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과 심양에 얽힌 한(2)
지난호에 이어 이번호에도 리문호 선생의 글을 연재한다. 리문호 선생은 서두에서 "병자호란은 겨레라면 누구나 생각하기 꺼려하는 가장 수치스런 국치의 사건이다. 한국에 있는 중국동포들은 병자호란을 아는 분이 많지 않다고 생각되어 조금이라도 계발을 주려고 아래에 간략하여 적어 본다."고 밝혔다.[편집자 주]
글/리문호
시인/심양조선족문학회 부회장, 심양 시조문학회 부회장
ㄱ), 병자호란의 배경
1632년 홍타시는 내몽고를 점령하고 1636년 4월에는 국호를 청(淸)으로 정하고 황제에 올라 년호를 숭덕(崇德)이라 하였다. 병자호란의 시발은 이러하다.
병자년 이른 봄에 무신동지(武臣東知) 이곽(李廓)과 첨지(僉知) 나덕헌(羅德憲)이 춘신사(春信使)로 심양에 갔는데 마침 3월 11일은 홍타시가 황제를 참칭(僭稱)한 날이였다. 그들은 이곽등을 위협하여 참석하라고 하였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여 따르지 않았다.. 녀진족 관리들이 구타하여 옷이 찟기고 갓이 부서졌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이곽등이 돌아올때 한(漢‐ 청의 황제를 일컬음)은 답서를 주어 가져가게 하였으나 오는 도중에 버렸다. 이해 늦은 봄 용골대(龍骨大), 마부대(馬夫大) 두 장수가 인렬왕후의 조제(弔祭)를 드리러 왔는데 청나라 십왕자(十王子)가 인조에게 드리는 글을 보내 왔다.
내용인 즉 화호(和好)를 끊지 말며 이곽등이 의식에 참가하지 않을것을 비난하는 글이였다. 조정은 벼슬 자리를 잃고 있는 이명등에게 접대를 분부하였는데 너무 소홀하였다.장령(掌令) 홍익한이 상소를 올려 사신의 목 베기를 청하였다. 기미를 알아 챈 호장은 민가에서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 났다.묘당(廟堂)에서는 그제야 겁이 더럭 나 만류했으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인조는 곧 팔도에 교서를 내려 척화(斥和)할 뜻을 효유하였는데 서로로 가져가던 교서가 호장에게 빼앗겨 트집 거리가 되였다.
조선은 명나라 신하의 나라로 임진왜란 때 명의 지원을 받았으며 주인을 두개 모실수 없다는 이유에서 였다. 홍타시는 서정(西征)에 후방 조선을 큰 걸림돌로 삼았다. 청은 후환을 없애고 물자를 보충하기 위해 병자 호란을 일으킨 것이다.정세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조선 조정에서는 주화파와 척화파로 나뉘어 논란이 분분했으며 청의 사신을 목 베고 국교를 끊자고 했다. 양반, 선비, 사대부의 나라가 붓과 세치 혀로 강대한 제국의 창칼을 맞서기는 만무하다.
역사는 정의(正義)가 없다. 강자는 승리하고 약자는 멸망한다.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은 정세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화친을 주장하였으며 이에 영의정 김유도 동조하였다.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 교리(校理) 윤집(尹集,) 수찬(修撰)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등이 대표로 하는 척화파가 우세였다. 그 동안 조정에서는 주화파와 척화파가 옥신각신 싸우는 바람에 상황은 비운의 대세로 기울어져 갔다. 인조는 소역(小譯)을 특명으로 청나라에 보내 화해를 전하였으나 한이 소역에게 <너희 나라가 만약 11월 25일 이전으로 대신과 왕자를 보내 화의를 정하지 않으면 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무찌를 것이다>라는 답변을 가지고 왔다.
조정에서는 또 다투다가 결국 박로(朴魯)를 보냈으나 기일을 지키지 못했다.
중국 요녕성의 성도 심양 고궁, 병자호란이 일어난 당시 심양은 청나라 초기(1616~1643)의 수도였다.
(ㄴ), 병자호란
병자호란은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12월 9일 청병 수천이 압록강 얼음타고 건너 들어오고 뒤 이어 청에 편입된 몽골군을 망라하여 20만 대군이 잇다라 강을 건너 왔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비켜 놓고 성읍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직진하는데 각진의 조선 군사들은 겁 먹고 감히 막지 못하니 그야말로 승승장구가 따로 없었다. 12월 14일에는 청군이 이미 서울 가까이에 이르러 인조는 창황히 대궐을 떠났다. 서울안의 사대부들은 남녀노소를 부추기고 피난 가느라 수라장이였다.
인조는 강화로 가려 하였으나 적의 추격이 두려워 남한산성으로 도주하였다. 성안에는 서울과 지방군사 1만 2천명, 문무관과 산관이 200명, 종실과 삼의사가 200명, 하리가 백명, 하종관이 데리고 있는 노복이 백명이였다. 이런 오합지졸로 대적하기는 역부적이였다.
청병은 산성으로 진군하여 16일에는 완전히 산성을 포위 하였다. 뒤따라 태종 홍타시도 그믐에 서울에 도착하였다.한편 강화도의 군사는 싸우지도 못하고 뿔뿔히 흩어졌으며 피난 간 빈궁(嬪宮)과 봉림, 인평 두 대군 및 부인은 청군게 붙잡혀 남한산성으로 끌려갔다.남한 산성이 포위된 후 각 지방의 군사들은 감히 증원을 하지 못했으며 소부대가 증원 왔다해도 패배하고 흩어졌다.
