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교단의 중심지 보은 장내리 대도소와 보은 취회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은 1892년 12월 6일 보은 장내리에 교조신원운동에 필요한 지휘본부인 도소(都所)를 설치하도록 했다. 이 때부터 갑오년 내내 장내리 도소는 동학교단의 본부로 활용되는 동시에 혁명운동의 저수지 역할을 했다.
보은 장내리는 동학이 일찍 전파된 곳이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서울로 압송되던 1863년 12월, 동학교도였던 이방이 최제우를 극진히 대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1885년에는 최시형이 탄압을 피해 단양에서 장내리로 옮겨와 비밀포교지로 활용하던 곳이었다.
장내리는 충청·경상·전라도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산간에 위치하고 있어 여차 하면 피신하기가 쉬운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인근지역에는 서병학·황하일과 같은 뛰어난 인물이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보은 장내리는 1887년 3월 경에 동학교단의 중앙본부 역할을 한 육임소(六任所)가 설치됐다. 또 1888년에는 최시형이 이곳에서 손병희의 누이동생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육임소는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과 수색을 피해 1889년에 폐지됐으나, 동학도들의 장내리 내왕은 끊이지 않았다. 어느 덧 보은 장내리는 동학교도들의 신앙촌이 됐고 탄압을 피할 수 있는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1893년 3월 이곳에서 동학사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보은취회가 열리게 된다.
1892년 충청도와 전라도 감영에 교조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단자를 올린 동학교단은 1893년 2월 서울로 올라가 '광화문복합상소' 운동을 전개했다. 다음 달에는 교주 최시형이 창도주 최제우의 조난향례일을 맞아 '보은취회'를 결정하고 보은 장내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척왜척양 운동을 전개했다.
1893년 3월 10일부터 4월 5일까지 계속된 장내리 집회에는 충청·전라·경상·경기·강원 등 전국 각지에서 약 2만 300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집결해 척왜양운동을 전개했다. 이곳에 모였던 교도들은 척왜양을 주장하다가 조정에서 선무사 어윤중을 보내는 등 효유하자 자신들의 주장이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판단하고 해산했다.
당시 동학교도들은 '반 장 높이의 돌성을 쌓고 각 포에는 대접주가 있어서 질서정연하게 포를 통솔해 주문을 암송했다'는 기록이 당시의 비폭력적인 평화 시위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장내리는 동학농민혁명의 2차 기포에서도 많은 농민군들이 집결한 곳이기도 하다. 1894년 9월 18일 청산에서 기포령을 내린 최시형은 휘하 두령들에게 군중을 인솔하고 보은 장내리의 대도소로 총집결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다시 관군과 왜군에 맞서 전쟁을 벌이게 된다.
◇꺼져가던 혁명 불꽃 마지막 타오른 보은 북실 전투
1894년 11월 9일, 동학농민혁명 최대 전투인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후 전봉준은 논산을 거쳐 전라도 태인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이지만 12월 2일 순창에서 체포되고 만다. 이것으로 1894년 10월 하순에서 12월 동안 조선 전역을 피로 물들게 한 동학농민전쟁은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꺼져가던 혁명의 불꽃이 마지막으로 타오른 곳이 바로 보은 북실 전투다.
북실 전투는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에서 농민군이 가장 참혹한 희생을 당한 전투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군은 전투 중에 총을 맞고 죽은 농민군의 수를 300여 명으로 보고하고 있지만 학살한 농민군의 수는 의도적으로 보고하지 않았다.
우금치 전투 이후 손병희 부대와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교단 직속의 북접농민군은 전라도 장수를 거쳐 12월 5일 새벽 무주를 점령하고 청산을 거쳐 12월 16일 보은 읍내를 점령 하게 된다. 이들의 규모는 3만-4만 명 정도로 보은·상주·선산 등지를 함락시킨 뒤 서울로 올라갈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이에 놀란 정부는 충청도와 경상북도에 있는 병력을 모두 투입해 이들과의 전투를 준비하게 된다.
드디어 12월 17일 북실 마을에 주둔중이던 동학농민군을 향해 일본군과 상주 유격병대가 3대로 나뉘어 선제 기습공격을 시작하게 된다. 기습공격을 받은 동학농민군은 잠시 당황했으나 곧바로 산 위로 올라가 대항하게 되고 이때부터 쌍방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밤새도록 전개된다. 다음날 아침에는 선혈이 낭자한 붉은 눈과 농민군의 시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당시 영남 선무사 이중하는 '칼에 베이거나 포살된 수가 395명이고 그밖에 계곡의 구덩이와 숲속에서 죽어 넘어진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라고 정부에 보고했다.
보은 북실 전투에서 살아남은 북접농민군은 속리산을 비롯한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것으로 안으로는 낡고 썩은 사회를 개혁하고 밖으로는 외세를 물리치고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