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노라 닫지 말며-김천택
잘 가노라 닫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말라.
부디 긋지 말고 촌음(寸陰)을 앗겻슬아.
가다가 중지(中止)곳 하면 안이 감만 못하니라.
_ 김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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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어 풀이
잘 간다고 달리지 말 것이며 못 간다고 해서 쉬지를 말아라.
부디 그치지 말고 짧은 시간이라도 아껴서 쓰도록 하여라.
가다가 중지하면 가지 않는 것만 못하니라.
감 상
이 작품은 무슨 일이든 중단하지 말고 꾸준히 끈기 있게 해나가야 성공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교훈성이 강한 작품으로 수양가(修養歌)이다.
뜻을 세웠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초장에서는 ‘중용’(中庸)을 강조한 듯도 하지만, 종장에서는 중단 없는 전진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종장 같은 경우는 문학 작품이지만 경구적 성격이 더 강하다. 많은 사람들이 뜻을 세워 시작은 했지만 중도에서 포기하고 마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시작은 있었으나 끝을 보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다. 결과로 나타난 좋은 것만 보고,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보이지 않는 노력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너무나 뻔한 이치를 담은 것 같지만 그 가락이 유연하고 내용이 삶의 진리를 담고 있다. 무슨 일이든 좋아보여서 시작했다가 그만두는 일 경험하지 않은 사람 드물 것이다.
김천택 [金天澤]조선 가객 | 브리태니커
조선 영조 때 활약한 대표적인 가객(歌客)·시조작가.
사대부들이 즐겼던 시조가 중인 가객들에게까지 확산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최초의 가집인 〈청구영언〉을 편찬했다. 자는 백함(伯涵)·이숙(履叔), 호는 남파(南坡).
당시 많은 가객들처럼 그도 중인계층으로서, 젊었을 때 잠시 관직에 있었을 뿐 거의 평생을 가객으로 지낸 것 같다. 1728년(영조 4)까지 노래로만 불리고 기록되지 못했던 역대 시조를 모아 최초의 가집인 〈청구영언〉을 편찬했다. 그 서문에서 국문시가인 시조도 한시 못지않게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평시조 외에도 '만횡청류'(蔓橫淸類)라는 이름 아래 사설시조 111수를 수집해놓아 사설시조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江山 좋은 景을 힘센 이 다툴양이면
내 힘과 내 分으로 어이하여 얻을소니
眞實로 禁할 이 없을새 나도 두고 노니노라
그의 작품은 진본(珍本) 〈청구영언〉에 30수, 주씨본(朱氏本) 〈해동가요〉에 57수가 실려 있다. 이 가운데 14수가 겹쳐 있으므로 전체 작품수는 73수 정도이며, 모두 평시조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둘로 나뉜다. 첫번째는 강호한정가(江湖閑情歌)들이다. 여기에 속하는 작품들은 대개 조선 전기 사대부 시조의 주류인 강호가도(江湖歌道)의 관습적 표현을 빌려 쓰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차용과 답습에 그치지 않고 창조적 변용을 이루고 있다. 그의 시조에 나타나는 자연은 성리학적 도(道)의 공간이 아니라 중세의 신분질서에 의한 굴레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공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중세의 신분구조 속에서 김천택이 느낀 제약이 자연에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부류의 작품들은 망해가는 세상을 탄식하는 노래들이다. 이 작품들은 세상의 어떤 가치도 부정하면서 단지 술과 음악 속에서만 의미를 찾고자 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그가 신분갈등 때문에 절망에 빠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창작에서도 조선 후기 중인층의 의식의 한 면을 뚜렷하게 보여줌으로써 시조사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작가로 꼽힌다.
부생(浮生)이 꿈 이어늘 공명(功名)이 아랑곳가
현우귀천(賢愚貴賤)도 죽은 후면 다 한 가지
아마도 살아 한 잔 술이 즐거운가 하노라
김천택
호는 남파南坡.
역대 시조를 모아, 최초의 가집인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
남파 김천택은 조선후기의 시조작가. 선가자(善歌者).
[해동가요]에 57수를 남겼고, 1728년 시가집[청구영언]을 편찬.
