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머리가 너울을 대신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회개를 하라는 말까지 나온것은 매우 지나칩니다.
성경은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지 진리 자체가 아닙니다.
성경은 기록목적상 진리를 증거함이지 진리 자체가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에 위배된다고 회개를 해야한다면 너울(면박)의 실제적 용처인 평상시에 쓰지 않음도 회개해야 합니다.
당시에 그리고 그 전부터 너울은 여인들이 외출시에 얼굴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어져 왔습니다.(창38:14)
성경 기록 당시에도 너울은 여인이 외출할때 필수적으로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11장은 10 장의 연장선에서 해석되야 합니다.
10 장에서 믿음안의 자유가 타인에게 끼치는 영향과 이것의 바른 길에 대해 설명하고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
11장으로 넘어 옵니다.
11장은 고린도인들의 모임에 대한 설명으로 문제점을 지적하고 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당시에 가정에서 모였고 집안에서 모였었으며 모인 무리가 가족으로 인식되어 졌기에 여인들이 자기 집안인것처럼
너울을 벗고 모임에서 기도도 하고 예언도 하는 일이 있었고 이것은 마치 현대적 비유로 볼때는 가정에서 모인 모임에서나
혹은 예배처소의 모임에서 마치 집안에서의 편하고 노출이 된 복장을 한채로 참석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수 있습니다.
너울을 벗은것은 마치 외출복이 아닌 집에서나 입을 미니스커트나 핫팬츠를 입은것과 유사합니다.(현대적인 기준으로)
모임에서 공중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매가 부적절한 복장으로 임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너울의 의미를 10 절에서 "권세아래 있는 표"로 해석한 부분은 현대에서 너울을 아직도 쓰는 중동의 풍습과 비교를 해보면
여인은 아이에서 여인으로 성숙하면 그 얼굴을 가족 이외에는 절대 보여주지 않습니다.
권세아래 있다는 의미는 고전 7장 36~38 절로 말씀 함같이 처녀일때는 아버지의 권세아래 있다가 시집을 가면
남편의 권세아래 놓이게 된다는 의미이며 이것에 대하여 10 절에 "천사들을 인하여" 라는 말씀이 등장하는 이유는
천사가 실제로 성도를 돕는 역활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1:14)
천사가 여자 성도를 섬기려할때 여자 성도의 머리인 남편을 초월하여 섬기지 않게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마치 너울은 "나는 누군가의 권세아래 있습니다." 라는 고백과 같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한 부부가 한몸인것 처럼 한 영혼도 된다는 의미이고(그릇이 하나면 내용물도 섞이어 하나되기에)
이로 인하여 천사의 섬김은 머리를 의식하고 머리를 초월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너울의 의미는 당시에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문화 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지나치게 사용하여 부적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며
이것에 대한 강조를 하는 목적은 10 장 마지막절의 정신과 같습니다.
마치 불순한 모임이라도 되는 듯이 문화적 행습을 초월하기 까지 하면 안된다는 의미 입니다.
긴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한다는 의미는 성경의 본래 기록목적과는 반대되기에 쓰는 것을 위하여 주셨다고 봐도 됩니다.
하지만 현대적인 용례와 복음의 진리를 따라 해석을 한다면 "대신한다"로 해석을 해야 복음의 진리대로 해석이 됩니다.
현대의 일부 소수 중동국가 처럼 평시에 너울을 쓰는 문화권에서는 모일때 너울을 써야 겠지요.
하지만 평시에 너울을 쓰지 않는 문화권에서는 굳이 써야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문화를 진리로 해석을 한다면 우리는 노예 제도등도 용인을 하게 됩니다.
오네시모를 위한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암묵적 노예제도의 용인이 있었으며
"종에서 뛰어나 사랑받는 형제로 둘자라" 라는 말로 주안의 지체를 종으로 삼지 않는것이 타당하다 한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종은? 그냥 노예이고 종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권한을 행사하여 딸을 시집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해도(딸의 의사에 반해서)
교회에서는 이에 대해 아버지의 손을 들어줘야 합니다.
문화권에서의 일반적인 권한이나 행습을 표현하는 부분은 신약에도 몇차례 이상 등장 합니다.
현대의 어느 교회에서 먹으러 모이는 모임이 존재하는지요.
