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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내리는 겨울입니다. 이번 닥칠 추위가 지나면 비보다는 눈이 오기를 바랍니다. 하기야 차를 운전하기에는 눈보다 그래도 비가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적당히 오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이 겨울 들어서 맑고 파란 하늘 보기가 어려우니 말입니다. 갈색의 산들보다 흰 눈 덮인 산과 파란 하늘을 보는 것이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개인의 생각) 아무튼 한 동안 봄을 느끼게 하더니 갑자기 한파를 맞으려나 봅니다. 몸들 잘 추슬러야 하겠습니다. 자칫 감기라도 걸리면 또 며칠 고생하잖아요. 별것 아니지만 요즘은 별것이 되었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사람들 면역력이 떨어졌다나요? 아무튼 걸려봐야 좋은 것은 없습니다. 힘들기만 하겠지요.
모처럼 찾아온 손님 덕에 영화‘서울의 봄’을 보았습니다. 천천히 보려고 했는데 빨리 보자고 해서, 덕 좀 보았습니다. 호 -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크게 볼거리도 없는데 말입니다. 소재를 잘 택하여 영화를 만들면 큰 돈 들이지도 않고 사람들 마음을 휘잡는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구나 싶습니다. 아무튼 자세히는 몰랐는데 상상력이 보태졌겠지만 잘 꾸며진 이야기에 공감이 갑니다. 요즘 심박수 챌린지가 유행이라지요? 그 때를 살던 사람들보다 어쩌면 잘 몰랐던 세대 젊은 층이 더 나서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역시 대한민국 미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함 보십시오. 재미도 짱입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만들기 나름입니다. ㅋㅋ
이 달도 벌써 중순입니다. 끝이 보이네요. 남은 두 주, 멋지게 건강하게 복된 시간들을 만들기 바랍니다. ^)^
2023년 12월 16일 김종우 목사 드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 : 18)
<싱글 인 서울>
혼자 살도록 만들어졌다면 구태여 남자 여자로 창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그냥 신비이겠지만 늘 해보는 질문입니다. 왜 대부분의 생명체가 암수로 되어 있고 사람조차 남과 여로 존재하게 되었을까요? 그렇게 세상은 한 쌍이 만나 다시 자신의 존재를 이어갑니다. 물론 자기와 다른 자기입니다. 유전자를 이어받아 종(種)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고등동물일수록 암수로 나뉘어 있고 우리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자식을 생산하여 가계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사람마다 이야기를 생산하게 됩니다. 기막힌 인연이 생길 수도 있고 가슴 아픈 굴곡의 사연이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인류 공통으로 수 천 년의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대한민국의 상황은 매우 이례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생각해보면 어쩌면 소위 ‘N포’ 세대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살기 힘들다는 것이지요. 혼자도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에 연애와 결혼은 그냥 꿈입니다.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찌 보면 참 딱한 일이고 가엾다 생각도 듭니다. 연애도 포기, 결혼도 포기, 아니 무슨 재미로 살지요? 하기야 요즘 재밌는 일이 한두 개입니까? 즐길 거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찌 보면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스마트폰 하나만 가지고도 종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꼰대’스러운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반세기 전까지도 있고 없고 따지지 않고 그냥 20대 후반 들면 결혼은 필수였습니다. 가능하면 있는 사람이 좋고 아니면 장래가 좀 희망적으로 보이는 사람을 택해서라도 결혼하였습니다. 혼자 사는 것보다 부부가 힘써 일하며 아끼고 절약하여 모으면 자립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요즘 세상 형편에서는 이 ‘장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3포에서 4포 나아가 N포가 되었겠습니까? 하고 싶어서 그랬느냐, 하지 않겠습니까? 알기에 그 부모들도 강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모조차 뒷감당할 능력이 부족하니 말입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안쓰러운 세대입니다. 결국 다인종 국가로 가야하는가 싶습니다.
