의 종이 띠가 십자가 모양으로 문 위에 붙어 있습니다. 뒤뜰로 돌아가 보면 일부 장소에서 망가진 쪽문과 여기저기 흩어진 물건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직적 학살이나 파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며, 다른 곳으로 피신할 당시 불필요한 가재도구들을 남겨둔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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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중령 ___________________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5. РГАВМФ, ф.9, оп.1, д.26, лл.1~14об.
1899년 5월 26일
서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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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모레인, 새로운 달력으로 6월 9일에 헨리 왕자가 이곳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성대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정중함으로 봤을 때, 이 만남이 일회적인 화려한 행사로만 그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곳 사정에 다소 익숙해지면서, 감히 본인이 판단하기로는 왕자의 방문이 한국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서울~원산 구간의 철도 부설 사업과 관련된 독일의 이권 문제가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파블로프가 떠난 후, 독일인들은 개인적인 이윤목적으로 철도사업이권을 획득한 미국 기술자 콜브란(Кольбран)에게서 이 이권을 새로이 얻어내고자 합니다. 게다가 한국의 외채 문제를 다루기 위해 독일 영사가 한국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 사람들은 가장 확실하면서도 폭넓은 정치적 보증과 같은 것이 없이는 차관을 빌릴 수 없습니다. 서울에서 3일간 다양한 의전 행사들을 치른 후, 왕자는 60명의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서울과 원산 중간에 있는 마을인 당고개(Танкогай)로 갈 예정입니다. 그곳은 독일이 금광채굴권을 획득한 곳입니다. 이곳은 한국에서 보다 세력을 넓히기 위해 독일의 계획이 집중된 중심 지점입니다. 현지 주재 영사는 이미 당고개를 통과하는 독일의 전신선(그곳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독일 국민들을 위해!) 가설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아마도 미래의 철도 역시 바로 이 마을을 통과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만약 이 모든 계획이 실행된다면, 독일인들은 이 나라에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자오저우(Киа-Чжоу, 膠州)만으로부터 일본해(Японское море)에 이르는 가장 최단거리의 통로를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독일인들은 원산에서 공고한 지위를 확보한 뒤, 남만주에서 바로 일본해로 연결되는 유일한 우리의 통로을 차단할 것입니다.
Здешний консул просил уже о разрешении провести в Танкогай немецкую телеграфную линию (для нужды нескольких живущих там ныне немецких подданных!), через это же селение, вероятно, пройдет и будущая железная дорога. Таким образом, если бы все эти планы осуществились, то немцы, помимо большого политического влияния в стране, получат самый прямой выход из Киау-Чжоу в Японское море и с другой стороны, укрепившись в Гензане, закроют нам наиболее прямой и наиболее естественный выход к тому же морю со стороны южной Маньчжури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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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스트렐비츠키(Ив. Стрельбицкий) 올림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6월 9일 양력 1번째기사 1899년 대한 광무(光武) 3년
독일의 헨리 친왕을 접견하다
독일〔德國〕의 헨리〔顯利〕 친왕(親王)을 함녕전(咸寧殿)에서 접견하였다. 황태자가 시좌(侍坐)하였다. 【독일의 친왕은 강원도(江原道) 금성 금광(金城金鑛)을 가 보았다. 대개 독일인 워트〔華爾〕가 이 금광을 경영하였기 때문이다.】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10. РГАВМФ, ф.9, оп.1, д.108, лл.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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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먀쉬’호의 함장 해군대령 로굴랴에게 새로운 임명이 부여되어, 신임 함장 루드네프(Руднев) 해군대령이 하바롭스크에서 제물포로 향할 것입니다. 본인은 신임 함장이 개인적으로 귀하를 알현하도록 하명해 놓겠습니다.
