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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일본이 단시간에 세계열강에 진입할 수 이유는 영국 때문이다. 영국은 당시 세계 최강국으로 준 라이벌인 러시아 남하를 견제하고자 크림 전쟁Crimean War*으로 흑해 진출을 막은 것과 같이 극동 아세아에서 태평양 진출을 막는데 총력을 기울여 왔었다. 이 러시아가 청나라 만주로 진출해서 대한제국까지 먹으려 껄떡거리는 것을 막고자 일본을 이용하기로 작전을 세워 최신식의 라이플, 군함 등의 군수물자를 지원해서 러시아와 전쟁을 유도한 것이 러일전쟁이다. 이를 발판으로 군비증강에 나선 일본은 한국에서 수탈한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군비를 확충하면서 동양의 강대국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
역사란 아이러니컬ironical 하게도 간까지 빼줄 것 같은 배신의 아이콘인 일본을 동지로 선택한 영국이 그 끝을 2차대전으로 되받고 있다.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 영화 예에서와 같이 자국의 동양함대를 이들에게 궤멸 당했을 뿐만 아니라 싱가포르, 말레이 반도, 버마에 이르는 동남아세아 식민지를 배신자에게 헌납하고 있다.
물론 전에 연습 게임으로 청일전쟁이 있었지만 부패한 청나라 군대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시모노세끼 조약에 의거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일본에 지급하면서 전쟁이 마감되자 간이 배 바깥으로 나오게 된 것은 일본 앞날의 욱일승천(旭日昇天)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그 내용을 분석하면 전투가 아니라 일본의 일방적 살육전쟁이었다.
이젠 러시아만 만주서 몰아내면 아시아 최고 맹주가 될 수 있다는 야무진 꿈으로 러일전쟁을 만주에서 치르지만 기관총을 가진 8만의 러시아 군대와 라이플 소총과 인해전술로 몇 배나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냈고 또한 동해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섬멸시켜 승리로 이끌었지만 전쟁배상금을 한 푼도 못 받은 채 종전이 되었다. 일본이 배운 것은 우군이라고 여긴 세계 최강국 영국의 행동이다. 눈에 가시들이 싸우다 서로 망했으니 잘됐다고 배상금 없이 전쟁을 종결 시켜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사실이다. 따라서 일본은 이를 갈며 장기적으로 그 희생을 만회하고자 을사조약, 한일합방을 통한 한국에 대한 무자비한 수탈로 그 손실을 메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853∼1856년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영국·프랑스·프로이센·사르데냐 연합군이 크림반도·흑해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
일본은 조선에 임진전쟁을 일으키는 등 수세기에 걸친 침략 끝에 1910년 우릴 병탄해서 36년간 노예로 만들어 정말로 호의호식(好衣好食)했었으며 지금도 그 시절을 잊지 못하고 호시탐탐(虎視眈眈) 열도가 바닷물에 잠겨 없어지기까지 한번 더 식민지배를 왜 하려고 할까? 그만큼 그들은 우리 몸에 빨대를 꼽고 원하는 만큼 우리를 우려 먹은 36년이 일본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로 행복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농토의 57%을 뺏어 소작시켜 생산량의 60%를 뺏어 일본으로 보낸 사실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 그 뺏긴 농토 때문에 그 많은 우리 국민이 만주로 그리고 화전이라도 일구기 위해 산으로 120여만 명이 고향을 등진 사실을 말이다. 또 그들이 우릴 위해 철도 땜 학교 등을 만들어 줬다는 자체가 악랄한 수탈(收奪)를 말하는 것이다. 철도 예에서 경인선의 경우 30년간 운영한 결과 들인 돈의 87배를 이익으로 남겨 먹었다. 경부선의 경우 23배를 남긴 것이 선심이라는 놈들의 주장과 땜을 만들어 전기를 독점 공급해서 거두어 들인 수익이 평균 10년간 20배 이상이니 우릴 위했다는 것이 몽탕 사기다. 해방 후 미군이 조사한 내용 중 기가 막힌 것이 국민의 80% 이상이 문맹자였다는 사실로 일본이 교육을 위해 학교를 지어 줬다는 레퍼토리 repertory다. 일제가 교육을 빙자해서 입학금, 월사금을 비싸게 받고 학교를 운영한 속셈은 돈벌기와 친일파 양성을 통한 영원 식민지 만들기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 천하의 죽일 놈들을 두둔하는 지금의 일본놈들과 국내 친일파들이 지금도 그때가 괜찮았다는 주둥이의 나불거림을 보면--- 아이구! 아이구 배야!
