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회 창립한 은사 스님 위기상황서 ‘불광운동’ 전개
부처님 본래 모습 회복으로 ‘도심포교의 효시’ 이룩…
우리 사찰은 사부대중공동체 노후까지 걱정 없어야 합니다
1974년 9월 ‘도심포교의 효시’로 불리는 광덕스님(1927∼1999)이 서울 종로 대각사에서 ‘불광회’를 창립했다. 그해 11월 문서포교지인 월간 <불광>을 창간하며 새로운 불교신행의 바람을 일으키는 ‘불광운동’이 전개된다. 올해 40주년을 맞아 불광회는 지난10월 광덕스님의 도심포교 원력이 서려 있는 잠실 불광사에서 기념법회와 세미나, 선지식 초청법회를 열었다. 또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보현행원송’ 대공연을 진행했다. 이와 함께 <사진으로 보는 불광 40년>과 월간 불광 특집호를 발간하는 등 숨 가쁜 일정을 보냈다. 2004년 4월 불광회 회주로 취임해 불광회를 이끌고 있는 지홍스님을 불광사에서 만나 그동안의 소회와 앞으로 불광운동의 미래에 대해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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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홍스님의 은사는 ‘불광회’를 창립한 광덕스님이다. 그러니 불광회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다. 은사 스님과의 인연이 궁금했다.
“수계를 받고 법명을 지어달라고 하는 과정에서 은사 스님의 이미지는 ‘차가운 스님’이었어요. 그리고 ‘아무나 범접할 수 있는 스님이 아니다’는 생각도 들었요. 냉정하고 차가운 이미지는 열반하실 때까지 똑같았어요. 저뿐만 아니라 상좌들한테는 말입니다. 하지만 일반 재가자들에게는 자상한 분이셨어요. 신행상담을 하러 오면 긴 시간 상담을 해 주셨지요. 안타깝게도 상좌들은 흉금을 털어놓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기회를 접하지 못했어요.”
엄격한 스승이었지만 재가불자들에게 아주 자상한 스님이었다고 기억한다. “은사 스님은 감성적이고 시적이셨어요. 상좌들한테는 이야기하지 않으시는데 재가불자들과는 길을 가다가 전경이 펼쳐지면 시적 표현을 쓰기도 했어요. 나중에 커 가면서 인식을 하게 되었는데 상당히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사상이 깊고 철저한 분이셨어요. 지금도 글에 대한 용어구사는 정말 뛰어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광회가 창립된 배경이 무엇인가 궁금해졌다. “1974년부터 시작됐어요. 왜 사람들이 불광회에 대해 관심 갖는지를 보면 불광(회)의 존재와 탄생 이유를 알 수 있어요. 불교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해방 후 미 군정과 6ㆍ25한국전쟁을 겪어오면서 부침을 겪었습니다. 발전하기도 했지만, 탄압을 받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불교는 변방으로 밀려 무속화 되고 기복화 되어 체계가 없는 비불교가 판을 치는 시기였어요. 저희 스님께서는 ‘역사와 문화가 위기상황에 놓여 있다’고 느꼈다고 해요. 그래서 불교의 본래모습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시고 불광회를 창립했습니다.”
스님은 불광회의 구체적인 진행과정도 설명했다. “불광회 창립 이후 은사 스님은 불교를 대중에게 정확하게 알려야겠다며 월간 <불광>을 창간했어요. 여기에서 선언한 것이 ‘순수불교’입니다. 순수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 본래 모습과 내용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근본불교가 아니고, ‘인간이 본래 완벽한 존재이고, 본래 부처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생각으로 수행하고 신행하자는 거였어요.” <불광> 잡지가 출판되면서 군부대 등 공공시설에 많이 배포되고 요청도 많았다. 구독자들이 잡지뿐만 아니라 활동단체를 만들자는 요구가 있어 1년 후인 1975년 10월에 불광법회가 창립된다.
“법당이 비좁을 정도로 호응이 좋아 대중들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공간을 자체적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제기됐습니다. 불광법회 창립 2∼3년 후에 불광법당 건립발원을 해 1980년대 초에 잠실 불광법당이 생겨납니다.”
당시 누구도 개척포교당, 즉 도심에 사찰이나 포교당을 열어 성공하리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시도도 안했다. 게다가 당시 잠실은 허허벌판이었다. 그곳에 포교당을 세우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했다. 모두가 부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여기엔 비화가 있다.