한국에서 발생한 사건의 전환 국면에 본인은 매우 애석해하고 있습니다만, 다음과 같은 생각들 즉, 우리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을 들여 한국에서 이미 실행한 모든 것들을 우리가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이며, 항간에서는 벌써부터 들려오는 바, 우리정부의 눈에 한국 문제가 후퇴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그런 생각들이 저를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기실 귀하께서 어제 본인에게 발송해 주신 전문이 본인의 경각심을 상당 수준에서 자극했는데, 그 전문의 내용 속에서도 한국 문제와 관련된 일부 증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뤼순과 다롄만 점령 과업에서 우리는 이미 반전이 존재하지 않는 궤도에 진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경에서는 상기 항만을 독일이 교주(Киау-Чау)를 점령한 것과 같은 원칙에서 러시아에 양보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협상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무력 사용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С другой стороны в деле занятия Порт Артура и Талинвана, мы выступает уже на такой путь, с которого нет поворота – в Пекине уже начаты переговоры об уступке нам этих портов на тех же основаниях как Германия заняла Киау-Чау и наши требования мы решили поддерживать всеми мерами, не исключая и открытой силы
본인은 예언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기의 상황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심대한 곤란에 불가피하게 연루될 수 있으며,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결정적 행보를 취해야 할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손을 옭아맬 수도 있습니다. 또한 중국에서 우리의 과업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음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 본인의 생각처럼 그렇게 빠른 시일 내에 서울을 방문하는 것에 장애가 될 것 같으며, 북경에서 시작된 협상의 결과가 완전히 밝혀지기 전까지는 방문이 불가능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귀하께서 서울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본인에게 설명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시면, 본인은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귀하에게 요청을 드립니다. 즉 어떠한 경우에도 제물포에 정박 중인 전함 중 한 척은 새로운 전함으로 교대해야 하지만, 본인은 ‘그레먀쉬’호나 ‘만주르(Манджур)’호가 뤼순항에 내항하지 않는 한, 교대해 줄 수 없으므로, 제물포에 정박 중인 전함 중 한 척을 의무해제 해주실 수 있을 경우, 그에 대한 전문을 저에게 발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귀하에 대한 진정한 존경과 헌신을 믿어주시기 바라며, 안나 에라스토브나(Анна Эрастовна)에게 진심어린 안부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귀하의 두바소프(Ф. Дувасов)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1권 > 二. 各館來電 (12899) > (8) [독일 親王 上京 및 三井에 발주한 韓國軍艦 揚武號 입항 件]
문서제목 | (8) [독일 親王 上京 및 三井에 발주한 韓國軍艦 揚武號 입항 件] |
문서번호 | 來電第30號 |
발신일 | 1903년 4월 15일 오후 6시 3분 發 ( 1903년 04월 15일 ) |
발신자 | 仁川 加藤 |
수신일 | 1903년 4월 15일 오후 7시 着 ( 1903년 04월 15일 ) |
수신자 | 林 公使 |
(8) [독일 親王 上京 및 三井에 발주한 韓國軍艦 揚武號 입항 件]
來電第30號
1903년 4월 15일 오후 6시 3분 發
1903년 4월 15일 오후 7시 着
仁川 加藤
林 公使
독일군함 일치스號가 오늘 膠州灣에서 입항, 同艦에 탑승한 독일 親王은 즉시 상륙하여 5번 열차로 入京함. 京城으로부터의 出迎은 독일領事와 한국 관리로는 趙性協, 高羲誠두 사람이다.
한국정부에서 三井에 주문한 군함 揚武도 또 오늘 오후 5시에 입항함.
獨逸軍艦 「イルチス」 號本日膠州灣ヨリ入港同艦搭乘ノ獨逸親王ハ直チニ上陸五番列車ニテ入京セラレタリ京城ヨリノ出迎ハ獨逸領事ト韓國官吏趙性協高羲誠兩人ナリ
구글 번역기 독립 군함 "이르치스"가 오늘 자오저우 만 항구에 입항했습니다.
같은 배에 Duyi hanachini 왕자를 착륙시킵니다.
다섯 번째 열차 Nite, 베이징 진입
세라레타리 京城ヨri 아웃 잉 하 두이 영사 한국 관료 조 싱시에 가오 시청 두 사람 나리
출영[出迎]
나가서 맞이함
1. 좌측 상단 북경(청일전쟁 당시 삽화 좌측상단) 청일전쟁 당시 평양 추정
Shelfmark: 16126.d.1(41*)Title (Original): 日清平壌大激戦Title: Nisshin Heijō daigekisenTranslated title: The Battle of PyongyangArtist (Original): 無しArtist: AnonymousPublisher (Original): 堤吉兵衛Publisher: Tsutsumi KichibēPublication date: 1893.8Acquisition date: 1895/06/11Category: PyongyangNote:Country of origin: JapanSize (cm): 75.5 x 39.6
첫댓글 獨逸軍艦 「イルチス」 號本日膠州灣ヨリ入港同艦搭乘ノ獨逸親王ハ直チニ上陸五番列車ニテ入京セラレタリ京城ヨリノ出迎ハ獨逸領事ト韓國官吏趙性協高羲誠兩人ナリ 일본어 잘 하시는 분 해석 부탁드립니다. 에서 와 에는 출발점과 도착점이 달라지죠.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jh&levelId=jh_021_0020_0080&types=o 원문 사이트
번역기로 번역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독일 군함 '일치스'호가 오늘 교주만에서 입항했으며 이 함선과 함께한 독일 친왕은 바로 도쿄에서 상륙하고 5번 기차를 타고 서울(경성)로 들어갔습니다. 서울(경성)에서의 환영은 독일 총영사와 한국 관리 조성교, 고희성 두 사람이 담당했습니다."
2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2(한국사료총서 번역서2) > 1894년(조선 개국 503년, 고종 31년, 갑오년) > 8월 > 24일(음력 24일) 《금요일》 찌는 듯 더운 날―전례 없이 더운 날―온도계가 102도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중국! 하늘의 아들(오히려 ◯◯◯의)이라고 불리는 돼지꼬리 타타르인들의 부끄러움이여. 자신들이 떠벌리는 자랑, 자만심, 무지 그리고 이기심에 의해 점점 더 깊이 나라를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하고 있는 중국 지식인들의 부끄러움이여.
중국은 1,400만 불의 차관을 구하기 위해 런던과 다른 곳을 물색하고 있다. 단지 한 두 사람의 일본인이 그 전쟁을 위해 1,500만 불의 기금을 모금했다. 만일 중국 신문이 신용할 만하다면 이씨 가문(Li’s family) 홀로 수천만 불을 확보해서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황실은 북경과 무크덴(Moukden)註 007에 있는 그들의 보물창고에 수억 원 어치를 쌓아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