우리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긁어 모았는지 1930년대 중반 미국과 전쟁을 해도 이긴다고 큰소릴 쳤던 자들이 그 믿는 구석은 곳간에 정말로 돈이 많아서였다. 이 구석 때문에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대동아전쟁으로 확대되면서 2차대전의 서곡이 울리게 된 것이다. 그러다 망했다. 그러면서 우리 동족상잔의 625덕분에 G-2까지 갔었던 사실을 요즈음 우리가 “불쌍한 놈들” 이라 한마디로 표현한 것은 어디 가지를 못하는 섬나라의 태생적 한계 및 민족성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세계에서 자연재해에 따른 불쌍한 민족을 뽑으라면 여러 민족이 있겠지만 태풍, 지진, 화산폭발, 산사태, 해일, 츠나미tsunami, 폭우, 지반침하 등 그 강도가 센 놈으로 세계적인 자연재해의 모든 종류가 또 자주 많이 발생하는 곳이 일본이다. 근데 불쌍한 것은 어디로 도망가서 살고 싶어도 섬나라 특성상 모든 것을 참고 사는 수밖에 없는 불쌍한 민족이 되어 버렸다. 이 저항할 수 없는 자연재해의 연례 행사에 웅크리고 쫄고 체념하고 모든 것을 몸으로 때우면서 불쌍하게 살아온 야마토 민족(일본어: 大和民族) 즉 일본인 것이다.
이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들이 따듯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한국 진출 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정명(定命)은 <조선 식민지화>가 당연히 국시가 되었었고 물론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G-2 시절 막강한 자금력으로 자연재해를 예방하는데 막대한 돈을 사용했으면 지금과 같이 내리막길을 달리지는 않았을 놈들이 무사안일에 빠져 국민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있다. 아마 조금만 있으면 섬나라 근성으로 한국에 와서 손을 벌릴 놈들에게 일본에게서 조상이 덕을 본적이 있다고 그 손을 잡을 친일파 집안들이 우리나라엔 차고 넘친다.
근데 이런 불쌍한 민족에게 억울하게 나라를 뺏긴 나라가 있으니 그게 조선 즉 대한제국이다. 불쌍한 대한제국은 어떻게 해서 일본에게 먹힐 수밖에 없었는가?
삼강오륜에 따른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성리학 이론으로 통치이념을 세웠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듯 학생은 선생을 신료(臣僚)는 임금을 받들면 즉 왕권이 신장돼서 나라가 잘될 수 밖에 없다는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이론으로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이다. 위를 받든다는 것은 하해와 같은 내리사랑이 전제가 되어야 반대급부를 바랄 수 있는 것인데 왕에게 일방적 치사랑만을 강조한 통치이념은 그 내막을 들여다 보면 속 빈 강정에 불과한 것이다. 논어는 그렇게 우릴 가르치지 않았지만 이단인 맹자가 유학의 주류로 등장한 이유와 맹목적 추종 때문에 이를 신봉한 송, 명, 청의 중국과 조선은 학문적, 정치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여기서 일본이 우리의 성리학을 연구 이를 토대로 이토 진사이(伊藤仁齋1627~1705), 오규소라이(荻生徂徠1666~1728) 등이 유학 정통이 고학에 있음을 알고 이단인 맹자 즉 성리학을 버리는 것을 알 수가 있다. 20세기 동양에서 신흥강국의 탄생 즉 일본의 그 인문학 뿌리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선진 강국으로 재 탄생한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고려를 무너트리고 이성계가 세운 나라가 조선이다. 비운을 맞은 고려의 왕(王)씨들은 이성계의 명으로 전부 성을 바꾸고 있다. 전(全), 전(田), 옥(玉) 등으로 모두 바꿔서 목숨이나마 부지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가 이(李)씨 성을 인 바꿨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도 자기들은 잘못이 없고 나라를 뺏은 일본 책임이니까 또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은 고종이 허락을 안 했으니 문제가 없다고 버티고 있다고 본다. 왜 이렇게 두리뭉실 지금도 넘어가고 있을까? 바뀌어야만 되는 것이 아닐까?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지금의 중국인 명나라에 나라를 바치고 식민지인 제후국으로 좋아하고 있다. 청나라 침입인 병자전쟁에서 져서 삼전도의 삼배구고 치욕의 예로 나라를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꿔 다시 바친 인조도 아무 책임 없이 그냥 청나라 제후국의 왕으로 잘 먹고 살면서 왕권을 휘둘렀던 것은 조선 왕들에게 있어 국민을 개 돼지 취급하면서 자기들 종묘사직만 보전하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효종의 북벌론이 있었지만 또 소설인 <박씨전> 등이 있지만 그냥 만든 이야기 정도로 끝나는 것을 보았을 때 조선의 통치이념이 무엇인지 지금도 난 헷갈린다. 오직 이가의 종묘사직만 보전하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즉 일본에게 식민지가 되더라도 일본 천황의 제후국이 되어 이가 왕들의 종묘사직만 보전하면 왕의 임무가 조선의 통치가 즉 지네들은 아무 책임도 없이 그냥 넘어오다가 일본의 자비를 기대하다가 황국신민이 되어 나라가 흔적도 없이 그냥 마감한 것이다. 어이구! 도무지 말 같은 이야기가 전개가 안 되는 ‘조선의 민 낮이여!’ 정말로 개탄을 금치 못하겠다.
