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천재(Idiot savant)들은 평균 수준에 현저히 못 미치는 지능과 함께, 몇몇 특별한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모순적 존재다. 백치천재들의 이런 특성은 그들의 특별한 뇌에서 발원한다. 학자들은 이들의 뇌에 관심을 가지며, 보통 사람들은 이들의 놀랍고도 슬픈 이야기에 감동받는다. 음악 백치천재(musical savant)들의 이야기도 그렇다.
▎영화 [레인맨]의 포스터. 왼쪽은 백치천재 레인맨 역을 맡은 더스틴 호프만, 오른쪽은 그의 동생 역을 맡은 톰 크루즈.
대부분의 백치천재에게는 선천적이거나 아주 어린 시절 얻은 후천적인 신체장애가 있다. 여기에 소아자폐증과 지체장애 등이 동반된다. 이렇게 중증 심신장애를 가진 아이들 중 일부가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 재능을 갖춘다. 이런 백치천재들이 지난 100년 동안 전 세계에 100명가량 있었다고 한다. 백치천재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워서 종종 영화화된다.
1989년 영화 [레인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레이먼드는 실존 인물인 킴픽(Kim Peek)을 모델로 창조되었는데, 킴픽은 미국의 우편번호부를 통째로 외우고 몇 년 몇 월 며칠이 무슨 요일인지 바로 맞혔다고 한다. 백치천재들이 보여주는 뛰어난 능력들은 이렇게 단순한 계산이나 소묘, 기계 처리, 악기 연주 등과 같이 구체적인 작업에 관련되며, 주로 우뇌가 담당하는 것들이다.
반면 그들이 잃어버리거나 발달시키지 못한 능력들은 추상적이거나 종합적인 것들이며 특히 언어와 관련된다. 이 능력들은 주로 좌뇌가 담당한다. 학자들은 백치천재들의 놀라운 능력을 그들의 우뇌가 장애가 있는 좌뇌를 보완하려다 발전시킨 결과로 추측한다.
바흐의 전곡을 외우고 2025년 4월 3일의 요일을 맞히는 이들
영국의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를 비롯해 몇몇 학자가 백치천재들에 대해 보고한다. 색스는 저서 『뮤지코필리아』에서 선천적 시각장애인인 마틴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틴은 세 살 때 수막염을 앓아 성격이 충동적으로 바뀌고 지능이 발달하지 못했다. 이런 마틴이 1984년 색스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2000여 편의 오페라를 알며 헨델의 [메시아]를 포함해 바흐의 모든 칸타타를 외우고 있다고 말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칸타타 300여 곡을 작곡했지만, 현재 200여 곡만 남아 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음악적 백치천재로 평가받는 이는 레슬리 렘키(Leslie Lemke, 1952~1993)다. 렘키는 녹내장과 뇌성 소아마비, 뇌 손상을 안고 태어났다. 갓 태어나 눈 제거 수술까지 받았던 어린 렘키는 음식물조차 잘 씹지 못했다. 생후 7년 동안 렘키는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며, 어떤 감정도 표출하지 않았다. 12살 때 처음 일어났고, 15살에야 걷기 시작했다. 그의 지능은 IQ 58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렘키가 어느 날 한밤중에 TV에서 처음 들었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걸 그의 양어머니가 봤다고 한다. 그의 나이 16살 때의 일이다(14살 때 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렘키는 이후 여러 장르의 많은 곡을 연주했고, 자기 스타일로 편곡도 했다.
렘키와 함께 백치천재들이 모방을 넘어 창조 수준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생겼다. 렘키는 이후 미국 각지와 일본 등을 순회공연했다. 많은 방송이 그를 다루며 칭송했다. 렘키는 안타깝게도 중년의 나이에 알츠하이머병을 앓다가 죽었다.
최근에는 데릭 파라비치니(Derek Paravicini, 1979~)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데릭은 25주 만에 태어나 미숙아에게 제공되었던 산소요법을 받다가 시각장애인이 된다. 이 요법은 뇌에도 문제를 일으켜 이후 그가 겪은 학습장애의 원인이 된다. 데릭은 다른 백치천재들과 달리 정규교육을 받았다. 그가 태어난 영국 런던에 있는 맹인을 위한 음악학교에서 말이다.
데릭은 영국 작곡가 매슈 킹과 함께 매슈의 [피아노 협주곡 ‘파랑’](Piano Concerto ‘Blue’)을 2011년 런던의 퀸엘리자베스 홀에서 매슈와 함께 연주한다. 백치천재를 위해 작곡된 최초의 곡을 통해 데릭의 다양한 즉흥연주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곡의 여러 부분에서 데릭은 즉흥연주를 했고, 그런 부분들과 매슈가 작곡한 부분들이 조화롭게 연결됐다.
뛰어난 악보 암기력에 비해 작곡 능력은 없어
▎신디사이저를 치고 있는 데릭 파라비치니. 데릭은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계정을 운영하고 있다.