평민출신(?)으로 숙종 때 포교를 지냈다. 포도청은 지금의 서울 경찰청.
포교는 ‘포도부장’, 조선시대 포도청에 4명의 포교(포도부장)가 있었고,
그 아래 포졸이 무려 90여명에 달했으니, 꽤 높은 자리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같은 평민출신 노가재(老歌齋) 김수장(金壽長)과 함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 에
동인(同人)을 결집. 시조에 신풍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그는 [청구영언]에 최선을 다해
작품을 수집, 작가에 대한 고증을 하려 애쓴 과정을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려로 부터 조선의 명공(名公; 요직을 맡은 사대부), 석사(碩士; 큰선비)와
여항(閭巷; 일반인), 규수(閨秀; 모든 여자를 일컫는 말)의 작품에 이르기 까지 영언(永言)으로
지어져 세상에 전하는 것들을 수록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비록 최고걸작은 아니더라도,
울림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들은 모두 기록하였다. 비록 그 사람은 대단할 것이 없다하더라도,
그 영언이 볼만한 작품이면 또한 모아서 기록하였다.”
이 [청구영언] 가집에는 고려 말로부터 김천택의 당대까지 노래 총580수를 악곡별로 수록했다.
그의 노래도 30수나 실려 있다.
한편, 남파 김천택의 인물됨은, 속된 기(氣)가 없이 맑고 바른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시(漢詩)삼백편을 늙어서까지도 외울 만큼 한시에도 소양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시대 노래책[歌集가집] *
우리가 아는 가곡, 가사, 시조는 조선시대의 소위 클래식한 성악 장르들이다.
이 노래들은 단지 구전으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책으로도 남겨졌다.
악기연주를 위하여 ‘금보(琴譜)’ 라는 악보가 남겨져있고, 노랫말의 기억을 위해서는
가사모음집인 ‘가집(歌集)’을 남겼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가집은 1728년 가인
김천택의 [청구영언]이다.
이후 크고 작은 수많은 가집들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조선의 3대 가집으로
[청구영언(靑丘永言)]과 해동가요(海東歌謠)], [가곡원류(歌曲源流)]가 있다.
그 외에도 많은 가집들이 가객들에 의해 편찬되었다. 그러면 가집의 명칭은 어떻게 생겼을까?
물론, 책(가집에 담아낸-- 조순자)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가곡 가사 시조 등의 노래를 통틀어 예전에는 ‘영언(永言)’ ‘가요(歌謠)’ 등의 명칭을 사용했다.
그런데 전해오는 가집들을 살펴보면 똑같은 이름으로 된 가집들이 여러 개 있다.
그러나 그 안의 내용들은 서로 달라서 그 가집들을 구분할 방법으로 그 가집의 소장자나
처음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붙여서 구별한다. 그래서 앞에 구별을 위해 뭔가 붙는다.
예를 들면 [청구영언]중에 육당 최남선이 발견한 것은 [(육당본)청구영언]이라 부르고,
조선진서간행회(朝鮮珍書刊行會)에서 처음 소개한 것은 [(진본)청구영언]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가객(歌客)]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노래를 직업으로 하는 전문인을 말하며,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노래를 즐겨 부르던 이들을 [선가자(善歌者)]라 하여 둘을 구분하였다고 한다.
한편, [청구(靑丘)]는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로써 ‘청’ 곧 ‘푸른색’으로 동쪽을 가리킨다.
따라서 ‘청구’는 동방의 땅. 해가 떠오르는 땅이기도 하다.
[영언(永言)]은 중국의 상서(尙書)라는 책에 ‘시언지 가영언(詩言志 歌永言)’이라는 말이 있다.
시(詩)와 가(歌)를 구별해준 말인데, 해석하면~ ‘시는 뜻을 말한 것이요,
노래는 말을 길게 한 것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노래를 ‘말을 길게 한 것’ 이라고 설명했으니.
노래란 곧, 영언(永言)인 셈이다.
실제로 노래는 평상시 사용하는 말에 일정한 높이의 음(音)과 길이를 얹어 길게 뽑아내는 것이니
매우 적절한 명칭이라 하겠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첫댓글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부채작품하면서 수집한 자료를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