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사색의 순례길, 콘텐츠를 입다(1편)
첫 번째 이야기 : 거꾸로 가는 순례길을 시작하며
1. ‘해미국제성지’가 되다, 취재목적 및 기대효과
2. 해미국제성지-해미읍성-산수저수지-한티고개-충의사(14.4km)까지 걸으며
해미국제성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충남지역의 순례길 중심이 해미국제성지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각난 코스가 아니라 유기적인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해미국제성지에서부터 출발하기로 했다.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과 생매장 당한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을 떠올리게 하는 아픈 역사의 현장들을 걸으며 현재와 미래를 고찰해본다.
상상할 수도 없이 고통스러운 지난 과거의 천주교박해 참상과 같은 일들을 미래세대가 다시는 목격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1. ‘해미국제성지’가 되다 : 출발지이자 도착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이후, “해미 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이 추진 중이며 글로벌 관점에서 해미국제성지가 위치한 해미를 목적지로 외래관광객 유입이 가능하도록, 국내외 인지도 제고를 중점으로 주변 자원과 연계 가능한 사업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교황청 새복음화촉진평의회 의장 살바토레 피시켈라 대주교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과 대림 시기 시작일인 지난 2020년 11월 29일 교령(Decretum)을 발표, 한국 해미의 순교성지를 국제성지로 선포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던진 현장인 ‘해미순교성지와 순례길’이 로마 교황청이 승인한 ‘국제성지’로 선포된 배경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미의 무명 순교자들과 한국의 신앙 선조들은 믿음과 삶이 일치했던 분들로서 코로나19 후에 교회가 새롭게 나아갈 모습 및 인류가 더불어 함께 사는 길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수많은 무명 순교자가 탄생한 해미순교성지로 향하는 순례길은 순교자들의 탄생지와 순교지, 무덤과 복음 선포 장소가 어우러져 있다. 해미성지에서 이어지는 순례길에는 솔뫼성지, 합덕성당, 신리성지, 공세리성당, 덕산성당, 고덕성당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성지들에서는 대규모 도보순례와 성체거동, 성체강복 등이 거행되고 매일 미사와 고해성사가 이어진다.
국제성지는 전 세계적으로 30곳에 불과하며, 국내에서는 서울에 이어 두 번째, 단일성지로는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충남도는 ‘해미순교성지와 순례길’을 권력의 폭력성과 시대적 편협성을 극복하고, 포용과 융합의 가치가 공존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특히 이완섭 시장을 비롯하여 성일종 국회의원도 “종교를 초월한 인권 존중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해미국제성지와 보원사지를 연계한 명품종교관광벨트를 조성하여 해미읍성 축제의 명품화를 추진하며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활용한 관광콘텐츠를 집중적으로 개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서산시는 2022년부터 약 10억 원을 들여 ‘해미국제성지 세계명소화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추진하고 있다.
종교적 영역을 넘어서 포용과 공생의 문화가 공존하는 순례길에서 만나게 될 성현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며 현 세대들에게 남긴 메시지를 성찰하고자 한다.
해미읍성
2. 해미국제성지-해미읍성-산수저수지-한티고개-충의사(14.4km)까지 걸으며
▲해미국제성지-해미읍성 : 참혹했던 순교지, 수많은 무명의 순교자들
해미국제성지가 위치한 일대는 ‘여숫골’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당시 처형을 앞둔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를 하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 소리를 ‘여수(여우의 방언) 머리’로 잘못 알아들은 데서 유래한다.
순교 자리개
1866년 병인박해 때 해미진영(海美鎭營)은 천주교도 색출과 처벌의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충청도와 경기도 평택에 이르는 해미현 관아 관할지역에서 붙잡힌 천주교도들은 해미읍성으로 끌려왔다.
1872년까지 6년간 이어진 박해기간 동안에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 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는데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진둠벙 순교지 : 박해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처형 방법의 하나인 익사 및 수장이 행해지던 곳
한 명씩 처형하는데 지친 관헌은, 특히 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시에는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 데나 땅을 파고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버리는 참혹한 행위로 생매장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스러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132명의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그나마도 불확실하고 나머지는 이름 석 자 하나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동상
1935년에는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돼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돼 있었는데 1995년 순교자대축일에 원래의 순교 터인 생매장 순교 지 순교탑 앞으로 이장됐다. 성지 조성은 천주교 신자들 대상으로 홍보, 모금 활동을 벌여 부지를 확보하고 건립을 시작해 2003년 6월 17일 완료됐다.
해미국제성지에는 ▷700석 규모의 대성당과 150석 규모의 소성당 ▷기념관 ▷당시 죽음을 당한 무명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한 ‘해미순교탑’ ▷사제관과 수녀원 ▷무명순교자의 묘 등은 물론 2014년 이곳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동상이 설치돼 있다.