그러자 의식의 변화도 따라옵니다. ‘혼자 걷기, 혼자 쉬기, 혼자 먹기, 혼자 살기 ---’ 혼자가 좋다. 한 마디로 자유롭습니다. 누구의 간섭을 받을 일이 없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겁니다. 그러나 생각해봅니다. 자유 곧 행복일까요? 그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행복을 만드는 과정 속의 도구입니다. 예를 들어 노예해방을 통해 자유를 얻었던 노예들이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간 예가 있습니다. 왜요? 자유가 생활을 보장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도 좋지만 일단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일자리가 없고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데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사실 자유는 있는 자들이나 누릴 수 있는 허영입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작가 ‘박영호’의 생활환경은 혼자 살아도 얼마든지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혼자를 택한 이유가 천천히 드러납니다. 쉽게 말하면 다시는 상처 입을 일은 하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사실 연애라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아주 쉽게 이루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행운이지요. 짝을 만난다는 일이 그렇게 만만하다면 그 많은 연애소설이나 드라마가 왜 생기겠습니까? 그리고 전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도 이 연애 사건에는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남녀의 이야기는 관심의 대상이고 대부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언어와 문화를 떠나서 누구나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냅니다.
출판사 편집부장을 맡고 있는 ‘현진’과 작가 지망생 영호가 만납니다. 선후배 사이라고 하니 초장부터 편하게 말을 놓고 지냅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바라는 것과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좀 다릅니다. 주제는 도시에서의 혼자 사는 삶입니다. 티격태격하면서도 맞춰나가려고 합니다. 마침 변수가 발생합니다. 우연인지 출판사 대표가 알아내서 찾았는지 아무튼 작가와 비슷한 또래의 또 다른 작가를 모셔옵니다. 그런데 영호의 옛 연인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읽다가 알아챈 모양입니다. 비슷한 연배로 나이는 들었는데 출판사에서 추구하는 주제와 같아서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영호의 상처가 도졌습니다. 그러나 곪은 상처는 도려내고 치료해야 합니다.
혼자를 고집하였지만 사실은 도피였고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혼자서 살라고 남녀를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한 세대 지나고 끝장내려고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편이 그래서 혼자를 고집하는 것뿐입니다. 젊은 세대에서도 1인 가구가 늘어가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 세대의 아픔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먹고살 걱정이 없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됩니다. 아니면 그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는 미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짝을 찾으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연애, 그 짜릿한 삶의 기쁨을 잃고 사는 세대가 가엾습니다. 당장은 없어도 함께 꿈을 꿀 수 있는 사회가 어서 되기를 기원합니다. 영화 ‘싱글 인 서울’(Single in Seoul)을 보았습니다.
<서울의 봄>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이 났습니다. 두 사람이 같으면서도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배짱과 끈기는 비슷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것을 펼치는 과정이 너무나 다릅니다. 일단 그 바탕이 전혀 다릅니다. 노 대통령은 한 마디로 ‘의(義)입니다. 그러나 전 대통령은 ’탐욕‘입니다. 그것도 권력에 대한 탐욕이고 그것을 통하여 얻을 재물에 대한 탐욕이지요. 그래서 그가 이용한 것도 바로 재물입니다. 아마도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돈에 넘어가지 않을 인간이 있겠는가, 하는 확신 말입니다. 반대로 노 대통령이 믿은 것은 인간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소망에 확신을 갖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결국은 뜻을 이룹니다.
최고지도자가 되어서도 진행 과정이 매우 다릅니다. 한 사람은 민주적 절차를 중요시하여 대화를 자주 시도하였고 또 한 사람은 그냥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자연히 희생이 따르게 되었고 많은 국민의 원성을 사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 되었고 오랜 시간 지역적으로 원한을 새겨놓게 하였습니다. 더구나 두 사람의 끝이 매우 대조적입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의를 지키려 목숨으로 답했습니다. 그러나 전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욕을 지키려 끝까지 굽히지 않았습니다. 정권을 유지하며 개인적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취하여 숨겼는지도 잘 모릅니다. 나라에 갚으라는 배상금도 다 갚지 않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군대 내에 사조직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기억하기로는 한참 뒤 김영삼 대통령 때 해체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전까지는 그야말로 군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권력기관이 하나회 아래 놓여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전 대통령으로 시작한 이 사조직이 군대라는 힘을 이용하여 나라를 손에 쥐게 되었고 긴 시간 권력을 행사하며 사조직인 만큼 사적인 이득을 취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고 칭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왕조시대도 아님에도 구시대의 산물을 만들어내 사욕을 채웠습니다. 문민정부의 출발은 애매하였지만 이 하나회 숙청은 김 대통령의 업적 중에서도 기억할 만합니다.
