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33/문학관]30년대 석정夕汀의 시를 예이츠가 영역?
사돈과 한두어 달에 한번씩 둘이 하는 ‘일일여행一日旅行’이 다섯 번을 넘었으니, 별나다면 ‘별난 여행’일 것이다. 사돈가족과 정례식사를 하거나 바깥사돈끼리 술자리를 갖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여행을 같이 다닌다는 게 꺼끄럽지 않냐는 게 중론일 듯. 하지만, 우리는 헤어지고 나면 다음 여행이 기다려진다. 그런데 늘 호칭이 문제이다. 나이가 세 살 차이이므로 호형호제呼兄呼弟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그리 어려울까. 하여 호를 지어드린 후 호 뒤에 ‘사돈査頓’을 붙여 부르자고 하니 조금 나은 것같다. 흐흐.
아무튼, 지난 3월초 탐매探梅여행을 시작으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서원書院순례(병산, 도산, 무성, 돈암, 필암) 그리고 문학관文學館 순례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토요일, 유일하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대한민국 최고의 단풍나무숲인 ‘문수사 단풍’ 구경을 먼저 한 후, 문학관을 돌자고 했다. 당단풍 400여그루의 단풍이 절정이었다. 여행사진 전문가들이 영순위로 꼽는 명소. 코로나 상관없이 상추객賞秋客으로 붐볐다. 얼굴이 절로 붉어진다. 절 앞 15m 이상 되는 감나무 한 그루에 달린 주먹보다 좀 작은 똘감이 몇천 개 달린 듯하다. 히야-. 그야말로 장관중의 장관이다. 딸 수가 없어 그렇지 곶감을 깎으면 몇백 접은 나올 듯하다.
근처, 축령산 휴림의 도반이 인스턴트 매생이떡국으로 반겨 마음心에 점点 하나를 맛있게 때린 후, 곧장 고창 ‘미당시문학관’을 찾았다. 불행히 전염병으로 인한 무기한 휴관이란다. 이 문학관은 사실 나로선 세 번째이지만, 사진전문가 수준의 사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1975년 고3때 미당이 전주에서 한정판 육필시화전을 열었다. 그때 사면서 사인 받은 시집을 지금도 갖고 있다. 미당만 생각하면 안타깝다. 친일시는 차치하고라도 역대 독재자들에 대한 낯 뜨거운 찬양시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조정래 작가가 ‘잘못했다’고 딱 한마디만 하라 했을 때 화를 내는 게 어디 될 법이나 한가. 그래, 전두환의 미소가 부처님보다 더 인자하더이까? 그러니 그 작자 지금껏 광주학살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지 않은가. 그 부인은 또 남편이 한국 현대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궤변을 늘어놓지 않은가. 백담사 귀양, 3천배는 당연히 쇼. 그야말로 민족 앞에 확실한 ‘확신범’인 것을. 일본어로 쓴 친일시를 전시해 놓은 걸 보고 ‘잘못도 역사이긴 하다’고 느꼈었다. 미당의 생가는 봐서 무얼 할 것인가.
다음으로 찾은 곳이 ‘석정문학관’. 석정의 호는 심플하고 멋있다. 저녁 석夕, 물가 정汀. 시인답다. 본명 석정錫正으로 알려졌으면 얼마나 촌스럽고 밋밋한가. 흔히 ‘촛불’이니 ‘어머니 그 먼나라’니 하며 목가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육사 시인 못지 않게 창씨개명와 친일을 거부했다. 전북이 낳은 대표적인 시인이랄 수 있는 '미당과 석정'은 이렇게 달랐다. 한 분은 안타깝고 한 분은 자랑스럽다. 제자 허소라 시인에게 써준 휘호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가 평생 신념이었던 듯. 뜻을 높은 산과 흐르는 물에 두면서 아닌 건 아니라고, 독재와 쿠데타는 아니라고 당당히 말한 시인을 일제강점기 목가시인으로 묶어놓는 것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일. 시인이 평생 주고받은 문인들과의 편지가 여러 편 전시돼 있다. 그곳에서 발견하여 처음 안 사실 하나만큼은 꼭 명기해야겠다. 1939년 문학평론가 정인섭이 펴낸 『대한 현대시 영역 대조집』(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실린 석정의 시 「임께서 부르시면(If My Loves Calls Me)」을 <나 일어나 이제 내 고향 이니스프리로 돌아가리/흙 바른 작은 오두막 짓고/아홉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벌 윙윙대는 숲속에서 나 혼자 살으리>라는 「이니스프리호수섬」로 유명한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1865-1939. 1923년 노벨문학상 수상)가 정인섭씨와 공동번역했다는 것. 예이츠가 ‘동방의 등불’ 코리아의 신석정 시를 영역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쩐지 예이츠의 시들이 석정의 시 <그 먼나라를 아십니까> 등과 비슷한 내음을 풍기더니 서로 통했나보다. 재밌다.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그렇게 가오리다/임께서 부르시면...//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말없이 재 넘은 초승달처럼/그렇게 가오리다/임께서 부르시면...//포근히 풀린 봄하늘 아내/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그렇게 가오리다/님께서 부르시면...//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그렇게 가오리다/님께서 부르시면...> 그 '님'이 만해 한용운 선생처럼 조국이었을 것이다. 그저 단순히 한 여인이지는 않았을 듯.