을사조약(1905. 11.17)에 따른 황성신문(1905년 11월 20일자)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이번 조약체결에 있어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을 이또(伊藤) 후작(侯爵)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다. 우리 대신들은 자기들 일신의 영달과 이익을 위해 일본의 위협에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날강도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를 노예가 되게 하였으니 외무 대신을 나무랄 것도 없다.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하고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우리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
을사조약의 주된 내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통치를 위한 일제 통감부 설치를 계기로 국권을 거의 일본한테 완전히 뺏긴 사건을 말한다. 한마디로 일제의 보호국인 식민지가 되었던 사건으로 명나라 청나라에 빌붙어 진드기처럼 잘 먹고 살던 자들이 다시 나라를 바꿔 일본에 빌붙은 사건으로 온 국민이 억울해 했던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책임이 당시 황제였던 고종한테 당연히 있는 것을 대신한테 몽탕 그 죄를 돌리고 황제는 죄가 없다는 논설의 전개 내용을 볼 때 사설 작성자 장지연은 국가관에 있어 정말로 무지몽매한 자가 틀림없고 문제는 지금도 이것이 맞는다고 친일파들이 이구동성으로 을사오적을 들먹이고 있는 작태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린 그 잘못을 냉철히 분석해서 후손에겐 이런 치욕을 당하지 말아야 하는 역사적 교훈을 남겨야 하는데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가진 황제가 책임이 없다는 논리가 어떻게 나올 수가 있을까? 이를 식민사관에 의거 작성한 역사학자들 중 죽은 자는 부관참시(剖棺斬屍), 산 자는 다시 죽이는 작업을 지금이라도 시작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고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이를 시행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차근차근 병탄해가는 일본 놈들의 술수를 정말 몰랐을까? 친일 반민족행위자 조사위원회가 발간한 역사 단행본 <친일재산에서 역사를 배우다>에 따르면 한일합방의 공로자로 인정받은 종친, 왕실, 외척, 을사오적을 포함한 신료 등 조선귀족으로 모두 수만엔씩 은사금을 받았다. 얼마나 좋았을까? 나라 갖다가 바치니 일본 천황께서 돈까지 주시니 말이다.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고종 형님 이재면 83만엔(166억원) 다음이 순종 장인 윤택영 50만5천엔(100억 8천만원) 기타 을사5적의 이완용 15만엔(30억원) 송병준 10만엔(20억원) 등으로 나라를 팔아 먹은 결과 우리가 생각한 이상으로 배부르고 등 따스한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본다. 당시 일본이 사용한 은사금이 3,000만엔(6,000억원)으로 이 돈 역시 한국에서 수탈한 돈으로 메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일본놈들이 어떤 놈인데 제 돈을 써?
재미있는 것은 이재면과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 묘가 3번의 이장 끝에 지금은 남양주시에 있는데 이를 문화재라 해서 시에 바치고 있다. 파묘해야지 무슨 문화재며 후손은 유지 관리하는데 돈이 들어가니 국가가 돈들이라고 갖다 바친 그 속과 또 그것을 냉큼 받은 시장 역시 한통속이란 생각마저 든다.
우린 후손에게 물려줄 우리 대한민국의 정통을 못 만든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물론 남과 북이 갈린 원인이 가장 크다고 변명하지만 사실은 이승만의 반민특위 해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은 대통령이 조선 왕조 세종의 형님이었던 양녕대군 16대손이었고 그 심복인 이기붕이 17대손으로 반민특위가 정상적인 활동을 했다면 전주 이씨들의 무지막지한 심판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자기 일가친척(一家親戚)들을 그렇게 할 수는 없었기에 우물우물 특위를 없애버린 것이다. 손으로 해를 가린 일을 그 뒤 정권들도 다시는 거론치 못한 것은 아직도 이 땅에 일본에 빌붙어 사는 친일파가 정말로 적지 않기 때문이다. 2019.07.04 일본이 반도체 핵심 소재 3개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발표하자 태극기 들고 일본에 가서 아베 일본총리에게 사죄하라는 데모를 보았을 때 정말 만감이 서렸다.
지금은 우리가 서서히 일본을 압도해가고 있는 반면 일본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에 따른 원전사고로 나라가 망해가고 있다고 본다. 떼는 떼대로 간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굳세게 믿고 열심히 조그마한 극일을 해왔던 나로서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요새 정말 기쁘다.
첫댓글 I stand up for you. Great writing. Hope we have deep convos on this if there is a ch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