60년대 초에 시작된 군사정권이 90년대 초 문민정부의 시작으로 끝나기까지 근 30년의 세월을 우리나라는 억눌림 속에서 자라왔습니다. 물론 군사정권 속에서도 괄목할 만한 실적은 있었으니 바로 경제적 발전입니다. 억압 속에서도 우리 국민은 각자의 현실 속에서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현실보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 국민의 교육열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굶어도 자식은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우리네 의식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교육에서 나올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부터 실제로 그래왔습니다. 지금도 여전함을 보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1979년 12월 12일 바로 그 날 긴박했던 9 시간을 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군대 내에서 겨우 별 두 개 소장인 보안사령관이 어떻게 권력의 상좌에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계급보다 보직이 더 유용하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상급기관의 말단 보직이 하급기관에 근무하는 상관보다 나을 때가 많습니다. 최전방 병장으로 근무하기보다는 사단 본부 일등병으로 근무하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계급보다는 어디에서 일하느냐 하는 것이 개인에게 있어서는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나라 안의 모든 정보를 쥐고 있으니 중요인물까지도 통제가 가능해집니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용합니다. 게다가 하나회 동지(?)들이 손발이 되어 움직여줍니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그렇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차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면 오늘날에야 선거라는 것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19 세기까지도 세상 여기저기 권력쟁탈전이 있어 왔습니다. 성공한 예도 있지만 실패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잔혹하게 처벌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단 일으켰다 하면 그야말로 목숨 걸고 쟁취해야 합니다. 그만한 실력과 배경과 그리고 배짱이 필요합니다.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으로 인한 희생이 너무나 컸기에 국민의 응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 기간 눌려 살던 국민은 꾸준히 저항해 왔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국민의 주권을 회복하였습니다.
물론 끝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관람합니다. 이미 지나간 역사이니까요. 그러나 그 과정을 상세히 아는 사람은 당사자들 외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상상력과 실제를 조합하여 만들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그 이야기 속에 그냥 묻혀버립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긴박한 상황이 이어집니다. 사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들입니다. 분노가 폭발하지만 그 사람의 배짱과 결단력은 인정합니다. 최고 권력자가 될 만한 그릇입니다. 아쉬운 것은 존경과 사랑을 받는 지도자가 아니라 원망과 원한을 쌓게 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영화 ‘서울의 봄’(12.12: THE DAY)을 보았습니다.
성경 속의 비밀
성도들이 성경을 공부한다고 합니다. 또 때로는 성경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그 동안 여러 번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기독교서점에 가면 성경공부 교재도 다양하게 나와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부터 시작해서 성경 각권을 가르치는 것도 있고 주제별로 나누어서 가르치는 것 등등 여러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언과 비유 부분을 가르치고자 하는 교재는 찾기가 힘듭니다. 왜 그럴까요? 짐작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데 잘못 해석하면 자칫 온갖 비난과 비판, 나아가서는 이단이라고 정죄 받고 교단에서 쫓겨나기 때문입니다. 두렵지요. 그러니 그렇게 왈가왈부하는 내용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서 화를 자초할 것이 무엇이냐 하는 안이한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러잖아도 배울 것이 많은데 뭐하려 긁어 부스럼 만드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그 많은 역사와 교훈들을 배우고 행하기에도 평생이 모자랄지 모릅니다. 사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만만한 일입니까?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려 고군분투했던 일을 상기하면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살기도 힘든 마당에 비유나 예언에까지 신경 쓸 일이 무어냐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일지요.