<Softly as the golden ginko leaves in autumn/Are shaken and scattered by the wind/So I will go/If she calls me//Silently as the new moon/That peers through the mist above the lake/And, voicelee, passes over the mountain/So I will go/If she calls me//Gently as the streams beneath the warmth of spring/Run round and round the end of the sky/So I will go/If she calls me//Sweetly as the while heron sings in the welkin sky/And quitely as the sunshine creeps in the lawn in the early Spring/So I will go/If she calls me>
이제 조정래의 ‘아리랑문학관’으로 가자. 검색을 잘못해 도착한 곳이 김제 죽산면의 ‘아리랑마을’이다. 알고 보니, 아리랑마을은 소설 『아리랑』의 무대였던 외리, 내리 마을을 1만평의 부지에 수탈기관 등을 잘 복원해 놓은 곳이고, 문학관은 벽골제가 있는 부량면에 있다한다. 줄거리는 거의 잊었지만, 새삼 확실히 기억나는 이름들, 감골댁, 지삼출, 송수익, 방영근, 방대근, 일본인 대지주 하시모도(그의 송덕비가 남아있다) 등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아프다. 가슴이 먹먹해 온다. 하얼빈역을 60분의 1로 줄여 만들어놓았다. 그곳에서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탄 세 알을 안기고 “코레아 우라(코리아 만세)”를 세 번 외쳤다. 그 역사적인 현장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기억나는 대목은 12권의 대하소설 맨 마지막 후기에 작가는 이렇게 적었다. “일본놈들의 죄는 잊지도 말고 용서하지도 말자”. 아아- 지긋지긋한 토착왜구들의 반민족적 행태들을 21세기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백주대낮에 우리의 눈으로 매일매일 보고 있다니.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벽골제 앞에 있는 조정래의 ‘아리랑문학관’. 나는 단연코 조정래야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문호文豪라고 생각한다. 그가 지은 『태백산맥』(10권) 『아리랑』(12권) 『한강』(10권) 3부작 대하소설만 보자. 살아있는 문인으로서 그를 기념하는 문학관이 3개(아버지, 아내의 문학을 함께 기념하는 가족문학관 포함)나 된다는 것은 상당히 거시기하지만, 그가 바라본 우리나라의 근현대사가 어찌 처참하고 한스럽지 않은가. 그 바탕 위에 세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우리나라의 민족적 저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 200자 원고지 1600여장을 쌓아놓고 손자와 찍은 사진, 작가의 꼼꼼한 취재수첩, 여러 명의 『아리랑』 전체 분량의 필사본을 보면서 그저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언젠가 다시 읽어볼 시간이나 여유가 있을까. 아니면 필사筆寫를 해볼까. 흐흐.
군산의 ‘채만식문학관’을 마저 들렀으면 했지만, 요즘엔 5시반만 되면 어둑해진다. 채만식도 친일작가. 아침 8시반부터 시작한 여행은 5시 반 익산 도착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막을 내렸다. 내달에는 전남지역 문학관들을 찾기로 약속하다. 자연과 삶을 알아가며, 문학의 세계까지 곁들여 엿보는 일일여행이 마냥 재밌고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