"시장하다" 라는 표현을 통해 단순히 이것이 성찬만을 의미하지 않는 다는 의미이며 당시의 식사자리가 갖는
문화적인 부분이 분명히 존재 했기에 "먹으러 모일때" 라는 말씀이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몽골에서는 식사를 함께 한다는 의미는 생명을 맡길수 있는 사람 이라는 의미가 포함이 됩니다.
(칼을 들고 식사를 하기에)
만일 제가 구약의 여러 문화적 풍습을 설명하자면 상황은 더 복잡해 집니다.
남편이 죽으면 시아버지의 씨라도 받아야 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아들을 갖게 해야하고
일부 다처제나 근친 결혼등.....
문화를 진리로 승화하는 것은 일부러 겸손함이 아니겠는지요.
너울이 진리라면 너울쓴 자매들은 그 영혼에 진리의 실행에 따른 더 큰 복이 임하게 됩니다.
따라서 너울을 쓰는 순간에 일어난 다양한 내면의 변화등도 있어야 하고 간증도 많고
너울을 쓰는 자매들의 영성은 특별히 너울 안쓰는 자매님들에 비하여 탁월해야 맞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진리가 아니면 생명이 없고 생명이 없다면 타락이고 저주에 가까와 벌거벗은 구원이나 간신히 받는 다는 이야기 입니다.
너울 쓰는 자매들의 영성은 진리의 실행때문에 진정 탁월하기 그지 없고 너울 쓰는 모든 자매님들은 남편에게
매우 종용하여 순복하며 너울 안쓰면 남편에게 대드는 증상이라도 나타난다는 증거가 있는지요.
우리 문화권에서 어린 형제가 머리가 허연 장로님 어깨에 손을 척하고 올리는것이 타당한가요?
하지만 브라질에서는 친근함의 표시로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문제가 안됩니다.
너울의 실행은 진리가 아닌 부수적 실행이기에 문화의 일부로 이해를 하는 것이 타당하며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라는 말씀처럼 할례나 너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 거침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
형제 사랑을 실제적으로 나타내야 함을 말하면서 표현한 것입니다.
너울이 진리문제라면 모든 진리에 생명이 관계되기에 구원과도 관계가 있게 됩니다.
성경이 성경문자 자체로 진리라면 성경을 읽기만 해도 생명을 모든이가 얻어야 합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화합하며 성령이 감동하시기 전에는 생명없는 의문 일 따름입니다.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자(얼마나 막연한 주장인가요?성경 어디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하나님 나라로 가야지요. 성경에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써있는지요.)
성경을 문자자체로 진리라고 여기면 성경을 우상숭배 하듯 끊임없이 숭앙하던 바리새인들과 다를바 없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의 진리를 전했지 성경자체의 문자들을 전한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인용은 했어도)
성경을 전파하고 성경말씀을 푯대로 삼으면 문자적 실행에 쏠리게되며 자칫 외식의 위험이 항상 존재 합니다.
너울은 그저 부수적 실행이며 회개 운운까지 나온것은 진리의 굴절일 뿐으로 여깁니다.
갈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성경구절 아무대나 쓰이는거 아닙니다.
이제 슬슬 가이컨님께 인간적인 짜증이 발동하려 합니다. 상대방의 화를 돋구고 내재한 분노를 펌프질 하는 것도 님께서 너울을 안쓰는일 못지않은 죄라는 것쯤도 알아두십시요. 님의 그 열정이 하도 가상해서 님처럼 머리에는 못 쓰더라도(형제라서 ㅋㅋ)마음의 너울이라도 써야겠구나 생각했는데, 너울이 절대진리인냥 굽히지 않는 집요한 모습을 보니... 마음에 쓰고 있던 너울도 벗어던지고 싶어집니다. 그만하시지요?
가이컨자매님~ 자매님께서는 믿음대로 너울을 쓰십시요..상대 자매들에게 강요하지마시고...이러한 교리를 주입식으로 반드시 관철시켜서 백기를 들게 하시려하지 마시고...자기 옳음을 따라 믿음대로 가면 됩니다. 너울쓰는걸 강력하게 주장하실만큼 믿음이 충실하신 자매님의 입에서 나오는 댓글들이 별로 안어울리는군요 너울이 아니라 너울보다 더한걸 쓰면 뭐하겠습니까? 척? 하고 체? 하는 외식자들이 너무 많은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