예수님이 걱정하셨던 일이 무엇입니까? 눅 18 : 8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한 마디로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여기 믿는 자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리스도인이 천만에 가까운데 아니 주님은 어째 그런 걱정을 하신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원하시는 믿음과 이게 맞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전혀 딴판으로 가는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7 : 22 - 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과 기적을 일으켜도, 하다못해 예수 이름을 불러가며 말씀을 전했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면 그들은 한 마디로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천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기막힐 일입니까? 한 평생 예수 이름 붙들고 사역했는데 혹 그것이 불법을 행한 결과라면 이처럼 황당한 일이 어디 있으며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소개해주셨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바로 영생 즉 천국 가는 길입니다. 역사와 교훈을 아는 것은 기초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육의 세상에 살기 때문에 시간의 세상 이야기 즉 역사가 있는 것이고 그 속에서 서로 부딪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교훈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쏟아지는 신지식 배우기도 바쁜 마당에 과거의 기록인 역사는 뭐하려 배우느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몰라서 하는 말이지요. 고전 10장에 보면 출애굽 당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말씀하기를 6절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역사는 우리에게 거울이 됩니다. 사람이란 시대가 달라도 그 심성이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환경만 다를 뿐 하는 짓거리는 비슷합니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할지 어떤 실수를 할지 예측 가능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짐작합니다. 그래서 그 역사를 거울삼아 비슷한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와 교훈은 육의 세상에서의 길잡이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생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천국을 그냥 들어갑니까? 오늘날 우리가 우리 집에 들어갈 때조차 비밀번호를 알아야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집 곧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그 비밀번호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집 비밀번호는 신경 쓰면서 아버지 집 비밀번호는 알 생각도 안 합니다. 딱하지요.
성경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천국 비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나에게 다 공개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 비밀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 나라에 도움을 주겠습니까, 해를 주겠습니까? 답은 뻔한 것이지요.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난 마귀가 하나님 나라에 유익을 줄 리가 만무합니다. 적군이 아군의 암호를 알면 아군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멸망시키려 그 암호를 악용할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이 천국의 비밀을 마귀가 알아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비밀입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지키려 비유로 말씀하셨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알 수가 없다면 즉 천국 백성조차도 알 길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통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벧후 1 : 20 - 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아멘! ‘경의 모든 예언’이라고 말씀하지요. 다시 말해서 성경의 모든 예언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니 또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을 통하여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이 비밀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지요. 마 13 :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자기 소유를 다 걸어도 될 만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밀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마 13 :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기서 천국 비밀을 허락받지 못한 ‘저희’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당시 누가 예수님을 방해하고 핍박하였습니까? 로마인들입니까, 이방인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롬 10 :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은 특심하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열심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들이 뱀이고 독사의 자식들(마 23 : 33)이었습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던 바로 그들이 실제로는 마귀의 자식들이었다는 것이지요.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그 속에 진리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천국의 비밀은 쉬운 말로 한다면 암호로 기록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즉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할 예언입니다. 그 안에 어마어마한 보화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비밀을 풀어야 합니다. 그 보화를 캐내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보물섬 지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 지도를 판독하지 못한다면 그 지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 지도를 볼 줄 모르면 보물을 찾지도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선 필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지도부터 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 어디 있습니까? 역시 성경에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잘 아는 것부터 실험해봅니다. 구약 성경의 비밀, 하나님이 감추어두신 비밀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골 2 :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다시 보겠습니다. 고전 2 : 6 - 8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나님의 그것은 감추어졌던 비밀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겠지요. 한 마디로 구약의 비밀은 바로 메시야의 오심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열심히 믿던 하나님의 백성은 영접은 고사하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짖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신약성경에도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여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것처럼 우리 또한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인들 예수님 다시 오실 때 그런 짓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예를 듭니다. 계 1 : 19 - 20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사도 요한이 장래에 일어날 일 곧 주 재림 때의 일을 보았습니다. 여기 ‘일곱 별의 비밀’이 나옵니다. 17 : 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여기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이 나옵니다. 그리고 10 : 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여기서도 하나님의 비밀이 나옵니다. 그 비밀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일곱 번째 나팔을 불 때입니다. 정리하면 일곱 별, 일곱 머리 열 뿔 가진 짐승 그리고 일곱 째 나팔인데 도대체 이 비밀들이 무엇일까요?