포승줄에 묶여 끌려갔던 천주교 신자들의 형상
▲ 산수저수지-한티고개-충의사 : 순교자들의 압송로를 따라 걸으며
한서대 앞 산수저수지를 따라 걷는 길은 중간중간 흔들의자와 벤치도 있고 저수지 풍경도 보며 걸을 수 있어 사색하기 좋은 숲길이다. 천주교 박해 때 포승줄에 묶여 끌려갔던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도 있다.
산수저수지에서 큰 도로를 건너면 대곡1리 입구가 나온다. 대곡마을회관을 지나 해미 폐차장에서 산 쪽으로 난 길을 오르면 한티고개다. 이 고개는 당시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압송로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도 그 기록이 나온다.
해미폐차장에서 민가를 지나 산길을 따라 가면 곳곳에 이정표와 14처가 한티고개 정상까지 안내해 준다. 살이 따가울 정도의 더위였지만 나무로 가려진 그늘이 있어서 오르기에는 힘들지 않았다. 자갈과 흙길을 지나 오르면 이내 정상에서 1처를 만나게 된다. 산 아래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잠시 더위를 식히고 재래식이지만 화장실도 있어 잠시 쉬어 갈만하다.
한티고개에 있는 제 1처 : 예수님, 사형선고를 받으심(제단 앞에서 바치는 기도)
그러나 대치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중간부터 풀이 무성하게 자라 무릎 위에까지 올라왔고 자갈인지 흙인지 모르면서 밟고 내려가자니 발목이 삐끗할까 조심스러웠다. 더욱이 뱀이 언제든 나올 수 있는 환경이라 등산용 스틱을 연이어 흔들어 가며 무거운 카메라를 목에 걸고 내려가느라 힘이 들었다. 한티고개를 올라갈 때와는 사뭇 다른 환경이었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잡풀이 무성했다. 다 내려가니 민가가 한 채 있었고 바로 아래에 옹기박물관이 보였다. 반가웠다, 문명을 만난 듯. 정돈된 진귀한 소장품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윤봉길 기념관
▲ 윤봉길 기념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을 불태운 윤봉길의사를 추모하며
옹기박물관에서 차도를 끼고 더 내려가면 왼쪽으로 윤봉길 기념관이 나온다. 넓은 주차장과 탁 트인 공간이 인상적이다.
윤봉길 기념관은 전에도 여러 번 방문했던 곳이라 익숙하지만 아직도 생생한 역사의 한 장을 스탬프로 찍듯이 뇌리에 그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사실 윤봉길 기념관은 순례길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윤봉길 기념관을 이번 순례길에 포함한 것은 처절했던 그 시대의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함이다.
어떤 의미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던 시절과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무수히 사라져간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일제강점기가 닮은 듯하다. 이름도 없이, 기록에 남아있지도 않은 채 스러져간 사람들...혼자서는 저항할 수도 없는 무력감이 마치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무게로 느껴졌을 그 당시의 상황을 그려본다. “쿵”하는 울림이 뼈에 사무친다. 무심한 듯 흘러간 시간을 뒤로 하고 앞만 보고 살았던 현재의 삶에 잠시 쉼표를 찍는다.
스쳐가듯 지난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저 잊혀져가는 지난 일들에 불과하다. 누군가에 의해 기억되지 않고,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현재뿐인 삶만이 존재하는 시간의 단절 속에 갇히는 셈이다. 따라서 인류에게 주어진 문명의 선물인 문자로 기록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당대의 사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순례길을 따라 걸을 때 행선지에 대한 안내와 종교적 조형물 외에도 오늘이 있기까지 이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처절하게 살아 온 이들의 삶을 반추해볼 수 있도록 기록물들을 이정표처럼 곳곳에 설치하고, 깊은 생각에 빠져 걸어도 위험하지 않게 순례길을 보다 안전하게 정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오늘은 내가 자갈길을 지날지라도 내일 이 길을 가는 다음 세대들은 보다 나은 길로 가기를 바래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충의사에 이르렀다.
해미로 돌아 갈 방법이 아득한데 셔틀버스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목적지로 가기 전에.
3. 이어질 이야기들
두 번째 이야기, 홍주순교성지로 향하다.
세 번째 이야기, 당진신리성지-당진합덕성당
네 번째 이야기, 솔뫼성지
다섯 번째 이야기, 당진원머리성지편-삽교천-아산 공세리성당
마지막 소회, (거꾸로가 아닌) 해미국제성지로 향해 가는 순례길
※ 이 취재는 2023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사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