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李大鎔, 1925년 11월 20일 ~ 2017년 11월 14일)”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한국 전쟁 당시 제6보병사단 소속으로 춘천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습니다.
주월남 공화국 대한민국 대사관 공사로 근무하던 1975년 사이공 함락시 국군 장병과 건설인력의 안전한 철수 귀국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서 애쓰다가 서병호 영사, 안희완 영사와 공산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이공의 치화형무소에 투옥된 후,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북한행을 거부하며 억류 생활을 하게 되었다가 이스라엘 거상이었던 사울 아이젠버그 등의 중재와 대한민국 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어 1980년 4월 귀국하였습니다.
위의 내용은 제가 위키백과에서 발취한 것입니다. 사실 부끄럽게도 저는 “이대용”의 이름은 들은 적이 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느 출처에는 이대용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소속이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분이 중앙정보부 소속이었던 것이 무슨 문제가 있다는 얘기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본인의 사명을 다한 뒤에 대한민국의 외교관으로 활동을 했고, 적에게 포로가 되어 5년이나 갖은 고문 속에 억류되었다가 끝까지 버텨서 극적으로 송환이 된 것만으로도 그는 대한민국의 영웅입니다.
<고 이대용 장군은 6·25전쟁 ‘찐’ 영웅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그는 6사단 소속 중대장으로서 전차부대를 앞세워 침공한 북한군의 파죽지세를 꺾는 데 성공했다. 6·25전쟁 첫 승전으로 기록된 춘천전투를 이끌어 낸 주인공이다.
그해 10월 26일 그가 이끈 1중대는 평안북도 초산 압록강에 이르렀다. 압록강에 맨 먼저 닿은 국군 부대 병사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쳤다는 일화 역시 그의 몫이다.
이 장군의 활약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준장으로 예편한 뒤 주베트남 대사관에서 공사를 지냈다. 1975년 4월 베트남이 패망하던 당시 그는 교민 보호를 위해 사이공에 남아 있었다.
미국 대사관을 떠나는 마지막 헬리콥터에 오르라는 미국 공사 제의를 마다하고 남은 교민들을 외국 공관에 피란시키려 애쓰다가 월맹군에 붙잡혔다. 날마다 고문을 당했다. 월맹군은 그를 북한으로 이송하려 했다. 이 장군은 북한 공작 요원으로부터 망명 자술서를 강요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고, 억류 5년 만에 기적적으로 풀려났다.
이 장군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영웅이다. 그의 장례는 국민적 영웅을 기리는 자리여야 했다. 나라를 위해 싸운 군인들을 기리는 전통이 강한 영국, 미국, 호주 등과 같은 나라에선 그런 영웅이 죽으면 반기를 걸고 그의 공적을 기린다.
하지만 2017년 11월 14일 이 장군이 숨졌을 때 우리 사회는 너무 잠잠했다. 적어도 육군장으로 치렀어야 할 그의 장례는 그저 가족장으로 치러졌을 뿐이다.
반면, 북한이 이 장군과 교환을 원했던 사람 중 한 명인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는 출소 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소주병에 독특한 서체의 ‘처음처럼’ 상표를 남긴 바로 그 사람이다. 2016년 1월 15일 사망한 이후에도 이런 흐름은 이어졌다. 사후에 그의 이름을 딴 추모공원이 생길 정도다.
북한이 경남 밀양 출신인 그를 집요하게 데려가고자 했던 사실은 외교부가 2016년 ‘베트남 억류공관원 석방교섭 회담(뉴델리 3자회담)’ 외교문서철을 비밀해제하면서 뒤늦게 밝혀졌다. 신 교수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20년 동안 복역하고 1988년 가석방됐다. 그는 교수를 하면서 동양 고전 풀이 관련 책을 몇 권 냈고, 이른바 신영복 서체를 유행시켰다.
민경우 대안연대 상임대표는 “나이를 먹고 사회에 진출해도 과거의 신념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운동권 중 일부가 신영복을 빌려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신영복은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평창동계올림픽 리셉션 환영사도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광주시의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은 우리 사회의 신 교수 추앙 흐름 연장선상에 있다. 강기정 광주시장의 중국인 여행객 유치 발언은 너무 군색하다.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사람은 소 닭 보듯 하고, 국가 전복을 꾀하거나 적군에 속해 사기 진작에 헌신한 사람을 기리는 공동체에 소망이 있을 리 없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를 겪으며 여권 내부에서도 너무 이념 위주로 흐르면 안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옳은 지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깊이 병들어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문화일보. 유희경 기자
출처 : 문화일보. 오피니언 뉴스와 시각, 이대용 vs 신영복·정율성
신영복은 석사 학위 취득 후 숙명여자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사로 근무하다, 육군 장교로 임관하여 육사 교수사관으로 복무했습니다.
1968년 북한과 연계된 지하당 조직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아 구속되었다가 전향서를 쓰고 1988년 특별 가석방으로 20년 20일 만에 출소하였으며 옥중의 시절을 경험하여 써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출간하였다고 합니다.
신영복은 진보 진영의 지식인으로 오래 활동하여 정치인들과도 꽤 인연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대표적으로 민주당계 정당의 주요 정치인인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전 대통령, 안희정을 비롯해 정청래, 손혜원 그리고 대한민국의 진보정당의 주요한 정치인인 심상정, 고(故) 노회찬, 기타 인사들과 상당한 친분이 있다고 합니다.
신영복의 글씨체는 문재인 정부 들어서 폭넓게 사용되었는데, ‘사람이 먼저다’에서 부터 시작된 인연이고, 경찰 등 정부 상징물 곳곳에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청와대 비서관들에게 신영복체로 된 '춘풍추상(春風秋霜)' 액자를 선물하기도 했고 홍범도의 묘에도 그의 글씨체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신영복이 널리 알려진 것은 순전히 문재인 전 대통령의 공(?)일 겁니다. 그것도 그가 대통령 시절에 신영복을 추앙하는 자세로 일관해 국민들은 잘 알지 못하던 사람이 갑자기 대한민국의 위인으로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2021년 교체된 국가정보원의 새 원훈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을 새긴 원훈석에 그의 서체가 사용되자,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처벌을 받은 종북주의, 김일성주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사람의 글씨체가 정보기관의 원훈에 사용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보수진영의 비난이 쏟아졌고.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뒤에 바뀐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저는 예전엔 ‘처음처럼’을 즐겨 마시다가 그 글씨가 ‘신영복체’라고 해서 지금은 마시지 않습니다. 과연 그가 대한민국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했는지 의문입니다. 과거의 신념이라는 것이 종북주의 아니면 공산주의 신봉으로 보이는데 그런 사람을 왜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추앙하는지 제가 판단이 되질 않습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사람이 무수히 많은데도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종북주의자, 공산주의자를 칭송하고,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위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사람들을 우리는 기려야할 것입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