모든 음악적 백치천재는 뛰어난 암보 능력(악보 암기력)과 음향으로서의 음악에 놀라운 수준의 기억력을 보였고, 노래를 잘하거나 피아노를 잘 쳤다. 하지만 그들은 작곡하지 않았다. 복잡한 곡의 암기는 사실 대단한 능력이다. 관행적 화음 진행 같은 음악의 구문론을 암묵적으로라도 이해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작곡은 이런 구문론적 지식을 펼쳐 보이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암보 능력은 작곡 능력을 위한 중요한 토대다.
나는 레슬리 렘키의 연주를 인터넷에서 들었다. 렘키의 상태를 감안하면 대단했다. 하지만 그의 양어머니는 분명 과장했다. 그녀의 여러 증언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의 편곡 역시 대단했지만 작곡 수준은 아니었다. 데릭은 훨씬 대단했다. 인터넷에서 그의 놀라운 즉흥 연주곡들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곡들은 누군가 작곡한 곡들을 즉흥적으로 편곡한 결과다. 데릭은 뛰어난 즉흥적 편곡자였다. 이 능력이 매슈 같은 전문 작곡가와의 공동 작업에서 발휘된 것이다. 즉흥적 편곡은 남의 악보를 연주하는 것에 비해 좀 더 작곡에 가깝지만 여전히 온전한 작곡은 아니다. 매슈는 데릭의 즉흥 편곡 능력을 잘 개화해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책임지고 작곡하도록 잘 도와줄 수 없었을까?
음악적 백치천재들이 연주 쪽에서 주로 능력을 발휘한 데는 어쩌면 그들 주위 사람들이 그들의 능력을 그쪽으로만 몰아갔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방송도 그들의 재능을 외향적 연주 쪽으로만 몰아갔다. 잘 알려진 명곡들을 어딘가 부족해 보이면서 앞도 못 보는 이들이 잘 친다는 것이 화제가 되고 상품이 되었을 것이다.
좀 재미없더라도 자기만의 소박한 감수성을 드러내는 작곡을 하도록 백치천재들을 독려할 수는 없었을까. 그들에게 작곡을 쉽게 가르칠 수 있는 훌륭한 교사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오늘날 작곡은 엘리트주의적 학습능력이 반드시 필요한 작업으로 오해되고 있다. 그 바람에 백치천재들이 자신의 능력을 작곡 쪽에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데릭과 같은 이들이 작곡을 하지 않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작곡을 하도록 독려를 받지 않은 것인지 궁금하다.
사람들은 이 궁금증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 작곡에 연연할까? 뇌에 문제 있는 이들이 피아노를 잘 치면 되지 않나? 어떤 작곡가도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작곡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의 음악을 듣고 연주하다가 어느 날 우연히 자기 곡을 만든다. 부모의 말들에 노출된 아이가 어느 날 말문이 트이는 것처럼 말이다. 작곡가들의 뇌에 입력된 곡들은 그들의 위에 들어간 음식물이 소화되어 대변과 소변으로 출력되는 것처럼 모종의 처리 과정을 거쳐 새로운 곡으로 출력된다.
세상 대부분의 계(界)에는 입력이 있으면 처리와 출력이 있다. 동화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이 동화 구연 능력을 가지듯이, 음악을 많이 감상한 이들은 누구라도 작곡을 할 수 있다. 음악적 백치천재들의 뇌 속 수많은 음악을 생각해보자. 나는 그것들이 처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력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작곡이란 인간의 다른 활동이나 행동들처럼, 입력과 처리, 출력이라는 뇌의 작동 과정이다.
음악적 백치천재들은 심적 처리와 출력으로 이어지지 않는, 과도한 심적 입력 상태에 처해 있다. 그들의 출력은 운동 출력에 가깝다. 물론 모든 운동 출력에는 심적 처리가 선행된다. 하지만 심적 처리가 별로 없는 단순한 운동 처리도 있다. 그들의 출력이 그런 쪽인 것 같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상황이다.
사실 여러분도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여러분 중 상당수가 노래방에서 한두 시간 노래할 수 있다. 노래방 화면에는 악보가 없다! 여러분에게 입력되지 않은 것은 가사이고, 입력된 것은 엄청난 양의 선율이다. 그것이 잘 처리되면 여러분도 나름대로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출력으로서의 작곡을 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찰스 다윈에 따르면 인류의 조상들이 구애를 위해 음악적 음으로 이성 상대를 유혹했다는데, 이게 바로 원형적 작곡 행위다. 우리 모두 수십만 년 전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 뇌에 콱 박혀 있는, 흥얼거리는 초보적 작곡 능력을 가지고 있다. 개화시키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음악적 백치천재들도, 여러분도 작곡할 수 있었으면 한다. 대단한 걸작이 아니어도 좋다. 자신의 독특한 마음 상태를 진솔하게 표현한 음악을 작곡한 음악적 백치천재들과 포브스 독자들을 보고 싶다.
김진호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