하지만 성안에서는 이런 정황을 통 모른채 화친파와 척화파 간에 갈등이 심하였으며 응원을 고대하며 벝이고 있었다. 고립무원의 상황하에 비축한 양식이 떨어지고 대세가 기울어 짐을 안 인조는 결국 항복하기로 하였다. 여기에 청의 한(漢)과 인조(仁祖) 간에 오고간 서신의 내용을 중점을 따 인용한다.
이조의 서한 ;<소방(小邦)은 궁벽한 바다 한 구석에 있어 오직 시서(詩書)를 일삼고 전쟁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약함으로 강한 것에 복종하고 작음으로 큰 것을 섬기는 이치인데 어찌 감히 대국과 맞서 겨루려 하겠습니까 ? 다만 우리는 대대로 명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원래 군신(君臣))의 명분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의 서한;< 오직 시서를 일삼고 전쟁을 익히지 않았다 했지만 지난번 기미년(己未年)에 너는 까닭 없이 우리를 침노(주; 1619년 광해군 11년에 지원군을 명에 보내 녀진족과 싸운 일)했지 않느냐 ? …>
인조의 서한;<조선 국왕은 절하고 글을 대청국 관온인성(寬溫仁聖) 황제게 올림니다. 엎드려 밝으신 뜻을 받자오니 간곡하신 타이름 내리셨읍니다. 그 책망하심이 엄하신 것은 곧 가르치심이 지극하심입니다 …>
이렇게 서한이 오고가고 사신이 오고 가면서 인조왕의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척화파를 내주고 세자를 인질로 보내며 해마다 청에 세공을 받히기로 하였다. 그리고 명 나라에서 준 고명(誥命,주; 고는 천자가 이르는 말, 명은 천자가 명령 하는 말)과 책인(冊印, 주; 임명장과 도장)을 받히며 명과 국교를 끊고 청의 정삭(正朔,주; 그 나라의 신하가 되어 따르는 것) 받들기로 하였다.
(ㄷ) 해마다 청에 세공(歲貢)할 물목은 ;황금(黃金); 100냥, 백금(白金); 1,000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00부, 단목(丹木); 200근, 환도(環刀); 20파(把), 호피(虎皮); 100장, 록피(鹿皮);100장; 차(茶); 1,000 포, 수달피(水獺皮); 400장, 청서피(靑鼠皮); 200장, 호초(胡椒); 10 두(斗), 호요도(好腰刀);26 파, 호대지(好大紙); 1,000권, 호소지(好小紙); 1,000권, 오조룡문석(五爪龍紋席); 4령, 각양화석(各樣花席); 40령, 백저포(白苧布); 200 필, 각색세주(各色細紬); 2,000필, 마포(麻布);400필, 각색면포(各色綿布); 10,000필,포(布); 1,000필, 쌀 (米); 10,000 포(包).이다.
(ㄹ) 1월 29일 최명길은 오달제와 윤집을 결박 시켜 성문을 나와 청군에 인도하였다. 인조왕은 그들에게 두분의 부모 처자를 종신토록 모시겠다고 약속 하였지만 몇 해동안 쌀을 내려 주고는 다시 은전(恩典)이 없었다. 김상헌과 홍익한도 후에 심양에 잡혀 왔다.
1637년 1월 30일 인조와 세자는 남융복(藍戎服)을 입고 서문으로 성을 나갔다. 홍타시 한은 일찌기 삼전포(三田浦)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남쪽에 9층 계단을 만들어 황색 장막을 치고 황색 일산(日傘)을 세우고 군사를 줄세워 위엄을 과시하고 있었다. 군진이 엄숙하고 병기가 해빛에 번쩍이고 있다.
인조는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려 항복하였다.서울은 약탈방화 살인으로 폐허가 되여 버렸다. 향교동구(鄕校洞口)에서 부터 좌우의 붓방(筆肆), 행랑(行廊)과 대광통교(大廣通橋),소광통교(小廣通橋,주; 서울의 종로,종루 남쪽 청계천에 있는 다리)에 이르기 까지 좌우 인가는 모두 불타 버렸으며 도처에 죽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불모로 세자와 대군이 심양으로 잡혀 왔으며 사대부의 부녀자와 민간인 아녀자 3만이 끌려가 청의 종, 첩으로 되였다. 후에 최명길에 의하여 데려 왔지만 환향녀를 화냥년으로 일컬는 일은 다 아는 사실이다.
병자호란 후에도 청은 명나라를 치는데 조선의 보병,기병, 수군들을 충당 시켰으며 물자를 공급하게 하여 시달림이 끝임 없었다.
(ㅁ) 이런 치욕의 병자호란으로 부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은 줄곧 도탄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런 치욕을 당하면서 국토만은 자손에게 물려 준 것은 다행이 아닐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청국에 편입되어 지금은 조선과 한국이 중국의 서부의 누란(樓蘭)이라는 나라처럼 종적을 감췄는지 모른다. 또한 폐쇠적이고 보수적인 양반제도와 유생들이 죽은 글을 고집하여 나라 일을 그르쳤는지 반사(反思)해 보아야 한다.
그 때 왜 청은 조선을 통치하여 자기 땅으로 편입하지 않고 그것으로 끝났는가 ? 그것은 청이 그 보다 더 큰 고기 덩이 서정(西征)의 전략적 욕심이 있어 후방에 정신을 분산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청나라 황제가 담략가이며 정치가이며 모략가로서 영웅호걸임을 충분히 설명한다. 그때 양반제도의 조선에서는 절대로 이런 인재가 나올수 없다는 것을 후세로서 우리는 한탄할 뿐이다.
이 문장의 서두에서 말한것 처럼 력사는 강자의 역사이며 승자는 왕이고 패자는 역적으로 몰리는 력사이다.
@동포세계신문(友好网報) 제301호 2013년 9월 28일 발행 동포세계신문 제301호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