주님이 다시 오시리라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 압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실까요? 행 1 : 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면 구름을 뚫고 비행접시 내려앉듯 그렇게 오실까요? 살전 5 : 1 - 2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이 말씀처럼 도적 같이 몰래 아무도 모르게 오실까요? 그렇지 않으면 살전 4 :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말씀하신 것처럼 호령, 소리 그리고 나팔까지 불며 떠들썩하게 오시겠습니까? 도무지 헷갈립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육적인 것을 빙자하여 영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비유입니다. 이런 비유를 모르면 우리 또한 유대인들과 같은 잘못을 범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들은 메시야가 왕으로 오실 것으로 생각하여 대단한 모습으로 올 것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사 53 :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오실 메시야 그 분은 우리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기대와는 얼마나 차이가 있었는지 짐작이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씀과 동떨어진 분을 기다렸으니 자기네 기대와 다르게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잘 깨닫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또 다시 실수하거나 잘못을 범하지 않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님이 비유하신 천국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1. 비유가 무엇을 빙자한 내용인가 하는 것입니다.
비유란 장래 나타날 실체를 비슷한 땅의 것을 빌어다가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구약성경에 ‘어린양’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장래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 당장 실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적이 알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요. 암호를 적에게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비유하는 말씀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문자적으로만 읽혀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그것이 하나님 나라 또는 장래사를 이야기하는 경우에 말입니다. 세상에서도 비유의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음식을 많이 먹는 사람을 ‘돼지’라고 말하고, 교활한 사람을 가리켜 ‘여우’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짐승’이라고 표현합니다. 잠 30 : 2 - 3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짐승으로 표현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말씀하는 7머리 10뿔의 짐승도 사실은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면 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도대체 비유로 예언한 그 천국 비밀의 실체를 언제나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 속에 천국 비밀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장래사를 이야기하는 예언서에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궁금한 것은 도대체 언제 그 실체를 보느냐 하는 것이지요. 잘 아는 대로 성경에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전 3: 1)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6 :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비사’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다른 말로 ‘비유’지요. 그런데 때가 이르면 더 이상 비유로 하지 않고 밝히 이르리라 말씀합니다. 그 때가 언제일까요? 단 12 : 8 - 9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삽나이까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선지자 다니엘도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쭤본 것이지요. 그러나 때가 되지 않았기에 마지막 때까지 봉함하고 간수하라 하셨습니다. 다니엘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렘 23 : 20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말일에 가서야 완전히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 또는 ‘말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세’ 또는 ‘세상 끝’ 다 같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엉덩이든 궁둥이든 방댕이든 다 같은 뜻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의미의 세상 끝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지진이 나고 전쟁이 나는 것을 보며 흔히들 말세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과연 그 때를 말세라고 이야기하는가? 제자들이 세상 끝의 징조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마 24 :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님이 대답해주십니다. 7 -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사실 이런 일은 인류 역사가 존재하면서 끊이지 않고 이어져온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문자대로 보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말씀 전에 경고의 말씀을 먼저 하십니다.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절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다시 말하면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 칭하며 사람들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하라는 것이지요. 다른 곳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선지자 노릇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한다고 다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미혹받기 쉬운 것은 그 하나님의 종이라는 목자들이 어디서 활동합니까? 하나님의 종이니 하나님의 성전 곧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그래서 주의해야 하고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말세’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를 가리킵니다. 예컨대 구약의 약속 즉 메시야가 온다는 약속(예언)이 드디어 초림 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의 시대가 종결이 되고 신약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때를 가리켜서 말세라 합니다. 히 9 :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분명히 초림 예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 오셨다고 말씀합니까?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즉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때를 세상 끝, 말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다시 오실 그 때 곧 말세를 기다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아버지 집, 천국비밀을 알고서 함께 주님 맞이하기를 축원합니다. 거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시간 들여 공들여 배워야 합니다. 계시를 받은 목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마 11 :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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