“처음에는 세검정(구 하림각 자리)에 부지를 확보하려 했어요. 토지도 나와 있었어요. 계속 교섭을 하다가 잠실로 왔는데 이유는 자금사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개원하고 나니 엄청난 인파가 몰려왔다. 이 모습을 보고 많은 대중들이 ‘아! 뭔가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80년대에는 많은 포교당이 건립됐고, 성공신화를 쓰기도 했다. 지방 도시에서도 포교당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해 도심포교당 운동의 붐을 일으켰다. 이를 두고 불광회를 ‘도심포교의 효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불광회의 신도조직화 사업은 아주 특별했다. “당시 불광의 순수불교 운동은 반야사상을 토대로 한 보현보살 행원의 사상과 실천이 병행됐습니다. 여기에 ‘법등(法燈)’이 있어요. 법등이 5∼6개가 모여 구법회로 형성되고 그것이 모여 불광법회를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조직형태를 다른 사찰도 다 도입했어요. 불광이 한국불교의 도심포교의 대중화 생활화 현대화를 시작했다고 봅니다. 주말법회 즉 일요정기법회, 계층법회, 의식의 한글화 등을 구현함으로써 불교의 현대화에도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불광회의 신행활성화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에 대한 지홍스님의 대답은 확고하고 명료했다. “순수불교와 불교현대화, 대중화로 시작한 게 불광운동입니다. 불교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스님들뿐만 아니라 재가불자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게 대중화가 관건입니다. 그러려면 의식이 한글화가 되어야 하고 조직을 통해 불자들이 신행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법등조직이었지요. 그것이 불교의 현대화라고 할 수 있었어요.”
스님은 불광 신도들은 다른 곳에 가서 적응하기 힘들어한다고 했다. “의식의 한글화, 매주법회, 신행활동, 무엇보다도 반야사상이라고 하는 사상적 관점과 명확한 신행생활이 동반됩니다. 구체적으로 보살행이 제시됩니다. 보현십대행원과 육바라밀의 실천행이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광회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서울 불광사의 대작불사도 어느 정도 마무리 됐다. 대략 250억원이 넘는 재원이 투입됐다고 하니 그간의 노고가 느껴진다. 현대식 건물에 전통이 가미됐다. 5층 법당은 전통양식으로 지어졌고, 동쪽과 남쪽에도 전통형식의 일주문이 들어섰다. 지하에는 보광전이 지어졌는데 공연장 형태다. 영상법회를 봉행하면 한꺼번에 5000명도 수용이 가능하단다.
“외부불사가 거의 끝났어요. 나머지는 내부불사가 남아있습니다. 만불전과 이곳저곳 마무리 불사가 남아있어요. 불광기념관도 마련해 광덕스님 유품전시도 해야 합니다.”
하드웨어가 갖춰졌으니 이제는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고 했다. 소프트웨어는 결국 불광회의 미래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40년 동안 달려온 과정도 혁혁했지만 앞으로의 비전이 더 궁금했다. 스님은 ‘제2의 불광운동을 위한 5대 전략목표와 25대 사업과제’를 제시했다.
“불광회는 크게 교육원, 사찰, 유치원, 요양원, 어린이집, 출판사로 구성돼 있어요. 보이지 않는 규모가 반이고 보이는 규모가 반입니다. 변화된 사회에서 불교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2 불광운동’이라는 내용을 마련해 나가고 있습니다. 개략적으로 수행공동체와 신행공동체 건설이 필요합니다. 수행공동체는 승가의 문제로 출가하면 당해 사찰에서 입적할 때까지 의료, 교육, 생활, 노후까지 보장하는 것입니다.” 신행공동체는 사찰과 신도가 결합된 신행공동체다. 젊어서 절에서 신행활동한 후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하면 책임을 져주는 시스템이다. 또 한축은 사찰 종무원의 퇴직 후 생활보장이다. 그래서 스님과 신도, 종무원들이 불광사에서 마음 놓고 노후까지 수행하고 신행활동을 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제2 불광운동’을 통해 스님은 신도들과 함께 사부대중공동체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 지홍스님은 …
1970년 부산 금어사에서 광덕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71년 범어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1974년 쌍계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81년부터 10여년 동안 은사 스님을 시봉하며 ‘불광운동’의 중심지인 서울 불광사에서 포교활동에 전념했다. 1986년 동국대 교육대학원 철학교육과를 수료한 스님은 1991년 경기도 광명에 금강정사를 창건해 주지를 역임했다. 1992년에는 금강불교문화교육원을 설립했다. 1994년 종단개혁 불사에 동참해 조계종 개혁회의 의원과 포교부장을 역임했다. 1994년 제11대부터 중앙종회의원 활동을 시작해 최근 16대 종회의원에 당선, 6선 의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1998년 총무원 기획실장을 지냈고,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조계사 주지를 맡아 ‘한국불교 1번지’ 위상을 한층 제고하기도 했다. 2004년부터 불광회와 불광사 회주로 있으면서 신행활동을 이끌고 있으며 ‘환경정의’와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공동대표, 불교출판문화협회 회장,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본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